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 3: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조선일보 20180918 신문에는 “사방에서 퇴짜 맞는 차이나머니 ‘기업 사냥’”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중국 자본 퇴짜 현상’이다. 안보를 이유로, 세계 각국에서 중국에 기업 파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이 돈으로 세계 각국의 기술을 빼돌리고 있다는 경고였다. 스위스, 미국, 독일, 일본 등, 세계 모든 나라가 중국의 기업 사냥의 희생양이었다. 물론 그 안에는 우리나라도 포함되었다. 금융, 첨단기술, 보건의료, 화장품, 문화오락 분야이다. 돈을 주고 기업을 사들여서, 수십 년간의 노력으로 일군 기술을 빼앗는 것이다. 최근에는 중국이 아프리카에 600만 달러를 지원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갚을 능력이 없다면, 굳이 돈을 받지 않겠다는 조건도 제시했다. 중국의 힘이 날로 강해지면서, 국경을 잇대고 있는 우리나라는 불안하다. 우리에게 유쾌한 일이 아닌 것은 맞다.
중국에는 현대차와 기아차가 아주 많다. 과거에는 저렴하면서도 쓸모 있는 차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두 회사의 차가 전혀 팔리지를 않는다. 회사에서도 판매 자체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사드((THAAD) 영향이다. 제주도에 여행 왔던 자국민들에게 입국 불허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사드로 인한 피해액은 8조5천억 원에 이른다는 추정치가 나왔다.
중국의 그리스도인은 강하다.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전할 확신에 차 있다. 그들은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며 복음을 전한다. 우리나라에서 선교사 한 명을 파송하려면 어마어마한 재정이 필요하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어떤 곳에서도 버틸 수 있고, 어디든지 선교하러 갈 수 있는 힘이 있다.
중국의 그리스도인은 1억 명이 넘는다. 하나님의 나라의 측면에서 본다면, 중국은 강대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중국의 위정자들은 그 힘을 세계 열강에 뻗고 있다. 아프리카는 중국의 뒷마당, 놀이터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그 동안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하나는 중국의 힘이 매우 약했다는 것도 작용한다.
지금 중국 내의 종교 탄압은 사상 최악이다. 수십 명의 선교사들이 무더기로 추방된다. 중국교회는 정부에서 인정한 공식교회인 ‘삼자교회’와 미등록 교회인 ‘가정교회’로 나눠진다. 현재 정부의 핍박은 가정교회 뿐 아니라, 삼자교회에 대해서도 가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 저장성의 약 90%의 교회 십자가가 강제 철거 또는 파괴됐으며, 수십 명의 목회자가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십자가가 있던 자리에는 시진핑의 초상화가 내걸린다. 또 수많은 가정교회가 강압 때문에 문을 닫게 됐으며, 교회 재산은 국가에 전부 몰수됐다.
우리나라가 마치 北이스라엘과도 같다. 여로보암 2세 때는 北이스라엘의 영토가 거의 회복되었다. 아람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앗수르에 국내외적인 위기가 찾아와, 그 틈에 北이스라엘이 강하게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때 앗수르가 강대해지면, 그것은 곧 北이스라엘의 위기로 직결된다.
열 명의 정탐꾼은 가나안을 도저히 정복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판단은 정확하다. 거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그 땅을 이스라엘이 정복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시각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 열 명의 정탐꾼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었다.
요나의 판단도 정확하다. 앗수르 때문에 北이스라엘의 힘이 약해지고 있으며, 앗수르가 점점 힘이 강해진다면 결국에는 北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 없는 생각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시각이다. 물론 北이스라엘의 멸망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한 결과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이 말은 이렇게도 바꿀 수 있다. 앗수르가 강성하지 않았어도, 北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면 자신의 죄로 인해 스스로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강대함이 우리나라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죄악 가운데서 헤매고 있는 한, 앗수르처럼 왕을 포함하여 짐승들까지 회개하였던 그 회개가 없는 한, 우리나라는 스스로의 죄악의 올무에 넘어지고 말 것이다. 누구 때문이 아니다. 우리, 나의 죄 때문이다.
어느 날, 사모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 날, 은진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별다른 준비도 한 적이 없는데,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되기 위해선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집을 장만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건강한 父性을 준비해야 한다. 몰랐다. 그래서 실수를 참 많이 했다. 너무 서툴렀다. 나의 엄격함이 무의미했고, 나의 지식이 크게 도움 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자녀들이 잘 자라주었다. 걱정시킨 적 없다. 힘써서 무엇을 해준 적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무탈하게 잘 자라주었다.
어떤 사람도 온전하지 않다. 궁궐 같은 집, 박사 학위의 부모, 할아버지의 경제력, 아버지의 무관심, 어머니의 정보력이 있다고 해서, 자녀가 잘 자라줄까?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악마로 자랄 수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다윗이나 야베스 같은 사람으로 자랄 수도 있다. 똑같은 알코올 중독의 아버지를 두었지만, 한 사람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한 사람은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그 사람의 마인드에 달렸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다. 그때마다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했다. 공포에 떨며 자란 아들은 아버지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같은 집에 살지만, 아버지와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성인이 된 후,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도 늘 술에 찌들려 살고 있고, 가정 폭력을 일삼는다. 그렇게 싫어하던 아버지의 삶을 자기가 살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까? 누구 때문이 아니다. 회개하지 못하는 나 때문이다. 자기 안의 분노가 자신을 죽이기 때문이다.
꿈쟁이 요셉이 형들로부터 인신매매를 당하였다. 살면서 이것보다 큰 상처가 있겠는가? 꿈쟁이 요셉보다 더 불행한 인생이 또 있을까? 그의 영혼은 상처로 얼룩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평생 복수의 칼날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랬을까? 아니다. 꿈쟁이 요셉은 점점 암울해져 가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서 있는 장소를 ‘학교’로 받아들였다. 보디발의 집에선 가정 살림하는 법을, 감옥에서는 나라 살림하는 법을 배웠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함을 인정하였다. 그랬더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어느 순간, 꿈쟁이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었다. 우연히?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것이 요나와의 차이점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을 따라가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려야 했다. 철저히 자신의 생각, 감정, 판단을 내려놓아야 했다. 자기 부인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 감정, 판단에 사로잡혔다. 앗수르는 번영하면 안 된단다. 그것은 곧 北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서 벗어날 줄을 몰랐다.
물론 더 좋은 부모를 만났으면 다른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다. 부모 입장에서도, 다른 자녀를 낳았다면 다른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 지금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배우자였어야 했을 수도 있다. 상대편 배우자도 역시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안 되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 늘 다른 사람의 탓을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만 만나지 않았으면, 그때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갔었으면…….
내 생각, 내 감정, 내 판단을 신뢰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한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아야 한다. “지금 잘 되고 있다.” 앗수르는 앗수르일 뿐이다. 北이스라엘은 北이스라엘일 뿐이다. 나는 나일 뿐이다.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나는 나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신앙의 결국은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다.
“①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②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③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1~3)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첫 번째 시작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의 시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를 원하셨다. 내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 복을 베푸는 자가 되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④‘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⑤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⑥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4~6)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은 다 같은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나를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려 하신다. 당연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축복의 통로가 되어, 복이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나를 통해 세상의 끝까지, 모든 민족이 복을 받기를 원하신다.
요나는 앗수르가 번영하는 것이 싫다. 요나에게는 ‘땅 끝’이 곧 앗수르이다. 요나는 ‘땅 끝’에서, 앗수르에서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이 싫단다.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할 사람이 ‘축복의 종착지’가 되겠단다. 자기 세상에서 도무지 벗어날 생각이 없단다. 이것이 요나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교회가 타락하는 이유가 있다.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하는데, 교회 건축이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예수쟁이로서 빛과 소금의 사명이 되어 살아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는다. 그러니 교회가 타락할 수밖에 없다. 직장이 ‘땅 끝’이다. 학교가 ‘땅 끝’이다. 가정이 ‘땅 끝’이다. 내 원수가 ‘땅 끝’이다. 그곳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득해지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2013년 평창 동계 스페셜 올림픽 개막식에서 애국가를 부른 청년이 화제였다. 박모세는 두개골 기형으로, 뒤쪽 머리뼈가 없어서, 뇌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병원에서도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몇 차례의 큰 수술을 통해 뇌의 90%를 잘라내었다. 숨은 쉬지만, 보고 듣고 말하고 걷는 것을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던 모세가 5살이 되자 말문이 트였다. 7살 때는 찬송가를 불렀다. 나중에는 마치 성악가처럼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올림픽 개막식에 초대 받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기도했을 수도 있다. “왜 나의 아들에게 이런 아픔을 주셨습니까?”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 변할 가능성은 없다. 어머니는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졌다. 질문이 좋으면 대답이 좋다. 훌륭한 기도는 훌륭한 역사를 낳는다. 모세가 그렇게 된 이유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축복의 통로로 삼으셨다. 하나님의 영광이 흘러가게 하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던 그 자리에, 솔로몬은 성전을 세웠다. 그리고 천 년이 흐른 후, 그 자리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섰다. 내 생각이 죽은 자리에, 십자가가 세워졌다. 아브라함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이렇게 행하시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해를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순종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를 배웠다.
찬양 : 주가 일하시네
Q)
1. ‘축복의 통로’ 뜻이 무엇일까요?
2. 나는 ‘축복의 통로’와 ‘축복의 종착지’ 중 어느 것인가요?
3. 나의 ‘땅 끝’은 어디인가요?
4.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요?
A)
내가 서 있는 곳, 혹은 가야만 하는 그곳이 ‘땅 끝’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해야만 한다.
그 일을 위해 내가 부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