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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례역사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봄날
4. 세계적인 불교문화의 보고(寶庫) 호류지(法隆寺)
나라현 이코마군 이카루가정(奈良縣 生駒郡 班鳩町)에 있는 호류지(法隆寺)는 7C 전반에 창건되었고, 이카루가사(斑鳩寺)라고도 한다. 이는 ‘가라사람들의 땅’이란 의미가 있다한다. 그 이유는 이카루가에 있는 무덤을 발굴했는데 내시경으로 석관 속을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다. 부장된 유품들이 모두 한국에서 반입된 유물이기 때문이다. 법륭사를 건립할 때 고구려의 스님 혜자는 성덕태자에게 불경을 강론하며 성덕태자의 스승이 된다. 그래서 지금도 법륭사에는 혜자 스님의 상이 유존되고 있다.
호류지(法隆寺)는 스이코 천왕(推古)의 조카 쇼토쿠(聖德)태자가 601~607년에 세웠다고 하며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며, 나중에 쇼토쿠 태자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가람은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원은 회랑 가운데 동쪽에 금당, 서쪽에 탑을 배치했고, 북쪽에는 강당을 배치한 이른바 호류사식 가람배치를 취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금당, 탑, 중문은 배흘림기둥이나 처마를 바치고 있는 운두 등과 같이 덴표(天平) 건축에 없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동원은 유메도노(夢殿)를 중심으로 하여 남쪽에 예당, 북쪽에 사리전 등이 있다. 현존하는 사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호류사에는 창건 당시 석가삼존, 사천왕, 구세관음, 백제관음상 등을 비롯해 다마무시즈시(玉蟲廚子), 백만탑 등 많은 미술 공예품이 남아 있는데, 금당벽화는 금당 4벽의 4불정토도(四佛淨土圖) 등 수백 점의 고미술품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일본의 국보급 문화재들이다. 특히 금당 내부의 벽화는 610년(고구려 영양왕 21)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그린 것으로 세계 회화사(繪畵史)에 길이 자랑할 만한 미술품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1949년 1월 내부 공사 도중 불이나 소실되고 현존하는 것은 모사품이다. 1989년에는 같은 호류사 5층탑 벽화에 덧그림 밑에서 그가 그린 화려한 <관음보살상>이 1300년 만에 발견, 컴퓨터로 재생되어 그의 솜씨를 다시 확인해 주었다. 1993년 12월 일본에서 처음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절이다. 쓰이코 양식인 금당(金堂)․오중탑(五重塔)을 중심으로 하는 서원(西院)과, 덴표(天平)양식인 몽전(夢殿)을 중심으로 하는 동원(東院)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경내에 들어가 담징스님이 그렸다는 금당벽화를 보기 위해 금당 안으로 들어간다. 역시나 어두워서 불상 뒤의 벽화는 잘 보이지 않는다. 후레시를 준비해서 잘 살펴보아야 만 희미하게나마 조금 볼 수 있다. 법륭사의 금당벽화란, 금당의 열두 벽면에 각기 그린 벽화를 가리킨다. 고구려 담징(曇徵, 6~7세기경)이 610년에 일본에 건너가서 그린 이 금당벽화는 인류 문화사를 빛낸 명화들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막연하게 '담징의 금당벽화'를 말해온 게 사실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제부터라도 반성해야만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세계 명화로 자랑하고 있는 이 금당벽화에 대해서 우리 한국인들은 무관심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에 무관심했던 것인가를 우선 지적하기로 한다. 첫째로 대부분의 일본 학자들은 금당벽화가 담징이라고 하는 한국인에 의해 그려진 7세기 초의 세계 명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작가나 작가의 국적 등을 묵살하려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술 더 떠서 금당벽화를 그린 것이 고구려 스님 담징이 아니라는 엉뚱한 주장을 일삼기도 했다.
먼저 담징에 대해 알아보자.
고구려 스님 담징(曇徵)
고구려의 승려로 610년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왔다. 유교의 고전인 5경 연구에 뛰어났으며, 채색과 종이, 먹의 제조법을 일본에 전했다. 담징이 전한 채색은 이후 불상에 칠하는 도료로 사용되었으며, 종이와 먹의 제조법은 불경의 사경(寫經)을 수월하게 해 주어 아스카(飛鳥)미술에 끼친 영향이 크다. 또 담징은 맷돌의 제작 기술도 전해 주었다. 이것은 수력을 이용하는 맷돌로로 중국에서는 이미 몇백 전부터 사용되었는데, 일본에는 담징이 처음 전해 주었다. 그리고 일본의 승려 호오조(法定)와 함께 나라(奈良)에 있는 호류지(法隆寺)에 머물면서, 오경(五經)과 불법 등을 강론하고 금당(金堂)의 벽화를 그렸다. 석가(釋迦)·미륵(彌勒)·아미타(阿彌陀)·약사(藥師) 등으로 구성된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인 이 금당벽화는 1949년 1월 수리 중에 불타버리고, 현재는 모사화(模寫畵) 일부가 남아 있다. 불이 나서 타버리기 전까지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했던 서대벽(西大壁) 6호 벽화 아미타정토의 삼존상(三尊像)과 동남(東南) 2호 벽화 일광보살상(日光菩薩像)은 호류지 벽화 가운데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작품이었으며, 또 아미타정토의 삼존상을 그린 위와 아래에는 20여 체의 작은 연화화생보살(蓮華化生菩薩)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작품은 특히 입체감을 잘 강조하고 있었다. 그가 그린 금당벽화는 중국의 윈강석불(雲崗石佛), 경주 석굴암 등과 함께 동양 최고의 3대 미술품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문득 옛날 교과서에 실렸던 정한숙(鄭漢淑) 선생의 금당벽화(金堂壁畵)라는 소설이 떠오른다. 1955년 7월 [사상계] 24호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라는데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담징은 승속(승속)의 세계를 오가는 종교 예술가요 고구려의 아들이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포부를 펴기 위해 조국을 등진 것이 일종의 도피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여기서 담징은 조국애와 예술적 포부를 두고 내적 갈등을 일으킨다. 화폭 앞에 서면 수나라 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조국과 동포의 참담한 모습이 떠올라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그는 승려이기 이전에 고구려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는 날 금당 밖을 나오던 담징은 주지로부터 고구려의 승전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승전 소식으로 이제껏 속세에서 배회하던 담징은 모든 갈등과 번민을 일시에 떨쳐 버리고 불교 예술가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는 불당 앞으로 돌아와 떨어뜨렸던 염주를 주워 들고 다시 합장 배례를 한다. 그는 비로소 합장한 손끝에서 자비로운 불심을 느끼고 조국의 승전 소식에 접한 환희를 경건한 불심으로 바꾸어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붓을 든 담징의 손길이 무학(舞鶴)같이 벽 앞에 나는가 하면, 진한 빛이 용의 초리같이 벽면을 스쳤다.' 동방을 제패한 고구려의 환희는 관음상의 미소를 자아내게 하고, 오랑캐의 죽음은 그들을 조상하는 자비심을 불러일으켰다. 순간 그에게는 조국에 두고 온 여인의 환상이 떠올랐다. 담징인 그 속세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씻기라도 하듯 온 정성을 다하여 관음상의 미간에다 일점을 찍는다. 벽면에는 관음상의 미소가 빛나는 열반의 상이 된다.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자 구현된 지상의 열반 세계인 관음상에 도취한 주지와 왜승들의 합장 배례가 그칠 줄 몰랐다."
그 가운데서도 금당벽화 그림의 세계를 표현했던 정한숙 선생의 필체에 감동받는 부분이 있는데 마치 한편의 詩를 읽는 듯 한 착각에 빠지고 만다.
"붓을 든 담징의 손끝이 무학같이 벽 앞에 나는가 하면, 진한 빛이 용의 초리같이 벽면을 스쳤다.
거침없는 선이여,
그 위엔 고구려 남아의 의연한 기상이 맺혔고,
부드러운 색조여,
그 속엔 백제의 다사로운 꿈이 깃들인 속에 남국적인 정열이 어렸도다.
동방을 제패한 조국 고구려의 환희는 관음상의 미소를 자아내게 하고, 담징의 싱싱한 예술적 포부는 여기 무르익어 관음상의 불룩한 유방 위에 흘렀다. 이른 봄같이 다사로운 감촉이 숨은 보살의 손끝엔, 지금 막 멸망당한 수많은 오랑캐들의 죽음을 조상하는 자비로운 불심이 흘렀다.
목에 걸린 구슬이여,
이는 소식조차 아득한, 조국 땅에 남아 있는, 잊혀 지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이런가?
알알이 빛나고 줄 이어 맺혔으니, 국난을 막기 위한 단결된 그들의 정성이 여기 있도다.
담징은 비로소 붓을 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었다. 그리고는 한 걸음 물러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건만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조국 땅에 두고 온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담징은 다시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여인의 모습이 더욱 뚜렷해졌다. 담징은 몹시 괴로웠다. 그것은 열반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 아니라, 사바를 모방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다시 붓을 든 담징은 한 걸음 물러섰다가 앞으로 나갔다. 그대로 화면을 지워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던 것이다. 담징은 다시 주춤 서 버렸다. 초승달 같은 아미, 열반의 세계가 그 속에 있어야겠는데, 거친 속세의 모습만이 떠도는 것 같았다. 넓은 듯 좁은 듯 한 그 미간에 떠오르는 여인의 모습, 담징은 속세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씻기라도 하듯, 온 정성을 다하여 그 미간에다 일점을 찍었다. 그건 다시는 그의 의식에서 그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기도 했다. 그의 입가엔 비로소 미소가 떠올랐다.
범할 수 없는 관음상이여.
그리운 사람의 환상마저 잊으려는 담징의 각고의 노력으로 열반의 상징 보살이 이루어졌도다.
벽면엔 저녁놀이 물들기 시작했다. 담징의 등 뒤에 서 있던 주지가, 구현된 지상열반의 세계에 도취하여 그만 합장한 채 꿇어 엎드렸다. 담징을 비방하던 모든 왜승들도 모두 합장을 하고 주지의 옆과 뒤에 꿇어 엎드렸다.
조국의 승전의 쾌보를 받지 못했던들 금당 벽화는 한낱 승 담징의 관념의 표백에 그쳤을 런지도 모른다.
윤이 흐르는 생기여! 그것은 조국에 대한 담징의 충성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금당벽화는 지난 1949년 1월 26일 아침에 어처구니없는 화재사건으로 불타버렸다. 그 당시 화재 원인은 금당에서 일본 화가들이 벽화를 모사(模寫)하던 중에 전기방석의 누전으로 인해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화재사건의 원인이 의아스럽다는 당시의 언론 보도가 있었다. 금당 화재사건 직후인 1950년 7월 2일에는 교토(京都)의 국보 미술 건축물인 킹카쿠지(金閣寺)의 방화사건이 발생해서 세인을 다시금 경악시켰다. 법륭사의 금당 화재사건에 잇따른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6~1573)의 이 문화재 방화사건은 그 당시 일본 불교계뿐 아니라 미술계며 역사학자들을 격분시켰다.
이러는 가운데, 일본 국보 등 문화재를 잘 보존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고, '문화재 보호위원회'가 설립되면서 '문화재 보호법'이 일본 국회에서 제정(1950)되었다.
현재 법륭사의 금당 벽에는 새로 그린 벽화들이 붙어 있다. 즉, 담징 스님의 원화(原畵)를 모사했던 그림들을 화가 요시오카 켄지(吉岡堅二) 등 19명이 1968년에 재현한 것이다. 불행히도 화마를 입은 원화들은 현재 법륭사의 보장전에 피해당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담징의 벽화 그림 제1호 벽의 것부터 간단히 그 명칭만을 살피기로 한다. 제1호 벽화 석가정토도, 제2호 벽화 보살반가상, 제3호 벽화 관음보살상, 제4호 벽화 세지보살상, 제5호 벽화 보살반가상, 제6호 벽화 아미타정토도, 제7호 벽화 성관음보살상, 제8호 벽화 문수보살상, 제9호 벽화 미륵정토도, 제10호 벽화 약사정토도, 제11호 벽화 보현보살상, 제12호 벽화 십일면관음보살상 등이고, 이 밖에 소품으로 금당의 위쪽 내진(內陣)과 외진(外陣)에는 산중나한(山中羅漢)과 비천(飛天) 등 작은 벽화 20점도 만들어져 있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내진 소벽의 <비천> 그림이 화마를 면한 일이었다. 이 그림은 두 천녀(天女)가 유유히 하늘을 날면서 천의(天衣)자락들이 길게 허공에 날리는 자연스러운 광경을 빼어나게 묘사한 명화다. 또한 이것과 유사한 <비천> 그림은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유사한 그림이 있어서, 담징 그림의 수법을 연상시킨다.
금당에서 벽화를 자세히 볼 수 없었던 안타까운 마음을 보장전(寶藏殿-백제관음당)에서 비록 간신히 살아남은 담징의 그림 몇 편이지만 자세히 볼 수 있다.
백제관음당 안에는 담징이 그렸다는 금당벽화가 있으며 또한 백제 아좌태자가 그렸다는 성덕태자 그림도 함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백제 관음상은 발걸음을 멈추기에 충분하다.
호류지(法隆寺)에서 나눠주는 안내 팜플렛을 받아들었다.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어 먼저 읽어보았다.
호류지(法隆寺) 절의 유래
호류지절은 아스카(飛鳥)시대(6C중엽~8C초)의 모습을 오늘날에 전해주는 사찰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창건 유래는 [금당]의 동쪽 법당에 안치되어 있는 '약사여래상'의 후광명(後光銘) 및 '호류지절 가람연기 및 유기자재장(法隆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747)의 유래문에 의해 알 수 있습니다.
그 유래문에 의하면 요메이(用明)천황이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절과 불상을 건립하도록 명하였으나 그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후일 스이코(推古)천황과 쇼토쿠(聖德)태자가 요메이 천황의 유언을 받들어 607년(推古15년)에 절과 그 본존 '약사여래'상을 건립하였던 것이 이 호류지절(이카루가노테라(斑鳩寺)절이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 정사(正史)의 하나인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670년(天智 9년)4월30일 심야, 호류지절이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을 두고 메이지(明治)시대 이래 호류지절의 재건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전개되어 왔으나 오늘날에도 현재의 가람건립 연대에 관해서는 많은 문제점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류지절은 쇼토쿠 태자가 건립한 사원으로서 1,400년간에 걸친 유서 깊은 전통을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현재, 호류지절은 탑과 금당을 중심으로 하여 사이인(西院)가람과 유메도노(夢殿)불당을 중심으로 한 도인(東院)가람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넓이 약 187,000m²(56,500평)의 경내에는 아스카시대를 비롯한 각 시대의 진수를 결집시킨 건조물이 그 모습을 자랑하고 있으며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국보 및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만도 약190종류로 2,300여점에 달하고 있습니다. 특히 1993년 12월에는 일본 문화재로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는 등, 세계적인 불교문화의 보고(寶庫)로서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고 되어있다. 위 내용으로만 봐서는 전혀 우리와 어떤 관계성이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법륭사라는 절이 고대의 백제인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세운 큰 가람이라는 사실은 어디 한 곳 눈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일본인 미술가였던 도쿄대학의 이토우 추우타(伊東忠太, 1876~1954)는 법륭사 건축 당시를 법륭사의 가람은 쇼우토쿠 태자(聖德太子, 574~622)의 감독 아래, 백제의 공인(工人)들에 의하여 시공되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法隆寺》 1943). 고 말하고 있다. 또 불교 미술사학자인 나이토우 토우이치로우(內藤藤一良) 교수가 법륭사 건축 양식에 대해서 일본에는 일찍이 불교 건축의 빼어난 기술이 백제로부터 전해졌으며, 그 나라로부터 불공(佛工) 등도 건너와서 가람의 경영에 임했다. 그 결과 호우코우지(法興寺)며 시텐노우지(四天王寺) 등의 대가람을 국내에서 처음 볼 수 있게 되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 무렵 우리나라 사원 건축은 백제로부터 그 기술을 습득한 것이다.(《日本古美術史》 1940) 고 밝히고 있다. 이런 것들을 안내문에 적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계속 이어서 읽어보자
남대문(南大門)
무로마치(室町)시대(14C말기~17C초기)
호류지절의 현관에 해당하는 이 대문은 1438년(永亨10년)에 재건된 건조물로,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구조는 호류지절의 대표적인 대문으로서 그 위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중문(中門) 및 회랑(廻廊)
아스카(飛鳥)시대(6C중기~8C초기)
지붕이 깊숙이 덮혀 있는 처마, 그 처마 밑에 정교하게 새겨진 공포(拱包)와 아름답게 휘어진 난간, 그 난간을 바쳐주는 엔타시스 양식의 기둥, 하나하나가 아스카 건축 양식의 진수를 결집시킨 건조물입니다. 육중한 대문과 좌우에 배치된 소상(塑像)으로 만들어진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나라시대 8C초기~8C말기)은 동서로 길게 이어진 회랑의 살창과 대조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나란히 세워진 탑과 금당을 위엄스러운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또한, 그 안쪽 정면에는 대강당, 서쪽에는 경당, 그리고 동쪽에는 종각이 세워져 있으며 이 같은 가람배치를 '호류지절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금당(金堂)불당
아스카(飛鳥)시대(6C중기~8C초기)
호류지절 본존이 안치된 성스러운 불당이 금당입니다. 위풍당당한 이 건물 속에는 쇼토쿠(聖德)태자를 위해 건조된 금동석가삼존상(아스카시대), 태자의 부왕(父王)인 요메이(用明)천황을 위해 건조된 금동 약사여래좌상(아스카시대), 자당(慈堂)인 아나호베노 하시히토(穴穗部間人)황후를 위해 건조된 금동 아미타여래좌상(가마쿠라시대 12C후기~14C전기), 이들을 수호하듯이 지켜보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장목으로 만들어진 사천왕상(白鳳시대 7C후반~8C초기)은 사귀(邪鬼)의 등 위에서 위엄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목조 길상천(吉祥天)입상, 비사문천(毘沙門天)입상(헤이안시대 8C말기~12C후기) 등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또한 천정에는 서역문화의 영향이 짙은 천인(天人)과 봉황새가 비상하는 생동감넘치는 필치로 그린 닫집(天蓋)이 걸려 있으며 주위의 벽면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벽화(1949년 소실되어 현재에는 패널에 그려진 모조벽화로 대체되어 있습니다)가 그려져 있어 창건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안내서에는 참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문화유산에 대한 소개가 있었지만 금당에서의 벽화를 비롯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누구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도래인에 의하여 개창된 아스카시대의 불교문화는 점차 일본사회에서 토착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 결정적인 계기는 호류지의 금당에 모셔진 동조(銅造)석가삼존상에서 찾고 있다. 625년에 주조된 이 불상은 도래(渡來)양식에서 훨씬 벗어난 일본화의 분위기를 띠고 있는데 이 불상을 제작한 불사(佛師)의 이름이 도리(止利)이므로 흔히 '도리양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도리불사는 도래인 제3세이며,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은팔찌 제작자 이름이 다리(多利)인 것과 연관되는 점이 있다. 호류지의 본존 국보 불상인 ‘석가삼존상’은 누가 만든 것인가. 모두에 언급했듯이 사마달등 촌장의 친손자인 사마지리의 뛰어난 솜씨다. 그는 주로 지리불사(止利佛師·도리붓시)나 속칭 ‘도리붓시’(鳥佛師)로 불렸다. ‘새불사’라는 뜻도 되겠으나, 일본의 ‘만요가나’라고 하는 우리나라 이두식의 한자어 음차에 의해서 ‘지리’(止利)를 ‘도리’라고 읽는 데서 생겨난 표현이다. 지리불사의 첫 작품은 현재 안거원(安居院 아스카 절터)에 모셔 있는 철불 석가여래상이다. 사마지리 최초의 불상은 1956년부터 시작되었던 아스카 절터 발굴 현장에서 나온 것이다. 발굴에 참여했던 요코야마 고이치(橫山浩一) 교수는 “지리불사가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본존인 석가여래상은 손상이 심하지만, 역시 옛날의 대좌 위에 안치된 채로 고스란히 발굴했다”(‘아스카발굴사’, 1974)고 확인했다. 일찍이 도쿄대학 구로카와 마요리(1829∼1906) 교수는 “사마달등의 손자가 만든 불상은 한국 양식”(‘工藝志料’, 1905)이라고 단정한 바 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서기 622년에 작고한 성덕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백제인 불공 사마지리(司馬止利·7C)가 만든 금동불상이다. 사마지리가 손수 제작했다는 기록은 석가삼존상의 광배명에 써있고, ‘성덕태자전력’에도 나와 있다. 이런 표현이 없이 우리는 그저 일본의 아름다운 문화재로만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안내서를 더 계속 읽어보자.
오층탑(五重塔:五層塔)
아스카(飛鳥)시대(6C중기~8C초기)
탑은 스투파(率塔婆)라고도 불리워지며 석존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탑으로 불교사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물입니다. 높이는 기단상(基壇上)에서 약 31.5m이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오층탑으로 유명합니다. 이 탑의 최하층의 내진(內陣)속에는 나라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소상(塑像)들이 다수 안치되어 있으며 동쪽 면에는 유마거사(維摩居士)와 문수보살이 문답하는 장면, 북쪽 면에는 석존의 입적(入寂)장면, 서쪽 면은 석존의 유골(사리)의 분할 장면, 남쪽 면에는 미륵보살의 설법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중요한 내용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이라는 얘기 밖에 없다. 백제의 기술자가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면 그곳을 찾은 우리 일행이 얼마나 큰 반가움으로 목탑을 바라봤겠는가? 목탑을 세우는 기술은 삼국 가운데 백제가 단연 뛰어났다. 백제는 신라의 황룡사 9층목탑을 조성할 때 석공예 기술자 아비지(阿非知)를 파견하였고, 또한 일본에도 588년 백제의 기술자인 노반공(露盤工), 조사공(造寺工), 조와공(造瓦工), 화공(畵工)을 보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전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백제에는 목탑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심초석과 주초석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목탑지만 남아 있는데, 기록이나 목탑지만으로 백제의 화려한 영화를 떠올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일본 나라시대의 목탑 가운데 백제 목탑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인 나라의 호류지(法隆寺) 5중탑이다. 일본에서는 탑의 층수를 층이 아니라 중으로 세기 때문에 5층탑이 아니라 5중탑으로 표기한다. 어떤 이는 지붕이 여섯 개인데 왜 5중탑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1층의 지붕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붕이 이중일 뿐 층은 1층이다. 더군다나 아래의 지붕은 후대에 덧붙인 것이므로 이것을 빼고 보아야 백제탑의 모습이 분명해진다.
호류지 5중탑은 1층의 석조 기단에 5층의 목조건물이 서있고, 건물 중심에는 찰주가 솟아 상륜부를 이루고 있다. 2층에서 5층까지의 건물을 보면, 몸체는 잘록하고 지붕은 완만한 경사로 얇게 좌우로 활짝 펼쳐진 형상이다. 이러한 조형은 당시로서는 고난이도의 건축구조인 다층의 목조 건물을 세우는 공법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즉, 몸체를 작게 함으로써 위에서 짓누르는 무거운 하중을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는 것이다. 높이와 지붕을 살려 위용을 과시하면서 몸체를 줄여 안전을 도모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백제인의 노하우인 것이다. 신라에서 황룡사 9층목탑을 건립할 때 백제의 기술자를 초청한 것도 이러한 기술이 필요했기
(호류지 오층탑의 하앙식 공포와 난간) (부여백제문화단지 능사의 5층목탑)
그렇다면 호류지 5중탑과 같은 탑을 정작 백제에서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목탑은 모두 없어져 비교할 수 없지만 석탑인 정림사지 5층석탑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호류지 5중탑처럼 몸체가 잘록하고 지붕이 얇고 길게 펼친 형상을 취하고 있다. 1층의 벽체가 육중한 탑을 받치고 있고, 2층 이상의 벽체는 잘록하고 지붕은 마치 새의 날개처럼 좌우로 시원하게 뻗어 우아한 기품을 자아내고 있다. 목조로 된 호류지 5중탑을 석조로 간략하게 표현하면 정림사지 5층석탑이 되는 것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비록 돌로 만들었지만 백제시대 목탑의 이미지가 충실히 남아 있는 문화재로서 건축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더 구체적인 것은 익산 미륵사지의 석탑일 것이다. 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익산 미륵사터에 있는 탑으로,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아쉽게도 반쪽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6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다. 추정하기로는 9층탑일 경우가 거의 확실하다. 기단(基壇)은 목탑과 같이 낮은 1단을 이루었다. 탑신(塔身)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고 가운데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만들었으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웠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배흘림기법을 따르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본떠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되며,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를 보니 백제의 목탑 형상이 그려진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4세기 말에 들어왔지만 우리의 석탑은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후에야 첫선을 보였다. 그럼 그 200년간은 어떤 탑을 세웠나... 바로 목탑이다. 우리의 불교 초창기에는 무려 200년간이나 목탑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그 많던 목탑들이 전쟁통에 사라지고 때로는 운이 없어 화재로 사라지다 보니 이제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삼국시대의 목탑은 없다. 우리에게는 석탑 밖에 기억이 없다. 우리 민족은 목탑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대웅전이 존재하고 있는데, 충청북도 보은의 법주사에 가면 그나마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목탑을 조선시대 중기에 와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작년 부여에서 백제역사재현단지가 조성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능사의 5층 목탑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능사는 지난 92년 발견된 능산리사지(陵山理寺址)의 줄임말로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나성(사적 제58호) 사이에서 발굴된 절터로 충남도가 백제역사재현단지의 가장 역점 건축물로 조성된 것이다. 학계에선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능(陵)을 수호하고 왕이 제(祭)를 지내던 특별한 사찰이었던 것으로 고증하고 있으며,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 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288호) 등이 출토된 사찰로 유명하다.
그 중 5층목탑은 정면 3칸(7.4m), 측면 3칸(7.4m), 연면적 16평, 높이 37.5m, 상륜 높이 9m의 초대형 규모며 국내 최초로 복원되는 백제 목탑이다. 최기영 대목장(중요무형문화재 74호)이 못을 쓰지 않고 목재와 목재만 얽어 처마의 하중을 떠받치는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한 백제시대 특유의 '하앙(下昻)식 공법'을 적용해 건립했다. 능사 5층 목탑은 부여읍 동남리에서 출토된 금동탑편의 하양양식과 정림사지5층석탑, 미륵사지 석탑을 참고했다고 한다. 사용된 재료만도 소나무 28만 1,200여재(才), 기와 3만 1,700여매, 화강석 62㎥가 소요되었고 74억 3,000만원의 사업비가 투자됐고, 2004년 5월 탑지봉안식을 시작으로 목재조립에 착수한지 3년여에 완공된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우린 백제 건축의 특징을 첫째. 부채꼴(선자) 서까래를 가지고 있으며(한옥의 특징), 공포의 구성이 하앙식 구조이며(일본식 건축의 특징), 장식용 난간을 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또 고려초기 대표적 유적인 불일사 5층 석탑 내부에서 국내에서 유일하게 목탑 양식을 한 금동 9층소탑이 발견되었다. 이 금동탑은 높이가 37cm, 기단 부분의 길이는 13.8cm이며 전체적으로 단아한 모양이다. 기단 4면에는 8개의 문을 달았고, 탑신석의 각 층마다 창문을 냈으며, 옥신부의 처마에는 기왓골을 새겨 넣었다. 상륜부의 형태 또한 온전하여 거의 완벽한 형태의 목탑 양식 금동소탑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계단과 문, 그리고 창문 등의 표현은 실제 목탑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로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이 소탑은 고려 초기 작품으로 백제 장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전하는 호류지(법륭사) 목탑처럼 처마가 밋밋한 양식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등 양식상 황룡사목탑 건립 시기의 작품들과 유사성이 많다. 따라서 이 금동소탑은 황룡사 9층탑의 복원과 우리나라 목탑건축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렇듯이 호류지 오층탑의 경우는 백제식 건축양식을 아주 잘 따르고 있는 그래서 백제인의 작품이라는 걸 말하기에 전혀 주저함이 없는 백제의 목탑이다.
계속해서 안내서에 있는 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대강당(大講堂)
헤이안(平安)시대 (8C말기~12C후기)
이 불당은 불교의 학문을 연구하거나 법회(法會)를 거행하는 목적으로 건립되었으나 종각과 더불어 925년(延長3년)에 낙뢰로 소실되었습니다. 다행히도 990년(正歷원년)에 재건되어 본존인 약사삼존상과 사천왕상도 그때 제작된 것입니다.
경당(經藏:經堂)
나라(奈良)시대(8C초기~8C말기)
이 건물은 경전을 보관하는 시설로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천문과 지리학을 일본으로 전했다는 백제학승 관륵승정(觀勒僧正)상으로 전해 내려오는 좌상(헤이안시대 8C말기~12C후기)을 안치하고 있습니다.
종각(鐘樓:鐘閣)
헤이안(平安)시대 (8C말기~12C후기)
이 종각에 걸려있는 하쿠오(白鳳 7C후기~8C초기)시대의 범종은 지금도 당시의 신비스러운 음색을 오늘날에 전해주고 있습니다.
가미노미도(上御堂)불당
가마쿠라(鎌倉)시대(12C후기~14C전기)
이 불당은 나라시대, 덴무(天武)천황의 왕자인 도네리 신노(舍人親王)의 발원(發願)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의 건물은 가마쿠라 시대에 재건된 것입니다. 이 법당 내에는 헤이안시대의 석가모니 삼존상과 무로마치 시대의 사천왕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사이엔도(西圓堂)불당
가마쿠라(鎌倉)시대(12C후기~14C전기)
불당참배 코스에서 약간 떨어져있는 사이인(西院)가람 북서쪽의 작은 언덕 위에 팔각형 불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창건은 나라시대에 다치바나 부닌(橘夫人)의 발원에 의해 교키(行基)보살이 건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의 건물은 가마쿠라시대에 재건된 것입니다. 이 불당의 중앙에는 일본 최대의 건칠불상(乾漆佛像)으로 유명한 본존 약사여래좌상(나라시대)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쇼료인(聖靈院)
가마쿠라(鎌倉)시대(12C후기~14C전기)
동서로 길게 이어진 회랑의 바깥쪽에는 히가시무로(東室)·니시무로(西室)라는 건물이 남북을 향해 세워져 있습니다. 이 건물들은 승려들의 거처였기 때문에 승방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가마쿠라시대에 쇼토쿠(聖德)태자 신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쇼토쿠태자의 존상(헤이안시대 말기)을 안치하기 위하여 히가시무로(東室)의 남단부를 개조한 겅이 이 쇼료인(聖靈院)불당입니다.
대보장원(大寶藏院)
쇼와시대(1926~1988)
쇼료인불당에서 동쪽을 향해 걸으면 보물창고인 고호조(綱對藏)(헤이안 시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건물앞을 왼쪽으로 돌아 북쪽을 향해 걸으면 지키도(食堂)(나라시대)와 호소도노(細殿)(가마쿠라시대) 건물이 보이는데 그 안쪽에 새롭게 건조한 가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곳이 1998년에 낙성식을 가진 구다라(百濟)관음당을 중심으로 한 대보장원입니다. 건물 내부에는 유명한 유메치가이(夢違)관음상(하쿠오시대), 스이코(推古)천황 소유의 불전이라고 전해지는 다마무시노즈시(玉蟲廚子)감실(아스카시대) 그리고 연꽃 위의 금동 아미타 삼존불을 본존으로 하고 있는 다치바나 부닌노즈지(橘夫人廚子)감실(하쿠오시대)을 비롯하여 백만탑(百萬塔), 중국에서 전래된 백단(白檀)향으로 만들어진 구면(九面)관음상 및 촉강금(蜀江錦), 천인(天人)이 그려져 있는 금당 소벽화 등, 일본을 대표하는 국보급 문화재가 다수 안치되어 있습니다. 아스카시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이들 국보급 문화재들은 1,400년에 걸쳐 만들어진 호류지절의 값진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다라(百濟)관음당
헤이세이시대(1998)
호류지절에 전해 내려오는 구다라 관음상(아스카시대)은 일본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불상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합니다. 또 일본 불상으로서는 드물게도 8등신의 날씬한 몸매와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비가 넘치는 표정은 관람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호류지절에서는 이 구다라관음을 안치한 전당을 건립하는 것이 오랫동안의 숙원이었습니다. 그 꿈이 마침내 1998년 가을에 실현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구다라관음당입니다.
‘비단벌레 불상궤(玉蟲廚子·다마무시노즈시)’
대보장원에서 다시 담징의 금당벽화를 만나게 되며 안쪽으로 들어가면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오늘의 일본 국보 문화재가 된 훌륭한 2층 목조 불전(佛殿)인 백제의 ‘비단벌레 불상궤(玉蟲廚子·다마무시노즈시)’다. 일본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북창(北倉)은 百濟觀音, 남창(南倉)에는 옥충주자(玉蟲廚子)”라고 칭송한다. ‘비단벌레 불상궤’(玉蟲廚子)는 높이 232.7cm의 네모난 2층 구조의 칠공예 미술품(漆工藝美術品)이다. 상층부는 궁전(宮殿)을 본뜬 전각(殿閣)형식이다. 하층부는 수미단(須弥壇)으로 되어 있다. 검은 옻칠을 했고, 기둥 등 중요한 부분이 인동당초문양(忍冬唐草文樣)으로 투시조각(透視彫刻)된 금동(金銅)장식이다. 더구나 놀라운 세공(細工)의 기법은, 금동금구(金銅金具)의 밑에는 비단벌레인 옥충의 수많은 날개들을 정교하게 깔아서 붙인 것이다. 여기에 쓴 옥충은 그 수효가 자그만치 2,563마리나 된다고 한다. 한 마리 한 마리씩 비단벌레 날개를 펼쳐서 발라 붙인 백제 예술가의 땀 어린 예술혼은 아스카 땅에 건너와 눈부시게 빛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신비한 색체효과를 내준다는 그 작은 비단벌레 한 마리의 날개를 펼쳐서 발라 붙였기 때문에 이 주자의 이름을 ‘옥충주자’라고 한다. 이 옥충주자는 스이코 여왕이 아스카데라(飛鳥寺)에 이웃한 도유라궁(豊浦宮)에 안치하고 이 불단의 2층 불감(佛龕)에 봉안한 불상을 향해 합장 예불하던 귀중한 구다라 불교 문화재다.
옥충주자의 1층 부분은 수미단(須彌壇)으로서 4면에 각기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설을 그림으로 엮은 밀타회화 그림들로 만들어졌다. 정면인 앞쪽 그림은 불타의 사리를 공양하는 ‘사리공양도(舍利供養圖)’이다. 정면에서 우측으로 돌아간 곳의 그림은 부처가 호랑이에게 제 몸을 던져 먹여 살린다는 ‘사신사호도(捨身飼虎圖)’다. 또한 정면의 좌측면은 ‘설산동자’의 몸으로 태어난 석가가 바라문으로 수업 중인 장면인 ‘시신문게도(施身聞偈圖)’다. 그리고 뒷면 그림은 불교 세계 한복판에 있어 세상에서 가장 드높다는 수미산도(須弥山圖)를 그려 넣었다.
비단벌레불상궤인 다마무시노즈시(玉蟲廚子)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홍윤기 박사의 글이 으뜸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옥충주자는 현재 나라땅 이카루가의 호류지 사찰 ‘구다라관음당’ 안에 녹나무 구다라관음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이 옥충주자는 스이코 여왕 서거 후에 호류지 사찰로 옮겨간 것이다. 왜 왕실로 옥충주자를 보내준 것은 백제 제27대 위덕왕(554∼598년)이다. 그 당시 처음에는 옥충주자를 가시키야 공주(뒷날의 스이코 여왕)의 모후인 기다시히메(堅鹽媛·조정의 최고 대신인 백제인 소아도목의 딸) 왕후에게 보냈던 것이라고 미국인 동양사학자 페놀로사(E F Fenollosa 1853∼1908년) 교수는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옥충주자와 이상하리만큼 키가 큰 목조관음상(백제관음)은 조선 미술의 위대한 보물이다. 서기 590년경에 백제에서 왕후에게 보내왔다”(‘동아미술사강’ 1912년).
1885년 5월부터 그 당시 일본 정부 궁내성의 나라지방 문화재 조사에 참여했던 도쿄미술학교 오카구라 덴신(岡倉天心·본명 覺三 1862∼1913년) 교수도 옥충주자가 백제에서 건너왔음을 다음처럼 밝혔다.
“아스카 시대 문화재의 백제식 표본에는 호류지 사찰의 허공장보살(百濟觀音)과 유메도노의 구세관음이 있으며, 옥충주자의 그림(불화)도 백제식이다. 또한 고류지(廣隆寺·교토)에 여의륜(미륵상)이 있다”(‘오카구라 덴신 전집’·‘泰東巧藝史’ 1940년).
옥충주자의 비단벌레 날개 금구 장식 기법은 고대 한국의 특출한 기예라는 것을 기우치 다케오(木內武男) 교수는 다음처럼 밝히기도 했다.
“비단벌레의 날개를 깐 데서 ‘옥충주자’라는 이름이 붙었다. 더구나 비단 벌레를 공예품으로 응용하는 일은 일찍이 조선 삼국시대 당시부터 행해져 왔고, 신라 경주의 금관총에서 출토된 말안장과 등자, 행엽(杏葉) 등에도 투명한 금구 밑에다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서 그 색채 효과를 이루었다”(‘日本の考古學·木工, 漆工 1950년). 이렇듯 일찍부터 저명한 학자들이 옥충주자에 대해 백제 문화재라는 것을 고증해 왔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어떤 학자는 옥충주자가 일본서 만든 것이라며 다음처럼 내세웠다.
“옥충주자의 수미단 불화는 채색이 또렷하게 떠오르며, 위층에 만들어진 것은 아스카 시대 불전 건축을 연상시키는 옥충주자의 균재가 잡힌 아름다움이 실로 호류지 뿐만이 아니라 일본 고대 공예 미술이 낳은 걸작의 하나이리라”(大西修也 ‘호류지Ⅲ미술’ 1987).
그러나 일본 민예학자로 저명했던 센슈대학(專修大學)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 교수의 다음 견해를 귀담아 보면 또 어떨까.
“일본 국보는 모두 조선의 국보다”(‘朝鮮とその藝術’ 1948)이다.
구다라관음상(百濟觀音像)
일본이 자랑하는 최고의 문화재를 꼽으라면 거침없이 호류지의 구다라관음상(百濟觀音像)이다. 그들의 안내서에도 구다라관음상(아스카시대)은 일본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불상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하고 또 일본 불상으로서는 드물게도 8등신의 날씬한 몸매와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비가 넘치는 표정으로 관람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구다라관음을 안치한 전당을 건립하는 것이 오랫동안의 숙원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작가이며 정치가이었던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1901~1976)는 일찍부터 동양어학교(東洋語學校)에서 산스크리트어·중국어를 배우며 동양문화에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고미술품을 비롯한 골동품들을 수집하곤 했는데 구다라관음상을 보면서 언제 일본열도가 지진이나 쓰나미로 바다가 가라앉을지 모르는데 그 때 자신은 저 구다라관음상을 건져오겠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세계인의 찬사를 받는 불교미술작품이다. 이 구다라관음상에 대한 얘기도 홍윤기 박사의 글이 더 실감 있게 와 닿을 것 같아 이곳에 옮겨본다.
구다라(백제) 관음상 이야기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대표적인 국보 불상은 ‘구다라관음(百濟觀音)’이다. 백제가 7세기 초에 나라(奈良) 땅 왜 왕실로 보내준 훌륭한 녹나무 불상이다. 흡사 늘씬한 여성처럼 쭉 뻗은 키 2m28cm의 입상.
현재 일본 나라 땅 ‘호류지’(法隆寺·607년 백제 건축가들이 세움) 경내의 ‘구다라관음당’ 안에 모셔 있으며, 누구나 관람이 가능하다. 백제 왕실이 왜 왕실로 이 불상을 보내주었을 때의 명칭은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이었다. 그런데 18세기경부터 본래의 명칭은 사라져버리고 이 사찰에서조차도 구다라관음, 즉 ‘백제관음’이라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일본 각지에서 일인들이 나라 땅의 호류지를 찾아가는 것은 이 구다라관음을 보기 위해서다. 그만큼 일인들의 찬양을 받고 있는 것이 백제에서 건너간 구다라관음이다. 그러기에 일본의 저명 학자나 명사치고 옛날부터 이 불상에 대하여 글을 쓰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구다라관음은 백제의 불상 조각가가 한 둥치의 녹나무(樟木)로 만든 입상이다. 녹나무란 좀약을 만드는 방충제의 원료가 되는 목재인 만큼 벌레가 먹거나 쉽사리 썩지 않는다. 백제인이 슬기롭게 만든 이 녹나무 불상은 장장 1300여년을 왜나라 터전에서 줄기차게 버티고 있다.
허공장보살이라는 이름이 구다라관음으로 바뀐 것은 어떤 까닭에서일까. 이 녹나무 불상은 구다라의 빼어난 불교 미술품이기에 저마다 “구다라에서 건너온 훌륭한 관음불상이다”라는 계속되는 찬사 속에 어느 사이엔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백제 것만이 최고다”라는 “구다라나이”의 대명사가 되고만 것 같다. 아무래도 구다라관음이라는 명칭 등장은 매우 자연스러운 구다라 찬양의 발자취라 할 수 있다.
교토대학 총장을 역임한 고고미술사학자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1881∼1938) 교수는 백제로부터 건너온 이 불상의 ‘구다라’ 명칭에 관해 “이 불상을 ‘구다라관음’으로 부르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대에 일본으로 건너온 이후 ‘허공장보살’로 불러왔다고 하는 것은 이 불상의 아래쪽 대좌에 불상의 명칭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百濟觀音·1948)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하마다 교수는 일찍이 구다라관음이 허공장보살이란 명칭으로 백제로부터 건너온 것을 시인했다. 이 구다라관음이 백제에서 왔다고 하는 발자취는 필자가 지난날 발굴한 호류지 고문서인 ‘제당불체수량기 금당지내(諸堂佛體數量記 金堂之內)’에 “허공장보살은 백제국으로부터 도래하였다(虛空藏菩薩百濟國ヨリ渡來)”라고 쓰여 있는 데서 알아냈다.
저명한 역사지리학자였던 요시다 도고(吉田東伍·1864∼1918) 박사가 저술한 ‘대일본지명사서’(大日本地名辭書·1900)에서도 “허공장보살을 가리켜서 구다라관음으로 부르게 된 것은 백제국에서 보내준 목상관음상(木像觀音像)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1971년, 느닷없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논문이 나타나서 일본 국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녹나무로 만든 불상 ‘구다라관음’은 결코 ‘구다라(백제)’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고대 일본 특산 나무를 가지고 일본에서 만든 불상이다. 왜냐하면 조선에는 녹나무가 자라나지 않기 때문이다. 녹나무는 일본, 대만 및 중국에서만 자생하며, 조선에는 분포하지 않는다.”(上代木彫の用材·1971)
이렇게 주장한 사람은 그 당시 일본 지바(千葉)대학의 목재학 담당 오바라 지로(小原二郞) 교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하루아침에 일부 일인들의 환호성을 올리게 했다.
그런가 하면 도쿄교육대학의 미술사학자 마치다 고이치(町田甲一) 교수가 일본 NHK방송(교양프로 ‘문화전망’·1989)에 출연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방송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모든 일본인이 찬양해 왔던 자랑스러운 국보 구다라관음은 구다라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내온 구다라 불상이 아닙니다. 이 녹나무 구다라관음이야말로 고대에 일본인이 일본에서 만든 불상입니다. 왜냐하면 한국 땅에서는 녹나무가 자라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목재 전문학자 오바라 교수에 의해서 명백하게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재학자 오바라 교수의 돌출적인 연구 논문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발표되고, 일본의 이름난 미술사학자가 잇달아 방송을 통해 이를 알리자, 하루아침에 구다라관음의 자랑스러운 백제 불교미술품의 명성은 실추되기 시작했다.
과연 한국에서는 녹나무가 자생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때마침 그 방송을 청취한 녹나무 장뇌사(樟腦史) 전문가인 야마모토 렌조(山本鍊造)라는 학자가 이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다음처럼 일축했다.
“현재도 한국에는 녹나무가 엄연히 자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300년 전에 녹나무가 한국에 없었다고 하는 적극적인 증거가 없다면 한국에 녹나무가 자생하지 않았다고 감히 누구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大和古寺巡歷·1989)
결국 목재학자와 미술사가는 야마모토가 녹나무의 한국 자생을 규명함으로써 학문적으로 각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구다라관음은 그 이후 다시금 일본 문화재 관계 당국자들에 의해 잇달아 수모를 당했다.
1997년 9월 10일부터 2주일간 구다라관음이 프랑스에 나들이하여 파리 루브르박물관 ‘드농관’에 특별 전시돼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다. 그 당시 구다라관음은 프랑스 정부가 제정한 ‘일본의 해’ 기념으로 일본 나라 땅 호류지로부터 파리로 공수되었다. 막대한 보험료가 달렸다는 이 백제 불상에 관한 전시실 ‘게시문’은 다음과 같았다.
“이 구다라관음은 한국(구다라)으로부터 건너왔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비슷한 양식의 목조불상이 그 당시 중국이나 한국의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 비추어 ‘의심할 나위 없이’ 일본에서 제작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호류지 고문서에 “백제에서 건너왔다”는 옛날 문헌이 입증하고 있으나, 게시문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일본제임을 확신한다”고 거짓 주장한 것이다.
또한 2001년 6월에 간행되어 한일 간에 큰 말썽을 빚은 책이 대표 집필자 니시오 간지(西尾幹二)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였다. 이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도 백제관음상의 컬러 사진을 화보(3쪽)에 싣고, “구다라관음은 아스카 시대(592∼710)를 대표하는 우미한 불상이다. 녹나무는 조선에 자생하지 않으므로 구다라관음은 일본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단정하고 있다. 일본에서 이 교과서는 해마다 일부 학교가 채택하여 쓰고 있다.
한편 현재 호류지가 방문객에게 배포하고 있는 ‘호류지 약연기(略緣起)’라는 선전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참고 삼아 그 머리글을 옮긴다.
이와 같은 글도 구다라관음의 발자취를 모르는 관람객에게는 백제에서 보내온 구다라 불상이라는 사실이 올바르게 전달되기 힘든 기술일 따름이다.
더구나 ‘구다라관음’을 일본 것으로 내세우는 역사 왜곡은 현재 일본의 한 포털사이트(www.google.co.jp)의 ‘역사판(歷史板) 퀴즈’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 사이트에서는 ‘백제관음’에 대한 질문에서 “1951년에 일본 국보로 지정된 호류지 구다라관음상. 이 불상이 ‘구다라관음’으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별도의 객관식 해답란에서 ‘구다라’로 호칭하는 까닭은 “후세 사람들의 착각(後世の人の勘違い) 때문”이란 답을 만들어서 제시하고 있다.
1971년 7월8일, 충남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의 무령왕 머리맡에서 발견된 장식의 연화당초문은 백제관음의 보관(寶冠) 장식과 똑같다. 구다라관음이 백제에서 건너간 불교미술품이라는 증거다. 오늘날 호류지에 건재하는 구다라관음이야말로 “백제 물건이 아니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전형적인 ‘구다라나이’의 표본 백제 문화재이다. 여기 한 가지 곁들여 밝혀 두자면 8·15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부가 일본에 요청했던 ‘한국문화재 반환 청구 제1호’가 백제관음이기도 했다.
일본고대사 연구가 우다 노부오(宇田伸夫·1952∼)가 근년에 쓴 역사 저술 ‘구다라가엔’(百濟花苑·2002)을 보면 남편 조메이왕이 건축한 구다라궁(百濟宮)에서 살던 고교쿠(皇極·642∼645 재위) 여왕 당시 하시히토(間人) 공주와 히이라기 궁녀의 대화에서 공주가 정원의 붉고 아름다운 ‘잇꽃’을 가리키며, “이 꽃은 어디서 이곳 아스카(백제인 왕실 터전)에 온 것이지?” 하고 묻자 궁녀가 서슴없이 대답한다.
“물론 구다라에서 전해온 것이지요” 하자, “좋은 것은 모두 구다라에서 온 것이구나”라는 공주의 감탄이 나온다. 즉 ‘구다라나이’다.
"늘씬한 몸매는 소년과 같고, 우아한 얼굴 생김새는 여성적이다. 신비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像이다."라고 評들을 하지만 오랜 세월 속에 색은 탈색이 되어 죽어있었고 침침한 대보장원 구다라관음당에서 보는 구다라관음상에 대해 솔직히 별 감흥을 못 느꼈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수학여행을 온 일본학생들은 인솔하는 한 일본인교사가 후레쉬로 관음상의 얼굴을 비추는데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바로 저것이구나! 구다라 관음의 표정을 비로소 본 것이었다.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빛이 비춰지는 각도에 따라 그 표정은 각각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데 정말 신비롭고 황홀했다.
동대문(東大門)
나라(奈良)시대(8C초기~8C말기)
대보장원(大寶藏院)을 지나서 유메도노(夢殿)불당으로 향하는 도중에 위치한 이 문은 보기 드문 삼동(3棟)건축양식으로, 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건조물 중의 하나입니다.
유메도노(夢殿)불당
나라(奈良)시대(8C초기~8C말기)
서기 601년에 건조된 이카루가노미야(斑鳩宮)유적터에 교신소즈(行信僧都)라는 고승이 쇼토쿠태자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739년(天平11년)에 건립한 가람을 조구오인(上宮王院)불당이라고 합니다. 그 중심건물이 바로 “유메도노”불당입니다. 팔각형 불당 중앙의 감실(龕室)속에는 쇼토쿠태자 실물 크기의 비불구세(秘佛救世)관음상(아스카시대)을 안치하였으며, 그 주변에는 성관음보살상(헤이안시대), 교신소즈(行信僧都)의 건칠상(乾漆像)(나라시대), 또 헤이안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유메도노 불당을 수리한 도센율사(道詮律士)의 소상(塑像)(헤이안시대) 등도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 유메도노 불당은 중문을 개조한 예당(禮堂)(가마쿠라시대)과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어 모두가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믿고 있는 쇼토쿠태자를 추모하는 불당으로서 걸맞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불당입니다.
유메도노(夢殿)에서 본 구세관음상(秘佛救世觀音像)
호류사 몽전(夢殿)은 백제 위덕왕의 부왕에 대한 고뇌에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일 년에 두 차례, 봄. 가을에 한 달씩 개방하는 이곳 몽전에 일본 국보인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이 있다. 나무로 조각하고 금박을 입힌 목조불상인데, 얼굴과 표정, 높이 180cm 크기까지 사람과 동일하게 제작한 등신상이다. 머리의 쓴 화려한 보관 아래로 긴 머리카락까지 사람과 똑같이 조각되어 있다 한다. 호류사 몽전 구세관음상에 대한 이야기를 KBS 한국사傳에는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한다.
100년 전, 19세기에 일본 정부의 촉탁을 받은 페놀로사와 승려 오카쿠라 텐신이 호류사의 유물을 조사할 때 몽전(夢殿)의 문은 오래 동안 열지 않아 녹이 슬어 있었다. 호류사 승려들에게서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 몽전에는 조선에서 건너 온 불상이 있는데 함부로 문을 열면 지진이나 화재와 같은 큰 재앙이 사찰에 닥치기 때문에 절대 열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의 촉탁을 받았던 페놀로사는 몽전 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 불상이 들어있는 주자를 열었더니, 길이 500m의 무명천으로 쌓여 있는 목조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이 나타났다.
페놀로사는 이 구세관음상에 대해, “호류사에 있는 옥충주자와 몽전관음은 조선(백제)에서 건너 온 위대한 두 걸작품이다” 라고 했다. 15세기 초에 호류사의 승려 성예(聖譽)가 남긴 『성예초(聖譽鈔)』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威德戀慕父王像 所造顯之尊像卽 救世觀音像是也」
“위덕왕이 부왕상을 연모하여 만들어서 나타낸 존상이 구세관음상이다.”
일본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호류사 몽전의 구세관음상에서 백제 성왕의 얼굴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신기할 뿐이다.
백제 창왕의 시호가 위덕인 것에 대해 이유가 기록된 것은 없으나, KBS 한국사傳에서는 불교의 대위덕명왕에서 가져 온 시호로 보았다. 대위덕명왕을 비롯한 오대명왕은 불교에서도 밀교의 존상들이다. 대위덕명왕에 대한 『伽山 佛敎大辭林』의 설명을 그대로 적어 본다.
"대위덕명왕(大威德明王)은 염만덕가(閻曼德迦). 염만득가(焰鬘得迦) 등으로 음사되고, 그 듯에 의해 항염마존(降閻摩尊)이라고도 하며, 형상에 의거하여 6족존(六足尊)이라고도 한다. 5대명왕의 하나로 태장만다라 지명원(持明院) 중앙 반야보살 우측에 배치한다. 밀호는 대위덕금강(大威德金剛) 또는 지명금강(持明金剛)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호류지는 쇼토쿠 태자가 자신의 아버지 요메이 천황을 기리기 위해 사재를 털어 조성한 사찰이다. 언젠가 아버지를 위해 만세에 길이 남을 사찰을 세우리라 다짐했던 쇼토쿠 태자는 호류지를 건립하기 위해 백제에서 수많은 사찰 건축가와 기사, 사신과 스님들을 초빙했다. 백제로부터 구세관음상이 도착한 것은 사찰이 완공되기 3년 전인 604년이다.
구세관음상이 안치된 몽전(夢殿)은 일본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팔각정으로 손꼽힌다.
이 전각이 몽전 즉 ‘꿈꾸는 방’이라 불리게 된 것은 쇼토쿠 태자가 명상을 하다 꿈속에서 부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설화를 기려 지었기 때문이다.
1천여 년 전 일본과 백제의 두 왕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조성한 호류지와 구세관음은 이렇게 하나의 운명이 되어 오늘에까지 이어졌고,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두 나라의 깊은 불연을 입증하는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세월은 백제도 신라도, 아스카 시대도 역사 저편으로 흘려보냈다. 위덕왕의 애통함을 간직한 능산리의 절은 이제 이름조차 잊혀진 황량한 절터로 남았고, 최근 그곳에서 출토된 용봉 문양의 아름다운 향로(백제금동대향로, 국보 제287호)만이 부왕의 죽음을 비통해했던 여창의 마음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일본서기에는 아좌가 위덕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아좌는 쇼토쿠태자의 스승이고 그의 태자상을 그린 사람이다. 사가현립도서관에 있는 향토역사서 『비전국지』에는 아좌의 자료가 있는데, 아좌는 추고천황 597년에 8척의 배로 일본으로 건너 왔고 그가 닻을 내린 곳은 하스포가사끼 항구이다. 위덕왕이 왕흥사 사리탑에 사리를 봉안한 577년에서 20년 후가 된다.
그러나 사가현 기시마군 이나사신사(稻佐神社)에 오래 전부터 보존되어 내려 온 목판에는 백제 성왕 가족의 이름이 적혀있다. 기록은 성왕신(聖王神), 왕후신(王后神)과 왕후의 아들 아좌신(阿佐神)으로 되어 있어서 아좌가 성왕의 아들로 표현되어 있으며 신사에서는 그 기록을 믿는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에 대해 아주 효심이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이 그를 신으로 받들었다는 것이다.
위덕왕은 선사. 비구. 비구니. 주금사. 조불공. 조사공 등을 왜에 보내 오사카에 있는 사천왕사를 짓게 했다. 중문, 오층 목탑, 금당, 강당이 일자로 나란히 있는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이고 오사카에서 가장 오래 된 절이다. 오사카의 ‘금강조(金剛조:곤고구미)’라는 건축회사는 위덕왕이 보낸 조사공의 39대손인 ‘곤고 도시미츠’가 1,400년 동안 사천왕사를 수리 보수하는 일을 맡아오는 목조건축 전문회사이고, 백제로부터 가져 온 사찰 건축법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사천왕사의 『어수선연기』에는 민달천황시기에 백제에서 선사, 율사, 비구니, 주금사. 조불공, 조사공이 왔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오사카 대별왕사터는 위덕왕이 보낸 사절단이 머물던 터이고.
사리전(舍利殿)·회전(繪殿)
가마쿠라(鎌倉)시대(12C후기~14C전기)
사리전은 쇼토쿠태자가 2살 때의 봄에 합장한 손안에서 나왔다는 사리를 안치한 건물로, 회전(繪殿)에는 쇼토쿠태자의 일생동안의 치적을 그린 장지문 그림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덴포도(傳法堂)불당
나라(奈良)시대(8C초기~8C말기)
이 불당은 쇼무(聖武)천황의 부인이었던 다치바나노 고나카치(橘古那可智)의 저택을 불당으로 개조한 건물입니다. 당내에는 삼조(3組)로 된 건칠(乾漆)아미타 삼존상(나라시대)을 비롯하여 많은 불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도인(東院)종각
가마쿠라(鎌倉)시대(12C후기~14C전기)
이 종각은 하카마고시(袴腰:부채꼴 모양)라고 불리우는 형식의 건축물로 내부에는 “주구지(中宮寺)절”이라고 새겨진 나라시대의 범종이 걸려 있습니다.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
이렇게 해서 안내팜플렛을 따라 법륭사를 둘러보면서 남 다른 감회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법륭사야말로 고대 한국 미술 문화재들이 빼곡히 차 있는 터전으로 유서 깊은 곳이다. 지금은 일본의 국보가 되어버린 고대 한국의 눈부신 미술의 정화(精華)들은 오늘날까지 또렷이 살아 있으면서, 긴 역사를 낱낱이 말해주고 있다.
유메도노(夢殿)에서 일정이 다 끝난 게 아니다. 그 뒤편으로 가면 주구지(中宮寺)가 있고 그곳을 들어가려면 새로 매표를 해야만 한다.
주구지(中宮寺)는 예전에 쇼토쿠태자의 집터로 알려져 있으며, 이곳에서 우리는 일본 최고의 자수(刺繡) 예술로 평가되는 천수국만다라수장을 만날 수가 있다.
이 자수는 본래 두 장을 만든 것이나 지금은 한 장의 일부분만이 남아 있다. 한 장의 크기는 사방 5m(一丈六尺) 정도나 되는 매우 큰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廢寺되고 보관처를 옮기는 등 손상을 입어 현재는 극히 일부분의 殘片이 남아 있다. 그 잔편은 세로 88.5cm, 가로 82.7cm 크기의 額裝으로 收藏庫에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다. 물론 국보이다. 천은 비단이 바탕인데 붉은 색과 노랑색, 청색 등의 수실의 색깔이 아름답게 남아 있다.
이 ‘천수국만다라수장’은 성덕 태자가 非命에 죽자, 태자비인, 유대여랑(楺大女郞)이 태자가 천수국에 가서 왕생하는 모습을 그리기로 하고, 여러 궁녀에게 수장 두 장을 만들게 하여, 수장의 밑그림을 백제계의 야마토노아 야노마겡(東漢末賢)과 아야노누노가고리(漢奴加己利), 고구려계의 고마노가세이(高麗加西溢)가 그렸다고 한다. 이 수장에 보이는 인물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것과 같이 춤이 긴 저고리와 주름치마를 입고 있어 고구려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는 기록이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에 남아 있다.
첫댓글 다양한 불교 문화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