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미/ 권주열
가자미는 계단이 없고 밋밋한 경사로 이어진 장소다 제가 바로 그 장소인지 모를 때까지 한 장소에 오래 납작 엎드린 채 어디엔가 숨겨진 넓이가 더 있을 것 같은 불안, 불안은 방금 헤엄쳐 온 물결과 희뿌옇게 덮어쓴 기억이 접촉된 모든 면적이다 흙먼지조차 눈에 띌까 가만가만, 두 개의 눈알을 한 평면 위에 슬며시 붙여 놓고 마침내 장소는 체포된다
도마 위에 올려진 가자미의 곡면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어시장 뒷골목과 그 너머 백사장을 한참 더 따라나서야 도달할 수 있거나 어쩌면 끝내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
번득이는 칼날이 가자미를 가지런히 해체한다
어떤 장소는 장소 뒤에 남은 공허의 둘레를 포함하고 있다
곡률의 부호 / 권주열
민달팽이를 보았다.
마당 저쪽에서부터 느릿느릿 오고 있었다.
외출했다가 한나절이 지나 돌아왔을 때, 아직도 마당을 다 지나지 못한 달팽이를 보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만약 그가 동네 한 바퀴를 다 돌려면 내가 환갑이 지나고 칠순은 넘어야겠지. 그런데 살짝 다른 생각도 든다.
그가 동네 한 바퀴를 잠시 도는 시간에 다시 만난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게 아닐까. 아까까지도 멀쩡하던 양반이 왜이리 퍼석 늙어버렸......
같은 공간에 담긴 시간을 너무 많이 써 버리는 종種들이 있다.
일분일초도 한 공간에 놓아두지 못한다. 미친 듯이 소모한다.
그가 이제 겨우 한 장소를 쓰는 동안 어떤개체個體는 더 담을 장소가 없다.
끈적한 몸통 위로 수축된 시간을 펴느라 하품 한 번 하고 기지개도 켜고
가까스로 보행을 시작하려는데,
그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부인과 마당에 들어서고 있다.
내가 한나절 마당에 어슬렁거리는 동안
또 그 양반이다, 마당 저쪽에서 손주를 안고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