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행 1장 6-11절
설교제목 : 우리의 땅끝
영혼의 힘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봄날의 기운이 우리의 온 몸에 와닿는 듯 합니다. 아침에도 날이 일찍 밝아지니 새벽에 눈이 저절로 떠집니다. 길어진 해의 시간 만큼 부지런해지라는 신호같기도 합니다. 화창하고 생동하는 봄과 달리 세계 이곳 저곳에서는 여전히 불안한 요인들이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10여 일 전에 스위스에 계신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꿈이 생각납니다. 사업하는 40대 중반의 남성이 어느날 꿈을 꾸었습니다. 그 남성은 긴 기차를 운전하는 기관사였고, 기차를 운행하여 역에 들어오는데 기차가 탈선을 하여 모래 구덩이에 깊숙이 쳐박혀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비 하나가 기차 뒤에 나타나더니 날개짓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뿐히 기차를 끌어내어 다시 선로로 옮겼습니다.
나비는 변환의 상징이자 영혼을 가리킵니다. 외부세계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에게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꿈은 영혼의 힘이 얼마나 강력하고 그가 추동하는 기차를 끌어낼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을 일러주는 꿈입니다. 현대 문명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장의 가치를 신봉하고, 합리적이고 산술적인 방식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혼의 힘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나무에 열매가 몇 개가 열리는지 그 열매는 얼마나 비싼 가격에 팔 수 있는지에 관심합니다. 나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힘과 결속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삶의 자리에서도 평화와 넉넉한 미소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끊임없는 인간의 질문
사도행전은 주님의 승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1장 1절에서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속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데오빌로 황제에게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한 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의 세례를 기다리고 전한 후에,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를 다룹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시고 승천하십니다.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6)”
사도들의 이 질문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7).”
사도들의 질문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조바심내게 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물음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바로 지금’이냐고 묻습니다. 바로 지금이라는 표현 속에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는 지침의 상태가 느껴집니다. 그들이 바로 지금 이루어지길 갈망하며 묻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었습니다.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를 목놓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일이나 사건, 성취가 당장 이루어지길 갈망합니다. 그러나 갈망하는 일은 바로 지금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그 조바심 나는 질문에 일침을 가합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 권한이고, ...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를 두 가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때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자아의 제한된 규모에서 확실하게 때를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의도한대로 무엇이든 완벽하게 작동할 수 없습니다. 결정적인 시간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오히려 불확실하고 불안할 수 있는 날을 건강하게 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은 제자들의 순진한 낙관론에 일침을 가합니다. 모든 잘 될 거라는 희망고문을 하지 않습니다. 값싼 위로로 건네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되뇌이게 하는 바로 지금이란 질문 앞에서 때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에게 주신 날을 묵묵히 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능력
제자들의 질문에는 역사의 회복의 주체가 주님이시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주님께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상 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8).”
주님은 오히려 사도들을 주체로 세우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들이 증인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해방도,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안에, 이 땅 위에서 실현해가는 일은 주님이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분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은 자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임을 확실히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무임승차할 수 없는 법입니다. 경제적, 정신적, 사회적 자유를 누리는 삶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땀, 값비싼 대가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그의 삶을 지향삼아 사는 이들이 바로 해방의 주체, 변화의 주체인 것입니다.
이런 변혁의 주체가 되기 위해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능력이란 그리스어로 ‘뒤나미스’입니다. 이 뒤나미스에서 다아니마이트가 나왔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은 우리를 무기력과 침체로부터 일으켜 주님께서 부과하신 과제를 수행하게 하십니다. 내 힘과 자원은 제한적이고, 쉽게 오염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은 생동감을 지니게 하고, 쉬이 낙심하지 않게 하며, 분별력을 가지고 유혹으로부터 부과된 과제를 완수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어떤 카리스마틱한 힘을 과시하고, 병을 고치고 기적을 일으키는 선동적인 위력보다는 생을 용기있고,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일종의 에너지와 태도를 부여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이 주시는 능력, 곧 열매가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오래참음)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 22)라고 일러줍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은 위로부터도 내려오지만 끊임없이 우리에게 문을 두드리며 거룩한 영이 주시는 능력과 접촉하려 하십니다. 그리하여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우리 삶의 과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을 감당케 하심을 마음에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땅끝
이런 성령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증인이 되게 합니다. 수가성 여인이 물을 길러 갔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접속하고, 그분을 만남으로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 사람들에게 갑니다. 고통과 수치의 옷을 벗고,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왔던 율법과 형식의 항아리를 버리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와서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증인이란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기존의 세계에 문제제기를 하고 새로운 세계를 가리켜 보이는 사람입니다. 낡은 문법을 넘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이 있음을 가리킬 수 있는 자가 바로 증인입니다. 이런 삶은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새로운 세계를 맛본 자만이 가능합니다. 증인이란 그리스어는 ‘마르투로스μαρτυρος’입니다. 단어에서 순교자를 뜻하는 ‘martyr’가 나왔습니다. 증인이라 새로운 세계를 모셔들이기 위해 분투하는 자인 것입니다. 땅에 하늘을 모셔들이기 위해 자신의 생을 거는 모험을 하는 자입니다. 그분의 뜻이 이 땅 위에도 이루어지기를 위해 힘을 보태는 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가리켜 보이며 살고 있으신가요? 기존의 낡은 세계에 이의를 제기하고 하나님의 나라, 새로운 세계를 가리켜 보이는 증인의 삶이 우리의 인생 여정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증인의 길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라와 인종, 빈부격차, 문화와 종교를 넘어서는 영역입니다. 땅끝은 어디일까요?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가장 멀리 있는 곳입니다. 우리에게서 가장 먼 곳은 어디일까요? 우리의 그림자의 나라일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의 그림자의 나라를 인식하고 새롭게 하기 위해 분투하는 자의 삶은 자연스럽게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만 쳐다보느냐?
예수께서 떠나가실 때에 사도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게 흰 옷입은 천사들이 그들 곁에 서서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11).”
“어찌하여 하늘만 쳐다보고 서 있느냐?” 질문합니다. 하늘만 쳐다보는 그들을 책망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다시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힘을 보태려는 자들에게 지금도 찾아오십니다. 고통의 땅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임하십니다. 새롭게 인생을 재구성하기 위해 나의 그림자를 성찰하려는 자에게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하늘만 쳐다보고 그저 서 있어서는 그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꺼이 내 몸과 마음을 비워낸 자에게 주님은 오십니다. 겸손히 자신을 덜어낸 자를 새롭게 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심을 밝히 깨닫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