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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닷 컴에 李明山(마이클 리) 선생님이 북한 김씨왕조를 세운 가짜 김일성의 정체를 3 회에 걸쳐 폭로한 글을 옮겨 왔습니다.
普天堡(보천보) 전투와 가짜 金日成의 實體(上)
前 CIA 요원 마이클 리의 現代史 秘話-36/보천보 전투로 日人이 피해를 본 것은 주재소 순사(순경) 1명이 부상당하고, 주재소에서 잠자던 일본 순사의 두 살짜리 딸이 유탄에 맞아 사망한 것, 우연히 거리에 나왔던 일본인 음식점 주인이 총에 맞아 죽은 것 등을 제외하고 피해자가 모두 우리 韓人들이었다.
李明山(마이클 리) [ 2014-11-06, 17:00 ]
20세기는 우리 민족의 시련기
우리 민족은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36년 동안 고난에 시달렸고, 해방된 이후에도
공산주의 사상으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거의 1세기 동안
지구상에 돌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공산주의 사상은 그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의 문명을 파괴했고, 북한은
아직도 그 시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다. 1919년 독립만세 사건 이후 좌절과 실의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 역사의 악순환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프롤레타리아 해방’, ‘약소민족의 해방’과 같은 구호는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상당한 매력이 있었다. 1925년에 드디어 서울에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고 이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념적 구조나
이론을 이해하거나 소화하지도 못한 채 오로지 투쟁 구호와 행동방침만을 앞세우고 뛰어들었다.
불과 3년에 걸친 일본의 대대적 검거로 조선공산당은 와해가 되고 8·15광복 때까지 재건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국내에서
지하로 들어갔다. 그 주역들은 朴憲永(박헌영), 吳琪燮(오기섭), 朱寧河(주영하), 李康國(이강국), 金三龍(김삼룡), 李舟河(이주하), 李承燁(이승엽), 許成澤(허성택) 등이다. 한편, 조선공산당
滿洲總局(만주총국)에 가입했던 韓人(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의 一國一黨(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 滿洲省委員會(만주성위원회) 산하 각급 조직에 가입했고, 그 이후 만주에서는 韓人들의 독자적인 공산당
조직이 영원히 사라졌다. 국내에서는 지하에 들어갔던 공산당이 8·15광복 이후 朴憲永을 주축으로 재건됐고, 1946년 11월에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바뀌었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 우리 민족은 국내·국외에서 여러 형태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민족주의자들의 독립투쟁은 3·1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박차를 가하게 됐다. 후세에까지 그 용명을 떨친 인물로는 만주에서는 金佐鎭(김좌진) 장군, 洪範圖(홍범도) 장군, 그리고 시베리아에서는
金日成(김일성) 장군을 거론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金日成 장군은 본명이
金光瑞(김광서)이며 북한의 金日成이 아닌 별개의 인물이다.
지금부터 언급되는
김일성은 진짜 김일성인 金光瑞가 아니라 가짜 김일성이다. 북한의
김일성(본명 金聖柱)은 가짜 김일성 가운데 한 사람이다.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은 수십만의 韓人동포들을 기반으로 여러 지역에서 독립군이 활동했으나 대부분이 上海(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군대임을 표방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민족주의자들의 항일투쟁은 고난에 찬 가시밭길이었으며, 내외의 역사·정치적 여건에 따라 여러
형태의 도전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일은 1925년 전후해 중국의 韓人사회에 공산주의 운동이 침투되어 조국광복을 일념으로 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세계 공산화 또는 중국
공산화를 궁극의 목적으로 하는 공산주의 혁명 노선과의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은
만주지대에서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중국 본토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변으로 행동 무대를 옮겼으나 당시의 역사적 여건은 너무나 복잡했다. 1930년을 전후해 江西省(강서성)을 중심으로 활발해진 중국 공산당
세력은 蔣介石(장개석)이 이끄는 국민정부로 하여금 새로운 對共戰線(대공전선)을 형성하게 했고, 1931년 9월18일 일본이 滿洲事變(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땅을 강탈함으로
중국의 항일투쟁은 너무 힘에 겨웠다.
그러나 1943년 11월 카이로 선언에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영국 수상
처칠, 그리고 중국총통 장개석이 합의한 對日戰略宣言(대일전략선언)은 한반도를 자유 독립국가로 일제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약속이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한 첫 번째의 역사적 공약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장개석 총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깊은 교감, 그리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의 집요한 항일투쟁이 있었다.
민족주의자들은 해방
후 조국에 돌아와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했다. 임정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고 歐美委員部(구미위원부) 책임자였던 李承晩은 미국에서, 金九(김구), 李始榮(이시영), 金奎植(김규식), 李範奭(이범석), 李靑天(이청천), 趙素昻(조소앙), 申益熙(신익희), 金弘壹(김홍일), 崔用德(최용덕) 등 임시정부와 광복군(光復軍) 요인 수십 명이
중국에서 돌아왔다.
그들의 항일투쟁
전통과 정신이 1948년에 민주공화국으로 새로 세워진 대한민국에 계승되었으며, 인적 요소라든가 國號(국호)의 동일성뿐만 아니라 1948년 7월17일 공포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도 ‘기미년 3·1운동으로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 국가를 재건’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렇듯 선열들의 고귀한
피와 불굴의 애국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졌으며 UN이 승인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로 탄생했다.
국내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1931년 9월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 내에서는 국민정부나 중국 공산당
모두 항일 무력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1933년에는 중국공산당이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해 많은 韓人 공산주의자들이 가담했다.
1936년 동북인민혁명군은 동북항일연군으로 개칭 및 개편되었고, 第1路軍(제1로군)은 東南滿洲(동남만주)에, 第2路軍(제2로군)은 東北滿洲(동북만주)에 배치되고, 第3路軍(제3로군)은 北滿洲(북만주)를
작전지역으로 했는데 총병력은 약 2000명 정도였다.
그들에게는 엄격한
軍律(군율)이나 기강이 없었고, 중앙보급이
없었던 관계로 산림지대에 野營(야영)하면서 항일투쟁보다는 인민약탈이 더 빈번했다. 결국 인민의 敵(적)으로 전락해 1940년경에는 동북항일연군이 붕괴되어 약 300명이 蘇聯(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외에도 韓人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의 한 줄기는 중국 국민정부 관할 지역인
華北(화북)에서도 발생했는데, 延安(연안)에 있던 중국 공산당의 韓人 간부들을 중심으로 1941년 1월 조직된 華北朝鮮靑年聯合會(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 조직은 1942년 7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으로 발전했다. 조선의용군은 韓人들을 규합하고 중국공산당의 第8路軍(제8로군) 산하 각 부대에 배치되어 직접 항일투쟁에도 참가하고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들의 항일투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민족주의자들의 그것에 비해 소규모에 그쳤다.
이들을 우리는 延安派(연안파)라고 하고 연안파의 주역들은 金枓奉(김두봉), 武亭(무정), 崔昌益(최창익), 許貞淑(허정숙), 金昌滿(김창만) 등이다. 연안파의 주요 인물들은 해방 후 북한에 들어가 북한정권
수립에 동참했다. 그러나 훗날 북한의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계열의 업적을 부각하고 역사를 날조·미화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연안파, 소련파, 국내파, 갑산파를 反黨宗派(반당종파)로 몰아 모조리 숙청했다.
1953년 봄 국내파 박헌영·이승엽 등을, 같은 무렵에 소련파 허가이·박창옥 등을, 1956년 여름에는 연안파의 김두봉·최창익 등을, 그리고 1967년에는 갑산파의 박금철·이효순 등을 숙청했다.
동북항일연군과 보천보전투
1936년 중국 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은 동북항일연군으로 개칭 개편되고 예하 第6師(제6사)의 師長(사장)은 金日成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성명서나 문헌을 살펴보면
중국 공산당의 지휘하에 있던 이들의 목표는 일제를 몰아내고 東北失地(동북실지)를
회복하는 데 있었으며, 코민테른 지령에 의한 국제 공산주의 노선이나 중국 공산당의 排日(배일)정책에 보조를 맞췄다. 따라서 이들의 목표는 조선독립이나 민족해방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거의 韓人만으로 구성된 第6師 같은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外人部隊(외인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第6師는 長白縣(장백현) 오지인 密營(밀영)을 두고 활동했다. 문제의 김일성 부대(第6師)는 항일투쟁보다는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長白縣 일대와 甲山郡(갑산군) 일대에서 주로 韓人 농촌을 기습, 약탈, 방화, 살인, 납치를 자행했다. 이들은
공산당 특유의 극단적이고 잔인무도한 만행으로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을 극도로 괴롭혔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산주의자들의 일관된 특징은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 단체, 주장을
무조건 敵(적)으로 취급하고 무자비한 투쟁의 대상이며 敵과 대결하는 방법은
언제나 잔인무도한 폭력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敵은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는 지주, 부르주아, 지식인,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국가 등이며, 심지어 항일투쟁에서도 계급혁명에 반하여 민족해방과 독립을 지상목표로 투쟁하던
민족주의자들도 敵으로 간주했다. 일례로 1930년 1월24일 민족주의 항일투사였던 金佐鎭(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피살된 사건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항일투쟁에서도 민족주의자들과 합류하지 못하고 끝까지 자신들의 길을 갔다. 그 결과 오늘날 한반도는 분단의
비극과 민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체험을 해야 했으며 아직도 고난을 겪고 있다.
普天堡(보천보)와 그 일대의 韓人 동포들을 공포와 비탄 속에 몰아넣었던 보천보 습격사건의 자초지종은 아래와 같다.
1937년 5월21일 동북항일연군 소속 第4師 부대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태리 上興慶水(상흥경수) 부락을 기습해 대대적인 약탈 납치를 자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국경 일대의 일본 경찰이 총동원되어 第4師 부대 추격에 나섰다. 보천보 작전을 위해 사전에 현지답사를 끝내고 작전준비를 했던 김일성은(이
인물은 북한의 김일성이 아님) 上興慶水 사건 때문에 보천보에 치안 공백이 형성된 틈을 이용,
1937년 6월2일 대원 약 90명을 거느리고 밀영을 떠나 다음날 강을 건너 보천보에 접근했다. 김일성은 6월4일 밤 대원들을 6개
조로 편성하고 부락의 전화선을 절단한 후 기습을 개시했다.
당시 보천보는 韓人 280여 호, 日本人 26호, 中國人 2호, 합계 300여 호의 면사무소 소재지로 주재소(경찰 파출소), 보통학교(초등학교), 소방서, 우편소 등이 있는 비교적 큰 부락이었다. 30분가량 집중사격을 가한
후에 주재소 무기고를 부수고 경기관총 1정, 장총 6정, 권총 2정, 실탄 1170발과 기타 물품들을 탈취했다. 그리고 농사시험장과 소방서 등을 약탈하고 면사무소, 학교, 우편소 등을 방화했다. 시가지에 들어가서는 주택, 상점, 병원 등을 털어 현금과 물자, 의료 기기와 약품, 곡물과 의류 등을 닥치는 대로 약탈한 뒤 철수했다.
第6師가 항일전투부대라면 당연히 일본의 관서나 일본 경찰, 혹은
일본군 등을 상대로 작전을 해야 했다. 절대로 동포들에게는 피해를 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에서 일인이 피해를 본 것은 주재소 순사(순경) 1명이 부상당하고, 주재소에서 잠자던 일본 순사의 두 살짜리 딸이
유탄에 맞아 사망한 것, 우연히 거리에 나왔던 일본인 음식점 주인이 총에 맞아 죽은 것 등을 제외하고
피해자가 모두 우리 韓人들이었다. 그들의 작전 목적이나
방법은 물자 약탈이 목적이었지 항일전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8월23일에 김일성 부대는 만주 임강현 5道溝(도구)에 있는 채목장을 습격해 인부
5명을 납치했다. 9월3일에는 갑산군 운흥면
중평리에 있는 광산 세 개를 털어 사금과 금품을 강탈했다. 보천보 사건과 그 후 잇달아 벌인 약탈로
혜산경찰서는 第6師에 대한 비상경비 태세에 들어갔다. 김일성과 내통하는
국내인사들을 색출하고 權泰國(권태국), 金錫泰(김석태), 趙信濟(조신제) 등을 체포해 第6師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혜산경찰서는 60명의 특별 수사반을 조직해 장백현에 파송하고 김일성을
지원하는 조직망 11명을 체포했다. 그 결과 국내에서 각종
공산당 조직에 관련됐던 162명, 장백현에서 60명, 모두 222명이
체포됐다. 그 후 9월과
10월에 朴達(박달), 金成演(김성연), 李龍述(이용술) 등 279명이 더 체포되고 1·2차 검거에서 체포된 자가 모두 501명이나 되었다. 이것을 역사에서 惠山事件(혜산사선)이라 한다.
혜산사건 피의자들의
심문조서에는 국경지대를 소란케 했던 第6師長(제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당시 나이 36세(1901년생)로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 함경남도 태생이었다. 이 사람은 절대 북한의 김일성(1912년생)과 동일 인물이 아니었다.
보천보 사건이 발생 5개월 후 1937년 11월13일 그가 만주의 撫松縣(무송현) 楊木頂子(양목정자)에서 부하 약 100명과 함께 휴식하고 있을 때, 일본의 滿軍(만군) 보병 제7단 제1영의 포위 공격을 받고 부하 8명과 함께 사살됐다. 쓰러진 김일성의 시체는 항일연군 측이 회수하지 못했고 인근 주민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 김일성이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1937년 11월18일자 <京城日報> 조간 7면에 그의 사망 기사가 “공산비적 김일성이 사망, 朝滿국경지대 주민들이 이제 근심을 덜었다”고 보도됐다.
<계속>
普天堡(보천보) 전투와 가짜 金日成의 實體(中)
前 CIA 요원 마이클 리의 現代史 秘話-37/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은 원래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인 白山武士團(백산무사단) 소속 독립운동가들의 병을 고쳐주던 인물이었다. 김형직은 1926년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됐다.
李明山(마이클 리) [ 2014-11-07, 16:19 ]
또 한 사람의 김일성
김일성의 죽음과 혜산사건으로 위축된 第6師(제6사)는 1938년 봄 다시금
출몰하기 시작했다. 새로 취임한 師長(사장)도 죽은 전임자의
이름을 계승해 김일성이 戰死(전사)한 것이 아니라 건재한 것처럼 위장했다. 그가 첫 번째 일으킨 사건이 1938년 4월26일 임강현 제3구 6道溝(도구)의 습격이었다. 500여
명의 병력이 경기관총 6정으로 시가지에 침입해 물자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다.
그 무렵 동북항일연군은 주로 물자 약탈에만 급급했다. 1939년 초 第1路軍(제1로군) 산하 제1·2군이 제1·2·3 方面軍(방면군)으로 개편됐다. 이처럼 편제가 바뀌는 과정에서 第6師將 김일성(또 다른
김일성)은 第2方面軍長(제2방면군장)으로 승진했다.
1939년 봄 第2方面軍長 김일성의 부대도 각처의 부락을 약탈하고 다녔다. 일례로 1939년 5월3일 밤 김일성 부대는 200여 명의 병력으로 장백현의 한 부락을 습격해
만주국 경찰과 4시간 교전한 뒤, 식량과 의류를 약탈하고
경관과 주민 약 40명을 살상했다. 김일성 부대도 당시 손실이
컸다. 특히 第2方面軍 ‘부녀부장’이었던 김일성의 妻(처) 金惠順(김혜순)은 부상을 입고 부대에 돌아가지 못하고, 山家에 숨어 있다가 1940년 4월6일 체포됐다(조선일보 1940년 7월5일자 보도). 金惠順과 기타 체포된 대원들의 진술에 의해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어릴 때 간도 용정의 대성중학교를 다녔다. 1930년 5·30간도폭동사건 때에는 행동대장이었으며, 소련 사관학교 출신으로 당시 나이는 34세였다고 한다. 이 인물도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다.
軍警합동작전으로 1939년 10월~1941년 3월 기간 동안 동남3성(길림, 통화, 간도)에서 治安肅正工作(치안숙정공작)으로 공비섬멸 작전을 실시했는데, 당시 이 지역에서 준동하던 약 3000여 명의 항일연군 병력이 전멸됐다. 1940년 2월23일 제1로군 총사령관
楊靖宇(양정우)가 전사한 것을 비롯해 수많은 지휘관이 죽었으며 그 결과 병력이
궤멸됐다. 당시 戰果(전과) 기록을 보면
유기된 시체만 해도 1282구, 투항자 1040명, 체포 896명, 파괴된 병영이 2923개나 되었다.
그러나 第2方面軍 김일성은 살아남아 1940년 12월 말 패잔병 20여
명을 이끌고 소련원동으로 탈주하는데 성공했다. 소련으로 퇴각한 동북항일연군 중 第2·3路軍 패잔병은 하바로프스크
야영지에 수용됐다. 第1路軍 패잔병은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오케얀스카야 야영지에 수용됐다. 패잔병 총인원은 中國人과 韓人을 모두 합해 300여 명 정도였다.
김일성은 도착 후 오케얀스카야에서 얼마 후에 병사했다. 소련은 먼 안목으로 동북항일연군 패잔병들의 이용가치를 계산해 이들을 받아들인 뒤, 극동경비사령부 88정찰여단 공작대에서 각종 훈련까지 실시했다. 그들 중 韓人은 약 100명 정도였다.
해방 후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할 때 韓人들을 60~70명을 데리고 왔는데, 이들
중에는 崔庸健(최용건), 金策(김책), 崔賢(최현) 등 동북항일연군 출신들과 함께 소련태생 2세인 許哥而(허가이), 朴昌玉(박창옥), 奇石福(기석복), 南日(남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평양에 도착한 후 동북항일연군 출신, 소련에서 자란 韓人 2세들, 화북에서
돌아온 연안파 계열,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은 북한 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앞에 내세울 민족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들은 소련 원동지방(지금의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김일성 장군이나 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연군의 김일성이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소련에서 데리고 온 33세의 金聖柱(김성주, 1912년생)에게 ‘김일성 장군’이란 이름과 호칭을 주고 1945년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지금의 모란봉경기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나 놀랐고, 그를
김일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군중들은 김일성 장군을 ‘김좌진 장군과 비슷한 나이로 60세에 가까운 初老(초로)의 씩씩한 군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주둔 소련군은 치스챠코프(Chischakov) 대장이
지휘하는 제25군단이었으나 모든 정치공작은 로마넨코 평양주재 소련군 민정부사령관이 담당했다.
청년 김성주에게 김일성 장군의 탈을 씌워 로마넨코 정치사령부에
추천한 사람은 연해주지구 경비사령관 스티코프(Stykov)였다. 스티코프는
김성주가 오케얀스카야 野營(야영)에서 4년 반 이상
생활할 때 이미 그를 지켜봤다. 한인들 중에서 비교적 지도력이 있으며 외모가 가장 준수한 사람을 선택한
것이 바로 김성주였다. 스티코프는 소련군정 시기 평양에 있었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집행을 위한 美蘇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 대표로
있었다. 그는 美蘇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 남북한
분단이 불가피하게 되자 평양주재 초대 소련대사로 눌러앉아 가짜 김일성 중심의 북한정권 수립을 위한 후견인 역할을 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누구인가
북한의 김일성은 과연 누구인가. 그의 본명은 金聖柱(김성주)이며, 1912년 4월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그것도 조작이라는 설이 있다. 그의 증조부 金膺禹(김응우)와 조부 金輔鉉(김보현)은 가난하고 무식한 농부였다. 그러나 그의 부친 金亨稷(김형직, 1894년생)은 신식교육을 받아 평양에서 숭실중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金亨稷은 집안이 어려워 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 지방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1918년 평안북도 중강진으로 이사를 했다. 그는 중강진에서 3·1운동을 맞았다.
1919년 5월
다시 만주 臨江縣(임강현) 帽兒山(모아산)으로
이주, 한의원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다가 후에 다시금 장백현 八道溝(팔도구)로 이주해 한의원을 개업하고, 고향 외가에 맡겼던 아들 성주를 데려다
팔도구소학교에 넣었다. 金亨稷은 1923년 무슨 연유인지 아들을 다시 고향에 보내 외가 마을에 있는 彰德學校(창덕학교)를 다니게 했다. 그리고 1925년
봄 성주는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당시 金亨稷은 장백 일대에서 유력한 자산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장백현 서쪽에 있는 撫松(무송)으로 이사를 했고, 여기서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인 白山武士團(백산무사단)에 가입, 독립
운동가들이 병나면 열심히 한약을 지어 주곤 했다.
1926년 성주는 무송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樺甸縣(화전현)에 있는 화전의숙에 입학했는데, 부친 金亨稷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학업을 다시금 중단했다. 金亨稷은 민족주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됐다. 당시 金亨稷의 妻(처) 康盤石(강반석)은 세 아들 聖柱(성주), 哲柱(철주), 英柱(영주)를 데리고 무송에서 한동안을 지냈다. 그러다 성주는 그 무렵 무송 일대를 횡행하던 馬骨團(마골단)이란
공산폭력배의 무리에 끼게 되었다.
이 마골단은 십대 韓人 깡패조직이었다. 당시는
공산주의 열풍이 그 지역을 휩쓸 때였는데 마골단은 혁명을 한답시고 닥치는 대로 부유한 집을 털면서 협조하지 않으면 반동분자라고 때려눕혔다. 당시 韓人자치기관이었던 正義府(정의부)에서는 李鍾洛(이종락) 소대를 보내 마골단을 와해하고 소년 성주를 붙잡았다. 정의부는 김성주가 정의부 소속 백산무사단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金亨稷의 아들인 것을 알고 이종락으로 하여금 그를 훈육하도록 했다.
1927년 봄 이종락은 성주를 奉天(봉천)에 있는 平旦(평단)중학교에 입학시켰다.
평단중학교에서도 김성주는 마골단의 기질 때문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퇴학을 당했다. 김성주는 무송으로 돌아갔고, 그의
가족은 安圖(안도)로 이사했다. 안도에서는
안도현 경찰대장(중국인)의 도움으로 1928년 봄 길림의 중국인학교인 毓文(육문)중학교에 들어갔다.
길림에는 많은 韓人들이 살고 있었는데 소년들은 ‘조선인길림소년회’에 가입하도록 되어 있었고, 김성주도 가입을 하고 얼마 후 소년회 회장이 됐다. 그 무렵 공산주의자들은
활발하게 조직 확장운동을 벌이고 있었으며 주로 농민과 청년학생에게 접근했다. 1929년 17세가 된 김성주에게도 그 손이 뻗쳐 그 해 5월 초 어느 韓人 집에서 모이는 ‘고려공산청년회’에 참석하고 그 모임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일본의 길림 총영사관 경찰대에
의해 가담자 대부분이 검거되고, 김성주는 길림을 빠져나가 과거 자신을 돌봐주던 이종락을 찾아갔다. 그때 이종락은 마골단을 토벌하던 정의부나 국민부 소속의 민족진영이 아니었다.
그는 변절해 공산주의 활동에 깊숙이 빠져 있었고, 김성주를 자기 부대의 대원으로 삼았다.
당시 이종락은 길림성과 흑룡강성 일대에 吉黑農民同盟(길흑농민동맹)이란 것을 조직해 인근의 韓人 농촌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1929년 가을부터는
五家子(오가자) 지방까지 손을 뻗쳤다. 이종락
부대의 약 50명의 대원들은 권총을 차고 다니면서 농촌에 들어가 소득의 10분의 1을 길흑농민동맹에 바치라고 횡포를 부렸다. 김성주도 오가자에 파견되어 세금징수와 반동분자 색출에 설치고 다녔다.
이 때부터 김성주는 당시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던 김일성 장군(본명 金光瑞, 별호 金擎天)의 이름을 따서
김일성이란 별호를 쓰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훗날 이 김일성(본명
金聖柱)을 동북항일연군 第6師長을 지낸 김일성 또는
第2方面軍長을 지낸 김일성과 또는 진짜 애국투사이었던 시베리아의 김일성(본명
金光瑞)과 혼동하게 되는 것이다.
1930년 말 길흑농민동맹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었고 이종락이
체포된 후 김성주는 오가자를 떠났다. 당시 그는 봉천의 평단중학교 시절 중국인 친구였던 張亞靑(장아청)과 같이 張의 고향인 무송으로 갔다.
1931~1932년경 김성주와 장아청은 또래의 젊은이들을 규합하고 공산혁명을 위한 군자금이란 명목 하에 돈 있는 중국 사람들 집을
털었다. 이 때문에 무송에서는 “조선 놈 김일성 일당의 약탈 때문에 못 살겠다”는 비난의 소리가 비등했다.
1931년 9월18일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는 日軍에 저항하기 위한
두 개의 韓人 민족주의 무장부대가
있었다. 하나는 북만주의 한국독립군이고 하나는 남만주의 조선혁명군이었다. 위의 소식을 들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梁世奉(양세봉)은
예하부대의 高東雷(고동뢰) 소대장과 대원 9명을
무송에 파송, 김성주 일당을 퇴치하도록 지시했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김성주 일당은 무송에 도착해 피곤하게
잠든 高東雷 소대장 일행을
덮쳐 전원 사살한 뒤, 그들의 권총을 탈취해 사라졌다. 그
무렵 안도현에 살고 있던 김성주의 모친 강반석이 1932년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33년 6월 김성주는 汪淸縣(왕청현)에 있는 중국인 항일부대 중 하나인 吳義成(오의성) 부대에
나타나, 그의 당번병으로 시작해 부대의 대원이 되었다.
<계속>
普天堡(보천보) 전투와 가짜 金日成의 實體(下)
前 CIA 요원 마이클 리의 現代史 秘話-38/가짜 김일성이 49년간 독재하면서 북한을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이것도 모자라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어 그 애비보다 몇 배나 더 무서운 독재자로 전 세계에서 가장 지독한 인민탄압을 자행했다.
李明山(마이클 리) [ 2014-11-07, 18:04 ]
1934년 2월 동만주과 남만주에는 義勇軍(의용군), 救國軍(구국군), 自衛軍(자위군)등의
이름으로 20~30명 또는 100~200명 규모로 100여 개의 항일부대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오의성의 동북의용군은 600명 정도의 대부대였다. 1936년 4월 오의성 부대는 중국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 第2軍, 第5軍과 합동으로 항일협동전선을 구축했다. 같은 해 8월17일 동북항일연군 第6師, 즉 김일성(북한의 김일성이 아님) 부대는 오의성 부대와 합류해 약 2000여 명의 병력으로 撫松縣城(무송현성)을
포위 습격하는 합동작전을 벌였다.
당시 김성주는 김일성 부대의 대원으로 전속되어 있었다. 1937년
초 안도현 치안대의 韓人 李道善(이도선) 警佐(경좌)가
김일성 부대의 토벌에 나서 그 부대의 소년 대원 한 명을 붙잡았는데, 이름은 金英柱(김영주)고
바로 윗형 金哲柱(김철주)는 1935년에 죽고 “큰형 金聖柱(김성주)는 지금 김일성 부대의 대원”이라고 진술했다. 그때 김성주는 중국인 친구 張亞靑(장아청)과 함께 第6師 대원이었다. 김성주는
1937년 6월 초에 있었던 보천보 전투에도 第6師長 김일성이 아니라 그 부대의 일개 대원으로 참가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한동안 기를 쓰고 第6師長 김일성이 북한의 김일성과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그 戰績(전적)을 확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나이가 다르고 신원이 다르다.
1937년 7월 中日전쟁이 터졌을 무렵 장아청이 오가자에 있는 친구 李善一(이선일)에게
보낸 편지에는 “나와 김성주는 지금 동북항일연군의 제6사 김일성 부대에서 싸우고 있으니 자네도 동지들을
데리고 와서 가세해 달라”는 권유의 말이 적혀 있었다. 이 편지도 김성주가 김일성부대의 일개 대원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1937년 11월 第6師長 김일성이 죽고 그 후계자, 또다른 김일성이 第2方面軍長이 되었을 때에도 김성주는 계속해서 김일성 부대의
대원으로 남아 있었으나 이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다. 그러나 김성주는 1939년 같은 김일성 부대의 여자 대원이었던 金靜淑(김정숙)과
부부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下卒(하졸)은 결혼할 수 없다는 동북항일연군의 규칙으로 봐서
김성주는 중간 간부 이상의 직위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1940년을 전후해 軍警의 합동작전으로 동북항일연군이 궤멸되고, 1940년 12월 말 第2方面軍長 김일성이 부하 20여명을 데리고 소련의 원동으로 도망갈
때에도 그곳에 김성주가 끼어 있었다. 그의 처 김정숙은 그보다 먼저 오케얀스카야 야영 학교에 도착해
있었고 1941년 2월16일
그곳에서 첫 아들 유라(김정일)를 출산했다.
김성주는 해방 후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이곳에서 특수훈련과 교육을 받았고, 그 사실을 늘 자랑삼아 말했다. 대체로 군사참모학, 정보학, 통신, 낙하산
훈련, 그리고 마르크스 레닌주의 교육을 받았다. 훈련은 소련
연해주지구 경비사령부 소속 교관들에 의해 실시됐다.
역사의 捏造(날조)
북한에서 주장하는 김일성 항일투쟁사의 대부분은 세 가지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없었던 일을 날조한 것이다. ▲둘째는 있었던 일을 변조하거나
미화한 것이다. ▲셋째는 다른 사람이 한 일을 자신이 한 것처럼 도용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사건이 바로 보천보 전투인데 2002년 8월 초 한국의 김대중 정권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보천보 전투를 비중 있게 소개해 물의를 일으켰다. 또 학계 일부에서는 일제시대의 공산계열 독립운동도 史實(사실)로
인정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어처구니없는 의견도 제기됐다.
대한민국의 북한 연구가들이 저지르고 있는 과오 중 하나가 철저한 연구 분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북한이
날조·미화한 문헌과 자료를 비판 없이 접수하는 태도다.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으로 잘 알려진 송두율과
그를 추종하는 사이비 학자들은 대한민국의 진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부정적인 면을 극대화한다. 동시에
북한의 모순과 허위에 대해서는 절대로 비판하지 않는다. 이들은 날조된 역사를 사실(史實)로 인정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죽을 때까지 여러 겹의 탈을 쓰고 살았다. 그가
그토록 무서운 독재자가 된 이유 중 하나는 이 가면을 지키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속이지 않은
것도 있다. 그의 생년월일과 부모와 조상들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과거 행적의 대부분이 거짓말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혈통을 강조하기 위해 ‘백두혈통’을
내세운다.
역사를 날조해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1866년에 대동강에
들어갔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격퇴하는데 선봉장을 했다는 주장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와 그의
아들 김보현은 가난하고 평범한 농부였을 뿐이다. 그리고 김성주의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공산주의
혁명투사로 추앙하지만, 사실 김형직은 한의사로 만주에서 白山武士團(백산무사단)이란
애국 민족진영의 대원으로 활약하다 공산당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김성주 자신은 주로 만주 장백현 일대에서 동북항일연군의 비적으로 양민약탈에 잔뼈가 굵었다. 그의 妻(처) 김정숙은 빨치산들의 옷이나 세탁한 하녀에 불과했으며
백두산에서 싸운 일이 전혀 없다. 그들의 아들 김정일은 분명히 소련 극동지역 경비사령부 야영지에서 1941년 2월16일에
태어났다. 그들이 말하는 ‘백두산 밀영’에서 출생하지 않았다.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는 1952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했고, 1962년 아버지 고경택을 따라 北으로 들어간 북송교포다. 고영희는 만수대예술단 무용수였고 김정일의
‘기쁨조’ 대원이었기 때문에 집안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김정은의 외조부 고경택은 일제시대에 친일파였고, 이모 고영숙은 1998년에 탈북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결국 김정은은 북한 기준에서 보면 불순분자 집안의 자식이다. 그런데도
북한에서는 아직도 ‘백두혈통’을 부르짖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김정일이 다른 자식들 다 제쳐놓고
김정은에게 권력을 이양한 이유는 그가 祖父(조부)를 제일 많이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실과 허위를 배합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또다른 어려운 일을 추가적으로 해야 한다. 하나는 역사를 날조하는
작업이요, 다른 하나는 그 허위를 알고 있는 사람과 알 만한 사람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어렸을 때는 깡패요 청년시절에는 동족을 괴롭히던 공산비적으로 살아온 그가 ‘만고의 애국자요, 항일영웅이요, 민족의 태양’ 으로 둔갑해 49년간 독재자로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고, 비참하게
되었는지 역사는 사진과 같이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가짜 김일성이 도용한 진짜 김일성 이야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진짜 김일성 장군은 누구인가. 본명은
金光瑞(김광서)이고
별호는 金擎天(김경천)이다. 1888년 6월5일 함경남도
북청군 해안 승평에서 출생해 호적상의 본적은 서울 종로구 사직동 166번지이다. 그는 구한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유학해 1911년 기병과 제23기생으로 졸업하고 1915년에 기병 중위가 됐다.
김광서는 1919년 2월20일 병가를 얻어 서울의 사직동 자택에 있는 동안 3·1운동을 맞았다. 이후 그는 일본군을 떠나 해외로 도피해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하고, 같은 해 6월 일본육사 3년 후배인 池大亨(지대형, 또다른 이름은 池靑天)과 함께 만주로 탈출했다.
이들은 요녕성 孤山子(고산자)에 있는 韓人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李始榮이 설립)를 찾아가 교관이 됐다. 그곳에는 이미 구한말 正尉(정위) 출신의 申八均(신팔균)이
교관으로 있었다. 이 세 사람의 장교출신 교관들이 모두 ‘天’자 돌림의 별호를 갖기로 하고 신팔균은 신동천으로 김광서는 김경천으로 지대형은 지청천(또는 母性을 따라 李靑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들을 한국독립투쟁사에서 南滿三天(남만삼천)이라 부른다. 이후
중국본토에서 운남사관학교를 졸업한 李範奭(이범석)도 이들(南滿三天)과 합류했다.
1919년 겨울 金擎天은 무기 구입을 위해 시베리아로 떠났다. 시베리아에도 韓人이 많이 살고 있으면서 간도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의
한 근거지였다. 당시 볼셰비키 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 군대의 韓人에 대한 잔학행위가 극심했다. 그래서 김경천은 시베리아에서
항일무력을 조직하고 선두에 나섰다. 당시 김경천이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그의 활동이 소문으로 국내에 전해져 시베리아 항일투쟁의 영웅적 존재로 흰 말을 타고 날아다니는 일본육사 출신
김일성 장군의 신비로운 얘기가 널리 퍼졌다.
그와의 인터뷰 기사가 金光瑞(김광서)의 이름으로
1923년 7월29일 <동아일보>에 실렸다. 항일투쟁에서
김광서(金擎天=金日成)는 볼셰비키 군대와 동맹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1922년 가을 일본군대가 철수하자 시베리아를 장악한 볼셰비키가
그를 배신하고 韓人독립군 부대들을 볼셰비키 군대에 편입시키거나 무장해제
시켰다.
1925년 6월25일 <동아일보>는 “김광서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대적인 항일투쟁을
또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를 냈다. 이것이 김광서(金擎天=金日成)에 대한 마지막 소식이었다.
이제는 역사의 진실을 말하자
북한 김일성의 역사날조와 신분위장은 철저한 것 같으면서도 엉성하다.
그가 보천보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김일성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당시에는 사용하지도 않았던 장군이란 칭호를 사용했다. 또 동남만주 산악지대에서 싸웠다는 그가 흰 말을 타고 유격대를 지휘했다는 주장도 만화책 수준의 거짓말이다.
평양의 조선혁명박물관에는 백마를 탄 항일투사 김일성의 그림이 걸려 있고 김일성 傳記(전기)에는
그 그림이 빠짐없이 들어있다. ‘백마를 탄 김일성 장군’은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김광서의 이미지에서
따온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보천보 전투 이야기는 동북항일연군 第6師長 김일성(가짜 김일성)의
얘기를 도용해 미화한 것이다.
이외에도 《영웅 김일성 장군》, 《조선민족 해방투쟁사》, 《김일성장군 약전》, 《조선근대 혁명운동사》, 《역사사전, 조선전사》 등등의 북한 책에는 날조, 변조, 도용 흔적이 너무나 뚜렷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신분의 위장과 도용, 김일성이
조직하고 지휘했다는 전혀 사실무근의 조선인민혁명군 얘기, 그리고 그가 지휘했다는 보천보 전투의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이다. 이 가짜 김일성이 49년간 독재하면서 북한을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이것도 모자라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어 그 애비보다 몇 배나 더 무서운 독재자로
전 세계에서 가장 지독한 인민탄압을 자행했다. 지금은 3대
세습으로 손자 김정은이 앞서 두 독재자보다 더 지독하고 잔인한 악마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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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제시대 나라를 일본제국에 빼았기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피신했던 애국지사들 중 만주에 있던 조선인 공산당원은 독자적인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결성했으나 중국공산당의 결정에 따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하부조직으로 중국공산당의 통제하에 들어갔습니다.
이 사실은 본문에 있는 <조선공산당 滿洲總局(만주총국)에 가입했던 韓人(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의 一國一黨(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 滿洲省委員會(만주성위원회) 산하 각급 조직에 가입했고, 그 이후 만주에서는 韓人들의 독자적인 공산당 조직이 영원히 사라졌다.> 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1933년 만주에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해 많은 韓人 공산주의자들이 가담했는데 1936년 명칭을 동북항일연군으로 개칭 및 개편하였고 총 병력은 중국인 조선인을 합쳐 약 3000명 정도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엄격한 軍律(군율)이나 기강이 없었고, 중앙보급이 없었던 관계로 산림지대에 野營(야영)하면서 항일투쟁보다는 인민약탈이 더 빈번했다. 결국 인민의 敵(적)으로 전락해 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일본 관동군의 토벌에 밀려 전사 1282명, 투항자 1040명, 포로 896명의 참담한 손실을 입고 1940년경에는 동북항일연군이 붕괴되어 약 300명이 蘇聯(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으로 탈출했습니다.
@Iron Cross 이런 배경아래 조선인 공산당원은 중국 공산당의 하부조직으로 항일투쟁보다는 인민을 약탈하는 인민의 적으로 지냈으며 10 여년의 투쟁기간 중 본문에서 보이는 전과 이외에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소개한 김일성에 대한 설명처럼 북한 김씨왕조를 만든 김성주는 일제시대 조선인들에게 알려졌던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이 아닌자로 소련 점령군의 북한 강점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가짜임을 이 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1945년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지금의 모란봉경기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를 개최했을 때 군중들은 너무나 놀랐고, 그를 김일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