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우리나라 산지의 금표현황을 살펴보면서 보호지혜 얻고자한다. 재질과 서체를 비교해주셨으면 합니다.
① 옛 산림보호정책을 볼수 있는 문경의 황장산 봉산표석
② 보은 속리산의 금표
③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전주 건지산의 조경단 창덕궁 금표
④ 예산 가야산 남연군묘역을 비롯 태실과 왕자들의 무덤 주변에 있던 이산표석
⑤ 전북 익산군 미륵산 누황재의 산계표석
★ 장산에 있는 이산표석 발견은 동쪽에서44기, 서쪽에서33기, 남쪽에서4기 총81기를 찾아냈습니다. 개수 많다.
시민 여러분께서 이산표석에 대한 문화재적 가치가 어떨까? 함께 검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재송동과 반송1동 송정동에서는 이산표석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송정동이야 1914년에 기장현에서 편입되어 그럴수 있다고 보여지지만 재송동과 반송1동에서 찾겨지지 않음이 계속 아쉬워 마음에 걸린다. 건지산이나 가야산표석은 묘역관리가 목적이였고 황장산은 궁궐목재 보호측면이였으며, 속리산의 금표는 속리산의 풍광보호를 목적으로 출입과 벌채를 금지한 경계 표시다. 미륵산 산계는 소유목적의 표시로 보이나, 장산의 이산표석처럼 병선제작용 목재 보호용 봉산관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겠다. 장산의 봉산관리에서 지역민의 애환과 공유정신도 베어있어 이부분을 나타내고 배우려 하는 것이다.
발견표석 중 10%가 등산로에서 위치가 이탈되었거나 훼손되었음은 표석의 문화재 지정이 시급함을 얘기합니다.
오늘 나는 좌동 산1-230,144번지 일원1,500,000㎡가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문화재보호법 제13조)되기를 제안합니다. 그 사유는 첫째, 이산표석30기가 집중되어 있어 관리의 효율성을 도모 할 수 있으며, 둘째, 구석기부터의 유물과 수종의 돌담을 만나게 되며, 움집과 동굴 너덜겅의 변화 모습 확인 세번째, 6.25동란의 흔적과 일제강점기 모습의 역사 네번째, 하천과 폭포 및 약수터와 멸종위기종의 습지식물이 서식하는 습지의 생태경관지를 포함하고 있다. 다섯번째, 양치식물의 장산곶자왈을 그리며, 다양한 생물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옛무덤을 통해 장산국의 흔적도 더듬을 수 있기로 최소의 보호비용으로 해보자고 감히 과제 던져 보는 것입니다.
가야산의 이산과 장산의 이산은 같은 이산표석인데 음각된 서체가 분명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장산의81기중 글씨가 훼손되어 확인 할 수 없는 9기를 제외한 72기는 동일한 서체로 구별이 확실히 된다. 그러므로 표석의 제작주체도 다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장산의 이산표석 석재는 장산이나 인근의 암석임이 분명하다. 재질에 대하여는 과학적 검증 절차가 필요하여 추후 확인하여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장산은 병선제작 제원으로 관리된 봉산이였기에 관리주체가 경상좌수영이였다. 비석형이 아닌 자연바위에 음각한 표석은 검토에서 제외하고자 합니다.
첫댓글 표석 설치년도 황장산 봉산표석 - 1680(숙종6년), 보은 속리산의 금표는(1788? 정조12년), 건지산 창덕궁금표 - 1899전후로 추정(전주문화원), 가야산 이산표석 - 1865~1918으로 추정, 미륵산 산계표석 - 미확인(저 생각으로는 1967년경으로 보여 짐) 우리지역 장산은 병선 재목조달의 봉산이였고, 장산의 이산 설치시기를 1904~1913으로 추정하겠습니다. 이유는 경상좌수영 간비오산의 봉꾼이 마지막까지 임무수행한 시기가 1907년으로 기록되어있고, 송정지역에 이산표석이 없는 것으로 보아 1914년 이전 설치했다..
좋은 의견이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옛문화재 보전을 주장하면서도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시간을 할애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이 그 가치를 알고 앞장서서 실천을 하시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우리의 문화나 전통에 대해 소홀한 측면이 있었지요. 선조들이 살다간 삶의 흔적은 잘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늘 애쓰시는 옥선생님, 응원합니다 ^^
봉산(封山)이란, 수군절도사영의 관리 아래 전선(戰船)의 재료와 나라에서 필요로 할 경우 목재를 조달하고 일반인의 이용을 금지하기 위해 설정한 산림이다. 봉산의 기본법인 송헌(松憲)이 제정되어 몰래 나무를 벤 자는 그루 수에 따라 엄한 벌에 처했다. 소나무 한 그루를 벨 때마다 가시나무로 만든 회초리 장(杖)60대를 맞았고, 소나무 10그루 이상을 베었을 때와 솔밭에 불을 지른 방화범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사형으로 다스렸다. <출처: 울산제일일보>
이산표석은 경계의 표시이기는 하지만 이정표나 거리표석의 역할도 하였으며 경고의 표시로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