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인이 되기 딱 좋은 계절.
4월에서 5월로 흐르는 시간과 풍경은 모두 자연에 맞춰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초록빛은 지쳐있던 몸의 세포를 깨우기도,
흐리던 두 눈에 신선한 바람이 닿으면
몸에 걸쳐진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풍욕이라도 하고싶어 진다.
풍욕.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옷을 벗은 다음,
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들췄다 하며 바람을 일으켜 피부를 자극하는 일.
피부에 닿는 산소가 가득 담긴 신선한 바람이
눅눅한 몸을 깨우면,
마치 자연과 동화된듯한 기분이 느껴지곤 한다.
이처럼 풍욕과 잘 어울리는 곳,
계룡산 자락에 어느 허름하지만 자연과 맞닿아 운치가 가득한 집.
나는 운이 좋게도 그 곳으로 초대받게 되어
1박 2일 '나는 자연인이다'를 몸소 겪어보기로 마음 먹는다.
지인이 별장처럼 사용하는 곳이라 위치를 밝힐 수 없는 이 곳은
계룡산 중턱의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오르는 길은 어느 지점부터는 계속 비포장 도로로 이어질만큼 험하다.
이 곳은 기도원이 많은 곳으로 차량이 드나들 수 있지만
문제는 좁은 도로폭이라 내려오는 차가 있으면 골치아픈 일이 생길수도 있다는 것.
나는 다행이 한번에 도착했다. 확실히 운이 좋았다.
도착한 이 곳엔 물고기 모양의 딸랑거리는 풍경이
바람소리와 어우러져 묘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정말, 생각했던 대로 '나는 자연인이다' 티비 프로그램에 나올법한
장작을 패서 불을 떼고, 전기도 겨우 들어올까 말까한 그런 상태.
이 곳에서 무슨일을 해도 모르겠구나, 싶을 정도로 주변에는 인가가 드물었다.
그러나 주변 자연만큼은 기가막히게 아름답다.
오월이 다가오는 자연의 힘있는 푸른 색과 파란 하늘이 어우러져
마치 환상적인 '달력 사진'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또한 흐드러진 자연 가운데 다이닝 룸이 마련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입이 떡 벌어진다.
벌써부터 이 곳에서 구워먹는 고기맛이 기대...아니
이런 곳에서 하루를 묵는다니, 벌써부터 설렌다.
이 곳에는 불쏘시개로 쓸 마른 장작들이 마련돼 있다.
아직은 힘이 남아도는건지 옆에 있는 도끼로 마른 장작을 한번 힘껏 패본다.
"타칵..."
세상에, 힘이라면 뒤지지 않는 나지만
나름 힘껏 내리친 도끼 아래 나무는 생채기가 조금 난 정도다.
장작을 팬다는 일,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자연인이 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구나...
힘도 썼겠다, 밥을 먹기 전에 한번 휘- 주변을 한바퀴 돌아본다.
영험하다 일컬어지는 계룡산답게, 주변에는 기도원이 많이 포진되어 있다.
기도를 하며 쌓아올린 돌탑들이 무척 경이롭다.
산책길 주변에는 삼지창 같이 생긴 나무도 있다.
역시 영험함이 흐르는 계룡산에서 자라난 나무답다.
나무조차 도사처럼 생긴게, 어디서 쉽게 볼 수 없는 형태다.
산책을 하다 흐르는 계곡 사이 바위에 앉아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저 위에는 딱따구리의 "따라라라라라다다다따딱"하는 소리가,
저 아래엔 종달새같이 달콤하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왼쪽에는 멧다람쥐가 낯선 사람이 싫은지
쪼로록 달려가고,
오른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숲을 헤쳐가는 묵직한 들짐승 소리가 섞인다.
졸졸졸 흐르는 계곡물에 손을 담구니 꽤 차갑다.
손에 슬쩍 걸리는 동글동글한 것을 꺼내니, 놀랍게도 다슬기다.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에 산다고 하는 다슬기.
나도 강원도의 이름없는 계곡에서나 봤던 민물 다슬기인데
이곳에서 만나니 새삼 반갑다.
라면에 넣어먹으려 좀 잡아볼까 마음 먹다가
아서라, 손사래를 치며 발길을 돌린다.
어둑어둑, 벌써 해가 지고.
눈부신 4월의 햇살이 들이닥치던 이 곳에 푸른 밤거미가 내려앉는다.
그렇다. 어둠이 내리는 이 타이밍,
확실히 고기먹을 타임이다.
미리 달궈둔 숯으로 살짝 불멍을 하다가
그릴에 미리 사온 소고기며 돼지고기를 순서대로 올린다.
모두들 인정할테지만,
숯으로 구운 고기가 가장 맛있다.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숯으로 구운 고기를 입에 넣으면,
마치 고기와 내 혀가 하나가 되는 경이로운 경험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맛있다는 뜻.
밖에서 고기를 굽다보면 시간이 지나는지도 모르는채
계속 입 속에 넣게 된다.
이건 마치 자연이 시전하는 주문처럼,
위장의 용량이 늘어나는 마법을 느낄 수 있다.
든든히 배를 채운 다음, 따끈하게 데워진 황토방에서 잠을 청한다.
외부에서 밥을 먹고 나무를 떼서 뜨끈해진 황토방에서 자는 잠이라니,
정말 이만한 자연인 체험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이대로 잠드는게 아까워
어둠이 확실히 내려앉은 밖으로 한번 더 발길을 옮긴다.
별이 총총 뜬 밤하늘에 하현달이 청명하다.
멀리서 소쩍새가 빈 하늘을 채운다.
뭔가 시라도 읊으면 희대의 명작이 탄생할 것 같은 풍경이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
최근 일에 찌들어 힘들었던 내 모습을 내려놓고
싸늘해진만큼 더 신선해진 밤공기와
초연하게 눈부신 밤 풍경에
그간 지쳤던 내 몸을 맡긴다.
어김없이 다시 아침은 오고.
일찍 깨려 했으나 실패.
밤새 뜨끈뜨끈한 바닥에서 지졌더니
아팠던 근육통도 싹 다 나은 기분이다.
8시쯤 밖에 나와 짹짹대는 아침 새소리와 함께
신선한 공기를 코 속으로 들이마시고
어제 쟁여뒀던 햄을 팬에 올려 굽는다.
확실히 완벽한 아침이란, 먹을 것과 함께여야 한다.
뜨겁게 내린 커피 한잔과 쇠젓가락에 꽂은 햄 두 장.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지는 계룡산의 풍경과
브레지어를 하지 않아도, 머리를 감지 않아도 아무도 모를, 피부에 닿는 풍욕까지.
실로 완벽한 아침이다.
사실 이 곳은 지인의 별장이라
얼리 체크아웃 이런것은 없지만
너무 몸을 부비다 보면 민폐를 끼치기 마련.
그래도 그냥 돌아가기가 아쉬워 주변으로 아침산보를 한다.
커다란 키를 자랑하는 소나무 사이로 푸르게 이어진 나뭇잎들.
그리고 공기로 스미는 피톤치드까지.
올해 유독 빨리 피고 진, 그래서 아쉬웠던 벚꽃을 대신할
겹볒꽃까지.
꽃 잎이 밥풀처럼 생겼다해서 밥풀나무라 불리는 박태기 나무까지.
또한 쉽게 볼 수 없는 야생화인 '각시붓꽃'까지.
계룡산의 놀라운 자연의 풍광은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진다.
각시 붓꽃의 꽃말은
'존경, 그리고 신비한 사람' 이라고 한다.
문득 이 곳에서 1박 2일을 지내며 든 생각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비하고도 존경스럽다는 것.
티비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나오는 산신령들과 닮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언젠가 나도 이런 자연 속에서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또 점점 더해지는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자급자족의 상태로 '나는 자연인이다'를 홀로 찍으며 살아갔으면.
풍족한 자연의 힘을 온 몸으로 받아
건강한 삶을 스스로 마무리하게 되기를 바라며.
계룡산에서의 1박 2일을 마무리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