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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곤일척(乾坤一擲)
이원우
경주가 본관인 이창희 노인은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휘자(諱字) 거명(居明) 할아버지의 40세손이다. 대가 끊어지는 줄 알고 절망에 빠져 있다가 그의 아버지 상평(相平)이 얻은 아들자식이었다.
고고의 소릴 터뜨렸을 때, 아버지는 창희(彰熙)라는 이름을 택했다. 밝을 ‘창(彰)’과 빛날 ‘희(熙)’라니 어감도 좋고, 두 한자(漢字) 뜻이 마음에 들어서였으리라. 물론 빛날 ‘희(熙)’는 항렬자다.
어린 창희의 아버지는 부(富)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런데도 그의 사랑방에는 과객(過客)이며 지방유지, 한학자들이 더러 드나들었다. 아버지는 그들을 정성껏 대접하였으니, 인심 하나는 얻었다고 해야겠지.
참, 과객이라 하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죽은 감나무 줄기를 톱과 끌로 자르고 다듬어 상(床) 등 가구를 만드는 중년 남자였는데, 한 번 들르면 그는 일주일씩 머물다 가기 예사였다. 일종의 부보상(負褓商)? 맞는 말이리라. 등에 짐을 지고 다녔으니까. 양지와 음지 섬땀 마을에 총 여든 가구가 있었으니, 수요(需要)는 충분했다. 특히 섬땀과 양지는 이 씨의 집성촌이었다. 일흔 가구쯤 되었으리라. 나머지는 김 씨, 장 씨, 엄 씨였고.
아버지는 창희에게 그가 종친(宗親)이며 창희의 형님 된다고 강조했다. 벗 붕(朋) 자를 쓴다면서….물론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창희가 그를 ‘형님’이라 부를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그런데 그가 소위 ‘시조창(時調唱)’이라는 생소한 국악 정악에 심취해 있고 상당한 기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창희의 나이 여덟 살 때였다.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왔는데, 아버지가 창희를 부르는 것이었다.
“창희야, 네가 노래를 잘하는 것으로 소문난 지 오래다. ‘지리동산 갈가마귀야…’라는 민요 알지? 그거 이 형님 앞에서 불러 봐라.”
창희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이후후후후(*후렴) 귀야귀야 갈가마귀야/ 지리동산 갈가마귀야/ 니 검다고 한탄 마라 / 겉은 검고 속은 붉다…
“‘여산영’입니다. 일종의 노동요(勞動謠)라고나 할까요. 받쳐 둔 지게 위에 꼴을 한 짐 얹었으니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지게 작대기에 의지하여 이 소릴 뱉으면 힘이 불끈 솟아 저절로 일어서게 되지요.”
창희의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이렇게 그가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닌가! 그러고서 잇는 말이었다.
“그런데 창희는 굉장한 소리꾼이 되겠습니다. 보통 애들의 목소리와는 다릅니다. 아저씨, 얘 이름을 빛날 창이 아니라 소리 창(唱)으로 하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요. 하하. 농담입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건대, 이 아이는 노래에 천부의 소질을 갖고 태어난 것 같습니다.”
“조카, 보게. 그건 안 될 말일세. 다만 녀석이 소리로 이름을 빛내는 시절이 있다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하기야 조금 더 자라고 난 뒤, 밀양 권번(券番)에 가서 선을 한 번 보일 생각이긴 해. 판소리며 민요를 배워 주는 당대의 명창들이 거기 모여 있다더군.”
“잘 생각하셨습니다. 딴따라니 해서 얕잡아 보는 건 문제지요. 얘가 그런저런 인연으로 시조창을 배워 대가(大家)가 된다면, 개척자 혹은 선각자 아니겠습니까? 학교 공부는 계속해야지요. 저도 석암 정경태 선생을 사사했습니다. 학교 공부도 조금 했습니다. 중학교 과정은 밟았지요.”
그러더니 자기가 시조창을 조금해 볼 테니 창희더러 따라 해 보겠느냐는 게 아닌가? 아버지도 긍정했고, 소년 창희 또한 굉장한 호기심에 이끌렸다. 그는 시설시조 ‘팔만대장’-평시조를 끝내야 사설시조로 들어가는데-을 목청에 싣는 것이었다. 팔만대장 부처님께 비나이다/ 나와 임을 다시 보게 하오소서/ 여래보살 문수보살 오백나한/팔만가람…
그가 혼자서 손으로 방바닥에 박(拍)을 짚어가며 완창(完唱)하는 데엔 상당 시간이 소요됐다. 듣는 둘은 미동(微動)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이상한 기운에 휩싸여 숨도 크게 쉬지 못할 정도가 되어 버렸으니, 그 순간의 정황을 뉘라서 제대로 표현할까?
그럴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으니, 창희네 부모는 불교를 믿어왔고 부처님 소리만 들어도 합장할 정도였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인 창희 어머니가 더 독실했다.
그는 ‘팔만대장’ 사건(?) 이후 제법 오래 머물렀다. 열흘쯤은 되었으리라. 가끔은 섬땀에 있는 재실(齋室)에 들러 종중(宗中) 일을 돕기도 했고. 물론 일감이 있으면, 한강 어른(‘한강’은 찬희 어머니의 택호) 사랑방으로 돌아와 땀을 흘렸다. 어지간한 중고 가구라도 그의 손이 닿으면 모두 쓸모 있게 재탄생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해 유난히 장마도 길고 해서, 밖에서 농사일을 못 하는 근원동(近遠洞) 주민들이 몰려들어서다.
그가 연지동 아저씨와 재실 마루에서 낮잠에 잠시 빠져 있었다. 사고는 연지동 아저씨가 바로 곁인 집에 다녀오려고 재실을 비운 사이에 사고가 일어났다. 그는 천장 구석에 붙어 있는 제법 커다란 웃벌(말벌을 가리키는 경상도 사투리) 집에 공연히 신경이 쓰였다. 그는 그 벌집을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그 작업이 만만할 리가 없었다. 그가 배롱나무에 걸쳐놓은 대나무 장대를 집어 들고 벌집을 쑤셔 버렸더니 수백 마리의 말벌들이 그를 습격한 것이다.
연지동 아저씨가 재실에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그가 숨을 거둔 뒤였다. 일정한 주거도 없던 그의 장례는 양지와 음지, 섬땀 일가친척들이 간소하게 치러 주었다. 지관(地官)이기도 한 창희 아버지기 묫자리를 보고,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도 좀 이해되지 않은 일이 있었다. 섬땀과 창희 동네 음지 사이에 내(川)가 하나 흘렀다. 그 내에 바짝 붙어 아슬아슬하게 집을 짓고 ‘숯 영감’이라는 초로가 살았었다. 영감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내와 함께 열여섯 살 되는 딸 수미꼬를 데리고, 어렵게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영감을 ‘귀환 동포’라고 불렀다. 그는 산에 가서 나무를 베고 숯을 굽는 일을 했다. 그런데 두어 해 전에 영감이 갑자기 쓰러져 저승으로 간 것이다. 무심하다 할 정도로 그의 아내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수미꼬가 훌쩍거리는 소리만 담벼락을 뚫고 들려올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형님이 사고를 당한 즉시부터 숯 영감 아내는 대성통곡을 하는 게 아닌가? 수미꼬는 일찍 시집을 갔기 때문에, 집에 없었다. 그 사건은 동민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입방아를 찧게 하였고말고.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던 창희, 그가 어느덧 일흔 중반을 넘긴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는 한 번도 경제 형편이 넉넉할 때가 없었다. 하니 평생 자조 섞인 소리를 뱉으며 지내 왔을 수밖에. 학교도 여러 군데-중학교만 셋, 고등학교 둘-옮겨 다녔다. 게다가 고등학교는 중퇴였다. 폭력배와의 어울림, 집단 패싸움, 무단결석 등등. 그게 그의 머릿속에 되새겨지면, 지금도 몸서리를 칠 수밖에.
오랫동안 한 직업에 매달린 적도 없었다. 대학 입시 검정고시에서 합격한 그에게 다가온 첫 일자리가 은행경비였다. 방송대에 초등교육과가 생겨 거기 진학한 게 그에게는 참 잘한 선택이었다. 지금은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있지만, 연극계의 거목 이*택과 같이 공부할 기회도 그래서 얻었고. 물론 창희 씨는 교사로 임용, 몇 년 근무하긴 했다. 소설 등단에도 이*택의 힘이 컸다. 이*택의 본관도 경주였다.
그러나 창희 씨의 길은 그게 아니었다. 노래(혹은 음악)을 떠나선 살 수 없는 빡빡한 삶의 여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노래방이며 단란주점까지 열었고, 노래 지도 강사도 했다. 쇼 단의 밴드마스터까지 해 봤으니 더 열거해 무엇 하랴. 가수가 약속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을 땐 대타로 나서기 예사였다. 모두가 밀양 아니면 부산에서의 과거지사다.
예순 중반을 넘겨 당당하게 오디션에 통과하여 평생소원이던 가수-‘소리꾼’이 더 어울릴까?-가 되었다. 삼척동자라도 아는 남진을 비롯한 서너 명이 회장을 맡아오고 있는 대한가수협회 정회원인 것이다.
그가 수년 전부터 얼굴을 찡그리며 일상을 보내지 않는다. 차라리 항상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는 게 바른 표현인지 모르겠다. 인터넷 신문 기자 겸 가수 노릇 하기 대여섯 해 만에, 엄청난 가외소득(?)을 올리니까 하는 말이다. 행여 기사를 쓴 만큼 고료를 받는가? 아니면 가수로서의 출연료가 만만찮다? 그런 지레짐작을 누가 한다면 그는 참 섣부르다.
거듭 강조하건대 창희씨는 팔십 평생 일찍이 이토록 행복한 나날을 보낸 적이 없다. 그의 손에 휴대전화(스마트폰)가 하나 들려 있을 뿐인데….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매한가지! 그는 한밤중에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게 예사다. 아니 차라리 악습(?)에 가깝다고 하자.
그를 여전히 떠나지 않은 수식어 중 하나가 ‘기인(奇人)’이다. 그걸 고스란히 드러내는 인생 끝자락의 이모저모가 그의 스마트폰 유튜브며 카카오톡에 감춰져 있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그만의 세계가 거기 감추어져 있다. 두루뭉술하게 몇 가지 경우를 들어 소개해 보려는 거다.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튜브 속의 그는 주구장창 노래를 입에 담았다. 아니 노래와 안 엮어지는 영상은 없다. 저 친구가 좀 심하지 않는가 하고 여길 정도로 ‘노래의 화신’이 되어 등장하는 거다. 하기야 그가 좀체 보디 드문 별난 가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때로는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할밖에.
그의 스마트폰을 본인 아닌 누가 건네받았다 치자. 만약 유튜브에 그의 이름을 치면 기절초풍할 영상들이 수도 없이 뜬다. 물론 시차에 따라 제목이나 내용은 뒤죽박죽이 되지만….
오늘은 8월 15일, 광복절이다. 낡은 태극기를 교체한답시고 그가 문구점으로 걸음 한 사이 고등학교 2학년인 큰손자 재찬(在贊)이가 슬쩍 할아버지의 스마트폰을 열어 훔쳐보았다. 할아버지의 노래 세계가 어떤지 알아보고 싶어서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그 정도로 말미암아 할아버지께 혼이 날 정도는 아님을 녀석도 잘 안다.
유튜브가 바로 뜨기에 재찬은 부지런히 훑어 내려갔다. 이 문명의 이기를 통해 재찬이는 할아버지의 활약상 앞에 처음부터 아연실색할 표정을 지을 수밖에. 아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고 하자. 재찬이인들 바삐 메모해 내려가지 않고 어찌 배기랴. 재찬의 수첩 두어 페이지가 삽시간에 메워진다.
• ‘한강’ 300회/ 특집 TKBN-TV. 무대복을 입고 하사(下士)모자와 선글라스. 장발(長髮)이라 양쪽 귀는 안 보임. 사회하는 이는 미스코리아 출신.
• npbs-tv 경찰 방송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복음성가). 복장은 위와 같다. 사회는 경기문학인 협회 사무국장(시인).
• ‘** 초대석(완전한 군인 사랑)/더 스토리 방송. 완전 군복 차림이다. 머리는 병사만큼 짧게 깎았다. 간부 출신이라(하사 이상은 간부), 옅은 색깔의 선글라스가 오히려 어울린다. 아동문학가 사회.
• 조갑제 부산 강좌. ’Oh Danny Boy’ ‧ ‘황성옛터’ (9년 전)/ 참깨 방송. 부산일보 대강. 특이하게도 이창희의 윗옷이 모시 적삼. 조갑제 기자의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에 열렸었던 강연에 앞서 이창희가 일고여덟 번 노래를 불렀는데 그 중 하나.
• ‘돌아와요 부산항에’ (정자랑 떠나는 시간 여행 가요쇼)/ 68회(2년 전) 남양주 새로워 스튜디오. 사회 영화배우 김정자. 신사복 위에 하사 모자. 기자증도 목에 걺. 한창 군 안보 강사를 하던 무렵이라 그런 듯, 부사관(副士官) 머리.
• npbs tv 경찰방송. 복음성가(생활 성가) ‘사랑의 종소리’/ 어깨까지 머리카락이 닿는, 말 그대로 장발이다. 검정색 정장을 했다.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 방송국에서 복음성가 부른 기록.
• npbs tv 경찰방송. 복음 성가(생활 성가) ‘주여 이 죄인이/ 하사 모자.
• 조갑제 부산 월례 강좌 노래/ 9년 전. 참깨 방송.
• npbs tv 경찰 방송/ 복음 성가(생활 성가)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가톨릭에선 ’기도‘)
• 한올 문학상 시상식(안산)/ 173회(3년 전). 많은 목사들이 참석한 행사, 그들 중 누가 수상자였기 때문이라고 할아버지가 말한 적 있음.
그런데 열한 번째에서 재찬은 동생 재구(在球)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도 따라간 어느 야구장에서, 애국가를 할아버지가 독창하던 영상이 떴기 때문이다. 거기 첫머리에 정말 거창하다 해도 좋을 정도의 제목을 붙였는데, ‘최고의 애국가’!
6년 전 일이다. 무려 5,288회가 조회되었다. 강민호 황재균 손아섭 등의 얼굴이 보인다. 재찬의 말.
“우리 할아버지가 사장조 악보대로 어느 누구보다 정확하게 애국가를 부르시는 것 같아. 저 여자분 보렴. 복음성가 가수란다.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콘서트를 하듯이 혼자 선창(先唱)하는 건 금물이야. 이것 봐. 저 여자분 부른 게 3년 전 239만 회 조회인데, 1.8만 회가 ‘좋아요’ 이고, ‘싫어요’ 418 회야. 네가 한자를 잘 몰라 설명이 될지 모르겠다만, 애국가를 그르치는 주범(?)이 저런 허울 좋은 사람이야. 할아버지는 ‘좋아요’ VS ‘싫어요’가 17:0이셔. 누가 승자일까? 비율로 따져 보렴.”
그 다음으로 영상은 계속 이어졌다. 할아버지가 다행히(?) 조금 늦게 귀가하겠다는 전화를 했기 때문에, 둘은 안심하고 유튜브를 확인해 나갔다. 물론 그때쯤엔 이왕이니 할아버지께 유튜브를 시청하다고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았고말고.
그러다가 열두 번째에 가서는 기가 막히는 영상 제목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재찬 자신도 거기 출연하기 때문에 가슴이 설레는 가운데 눈을 유튜브에서 떼지 않았으니, 바로 이거다. 국방 TV ‘언제나 하사(下士)인 50년 노병’! 재찬은 동생에게 말했다.
“방송국에서 우리 집까지 와서 한나절 녹화하고 갔지. 다음 날은 할아버지가 26사단 군악대와 인사처라는 데에 가서 종일 카메라 앞에 서셨고…. 출연료만 1백 만 원을 받으셨단다. 거기 50만원을 보태 할아버지는 대형 거울과 책꽂이 및 책 서른 권을 사 주셨고….그날 또 수십 명 장병들에게 햄버거 하나씩을 대접하셨어.”
“근데 형, 조회 수가 엄청난데? 20,309번이야.”
“유노윤호! 너도 아는 그 이름난 가수가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할아버지 노래하시는 걸 도왔어. ”
둘은 다시 영상을 훑어나간다.
제15기 실버넷 기자단 발대식축하 공연. ‘Oh Danny Boy(무반주)’를 할아버지가 원어로 독창하는가 하면, 원로 가수 한명숙 선생과 ‘노란 샤스의 사나이’ 듀엣으로 부르는 현장도 나왔다. 정말 놀라운 무대였다. 성균관대 수원 캠퍼스에서였다. ‘목포의 눈물’ 및 ‘전선 야곡’ 메들리로 부른 것은 다시 TKBN-TV. 곧이어 O Sole mio, 한국시사랑문학회 정기 총회 및 신년 인사회….끝도 없다. 두 녀석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와, 우리 할아버지 대단하시다!
이윽고 창희 씨가 새 태극기를 하나 사서 들고 귀가했다. 두 손자 녀석들이 유튜브를 갖고 그때까지 실랑이를 벌인 것을 알고서 그는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서 하는 말
“그러고 보니 너희 둘이 스마트폰을 갖고 있긴 하구나. 하지만 너희 어미가 동영상은 막아 놓았으니 여태 할아버지의 모습을 못 보았었지? 내친김이니 나머진 내가 설명하마. 세상에서 유일하다는 평을 들을 만한 것도 있어.”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부른 노래 영상은, 이창희 자신의 이름만으로는 찾을 수 없다는 거다. 여러 가지 제목을 입력시켜야 된다는 서다. 그는 쟈니 리라는 유명한 가수와 두 번 공연(共演) 아닌 공연을 했다는 사실을 들먹이곤, 그 뜨거웠던 현장을 영상으로 소개했다.
“내가 군대에 입대할 때 이분 쟈니 리는 ‘뜨거운 안녕’으로, 큰 히트를 쳤던 가수였어. 서울에서 부산까지 전세기를 띄워 공연(公演)을 다닐 정도였으니까. 내가 소원이 하나 있었지, 그때. 내 평생 쟈니 리와 한자리에 앉아서 커피 한잔 나누는 것. 그런데 내 나이 일흔을 넘겨 그분을 형님이라 부르고, 무대에 같이 두 번이나 올랐으니 출세했다고 해야겠지.”
남산 밑에 있는, ‘문학의 집’이라는 현판이 붙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공간에 200명쯤이 모인 것 같았다. 거기서의 콘서트! 그들 청중의 1/4은 현역 장병들이다. 얼른 보아 대령(부사단장이라 했다)도 보이고, 주임원사를 비롯한 중위 및 병사들이 나머지다. 그런데 할아버지 혼자서 군복 차림으로 사회도 하고 진행도 하고, 음향기기 기사에게 지시도 한다.
이윽고 쟈니 리와 할아버지가 마이크를 각기 잡았다. 반주기에서 전주가 나오자 두 분은 어깨동무를 했다가 짐짓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서히 뒷걸음을 쳤다. 다시 각각 오른손을 높이 들어 이별의 시늉을 하는가 싶더니 한 소절씩 부르며 중앙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또다시 말해 주오 사랑하고 있다고 /별들이 다정히 손을 잡는 밤/기어이 가신다면 헤어집시다/아프게 마음 새긴 그 만 한마디/보내고 밤마다 울음인 나도/ 남자답게 말하리라 안녕이라고/ 뜨겁게 뜨겁게 안녕이라고// 또 다시 말해 주오…
노년들의 대부분이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따라 부르는 등, 야단이 났다. 열광의 도가니가 따로 없었다. 쉰에 몇 살을 더한 부사단장이 그 분위기에 휩쓸리는 게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물론 대령 계급장을 단 현역이다.
손자 둘이 보기에는 쟈니리란 가수가 보내는 제스처가 참 멋지고도 남았다. 할아버지의 차례 때는 그가 오른 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니….
영상의 레퍼토리가 다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느 노신사가 자작시를 낭송했다. (나중에 국제PEN이사장에 당선되었다고 했다,) 삼가동 본당(本堂)의 성가대 지휘자와, 여자 복음성가 가수가 복음성가(생활성가)를 불렀다. 보덕이라는 법명을 가진 불교 한 종파의 종정스님이 자신이 작사 작곡한 찬불가 한 곡을 선보이기도 했고. 성악을 전공하다 입대한 박참 중위가 가곡을 선사한 것도 대단한 반응이었다. 두 녀석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
“할아버지 그날 군복으로 말미암아 해프닝이 있었다고 하셨지요?”
“그래, 사단 사령부에서 장병들이 군복을 한 벌 갖고 왔는데, 내 체격에 안 맞지 뭐니? 내가 살져서 윗옷 지퍼가 안 올라가는 거야. 하는 수 없이 병사 둘을 화장실로 불러서 몸을 군복에 맞추었으니….두 시간 내내 숨이 가빠 죽을 뻔했어, 하하.”
창희 씨가 그 군복 차림으로 ‘북 치고 장구 치는 30분짜리 영상’ 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게 손자 둘을 어리둥절하게 하고도 남았다. 종각 역 뒤의 평양 모란관에서 그가 자신의 저서 출판 기념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 간 것이다. 소설가협회 편집국장이 한마디 거든 게 고작 이거였으니….오늘 이 북 콘서트는 모든 걸 저자에게 맡기겠습니다.
과연 요절복통할 행사였다. ‘저자 소개’는 책날개를 참고로 하라며 생략했고, 애국가 선창도 자신이 맡았는가 하면, 지휘까지 그의 몫이었다. 무대에 아무도 올라가지 않게 하겠다고 선언까지 했던 터, 군복을 입은 그가 단하에서 지휘봉을 휘두르는 진풍경도 그래서 연출되었다. 이어서 그가 던진 이 한마디는 그의 말마따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도 남으리라.
“타관에 올라온 지 수년이 지났습니다만 아직 저는 ‘내빈 소개’ 때, 제 이름이 불린 적이 없었습니다. 내빈이라면, 올 ‘내(來)’에 손님 ‘빈(賓)’ 아닙니까? 다시 말해 저 외의 모든 분은 내빈이신 겁니다. 오늘 일찍이 어느 누구도 듣도 보도 못 한 내빈 소개를 함으로써, ‘차별 대우’를 깨뜨려 보겠습니다.”
그러고선 그는 130여 명의 각계각층 인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어서십시오!
곧 ‘차렷, 경례!’라는 구령(?)으로 그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순서’ 하나를 송두리째 없애버렸다. 내빈들은 혀를 내둘렀다. 문단의 거목들이 여남은 명이 와 있었던 터, 설마하니 그런 전대미문(?)에 가까운 파격이 펼쳐지리라곤 전혀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거기 참석한 대여섯 명의 상당수의 탈북 인사(소설가 셋 포함)들로부터의 후일담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대한민국에 와서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광경을 보았습니다!
옥의 티 하나. ‘무대 위에 아무도 못 올라간다’고 앞서 공언한 게 거짓이 되어 버렸으니 하는 말이다, 예외가 있었던 거다. 쟈니리, 그와 쌍벽을 이루던 고(故) 정원의 ‘허무한 마음’이 충동질을 해서였다. 그래 창희 씨가 그만 식언하고 말았으니….그가 쟈니 리를 부추겨 지난번 콘서트 때처럼 슬그머니 연출한 것.
“형님, 우리 둘이 올라가십시다. 어차피 오늘 주인공은 형님과 접니다.”
쟈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쟈니리가 창희 씨에게 2절은 아예 독창을 하도록 양보한 것도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대신 그는 창희 씨에게서 마이크를 넘겨받아 My Way를 절창함으로써 분위기를 돋우어 나갔다. 쟈니리의 콘서트? 뭐 그 타이틀도 어울렸으리라. 끝자락에 26사단 주임원사와 1사단 어느 중대장이 장병들과 군가 몇 곡을 제창하게 함으로써 애초의 약속을 어긴 걸 창희 씨는 사과를 했다.
두 손자를 옆에 앉힌 창희 씨의 계속되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몇 년 전 성균관 대학교 수원 캠퍼스에서 <실버넷뉴스> 기자 송년회가 열렸더라는 것. 장기 자랑 순서에서 자신이 레이 찰스 흉내를 냈다. 예비역 중령인 어느 동료가 I Can’t Stop loving You 영상을 나름대로 멋지게 만들었고. 근데 그게 없어졌지 없어졌으니 이만저만 실망이 아니라는 것. 채명신 장군 묘역 근처에서의 ‘전선야곡’과 ‘비목’, ‘현충일 노래’ 등도….
“온갖 고생을 하며 만든 건데 일이 이렇게 되다 보니 안타깝구나. 어쩌지?”
“코로나가 물러가면 우리 가족이 다 같이 현충원에 가면 안 될까요? 간이 앰프도 아빠가 하나 갖다 놓았고, 이번에 사신 할아버지 스마트폰이 워낙 기능이 좋아 영상도 멋지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I Can’t Stop Loving You도 현충원의 호국영령이나 전몰장병의 넋을 기리는 데 괜찮을 듯하거든요. 사랑을 멈출 수 없어요!”
큰손자의 말을 듣고 창희 노인은 중얼거렸다.
“딴은 괜찮은 해석이로군. 녀석이 많이 자랐어.”
하지만 내상(內傷)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케이블 방송에서 가요 및 가곡 200곡 녹화 중’이라고까지 명함에까지 인쇄해 다닐 정도로 극성을 부리면서 방송국에 드나들었는데, 반의반도 못 찾은 거다. 창희 씨 자신이 짐작컨대 영상으로 선 보인 가요만 1백곡은 넘었으리라. 특히 그의 또 다른 형님 김상국 가수의 ‘불나비’도 거기 포함된다. 소천한 뒤에 친구 사이가 됐었던 박상규의 ‘조약돌’도 마찬가지. 물론 다시 시도하면 불가하지는 않지만, 방송국까지의 교통비와 점심 식대, 노래 한 곡에 1만 5천 원을 지불해야 하는 녹화 비용도 만만찮다.
모두가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창희 씨는 잘 안다. 그는 장탄식을 내뱉는다. 그 모두를 컴퓨터에 입력시켜 놓았더라면, 이런 불행한 사태로부터 자유로웠을 것을, 쯧쯧. 사진 편집 등 컴퓨터 다루는 기술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근본 이유임을 자신도 안다. 그로 말미암은 불이익은 고스란히 자신이 떠안고 있다. 그래서 이번엔 야무진 결심을 했으니, 미심쩍지만 그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으리라. 몇 번이나 큰소리쳤으니까. 이참에 사진이나 동영상을 마스터하겠다! 그는 기자 수첩에다가 그 말을 옮겨 적기도 했다.
두서너 시간이 흘렀지만, 셋의 대화는 이어졌다.
“할아버지, 여태껏 녹화한 동영상이 모두 몇 개나 될까요?”
“글쎄다. 5백 곡 가까울걸? 근데 없어진 게 상당수니, 생각할수록 아쉽구나.”
“할아버지는 대단하세요. 5백곡이라면 기네스북에도 오를 만하겠어요. 한 곡에 1만 5천 원씩이라 해도 7백5십 만원 아니예요?”
“얘들아, 그렇지 않지. 유튜브 영상을 1천 개 가까이 올린 아마추어 가수도 있더라. 대신 아무리 그래 봐야 그 조회 수가 1천회를 넘기는 경우는 드물단다. 만약에 말이다. 조회수가 들쑥날쑥한 경우의 기록에 할아버지가 오를수도 있을지 모르지.”
“무슨 뜻이에요? 할아버지.”
“쉽게 설명하마. 내 유튜브 영상 중 최하 조회 수로 나를 겸연쩍게 만든 건, 아이러니하게도 ‘뜨거운 안녕’이야, 그 유명한 쟈니리의 히트곡. 그와 내가 두 번이나 무대에서 열창한 이 영상 봐. 단 12회야. 군복까지 입었었는데…. 까닭은 모르겠어. 그런가 하면 국방 TV ‘우리는 전우’가 20,000을 돌파했단 말이야. 내 영상 조회 수를 꺾은선그래프로 나타내면 그야말로 부침(浮沈) 즉 오르내림이 심할 거야. 이해되니?”
물 한모금을 마신 그가 다시 입을 연다.
“애국가 독창, 아니 선창이란 말이 맞지. 하여튼 그건 중간쯤 가겠지. 애국가는 박자 음정 발성 가창력 등 모두가 어우러진 하나의 결정체야. 내가 보기에 재작년 동계 올림픽 때 장사익이 부른 애국가, 그게 정답이야. 내 애국가 선창은 그 옛날 중계를 한 XTM에서 내보냈는데, 장사익과 내가 어금버금하다는 평가를 받는단다.”
마침 조금 전에 시장에 갔다 돌아온 둘의 할머니가 거들었다.
“할아버지의 열정이 기네스북 감이야. 공식행사에서 애국가 선창을 가장 많이 한 인사(人士)로 기록되실지 모른다는 뜻이란다. 할아버지는 늘 군인 냄새를 풍기셨어. 완전 군복 차림이든지, 군모만 썼든지….하다못해 군번줄과 군번 인식표를 목에 걸든지 했으니까.”
큰손자가 말했다.
“두 분 말씀대로 250 개 영상을 조회 수별로 그래프로 그린다면 굉장하겠는데요. 12회에서부터 시작하여 몇 십 몇 회, 몇 백 몇 십 몇 회, 몇 천 몇 백 몇 십 몇 회, 1만 몇 천 몇 백 몇 십 몇 회를 거쳐 마침내 20,150회! 그 그래프로 나타낸다면 참 장관이겠습니다. 하하. 할아버지는 자신의 유튜브 노래 영상 조회수에 굉장한 관심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쓰신 기사의 조회 수도 체크하신다고 할머니가 그러시던데요. 무슨 까닭이 있으세요?”
“그렇다마다. 내 여생의 모든 초점은 군부대나 장병 사랑에 맞춰져 있거든. 신문 기사 취재원도 전역한 노병들이 대부분이란다. 얼마 전 돌아가신 백선엽 장군보다 몇 달 먼저 태어난 장경석 장군의 근래 모습도 내가 소개했지.”
녀석들이 화들짝 놀랐지만 소릴 내지는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시 할머니가 거들었다. 너희 할아버지 고집은 너희들도 알지 않니? ‘비목’이라는 가곡 알지? 작사가 한명희 선생이 생존해 계신단다. 며칠 뒤 그분 앞에서 직접 할아버지가 ‘비목’을 독창하시기로 했단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지. 엄정행도 조수미도 박인수도 그런 엄두를 내지 못했어. 왜냐면 그들은 군과 깊은 관련이 없기 때문이야.
손자 둘은 말문을 열지 못했다. 창희 노인은 손자들에게 남양주시 시인협회 명예회장이자 한국전쟁문학회 회장인 홍중기 원로 탤런트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번 일에 다리를 놓은 주인공인데, 녀석 둘도 아는 안면을 익힌 지 오래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수시로 시청하는 ‘전원일기’에서 그분이 자주 얼굴을 내밀기 때문이다.
여기서 차라리 두어 달 전 꿈속에서 창희 씨가돌아가신 그의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한 번 소개해 보자. 이런 정황은 가끔은 펼쳐지는 것,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되레 이상하다.
“아버지, 소자 불효만 저지르며 살아왔습니다.”
“말은 바르게 하는구나. 넌 어찌 나와 네 어미 속을 그렇게나 태웠느냐? 쯧쯧. 그래도 일흔을 넘기고 몇 년이 지났네. 우리 둘보다 네가 각기 열여섯 해, 열두 해 더 살았다는 것만은 효도니라, 이놈아. 이런 말을 하는 난들 왜 가슴이 아프지 않겠느냐? 소리꾼이 아니라 딴따라로 늘그막을 장식하다니, 쯧쯧. 그래도 네가 소설을 쓴다니 그건 대견하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딴따라라고 해서 무조건 폄훼하셔도 안 된다는 말씀 드립니다. 저는 오케스트라와 가곡 협연을 하는 성악가이기도 합니다. 저는 소설을 쓰는 이른바 작가로 문단 말석에 앉아 있기도 하니 그 둘을 접목시키는데 혼신의 힘을 쏟을 계획입니다. 제가 군대에 가서 정신 좀 차리고 오라고 하신 분도 아버지십니다.”
“허, 저런 고얀 놈 좀 보게. 입은 여전히 살아갖고…. 어쨌든 너는 문중 일에 게을렀다. 오히려 훼방만 놓은 게 너였다. 네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무렵이었지. 보첩 즉 족보 만드느라 아비가 붓으로 초안을 잡아 둔 문종이(한지) 가져다가 네가 제기를 만들었지 않니? 낙향하여 모처럼 큰일을 맡았었는데….문중이 발칵 뒤집혔었지. 크고 작은 그런 사고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버지,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여기서 창희 씨 집안 내력을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다.
창희의 부모는 1915년생으로 갑장이다. 대신 아버지는 일찍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다가 밀양놈잠학교를 졸업하고, 관공서에서 일했었다. 그러면서 가끔 종중 일을 보러 서울을 오르내렸는데, 경기도 남양주읍 조안리의 정 씨 문중 규수와 혼담이 오갔더란다. 그런데 규수가 한쪽이 심한 시각장애인이어서 부부의 연으로까지 이어지는 데까지는 고생이 많았다.
사십대 중반이 좀 넘었을 무렵 낙향을 했다. 그때까지 슬하에 자식이 없다가 결혼 10년이 넘어서 어머니가 회임을 했다. 하지만 열 달이 지나 어머니는 그만 사산(死産)을 하고 만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어머니의 시력은 더욱 나빠지고 말아, 사람은 목소리나 체취를 통해 겨우 분간했다.
하늘의 도우심인지 어머니는 2년이 지난 후 다시 아기를 가져서 낳았다. 창희였다. 두 분이 미혹에 가까운 나이에 첫아들을 보았으니, 그야말로 두 분의 기쁨은 컸다. 하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그 자식을 애지중지 길렀다. 그러다 보니 창희는 젖 뗄 무렵부터 고집이 세고, 버릇없는 아이가 될 수밖에. 이 세상에서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자랐던 탓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특히 삼종형(7촌)과의 사이가 세월이 흐를수록 왠지 안 좋아져서 탈이었다. 누구의 잘못이 큰지 모르지만 둘은 물과 기름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창희가 양평공 할아버지(휘자 철견/무과에 급제하여, 형조 ‧호조 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지냄)의 追遠齋(재실) 일에 소홀했다는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걸 창희에게 뒤집어씌우는 건 얼토당토않다. 삼종형은 글자를 겨우 익히는 처지에 모든 걸 자기 고집대로 했으니까.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비난을 받을지 모르지만, 방송대라도 졸업한 창희가 그런 종형을 은연중에 얕잡아봤을 수밖에. 삼종형이 조금만 마음을 열었어도 창희 씨가 재실 향사(享祀) 등 종중 일에 보다 신경과 정성을 쏟았으리라.
그런 창희 씨는 요즈음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전이 각일각으로 다가오는 심경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지난 70여 년의 세월을 한꺼번에 정리하는 지대한 의미의 업무를 맡은 것이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유일 하게 종친들이 모여 만드는 <표암문학>의 주간(主幹)이라는 중책이 그에게 떨어졌으니…. 종친 중 호사가들이 왜 없겠는가? 그들은 만나서나 전화로 혹은 단체 카톡방을 이용해서 이렇게 입을 모아 말한다.
“경주 이씨뿐만 아니라 분족된 일곱 개 종친들도 참여하는 문학회 회원들의 역량 총화(總和)이니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거요. 경주를 비롯해 합천(陜川) ‧ 차성(車城) ‧우계(羽溪)‧ 원주(原州)‧ 아산(牙山)‧ 재령(載寧) ‧ 진주(晉州) ‧ 장수(長水) 이 씨 문중의 문인들이 모두 참여하는 터, 때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소명 의식도 가져야 할듯하오. 부디 열정을 다해 책을 만드는 데 기여하도록 하오. ”
이를 공적(公的)인 성격으로 규정짓고 창희 씨는 혼신의 힘을 쏟을 건 보나마나. 나아가 동전의 양면처럼 사사로운 지난 삶을 용서받을 수 있는 계기로 삼는다는 각오가 그의 가슴에서 물결치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앞서 들먹인 바와 같이 그는 8월 말까지 한명의 선생의 문화원으로 가서 그가 작사한 ‘비목’을 독창한다. 코로나도 그 발길을 막을 수 없으리라. 끝나면 군복 차림에 잠시 군모를 벗은 짧은 머리의 노병으로 선언(?)을 할 생각이다.
“내 가족들은 내가 죽거든 이 군복을 수의(壽衣)로 입히기 바란다, 이는 꼭 지키도록 하렴.”
녹음 유언은 유서보다 더 유효하다. 하물며 수많은 사람들이 시청하는 유튜브 동영상임에랴!
그리고 남양주에 간 김에 ‘전원 일기’, 그 대하드라마의 무대가 된 곳곳을 둘러보는 것도 뜻이 있고말고. 70 평생을 살아오면서 일곱 살 때 한 번밖에 가보지 않은 외갓집 흔적이 있는지 답사를 통해 알아보겠다는 게 또 하나의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설렘이다.
거기서 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 어머니와 떼려야 뗄 수 없고, 당신이 생전 그렇게 좋아하던 ‘한강’. 29년생 심연옥이 47년에 부른 노래다. 친정 조안리가 한강 유역에 있어 그러려니 싶었지만, 당시에 당신은 그 노래를 정말 애창했다. 향사를 모시고 난 뒤 일가들이 모여 잔치를 벌였는데, 당신은 어두운 눈으로 ‘한강’을 입에 올렸던 거다. 때론 춤사위까지 곁들여서….
창희 씨의 진정한 건곤일척은 <표암문학>이 고고의 성을 내고 난 뒤 몇 시간 안에 참모습으로 나타나리라. 출판 기념회가 종친회 사무실에서 열릴 게 뻔한 노릇, 그 자리에서 결코 딴따라라는 소릴 듣지 않을 가곡을 하나 택해 부른다 치자. 아버지의 만족해하는 모습이 떠오를 테니, 그동안의 불효며 경주 후인으로서의 잘못을 상쇄시키는 계기로도 삼을 수 있으리라.
2차로까지 이어지면 그는 ‘한강’은 ‘한강(漢江)이 아니고 ’한강(恨江)‘임을 종친들에게 설명하고-물론 자기 해석이지만-종친들 앞에서 열창하고 싶은 것이다. 한 많은 강가에 늘어진 버들가지는 /어젯밤 이슬비에 목메어 우는구나/ 떠나간 그 옛 임은 언제나 오나/ 기나긴 한강 줄기 끊임없이 흐른다//흐르는 한강물 한 없이 흐르건마는/ 목메인 물소리는 오늘도 우는구나/ 가슴에 쌓인 한을 그 누가 아나/ 구백리 변두리를 쉼 없이 흐른다.
귀가하는 길에 이웃 양주시 백석읍에 들러 자기를 3년 가까이 품어 주었던 26사단 기념관에 들러 보는 계획도 갖고 있으니, 그 또한 백미(白眉)이라 하지 않고 어찌 배기랴. *
원고지 88장
이원우 약력
• 42 밀양 출생- 부산명덕초등학교장 정년퇴임 • 전 덕성토요노인대학장(21년간 매주 토요 오후 수업) • <지우문예><수필문학(김승우 발행)><한국수필> 추천 • <한글문학> 소설 신인상 • 현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 한국문인협회 문인복지위원 • 대한가수협회 회원 •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 • 한국전쟁문학회 자문위원 • <표암문학> 자문위원 겸 주간 • 경기PEN운영위원 • <문학과 비평> 운영이사/ 저서 소설집 <거기 나그네 방황 끝나는 곳> 외 4권 • 수필집 <죽어서 개가 될지라도> 등 15권 • 논픽션 등 4권(총 개인 저서23권)/ KNN문화대상 • 화쟁포럼 문화대상 • 한국수필 ‘청향문학상’ • 허균문학상 • 경기PEN문학대상 • 부산수필 대상 • <문예시대> 문학대상 • 부산가톨릭문학상 • 부산북구문학상 • 자랑스러운 부산시민상(봉사 본상) • 자랑스러운 부산 교대인상 • 부산교육상 • 황조근정훈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