*7월의 독서일지(2024.07.04~07.25)*
<7월 20일 토요일>
도서관 가는 새길
존재(being)란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결합이
완성되는 삶의 상태인데, 진리란 이런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즉, 음양의 조화와 합일에서 진리가 발생한다.
-D.H. 로렌스
1
문학 표현의 신비
어떻게 네 추모 모임에도 안 오니?
어떻게든 내 추모 모임에도 안 와.
부영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부영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든.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됐어.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언제부터든 이렇게 됐어. (중략)
아……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 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사슴벌레식 문답>, 권여선,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중에서
2
도서관 가는 새길
딴 뜻은 없고요, 대출기간을 삼 주로 늘려주셨으면 하는 것과, 대출 연장을 하게 되면 혹시 다른 이용객이 대출예약을 하는 수가 있으니, 대출 다음 날 바로 연장을 신청해야 한다고 사전에 안내를 해주시면 감사하겠다는 이야깁니다. 네, 책을 바로 갖다 드릴 게요.
내가 읽는 책 중에 누가 대출예약을 한 권 걸어두어 반납하라는 메시지가 왔던 것이다. 그럴 줄 알고 반납 하루 전에 인터넷 상에서 한 주 연장을 모두 신청해서 안심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니까 다른 이용객이 내가 빌려간 날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어떤 책에 대해 대출예약을 했던 모양이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반납 하루 전에야 연장 신청을 인터넷으로 한 것이다.
얼른 편안한 외출 복장으로 갈아입는다. 아내에게는 도서관에 급하게 반납할 책이 생겼다고 말하고 나온다.
그러니까 지난 달 중순쯤이었다. 그 날 난 기차역으로 가서 전철을 이용해 타 도시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갔다 오는 길에 혹시나 해서 도서관 쪽으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도서관 공사가 길어지고 있었던 탓이다. 내부 리모델링이라고 했는데 제 날짜를 지키지 못하고 올 유월까지 반년이나 연장해서 공사를 진행하여 도서관 이용을 못하게 하고 있었다.
좁고 오래 된 길을 벗어나 도서관 앞의 대로에 막 접어들었는데 처음에는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전면이 완전히 바뀐 모습에 새롭게 조성된 주차장이 원형으로 차를 받아들이고 내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7월 초에 책을 빌릴 겸 도서관 구경도 할 겸 가면서 새롭게 발굴한 길이 있었는데 마침 그 사이 아파트 재개발 공사가 끝나면서 깨끗하고 조용한 길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책을 다 읽지도 못했는데 갖다 줘야 하는구나. 다음에 다시 빌려보지 뭐.
그러나 책이 그렇게 손을 떠나가면 대개 다시 집어 드는 일은 드물었다. 강렬한 인상을 준 책이라면 벌써 읽었을 테고, 빌려온 많은 책 중에서 지금껏 남아서 여전히 읽어야 할 것 같으면 안 읽어도 그만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생각하는 시대적 추세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 대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꿀 정도로 대규모 도심개발을 하여 주변에 많은 이용객을 불러 모으고, 자연 친화적인 그린환경으로 변모시키며, 인근 주민과 함께 번영하고 변화하는 친근한 도시 등 미래형 도시 개발조성의 모델이라고 소개하는 책이었다. 그런데 난 빌려 온 책 중에서 지구의 기후변화에 따른 위기를 다룬 이야기를 이미 읽은 터라, 모든 일에는 급하고 중요한대로 선후가 있듯 이 시대 이 시기에는 급해도 아주 급한 불인, 지구의 기후변화에 따른 위기 대응방안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구체적 실행에 관한 책자들이 더욱 이슈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개발이 급한 게 아닌 것이 앞서 언급한 책에서 이야기하듯, 이런 지경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어른들은 하나같이 돈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 무지막지한 전 지구적 개발이 지금의 기후변화를 초래하며 위기를 불러들인 주된 원인 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사람들은 돈에만 관심을 보이는 거예요.
도서관으로 가는 별로 사람도 없는 조용한 길에서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살짝 들은 이야기도 하필이면 돈 얘기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나와 주택가를 오 분 정도 걸어서 지나면 이어서 나타나는 큰 차로를 건너야 하고 그때부터 도서관에 이르는, 최근에 발굴한 길은 모두 새 도로로 지나다니는 통행인이 거의 보이지 않는 한적하고 조용한 길이다.
요즘 새로 짓는 아파트 주변에 나는 길은 파란 잔디와 나무를 잘 조성해서 깔끔하고 아름다운 공원으로 꾸며놓은 게 지나다가 잠시 앉아서 휴식을 취하거나 책을 읽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갈하고 조용하다. 마침 어느 아주머니는 집에서 같이 사는 반려견을 데리고 나와 한가롭게 산책을 하고 있고, 주변에 나무가 성글한 파고라 밑에서는 어느 노인이 조용히 혼자 주변을 돌아보며 쉬고 있다.
지금까지 오는 길에 마주친 사람이라곤 서넛 정도가 될까 싶다. 책 대출관련이기는 하지만 이제 오전 열 시를 조금 넘은 시각에 책을 넣은 하얗고 조그만 베로 만든 장바구니를 들고 한적한 시골 길을 걷듯 걸어왔으니 마음이 푸근하다 못해 날아갈 듯하다. 도심지에서 이런 기분을 느끼기란 얼마만인가.
농고 뒷마당에 지어진 아무도 없는, 온갖 채소와 푸른 식물이 사는 투명한 자재로 지어진 사각형 온실과 그 옆 초록색 아스팔트 공터에 만들어진 농기계 훈련장과 대기 중인 깨끗한 중장비들을 구경하는 재미란. 나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방해할 그 아무 것도, 그 아무도 없는 것이다. 어제는 종일 소나기까지 내려 도로에 일부러 물을 뿌려놓은 듯 시원한 청량감까지 느껴지니.
로비에 새롭게 설치 된 대출과 반납전용 기기가 보인다. 전날 방문했던 때처럼 도서관 꼭대기 층인 사 층부터 중정에 꾸며진 아름다운 나무들에게로 쏟아져 내리는 빛으로 로비는 벌써 환한 동화세계에 들어온 것처럼 화려하다.
책 가져왔어요? 반납했어요?
네, 이제 반납해야죠.
오픈형으로 꾸며진 열람실 내부는 여기저기 책 읽는 이용객들로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좋다. 오늘 난 책을 읽으러 온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기기가 반납처리를 해주지 않는다. 옆에 역시 책을 반납하러온 얘기 엄마가 서 있어서 얼른 한 번 더 기기를 작동시키지만 역시 선선히 반납처리를 해주지 않는다. 도서관 사서와 마주치기가 싫어서 혼자 처리하고 조용히 나가려고 했는데 이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두 명의 사서가 머리만 빼꼼 내다보이는 인포메이션 데스크로 가서 처리한다.
미안해요. 다른 뜻은 없었고 대출 기한을 한 번에 삼 주 정도로 늘리는 방안에 대해 한 번쯤 검토해달라는 의미 외에 다른 뜻은 정말 없었어요. 열 권을 대출하는데 이 주는 시간적으로 좀 그렇잖아요. 정 안 되면 대출 때 연장하고 싶으면 바로 다음 날 인터넷 상으로 연기하라고 안내라도 좀 해주시든가. 그 정도……. 그 말이었어요. 아까 전화로 길게 실례했다면 정말 미안합니다.
도서관을 나오는데 갑자기 비가 세차게 내린다. 이런. 가방을 머리 위로 올리고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오래 전에 부러져 수술한 발목이 잘 견뎌주기를 바라며 이를 악문다.
3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작가,
D.H. 로런스의 사상 두 가지
-로런스가 더 주목하는 것은 이 고대 이교도의 서사에 담긴 우주적 인간 이해다. (중략) “우리와 우주는 하나다. 우주는 거대한 생명체이고 우리는 그 일부다. 태양은 거대한 심장이며 그 진동은 우리의 가장 작은 혈관으로까지 퍼져 나간다.” 고대인들에게 우주는 이렇게 인간을 포함한 살아있는 전체였디. 그런데 현대인들은 과학이라는 합리적 지식으로 우주를 죽은 천체들의 집합으로만 이해한다. (중략) 우주와 인간의 원초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 이것이 로런스가 말하는 아포칼립스(Apocalypse), 곧 현대 문명을 넘어선 새로운 인류 문명을 향한 비전이다.
(고명섭, 《생각의 요새》, <계시록에서 찾은 새로운 문명 비전 : 「아포칼립스」 - D.H. 로런스>중에서)
-이 ‘존재’는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결합이 완성되는 삶의 상태”라고도 할 수 있는데,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켜 로런스는 ‘진리’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음양의 조화와 합일에서 진리가 발생한다는 로런스의 진리관은 니체나 마르크스에게서 볼 수 없는, 서양 사유의 한계를 돌파하는 지점이며, 바로 이 지점이 로런스의 사유가 불교 사상, 노장 사상, 후천개벽 사상 같은 동아시아 사유와 만나는 접점이 된다고 백낙청은 말한다.
나아가 로런스는 바로 이 존재론과 진리관에 입각해 자신의 고유한 민주주의론을 제시하는데, 그 민주주의는 단순한 평등이나 자유를 넘어 “열린 길을 가고 있는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민주주의”이다. 이 만남은 “영혼들 간의 기쁜 알아봄이요, 위대한 영혼과 한층 더 위대한 영혼들에 대한 더욱 기꺼운 숭배다.”
백낙청은 이런 영혼들이 “말하자면 불보살들이며 ‘길이 열리는 대로 열린 길을 걸어 미지의 세계로’ 가는 ‘도인’(道人)들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 도인들의 민주주의가 바로 문명의 대전환을 통해 열리는 후천개벽 세상의 새로운 인간질서가 될 것이라고 백낙청은 전망한다.
(고명섭, 《생각의 요새》, <로런스에게서 찾은 개벽사상 : 「서양의 개벽사상가 D.H. 로런스」 - 백낙청>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