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사랑의 온도계
‘자기가 가진 재산은 통장에 들어 있는 잔고가 아니라 자기가 쓰는 만큼이다.’ 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통장에 들어 있는 것은 모이기만 할 뿐 사용되지 않으면 단순히 숫자일 뿐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러니까 이 논리대로라면 통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숫자가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것뿐입니다. 반면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또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서 또는 모두를 위한 어떤 일을 하는 데 얼마만큼 사용하느냐에 따라 가진 재산이 얼마인가를 평가하는 것이 더욱 의미 있고 실질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년 2월 2일은 주님께서 성전에 봉헌되는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 사람 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탈출 13,2)의 말씀처럼 모세를 통해 정해진 율법을 따라 예수님께서도 성전에서 봉헌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봉헌은 단순히 정해진 규정을 지키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메온의 예언서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 전부를 온전히 봉헌하심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신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고, 찾은 그 뜻에 당신의 전부를 내어놓으셨기에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알아야 믿음이 생기느냐’, ‘믿음이 있어야 하느님을 알게 되느냐’ 라는 질문을 가끔씩 받습니다. 둘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 봉헌한 만큼 그분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시간과 노력과 물질을 예수님께 봉헌한 만큼이 그분을 아는 정도이고 믿는 정도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원하시는 봉헌은 앞서 말씀드린 것들 중 어느 한 가지가 아니라 모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지도록 자신을 봉헌하는 것, 이것이 그분께 대한 믿음의 온도계이며 사랑의 온도계임을 기억합시다.
“주님, 저를 온전히 받아 주소서!”(聖 이냐시오 데 로욜라)
박상용 사도요한 신부 (본지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