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쓰기에서 시제와 인칭
이동민
모든 문장에는 말을 하는 화자가 있고, 행위가 일어나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말하는 사람을 따질 때는 일인칭이냐, 삼인칭이냐를 따지고, 시제를 따질 때는 시간을 지시하는 요소로서, 문법에서는 행위가 일어난 시간과 일치할 것을 요구한다. 문법적으로 보아서도 시간의 기준점은 화자가 말을 하는 시점과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의 두 가지가 있다. 화자가 어디에 기준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동일한 사건을 말할 때도 시제가 달라진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시간 요소가 문법적이기보다는 문장의 의미와 관련이 있는 수가 많다. 굳이 말하자면 한국어로 문학적 표현을 할 때는 반드시 시간과 일치하는 시제를 사용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라도 문학적으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현재형으로 써도 괜찮다는 것이다. 행위가 일어난 시간 자체가 아니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의 차원에서 시제를 정하는 수가 많다.
우리가 외국어, 특히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영어의 시제에 자주 혼란을 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한국어는 시제가 엄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언어로 살아온 우리로서는 영어가 낯설기 마련이다. 우리 언어에 너무 엄격하게 시제를 적용하면 오히려 부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일반적으로 수필은 거의 대부분이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상 형식으로 쓰기 때문에 시간 논리로 따진다면 과거형 문장이 90%가 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필문장을 분석해 보면 과거와 비과거를 수시로 넘나드는 형태이다. 우리 수필문장은 시제의 혼용이 일반화하였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문학에서 시제는 예술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결정한다. 작가가 자신의 시간의식과 미의식을 결합함으로 효과를 높이려는 수사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수필쓰기에서 시제 표현을 정하는 것은 문법적 요소를 넘어 선 문학적 기교로 본다.
수필에서 과거에 경험하였던 사실을 더 생동감이 있고, 현장의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 과거형 문장이 아니고 현재형 문장으로 나타내는 것은 ‘서사 전략적 선택’일 뿐이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캄캄한 밤에 심부름을 간 일이 있다. 골목을 돌아서면 밭과 흙담만 이어진 한적한 곳이다. 그곳에서 밤에 빨치산이 되어 마을로 내려온 마을 청년이(뉘네집 아들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곳이었다. 굿도 했다는 곳이다. 심부름을 하려면 그곳을 지나야 했다. 지금도 지난밤에 일어난 일처럼 기억이 생생하다 가슴이 콩닥거리면서 빠르게 걷는데 내 뒤에서 뚜벅 뚜벅하는 소리가 자꾸 나를 따라왔다. 소름이 끼쳐져서 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라 하고 내달렸다. 이것을 수필문장으로 표현하면서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고 또박또박 과거형으로 쓰는 것과 발 빠르게 현재형 문장으로 쓴다면, 어느 것이 더 현장감이 느껴질까. '뚜벅 뚜벅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다. 소름이 끼쳐섰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려었다.‘라는 문장과 ’뚜벅 뚜벅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름이 돋는다. 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렸다.‘는 표현을 비교해보자. 어느 시제로 할 것인가의 결정은 문법적 차원이 아니고 수사적 차원에서 한다.
수필문장에서는 시제의 문법성을 엄격히 따지지 않는다.
언어가 있다는 것은 그 언어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수필도 마찬가지이다. 화자는 말하는 주체이고, 문법적으로 화자는 항상 일인칭이다. 삼인칭은 될 수가 없다. 따라서 ‘말한다’는 내가 ‘나’에 대해서, ‘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문학 표현을 서사라고 한다면 행위의 주체가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야기를 하는 화자는 서사형식에서 이야기로 말을 하는 주체이지, 서사를 구성하는 작중 인물은 아니다. 수필에서는 화자 즉 말하는 사람은 작가 자신이고, 서사의 작중 인물 중에서도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진다면 화자와 이야기 중에서 행위를 하는 사람과 동일한 사람은 아니다.
이야기를 말하는 형식을 보면 ‘나’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도 있고,. 나가 아닌 ‘그’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도 있다. ‘그’는 타인이면서도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된 초점화 된 인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에 대해서 말할 때는 나의 자전적인 내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그의 자전적인 내용이 아니다.
“2인실에 바짝 밀착된 옆 환자가 신경 쓰인다. 애써 외면해도 숨소리까지 들린다. 가슴에 다닥다닥 단자를 붙이고 한 방울씩 떨어지는 수액에 목숨을 부지하던 그녀가 휠체어에 실려 나간다. 그의 등짝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에 놀라 얼른 눈길을 거둔다. 수술은 성공적인데 그녀가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이유를 의사도 알 수 없단다. 한 번 찾아온 남편은 침대 발치에 앉아 오래도록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모로 누운 여자는 힘주어 눈을 감고 어금니를 깨물며 남자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녀가 곡기를 끊은 이유는 남편에 대한 복수라는 말이 떠돌았다. 나는 그녀가 부디 시원하게 복수하기를 빌었다. 하지만 중환자실로 간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잠을 숙제처럼 안고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다. 찍고 차고 찍고 차고, 눈으로 뒤덮인 빙벽을 오르는 일은 진저리치는 두려움이다. 도처에 죽음의 틈새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여차하면 크레바스에 몸뚱이가 빠질 판이다. 피켈은 좀처럼 박히지 않는다. 햇빛은 노루 꼬리만큼 비치는가 싶더니 이내 구름에 가려버린다. 하켄을 박을 때 튕겨 나가는 단단하고 푸르스름한 얼음 조각은 흉기처럼 번뜩인다. 손바닥과 아이젠 발톱에 전달되는 파동은 온몸이 감전된 듯 저릿저릿 아프다. 꿈에서 깨어나고도 까무룩 의식을 놓아버렸다. 잠도 불면도 송곳 끝이다.
잠은 오늘을 내일로 이어주는 건널목이다. 내일로 건너가지 못하고 멈춰버린 시간은 감각의 촉수만 날카롭게 일어선다. 눈을 감으면 심장의 박동이며 실핏줄에 피 도는 소리까지 들린다. 재깍거리는 시계의 초침은 숨통을 조여 오는 저승사자의 발소리 같다. 신과의 교감을 청해 보아도 응답이 없다.
이따금 구급차의 다급한 사이렌이 적막을 깨울 뿐 사위는 고요하다. 조심스럽게 링거 대를 밀며 복도로 나왔다. 방마다 잠들지 못하는 기척이 새어 나온다. 어둠보다 정적이 더 끔찍할 때가 있어 밭은기침 소리조차 위안이 된다. 여러 개의 링거 주머니를 쩔렁거리며 다가온 남자가 마주 앉는다. 얼굴이 흙빛이다.
“아줌마도 수술했어요?”
“…….”
“나이가 얼마요?”
“…….”
“한 육십 넘었습니까?”
“…….”
“수술이 성공했다면 금방은 안 죽습니다. 최소한 오 년은 살아요. 지금 육십이라 치면 오 년 후에는 육십 다섯이니 그때는 뭐 죽는다고 쳐도 그다지 억울할 나이는 아니지요.”
나를 위로하려는 말인 듯하나 불편하다. 남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옆 병상의 그녀는 오 년 치 목숨을 남편에 대한 복수와 바꾼 것인가. 예순다섯이 넘으면 정말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할까. 지나가는 사람의 불확실한 정보에도 예민해진다. 남자는 다시 링거 줄을 모아 쥐고 복도 끝을 향해 걷는다. 애써 가슴을 펴고 어깨를 젖히는 남자의 등에 어둠이 따라붙는다. 그가 애써 강조하던 말은 내심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아닐까. 그도 얼마쯤의 절망을 숨기며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거겠지. 남자의 발길은 조금 전 내가 다녀온 하느님의 거처로 향한다.“
- 문혜란의 ‘병실의 밤’ 중에서 일부 -
1단락의 문장은 현재형과 과거형이 함께 나온다. 만약에 화자가 행위가 일어난 시점에서 쓴다면 현제 시점이 맞지만, 이미 지난 일을 이야기하는 형식이라면 과거 시제가 옳다. 뒤섞어서 쓴 글을 읽으면서도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이 수필도 언어로 표현된 것이므로 말하는 사람이 당연히 있다. 이 글은 수필 형식으로 화자는 작가이다. 지문과 대화체가 혼용된 문장으로서, 시제는 일반적으로 현대형으로 처리했다. 글의 내용이 상당히 절박한 분위기를 자아내므로 현대 시제를 사용한 것은 수사적이고, 책략적인 선택으로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를 이야기 한다. 한 사람은 중환자실로 끌려간 여자 환자 이야기다. 여자 환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자 즉 작가는 자기가 보았던 사실을 기술함으로, 증언하는 형식을 취했다. 여자 환자에게 일어난 사건들은 다른 사람에게 증언하듯이 서술했다. 또 한 사람은 링거 주머니를 달고 복도에 나온 남자 환자이다. 이 사람도 ‘그’이다. 말하는 화자인 ‘나’는 ‘그’인 링거를 단 남자의 말을 듣기만 한다.
여기서 링거를 단 남자는 병실에 입원한 수많은 환자들 중에서 작가가 이야기 속의 인물로 선택한 사람이다. 말하자면 그 남자를 ‘초점화’ 시켰다. 또 하나 눈 여겨 봐야 할 부분은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는 나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이때 링거를 단 남자인 ‘그’는 바로 ‘나’가 된다. 이때는 화자와 ‘그’가 모두 화자인 ‘나’인 것이다. ‘그’가 하는 말이 ‘나’의 말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는 ‘나는 말한다.’가 생략되고 바로 남자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면서 남자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이 수필에서는 지문 형식으로 서술한 ‘나를 위로하려는 말인 듯하나 불편하다.’ 라는 말에서 남자의 말이 화자와 어떻게 결합하였는가를, 말하자면 그와 나가 어떻게 ‘나’로 나타나는가를 보여준다.
“남자는 다시 링거줄을 쥐고 ------ 거처로 향한다.”
작가가 남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여기서 ‘나는 말한다.’가 앞 부분에 생략되었다고 본다. 또 남자가 어떻게, 어떻게 하였는가를 제 3자인 독자에게 전해준다는 점에서는 ‘나는 증언한다.’가 생략되어 있다. 이런 표현법은 남자의 행동을 우리에게 증언하듯이 들려준다. 이 이야기가 링거를 단 남자만의 이야기일까. ‘나’와 ‘그’는 모두 나이다. 라고 보면 화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인칭 화법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또 하나는 화자가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그’라는 삼인칭 인물을 내세워서 한 것이라면, 나와 그는 얼마나 같을까, 라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화자는 링거를 단 남자의 행동과 말을 사진처럼 전해주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그가 보고 들은 것은 ‘그’의 외피이고, 자기가 받아들인 것이지 진정한 그는 아니다. 그러면서 화자가 ‘나’에 대해서 말할 때는 자신의 내면을 싣고 있다. 그렇다면 초점화된 인물과 나는 동일인이 될 수 있을까?
화자인 ‘나’는 나를 말하기 위해서 ‘그’의 특성 중에서 나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차용해 왔을 뿐이지 ‘그’의 전부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 그의 전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행동, 그의 말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앞 서 말한 여성환자나, 링거를 단 남자는 모두 화자 즉 일인칭 인물의 분신일 뿐이다.
또 하나는 ‘나’를 표현하는데 인물로서 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나는 정체성을 가진 개인이다. ‘그’를 관찰하고, 기술할 때는 확고부동한 나의 눈(정체성을 가진 개인으로서의 관점)으로 그를 바라보고, 그를 평가하고, 그를 해석한다. 그러나 위의 수필을 보면 같은 병실에 입원했던 환자와도 만났고, 병실을 나서고, 복도에서 타인(그)을 만나고, 아침에는 하느님의 집에도 다녀온 나를 ‘그’로 바라보면서 말한다. 사실은 나의 행위들이다. 말을 하는 나도(화자) 확고부동한 나(정체성을 가진)와 동일한 인물인지도 불확실하다. 왜냐면 ‘나’는 적어도 화자가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과 관계맺음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나도 온전한 나라기보다는 사회적 맥락, 문화적 맥락, 병원에 함께 입원해 있다는 동지적 맥락 등 다양한 끈으로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 나이다. 그러므로 내가(화자) 말하는 나 또한 확고부동한 나라고 보기 어렵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라는 존재도 행위 속의 나이지, 확고부동한 개성 즉 정체성을 가진 나라고는 보기 어렵다.
길고, 어렵게 설명한 것이라서 이해에 오히려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약하여 말하면 수필에서는 모든 행위와 언술은 화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다. 화자 자신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