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행복
---이진진의 시세계
반경환
문배마을을 가다가 산의 내장을 보았다
구불거려 잘 보이지 않아
보지 못했던 내장
하루살이도 천년 살이도
삶의 발버둥은 다르지 않아
밤이면 어두움에 컹컹 울다 잠들었을 산
구불구불
산의 내장을 밟고 오면서
내장 속에 든
산딸기와
앵두와
푸른바람을 맘껏 먹었다
내장은 말없이 다 내주었다
무한재생 주고 생색내지 않는 산
사람들은 산의 창자 밟으며
돌도 캐내고 새소리도 훑어내고
온갖 착취를 한다
흑흑 흐느껴 우는 흙 울음은
범 무서워할 줄 모르는 버들강아지로 피었다
산의 내장이 터지면 인간 내장도 터지는 걸 알까?
---이진진의 [산의 내장] 전문
내장이란 무엇인가? 내장이란 척추동물의 가슴이나 뱃속에 있는 동물의 기관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우리는 이 내장을 통해 먹고 마시고, 숨을 쉬고, 배설을 하며 살아간다. 소화기관과 호흡기관과 비뇨 생식기관과 내분비계 따위의 여러 기관들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이진진 시인의 [산의 내장]은 자연의 내장이며, 산의 내장이 터지면 인간의 내장도 터진다는 종말론적인 경고를 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낯설게 하기’란 매우 친숙하고 일상적인 사건과 사고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말하고, 관찰자의 시선이 바뀌면 그 모든 일상적인 사건과 사고들이 매우 새롭고 충격적인 사건과 사고들로 바뀌게 된다. 천동설이란 우주의 중심을 지구로 바라본 것을 말하고, 지동설이란 우주의 중심을 태양으로 바라본 것을 말한다. 이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게 된 사실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랐지만, ‘낯설게 하기’란 전위주의적인 기법이자 모든 가치들을 전복시킨 ‘혁명적 세계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진진 시인은 산의 존재를 인간화시켜 “문배마을을 가다가 산의 내장을 보았다”고 말하고, “구불거려 잘 보이지 않아/ 보지 못했던 내장”을 보았다고 말한다. 하루를 살다 가거나 천년을 살다 가거나 그 “삶의 발버둥”은 조금도 다르지 않고, 이 삶의 노역에 지쳐 밤이면 밤마다 어둠 속에서 컹컹 울다가 잠이 들게 되었던 것이다. 산의 내장은 만물의 터전이 되고, 우리는 “구불구불/ 산의 내장을 밟고 오면서/ 내장 속에 든/ 산딸기와/ 앵두와/ 푸른 바람을 맘껏 먹었”고, 그때마다 산의 내장은 그 모든 것을 말없이 다 내어주었던 것이다. “무한재생 주고 생색내지 않는 산”----.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산의 창자 밟으며/ 돌도 캐내고 새소리도 훑어내고/ 온갖 착취를” 다했던 것이다. 착취란 힘이 센 자가 힘이 없는 자의 노동이나 재산 따위를 빼앗는 것을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자연의 세계에서는 사회적 강자도, 사회적 약자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최상위 포식자인 사자와 고래도 늙고 병들면 개미 한 마리와 기생충 한 마리도 못 이기고, 그 반면에, 최하위 포식자인 개미와 기생충도 최상위 포식자를 뜯어먹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어야 하고, 받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나, 이 자연의 법칙에 반하여, 우리 인간들은 만물의 영장이란 특권으로 만물의 터전인 자연에다가 “산의 창자 밟으며/ 돌도 캐내고 새소리도 훑어내고/ 온갖 착취를” 다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지구촌의 위기는 인문주의의 소산이고, 인문주의는 너무나도 잔인하고 뻔뻔스러운 최악의 테러 행위였다고 할 수가 있다. 모든 생명체들의 근본물질이자 그 터전인 흙이 흐느껴 울고 “범 무서워할 줄 모르는 버들강아지”로 피었다는 사실도 슬픈 일이지만, 그러나 “산의 내장이 터지면 인간 내장도 터”진다는 이진진 시인의 경고는 그의 ‘낯설게 하기의 기법’, 즉, 그 충격적인 전언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낡은 것이 새로운 것일까,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일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최희준의 [하숙생]을 들으면,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들의 인생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최희준의 [하숙생]의 주제가 ‘나그네 길’이라면 이진진 시인의 [임대 문의]의 주제는 ‘임대 인생’이라고 할 수가 있다. 만일, “상가는 5년, 집은 2년”이라면 우리들의 임대 인생은 과연 얼마가 그 적정 기간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60년일까, 70년일까? 80년일까, 100년일까? 따지고 보면 인간의 한평생은 여성의 생리기간과도 같고, 생리가 끝나면 곧바로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옛날의 임대 인생의 계약기간은 60년, 오늘날의 임대인생의 계약기간은 100여 년----. 하지만, 그러나 생리가 끝나고 된서리를 맞고도 4-50년을 더 산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임대차법’을 교란시키는 최악의 테러 행위이자 오늘날의 지구촌의 위기의 주범이라고 할 수가 있다. “달력은 9월을 벗고 10월을 입는다/ 왜 자꾸/ 마른개미 숨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들릴까?”의 [왜 자꾸], “자다가도/ 자동차 타고 가다가도/ 임대 기간만료 되었다고 훅, 방을 빼라는/ 임대인의 통보 받으면 방 뺄 시간도 없이 빼야 하는/ 인생임대법”([임대 문의])의 시들처럼, 우리 인간들은 어차피 임대인생이자 시한부인생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고, 임대인생이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되돌아가는 길에서, ‘네 것’, ‘내 것’을 따지고, 좀 더 오래 살고 싶어서 그처럼 애걸복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인생은 임대인생,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만물의 터전인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고 사유재산을 신성시 하는 자들과 자연과학과 생명공학을 통하여 인간수명을 연장시키는 자들은 모조리 살처분해야 한다는 것이 이진진 시인의 혁명적 세계관, 즉, 삶의 철학의 요체일는지도 모른다.
하늘이 힘든지
산 중턱에 켜켜이 내려앉아 쉬고 있다
참나무에 참새들 걸터앉아 그네 타고
숲의 심장 파랗게 부푸는 시간
불볕더위 매미울음으로 쏟아져
바닥에 매미울음 흥건하다
허기진 행운이 통통 구르는 소리
물관에 물 흐르는 소리
물은 어제를 밟고 내일로 흘러간다
청보랏빛 물무늬 자꾸만 여위자
삼십육계三十六計를 놓는 바람
애첩의 눈빛은
낭창낭창한 수양버들처럼 늘어지고
살충제 멀리하자
꽃들 목 버리며 유언을 남긴다
먼 길 돌아와 너울너울 매달리는 행운
별꽃은 별꼴을 달고 별별천지가 된다
비정상은 정상을 이기지 못한다는 소문위로
사계의 웃음이 쌓여가고
행운이 쑥쑥 자란다는 행운놀이터
행운이란 새떼가 푸르르 날아오른다
----[행운놀이터] 전문
이진진 시인의 시적 목표는 우리 인간들이 자연 속에 살며, 이 자연을 ‘행운놀이터’로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참나무에 참새들이 걸터앉아 그네를 타고 있으면 숲의 심장이 파랗게 부풀어 오르고, 불볕 더위가 매미 울음으로 쏟아져 내리면 바닥에는 매미 울음으로 흥건하게 된다. 별꽃은 별꼴을 달고 별별천지가 되고, 비정상은 정상을 이기지 못한다는 소문 위로 시계의 웃음이 쌓여간다. 물관은 어제를 밟고 내일로 흘러가고, 행운이 쑥쑥 자란다는 행운놀이터에서는 “행운이란 새떼가 푸르르 날아오른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인간은 인간이고, 동식물은 동식물이다. 자연은 만물의 터전이며, 스스로 그 모든 것을 생성 변화시키며, 그 모든 것들이 상호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게 만든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혁명가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 자연의 법칙에 반하는 그 모든 잘못들을 바로잡고 모두가 다같이 행운놀이터에서 살아갈 있도록 인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성전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성전들이 파괴되어야 하듯이, 시인이란 가치의 파괴자인 동시에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낯설게 하기’란 일종의 충격요법이며, 이 혁명적 세계관은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들의 낙천주의(자연주의)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는 삶은 임대인생이며, 이 임대인생은 이진진 시인의 [행운놀이터]에서 그 꽃을 만개하게 된다. 자연은 삶의 터전이고, 시는 삶의 꽃이고, 죽음은 삶의 열매이다. 이 세상의 삶이 임대인생이라는 것은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고 재미가 있다는 것이고, 그토록 짧고 아름답게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이 더없이 즐겁고 행복했다는 것이다. 장수만세는 만악의 근원이며, 우리는 오래 살기를 꿈꿀 것이 아니라, 즐겁고 기쁘게 죽어갈 것을 꿈꾸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으로의 복귀는 자연으로의 복귀이며, 자연으로의 복귀는 행운놀이터로의 복귀이다. 새들과 물소리와 산과 나무와 드높은 하늘과 맑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다가 보면,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의 부귀영화의 꿈과 장수만세의 욕망에 대한 구토를 하게 된다. 구토는 산의 내장의 터짐이자 역겨움이며, 그 모든 반자연적이고 인위적인 것에 대한 생리적이고도 정신적인 거부 반응의 몸짓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유는 개인주의이고,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의 궁극적인 형태이다. 자유는 만악의 근원이며, 이 자유를 최소한으로 억제하지 않으면 이제는 인간의 존재도, 인간의 사회성도, 그 모든 것도 다 소멸하게 될 것이다.
오오, 자연의 행운놀이터여!
오오, 이진진 시인의 행복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