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신공양
2009.6.10
1.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최후의 만찬’을 자세히 감상한 적이 있는지? 예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가 최근 ‘다빈치코드’라는 소설이 세상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나도 다시 보게 되었다. 알고 보니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아마도 수십개나 그렸던 것같다. 유럽의 제법 규모가 있는 성당에서는 더러 그 그림을 볼 수 있다. 어떤 것은 크기도 작고 다른 어떤 것은 성당벽 한 면을 차지할 만큼 큰 그림도 있다. 모두 손으로 그린 작품인 만큼 약간씩 다른 느낌과 감동이 있다. (왜 똑 같은 그림을 여러 개씩이나 그렸을까???)
예수의 임종 직전일(直前日)에 벌어진 일에 대해 비교도인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짐작에 죽음을 앞둔 스승과 제자들과의 만찬장이 숙연하고 무거운 분위기여야 함에도 놀라고 분노하고 고성이 오가는 그야말로 난장판처럼 보인다. 그림에서는 그렇다.
미술평론가와 성서학자의 설명으로는 이해가 된다. 예수가 만찬장의 열두 제자중 누군가가 자신을 팔아 넘길 것이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놀라고 당황하며 서로 언성을 높이고 분노하며 당황해 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제자중 우리에게 가장 알려진 베드로, 유다, 요한이 예수의 바로 오른 편에 있고 그들의 표정과 행동이 주목된다. 제자중 가장 나이가 많고 좌장역활을 했던 베드로는 세례요한에게 흥분하여 뭔가 얘기를 하고 있고 테이블위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있다. 반면 세례요한은 조용히 베드로의 말을 듣고 있다. 한편 가롯유다는 테이블에 두 팔을 올리고 한 손에는 돈주머니를 쥐고 있다. 한편 그외 다른 제자들은 예수의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듣고 모두 황당하며 그 자초지종을 따지고 확인하려 하고 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예수는 이미 유다가 자신을 배반하리라는 사실도 그리고 그로 인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았고 그렇지만 도망치지 않고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도 지쳐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당시의 기득권이였던 이스라엘 제사장들로부터 혁명세력으로 고발당해 여러 차례 기소를 당하기도 했지만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다. 하지만 당시 기득권의 끈질긴 공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예수의 제자들을 이간시키기에 이르러 가롯 유다를 매수한다. 그리하여 그의 거짓증거로 예수는 결국 처형당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보수 기득권의 행태는 그렇다 치더라도 제자들의 불안과 배반은 흥미롭다. 베드로는 대가족을 거느린 가장(家長)으로 그리고 무리중 다소 재산이 있었던 편이라 예수 아래서 혹은 사후에 후계자로 지목받기를 원했다. (이것으로 ‘다빈치코드’의 스토리가 전개된다.) 반면 가롯유다는 열혈청년으로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예수를 혁명대장격으로 추앙하며 따른다. 세례요한은 처음에는 예수와 동조하였지만 나중에 예수와는 정신적으로 좀 다른 차원의 세상을 꿈꾼듯하다. 그리하여 예수는 기득권의 공세뿐만 아니라 이러한 제자 혹은 동료들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서 무척이나 괴로웠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최후의 만찬’에 묘사된 예수는 인제 그 괴로움을 넘어서 차라리 죽음에 달관한 표정이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마지막 순간에 고통속에 피를 흘리며 이렇게 절규한다. “얄리 얄리 레마 사박타니……” (신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정말 인간 예수의 고통과 절규를 이해하고 싶다. 물론 기독교인들의 해석은 별개다.
예수는 당시 핍박받고 가난한 자들의 구세주였다. 기득권에게는 정적(政敵)일 뿐이였다. 예수가 나오는 성화(聖畵)의 배경을 보면 모두가 실내가 아닌 실외(室外)이다. 산이나 강가, 들판, 황야 아니면 토굴 혹은 저자거리다. 그만큼 서민들의 편에서 그들과 고통을 같이 나누며 그들의 마음을 샀던 것이다. 예수가 죽어서 슬퍼한 것도 그들이였다. 하지만 예수는 죽어서 그들의 정신과 생활 속에 부활했고 지난 이천년을 이어왔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쯤 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바로 노무현을 죽인 작금의 상황이다. 그도 이땅의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 무리를 모으고 동분서주하다 결국은 죽임을 당해야 했다. 보수기득권의 공세와 나중엔 그것으로 분열된 그의 지지자의 증언으로 무너졌다. 귀향의 기쁨도 잠시 그는 그를 버린 국민과 지지자들 그리고 동료들에 절망하며 고통스런 날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동료들도 하나씩 보수세력에 무너지고 마지막 칼끝이 그에게 다가오자 더 이상 부지가 힘든 육체를 던져 버렸다.
억지스런 유추이고 비유인가?
그렇다면 노무현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KW
2. 등신불(等身佛)
고교시절 국어교과서에 나온 김동리의 단편소설이다. 당시는 입시위주의 주입식 수업이라 그랬던지 수준이 안되서 그랬던지 별 감흥이 없었다. 이미 속세를 떠나 산중에 있었던 주인공이 왜 다시 속세의 끊을 수 없는 인연에 매여 제 몸을 불사르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세상을 사는 동안 무관심과 망각 속에서 최근 노무현의 죽음이 그 뜻을 환히 밝혀주었다.
지난주 토요일에 Wife를 따라 동네 체육관에서 벌어진 전국 인터넷배드민턴동호회대회에 구경을 간 적이 있다. Wife도 동네 클럽소속으로 열심히 운동을 하는데 일부 클럽회원과 함께 대회참가를 했다. 별 생각없이 따라간 대회였지만 의외의 발견과 깨달음이 있는 행사였다.
대회는 오전 8시부터 몇몇의 진행자와 선수가 체육관에 나와서 상호 선수이름확인하고 인사하고 바로 게임에 들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수와 관중이 늘어나고 체육관은 대회열기로 달아올랐다. 15면의 코드를 가득 메워 게임이 벌어지고 관중석에는 출전한 64개 팀의 회원들이 응원하고 번잡하고 시끌벅쩍한 여느 대회나 다름없었다. 대회 열기가 한참 달아오를 무렵 오전 11시쯤 장내 방송으로 게임이 일시 정지되고 개회식이 있었다. 인터넷 동호회 회장이 나와서 자신을 소개하고 자원봉사자로 대회진행을 하는 소개했다. 모두들 자신이 속한 클럽을 간단히 소개하기도 했다. 개회식 진행자는 협찬사로부터 상품소개와 대회진행 관련 몇가지 멘트를 했다. 그리고 서울 모초등학교의 배드민턴팀에서 어린 선수들이 나와 시범경기를 잠시 보여주었다. 개회식은 그것으로 끝이였다. 그리고 다시 15면 전체에서 동시에 경기가 이어졌다.
주체측에서는 사전에 대회진행방식을 인터넷으로 홍보했고 선수나 관계자들은 별 혼란없이 대회를 치르고 있었다. 하여 사람들은 주체측으로부터 최소한의 지시와 방송멘트를 들으며 담백하게 게임을 하며 대회를 즐길 수 있었다. 나중에 점심시간에서도 미리 예정된 식당에서 차례차례로 순서를 지키니 번잡함이 없었고 주차장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대회가 끝나고 시상식과 함께 폐회식도 그랬다. Wife는 선전하여 모두 4게임을 치르며 은메달을 획득했다. 부상으로 배드민턴백을 받아왔다. 대회관계자들이 입은 유니폼 상의에는 자그만 글씨로 “당당한 초보. 배려하는 고수”라는 슬로건이 새겨져 있었다.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내게 전해졌다.
나도 동네의 배드민턴 클럽회원으로 가끔씩 나가서 운동을 하는데 실력이 늘지 않아 거의 초보로 멈춰있다. 클럽에는 선수 못지않은 고수들이 즐비하다 보니 초보로 끼어들어가 항상 눈치가 보이고 게임을 할 수 있을까 기웃거리게 된다. 그럴 때 고수가 한수를 가르쳐 주거나 게임에 끼워주기라도 하면 참으로 고맙고 기분 좋은 날이 된다. 그러면서도 고수들의 게임을 망쳐 놓치 않았나 하는 미안함이 남는다. 아무튼 클럽에서 초보는 고수들 눈치보는 것이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클럽운영회의에서 회원들의 목소리도 그렇다. 아마 다른 모임에서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주 인터넷동호인 전국배드민턴의 슬로건은 얼마나 나 같은 초보에게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 발견인지? “당당한 초보, 배려하는 고수.” 그것이야 말로 사회의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여 모두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순간 본부석 위로 대회 플랙카드 한 가운데 세상을 떠난지 십여일 남짓한 노무현이 환히 웃고 있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가 그토록 이루려 했던 ‘사람사는 세상’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속에서 ‘등신불’ 로서 살아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진 나는 벌떡 일어서 그에게 인사했다. 고맙다고 . . . 그리고 잘 가시라고.
KW
그림 #1. (레오나르도 다빈치 원작) -- 일종의 표준작
그림 #2. (현대의 비유와 상징그림) -- 악귀 같은 제자들이 예수를 뜯어먹고 있다.
그림 #.3 (교과서에 나오는 오리지날 등신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