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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예수께서 ‘행복하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이라고 하신 이들은 어떤 이들인가? 가난한 사람은 그의 희망 전부를 오로지 하느님께 두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자다. 하느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가난하고 스스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하느님께 의존된 존재로서 자신의 한계성과 유한성을 깊이 인식한다.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와 참 모습을 알게 될 때 진정 겸손한 자, 작은 자, 빈자 곧 가난한 자가 된다. 겸손만이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하게 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이며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 손에 온전히 내맡기는 자다. 그는 어떤 삶의 변화, 역경, 모순 앞에서도 결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다. 그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 그분의 말씀, 그분의 나라를 확고히 믿으며 마음의 문을 연다. 그의 최우선적인 부는 예수요 복음에 담긴 가치들이다.
“그리스도교적 가난은 마음의 해방, 사람과 사물로부터 초연함을 의미한다. 이 가난의 목표는 사랑 안에서 성장한다. 가난은 해방한다. 가난은 사람을 사랑의 손길로 이끈다. 그리스도교적 자세로서 가난은 확신에 찬 사랑으로써 고양되며 또 그 사랑의 조건이 된다”(S. Galilea). 마음의 가난은 내적 포기를 가능하게 한다. 포기는 포기한 것보다 더 귀중한 가치를 희망하는데서 비롯될 때 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곧 자유와 사랑을 깊게 하기 때문에 해방을 느끼게 하여 인간답게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가난에서 중요한 것은 포기 그 자체가 아니라 포기의 동기이다. 마음의 가난은 필연적으로 물질적인 가난과 구체적인 형태의 초연함, 검소한 생활양식으로 표현된다. 실질적인 가난이 따르지 않는 마음의 가난은 공허한 환상일 뿐이다.
마음의 가난과 내적 포기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 필요한 근본적이고도 절대적인 요건이다. 마음의 가난이 지향하는 물질적 가난은 순전히 상대적이다. 외적으로 가난한 생활양식은 바로 내적 가난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데 방해될 만한 모든 것들, 즉 물건, 사람, 상황, 계획을 포기해야 내적 가난,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 예수가 칭송한 ‘가난한 사람’은 외적 가난을 통해 내적 가난 또는 마음의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은 인간의 깊은 변화와 근본적인 정화를 내포한다. 이는 이 세상의 유한한 것에 매어 사는 부자유한 삶을 내적 자유로 인도한다.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초월적이고 무한한 것을 향해 닫힌 마음을 열게 한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내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다. 그는 지금 외적으로 소유하고 있든 않든 간에 진리 안에서 가난한 자이다. 참된 부는 내적 자유를 전제한다. 우리가 버려야 할 집착의 대상은 많다. 무엇보다 버려야 할 것은 염려, 걱정하는 마음이다. 집착, 애착을 벗어나 초탈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자신의 무능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자신의 생각이나 욕망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 사랑에 내어맡기는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더 나아가서 이런 삶의 자세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다.
동양사상의 무(無)는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함이 아닌 텅 빈 충만 또는 충만히 비어 있음을 의미한다. 불가의 수행에서 ‘무’는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집착하지 않음을 뜻한다. 마음을 비우고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때 영혼은 내적 자유를 얻는다. 비움, 무, 포기 같은 가난의 수행은 힘들고 어렵다.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지만 철저한 고독과 갈등, 훈련을 수반하는 길을 거치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화해와 일치에 도달하지 못한다. 정화와 일치는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고 하느님 나라의 한량없는 부요함에 참여시킨다.
구체적인 생활방식인 가난을 일반적인 기준으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 가난은 하느님의 개별적인 은총이며 부르심으로써 사람 혹은 환경에 따라 크게 좌우되며 각자의 교육, 특정한 문화와 사회, 사회적 위치, 직업, 육체적 또는 정신적 건강에 따라 변화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삶의 기준을 결코 하나의 형식으로 함축시켜서는 안 된다. 새로운 상황에 접할 때마다, 비록 동일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매번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수도자들의 가난은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과 함께 빵을 나누며 기쁨과 슬픔까지 나누는, 다시 말해 물질만이 아니라 형제들의 무능, 약함까지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마태 19,21) 당신을 따르라 하신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부단한 쇄신과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동기나 역사적인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예컨대 중세의 가난의 동기와 형태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시대 교회 안에서 가난의 증거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삶의 방식이 지금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 사회적 맥락 속에서 복음적 가난은 가난한 이들과 연대의식 속에서 그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가난의 행복을 생활화한다는 것은 곧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목적이든 정치적이든, 혹은 문화적 투신이든 간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모든 그리스도교적 투신은 참된 행복을 현실화하기 위한 작업이다. 그리스도교적 가난은 오직 돈과 물질적인 결핍 또는 물질적인 것과 돈으로부터 이탈을 통해서만 표현되지 않는다. 특전을 벗어던지는 이탈, 비난을 감수하는 이탈, 갖가지 형태의 권력을 외면하는 이탈, 경력을 갖고자 하는 욕구를 배제하는 이탈, 위험과 불안과 박해, 모욕을 감수하는 이탈을 통해서도 가난과 내적 자유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모든 가치들에 마음을 두고 자기 자신을 겸허하게 하느님 손에 내맡긴다.
‘참된 행복’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완전히 실현되었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유일무이한 표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30). 이 말씀에는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한 예수를 본받는 이들에게 주는 행복의 약속이 담겨있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과 단순한 이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보여주고 하늘나라의 보화를 함께 나눈다(마태 11,25 참조).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생각하는 신앙] 완벽하지 않은 신앙
‘생각하는 신앙’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삶에서 제기되는 ‘실존적 물음’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신앙에서 그 답을 찾아가고자 합니다.
시련 속에서
살다보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련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대인관계에서 겪게 되는 배신과 상처, 정신적 육체적 질병, 죽음의 위협과 공포… 수많은 것이 삶을 위협합니다. 너무나 견디기 힘든 시련 속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외치기도 합니다. “주여, 왜?”
시련 속에서 자라나는 신앙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것이 있다면, 하느님은 나의 삶이 평온하고 안정적일 때만 함께하는 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신앙은 행복하고 평탄한 삶을 사는 이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삶을 사는 사람, 끝이 보이지 않는 시련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 더욱 필요합니다. 내가 더 잘 살 때, 삶을 잘 정리하고 나서, 그때 성당에 나가야지… 이러한 생각은 시련 속에서 자신을 고립시켜 결국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게 됩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 사람에게만 신앙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실존적인 물음, 곧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일로 생겨나는 삶의 물음을 안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과 상관합니다.
성경에서
성경 속 인물들도 우리의 처지와 비슷하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산, 우리보다 먼저 삶과 신앙의 길을 걸은 이들입니다. 성경은 비참한 삶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더 신랄하게 하느님과 신앙에 대해 물음을 던지며 치열하게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상적인 신앙의 표본을 제시하며 그대로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 존재의 명과 암, 나약함과 거짓됨까지도 깊이 통찰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 인물들과 함께 걸으며 우리의 삶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신앙에서 그 답을 찾아갈 때, 성경의 이야기는 이미 끝나버린 옛 이야기가 아닌, 오늘 우리들 각자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학교
신앙은 질문을 던지는 법,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사는 법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한 사람, 한 신앙인으로서 가슴에 품고 살아온 여러 어려움과 고민거리와 문제를 풀어헤쳐 봅시다. 물론 그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이 한 순간에 주어질 수는 없습니다. 만약 답이 한 순간에 주어진다면 그것은 돌더러 빵이 되라고 유혹하던 사탄이 만들어놓은 환상(마태 4,3 참조)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답은 서서히 밝혀집니다. 나의 내면의 변화와 함께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답을 얻기 위해 필요한 시간입니다. 기도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우리들 각자의 지향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나 자신의 변화와 성장입니다. 기도 안에서 갈망이 정화되고 무르익으며, 나는 어느덧 삶의 새로운 차원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물음을 안고 항구하게 믿음을 청하며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씨름
창세기에 하느님과 씨름하는 야곱 이야기가 나옵니다(창세 32,23-33 참조). 신앙은 시련 속에서 가슴에 물음과 의문을 안고 살며 하느님과 하는 씨름입니다. 주님께 매달리고 궁리하고 찾으며 걸어 가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날이 새어 새벽이 밝았음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과 씨름하면서 이미 어둡고 긴 터널의 끝자락에 온 것이며, 이전에 볼 수 없던 것들을 보기 시작합니다.
필요한 단 한 걸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긴 터널 속에 있다고 느껴질 때 필요한 것은 ‘단 한 걸음’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아 도저히 앞으로 갈 수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어쩌면 터널의 끝부분에 다다르기 위해 마지막 한 걸음만이 필요한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만 있다면, 이미 그 시련을 이겨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시련의 끝은 보이지 않지만, 모든 시련은 반드시 끝나기 마련입니다.
신앙인의 대열
시련의 다른 특징은, 이미 누군가 그것을 겪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보다 먼저 그 길을 걸은 사람, 이미 그 시련을 경험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됩니다. 내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시련을 넘어선 것입니다.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은 사람의 손길에 나의 삶을 맡기며, 이제 주님께 믿음을 주는 법을, 주님과 함께 하는 나 스스로에게 확신을 갖는 법을 배웁니다. 이처럼 신앙이란 누군가의 손으로부터 전달됩니다. 이제 나는 나의 뒤를 따라오는, 나와 비슷한 시련을 겪는 이에게 손을 내밀어 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란 시련을 이겨내며 신앙을 전수받은 이들이 주님 안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서로를 이끌어주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 구원에만 힘쓰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물음 특히 불의로 인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실존적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웃이 겪는 삶의 문제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며 함께 신앙 안에서 답을 찾아가는 것,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이 보여준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실존적 물음을 던지며 그 답을 함께 찾아가는 이들인가요?
프란치스코와 성체성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인격에 완전히 몰입되었던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그리고 그분의 현존과 살아있는 표지인 성체성사는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성체성사 안에 주님이 생활하시고 살아계신다.’ 제단은 그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핵심이자 사상과 행동들의 목표였다. 성체성사 안에서,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실재로서 그에게 오셨다.
성체성사는 그의 수도 생활 전체의 초점이었다. 이것은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형제적 사랑의 공동체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전의 어떤 성인도 따를 수 없는 깊은 성체 공경을 가졌다. 여러 가지 열렬한 권고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을 당신의 생활과 모범으로 보여주셨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성체에 대한 사랑으로 불탔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보인 주님의 인자하신 사랑과 사랑 넘치는 인자를 보고 넋을 잃었다. 최소한 한 번 미사참례를 안 하면 주님을 대단히 모독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자주 성체를 영하였고, 그가 영하는 것을 보면 다른 형제들도 경건한 마음이 생길 만큼 그렇게 경건하게 영하였다. 그는 성체에 대해 마땅히 바쳐야 할 온갖 공경을 다 바치면서 자기 육신 모두를 희생으로 바쳤고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을 받아 모실 때 마음의 제단에서 쉼 없이 타오르는 불길로 자기 마음을 하느님께 희생 제물로 바쳤다”(2첼라노 201)
만일, 병 때문에 성당에 못 갔을 때에는 사제보고 병실에서 자신을 위해 미사를 봉헌해 주도록 요청했다.(완덕의 거울 87) 이것마저 불가능할 때에는 그 날의 미사 독서 부분을 읽어 달라고 함으로써 미사에 영적으로 보필하곤 했다. “내가 미사에 참석할 수 없다면 나는 마치 미사에 참례하듯이 묵상하면서 또 영혼의 눈을 갖고서 그리스도의 몸을 흠숭합니다.”(완덕의 거울 175)
앞의 구절에서 ‘자기 육신 모두를 희생으로 바쳤다’, ‘마음의 제단에서 쉼 없이 타오르는 불길로 자기 마음을 하느님께 희생 제물로 바쳤다’로 표현되는 이 짧은 문장은 프란치스코가 성체신비를 얼마나 깊게 파악하며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분명히 알려준다.
그에게 미사 감사제는 단지 하나의 중요한 신심 행사나 경배 행사만이 아니다. 프란치스코는 거룩한 미사성제에서 우리 죄를 기워 갚기 위해 죽임을 당하신 하느님의 어린양과 일치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같이 희생 제물로 자기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기 위해, 하느님에게만 속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고 하느님을 위해서만 살기 위해, 자기 육신 모두를 희생으로 바쳤고, 마음의 제단에서 자기 마음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
프란치스코에게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은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주님의 죽음을 재현하는 바로 그 신비이다. 성체는 죄인인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거룩한 제사이다. 그리스도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주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도록 힘을 받는 순간은 바로 성체를 받아 모실 때이다. 하느님은 성체 안에서 또다시 당신의 구원 즉, 사랑과 평화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이며, 또다시 당신의 피조물들과 화해를 이루신다.
프란치스코는 이 사상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나는 여러분들의 발에 입 맞추면서 또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으로 모든 형제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에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존경과 영예를 나타내도록 하십시오. 그분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평화롭게 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형제회에 보낸 편지 12-33)
성체성사에 대한 그의 공경심과 사랑은 성체성사와 관련된 것들에 대한 그의 열정을 솟아오르게 한 원천이었다. 세속에 있을 때 그는 성찬 전례에서 사용된 귀중한 장식물이나 성작 등을 구입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성당에 몰래 보내곤 했다.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를 비롯하여 성 베드로 성당까지 차례로 수리했다.
성체성사에 대한 그의 신심은 그에게 사제직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경심을 일으켰으며, 그는 거룩한 성사에 대한 공경심 때문에 그 누구보다 사제들을 존경하라고 형제들에게 늘 권고했다.
“로마 교회의 관습에 따라 올바르게 생활하는 성직자들에 대해 신앙심을 가지는 종은 복됩니다. 그리고 이분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비록 그분들이 죄인들이라 해도 주님 자신만이 이들을 판단하는 것을 당신 자신에게 유보시키기에 아무도 이분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에 봉사하는 직분, 즉 자기 자신들도 이를 영하고 자신들만이 다른 이들에게 분배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에 이 직분은 다른 어느 직분보다 더 큰 것인 만큼,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에게 짓는 죄보다 이분들에게 짓는 죄는 더 큰 것입니다.”(권고 26)
“사제 자신들도 성체를 영하고 사제들만이 다른 이들에게 분배하는 주님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지극히 높으신 아드님을 내 육신의 눈으로 결코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유언 10)
프란치스코가 지식 많은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당신이 믿고 있었던 신앙의 신비들을 그 마지막 결과까지 살았기 때문에 그는 신비들에 대해 아주 깊은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프란치스코에게 성체는 예수님이 이루어 주신 구원의 열매를 베푸는 성사인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프란치스코가 성체를 그리스도교적 삶의 중심으로 보고, 생활과 사도적 활동의 중심으로 그리고 또 생명의 원천으로 보는 것이다.
“미사를 거행할 때 거룩하고 깨끗한 지향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의 참다운 제사를 존경심을 가지고 순수한 사람이 되어 순수하게 드리도록 하십시오.”(형제회에 보낸 편지 16)
하느님께만 완전히 개방된 마음으로, 하느님을 위해서만 자유를 얻은 사람으로 미사성제를 거행할 것을 부탁한다.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하느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아버지의 뜻에 자기 자신을 굴복하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십자가의 제사를 재생하는, 그리스도의 제사의 재현인, 미사 감사제를 드릴 때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우리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합치해야 한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는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 자신 전부를 바쳐야한다. 하느님을 위해서만 살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해 죽고 그분을 위해서만 존재하기 위해,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자기 자신의 전 존재를 내놓아야 우리의 미사가 “나를 기념하는 예식”(형제회에 보낸 편지 16)이 될 것이니, “만약에 누가 다르게 거행한다면 배신자 유다가 되고,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인”(형제회에 보낸 편지 16)이 되는 것이다.
성체 성사는 세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성체 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추종자들에게 하신 약속의 완수로서의 현존이며, 전 세계의 모든 제단에서 매일 거행되는 파스카 사건으로서의 십자가상에서의 제사의 실현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참으로 실제적인 인격적 일치를 이루는 성사이다.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성체성사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성체에 대해 하는 모든 말씀은 구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성체와 교회 (1)
성 프란치스코는 그의 삶 안에서 성체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의 관련성을 깊이 통찰하였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비체인 교회에 대하여 더 할 수 없는 충성을 바쳤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애정을 그의 성체에 대한 사랑과 관련하여 고찰하여 보기로 한다.
그리스도의 신비체 - 일치의 성사
프란치스코가 회개 생활을 시작한 후 어느 날 허물어져 가는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던 중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부터 “프란치스코야, 보다시피 다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가서 수리 하여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 후로 그는 그 성당을 수리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왜냐하면 비록 하느님의 이 명령이 그리스도께서 당신 피로 값을 치르고 얻으신 교회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완전해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2생애 10-11)
그는 이 성당 외에도 성 베드로 성당, 후에 작은 형제회의 요람이 된 포르치운쿨라, 거룩한 동정녀 성당 등 아시시 근교의 많은 성당을 수리하였으며 수시로 이 성당들을 빗자루를 가지고 다니며 청소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동들은 비록 외부적인 교회이기는 하지만, 지극히 거룩한 주님의 몸과 피가 모셔져 있는 그리스도의 성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이 깊어질수록 그는 교회의 내적인 신비, 즉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가톨릭 교회에 더 깊은 애정을 가지고, 철저하게 가톨릭적이고 완전히 사도적인 마음 자세로 살기를 원하였다.(유언 11)
가톨릭 교회는 파스카 신비를 현재에 재현하고 미래에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성체를 자주 모시는 것을 권함으로써 신자와 공동체를 이 신비에 참여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집회에서 교회의 하느님 백성다운 면모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서 하느님 예배를 위하여 모인 공동체가 동일한 파스카 빵의 나눔, 동일한 신앙의 고백, 영성체를 통하여 사랑의 일치를 이루므로,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신비체임을 증명한다.
그런데 이러한 신비체의 각 지체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동등한 신분을 가지면서도 다양한 직분을 이행함으로써 신비체인 공동체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받은 거룩한 교회 안에서 주 하느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과 다음과 같은 품을 받은 사람들, 즉 사제들, 부제들, … 모든 성직자에게 그리고 모든 남녀 수도자에게 … 세상 어디서나 현재 있고 앞으로 있을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모든 국가와 모든 국민에게” 여러 계층의 신자들에게 “참된 신앙에 항구하기를” 부탁하고 있다.(인준받지 않은 회칙 23,7)
이처럼 ‘참된 신앙’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에 프란치스코 이외에도, 초대 교회의 이상적인 공동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명 하에 복음적 가난 운동을 주장하면서 교회 권위를 부정하고 성사 특히 성체성사를 인정치 않던 수많은 이단 운동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이단자는 프란치스코를 멀리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프란치스코의 설교 내용이 로마 교회에 대하여 절대적이며 조건 없이 맹목적일 정도의 순종이었으며, 이러한 순종은 곧 교회의 사제들에 대하여서도 깊은 존경을 드려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우리는 이미 성 프란치스코가 성체성사의 집전자로서의 사제들에게 각별한 존경을 드렸으며,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고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참된 미사의 주례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사제는 그의 대리인이며, 신자들은 공동으로 집전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교회의 모든 성사가 개인 은총의 행위이고 동시에 공동체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모든 신비체와 각 지체들은 다른 모든 은총과 구별되는, 성체성사의 은총에 대해서 심각히 고려해야만 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시는 은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프란치스코가 ‘마음과 입으로 주님을 모시기’ 위해 권고하는 것들에 대해, 모두가 깊은 반성을 하여야 할 것이다.
성체성사는 공동체의 제사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이다. 개개인의 영성체까지도 하느님과 교회와 개인의 일치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거룩한 모임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신 신자들은 이 지존한 성사로 적절히 드러나고 놀랍게 이루어지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교의헌장 11항)
프란치스코는 성체성사가 작은형제회 공동체의 일치의 끈이 되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이 전하는 대사제의 기도를 인용하여 모든 신자가 “하나가 되기”를 기도한다.(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II 58-60) 영성체(Communio)는 어원적으로 ‘다른 이와 하나가 됨(Unio Cum alio)’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치는 자신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 안에서만이 가능하다.
성 프란치스코는 모든 창조물, 모든 좋은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고 어떤 것이라도 자신을 위해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29)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할 때 이는 하느님과의 친교의 길을 막는 동시에 다른 인간 공동체에 대해서도 나눔의 길을 막아 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성체성사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성체성사를 가까이할수록 타인을 생각하는 공동체 의식이 발전하고 일상생활에 있어서 공동선의 추구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성모기사, 2017년 9월호, 김성학 사무엘(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 부산 기장성당 주임)]
성체와 교회 (2)
성체의 파견자
지난 달 살펴보았듯이 영성체로서 공동체 의식을 터득한 사람은 당연히 복음 선포에 앞장서서 하느님 나라를 전할 것이고, 공동선의 증진을 위하여 건전한 사회 참여에 함께함으로써 교회와 사회 발전에 많은 도움을 줄 수가 있다.
왜냐하면,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교회는 청중을 신앙과 신앙고백으로 이끌어 (…) 그들을 그리스도께 합체시켜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에 이르기까지 자라게”(교의헌장 17항) 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생활에 있어서 성체에 대한 사랑은 그 신심 자체에 폐쇄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이 사랑은 형제들에게로 향하는 파스카의 행진으로 전교의 성사가 되었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전교란 이미 자신을 주시고, 자신을 주면서 구원하시는 살아계신 예수님 현존의 영구한 빛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중심에 현존하고 계심으로써 이미 당신의 신비체는 계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성체에 대한 공경과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현존을 13세기의 모든 신자에게 인식시키려고 무척 노력하였다. 그리고 병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한 이 봉사직을 직접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편지를 통하여 이 점에 관한 열렬한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을 사용하였고, 그 편지 내용을 복사하여 모든 세계로 널리 알리기를 원하였다.
“이 편지의 내용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마을과 거리마다 널리 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곧바로 이것을 많이 베껴, 반드시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아주 부지런히 전하십시오.”(보호자 형제들에게 보내신 편지Ⅱ 7)
형제들이 선교 여행을 떠날 때면 아름다운 성합을 들리워서 파견했다는 사실은 이미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또한 자신의 선교지로서 프랑스를 택했던 일이나, 순교에 대한 열정으로 회교도들의 나라에 가고자 한 것도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어 마침내 빵의 형상에 현존해 계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불타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생각하는 신앙] 생각하는 자유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파리에서 유학할 때 세미나 시간에 교수님이 던진 질문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느꼈습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신앙에서 내 생각이 무슨 소용인가요? 그것은 하나의 ‘문화 충격’이었습니다. 정답에 익숙했던 나에게 비판적인 생각의 문화는 너무나 생소했습니다. 한국에서 ‘정답’을 요구한다면, 그곳에서는 ‘나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그곳의 교수님들은 내용 전달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학생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나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과연 나의 생각은 무얼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나의 생각을 갖고 있기나 한 것일까? 어디서 듣거나 읽은 남의 말을 내 생각인 것처럼 착각하고 산 것은 아닐까?
나를 자유롭게 하는 ‘생각’
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찾는 여정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다행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좋은 스승들을 만났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탐구하는 길에서는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좋은 질문은 이미 답을 포함하고 있다. 긴 시간 동안 무르익은 질문은 우리를 진리에 더 가깝게 다가서도록 한다…. 내 안에 있던, 단 한 번도 의문시하지 않았던 수많은 말과 생각에 물음을 던졌습니다. 어째서 그러냐고 말입니다. 그렇게 내 안에 있던 것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고, 나의 생각을 조금씩 다듬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진정으로 나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의 생각에 물음을 던지며, 타인의 말과 생각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졌습니다. 세상은 남의 말을 따라하는 ‘앵무새’가 아닌,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나 자신’을 바라고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생각하는 신앙인’ 마리아
누구보다 진지하게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던 사람은 나자렛의 마리아였습니다(루카 1,26-38 참조).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가브리엘 천사의 이 인사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으며,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였다”고 루카 복음서는 전합니다. 생각에 잠긴 마리아에게 천사는 하느님의 놀라운 계획을 전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두려움에 떨면서 맹목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의구심을 외면하지 않았고, 고개를 들어 질문을 던졌습니다. 생각하고 물음을 던지는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말로 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은 맹목적인 응답이 아니라, 어둠과 의구심을 거쳐낸 신앙의 응답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생각하였기에 자유로웠고, 신앙으로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질문을 던지는 신앙
보통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성직자는, 수도자는, 교리교사는 어떠한 의구심도 없이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알고 믿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마리아에게서 확인된 것처럼, 믿음은 놀라움과 의구심의 터널을 관통하며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솔직함입니다. 하느님과 교회를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해서는 안 되겠지만,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자세 또한 신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멉니다. 신앙과 삶에 대해 물음을 가짐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자신에게 솔직하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시다. 물음을 갖기 시작하면,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성경과 교리서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우리 삶에는 알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유아기적 신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물음을 던지며, 세상 사람들의 고뇌와 물음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문제, 죄와 악의 현실, 시련과 고통에 관심을 갖고, 성경을 벗 삼아 신앙의 길 위에서 진리를 갈망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놀라운 자유와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일상에서 거룩해지는 길
인간에게는 일차적 욕구인 생존의 욕구 외에 감성적 욕구인 사랑, 안정, 인정, 지성과 무엇보다 영적 충만함을 갈구하는 욕구가 있다. 즉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서는 “교회 안에서 모든 이는 교계에 소속된 사람이든 교계의 사목을 받는 사람이든 다 거룩함으로 부름받고 있다”(제5장 39항)고 말한다. 거룩함은 무엇일까? ‘거룩함(sanctification)’이란 한마디로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상에서 어떻게 성화의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
구약의 히브리어 ‘카도쉬’나 신약의 그리스어 ‘하기오스’는 모두 ‘거룩함’을 의미한다. 이 단어와 연결된 거룩한 시간, 사람, 장소, 사물 등이 모두 ‘하느님’과 연관된다. 탈출 19,6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내 백성’으로 불린다. 백성 전체가 거룩하다는 속성을 부여받는다(신명 7,6; 14,2.21; 26,19; 28,9 참조).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sanctified)’ 사람들을 “성도”(1코린 1,2)라고 부르며, 하느님께서 성도에게 원하시는 것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1테살 4,3)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도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을 겪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화의 삶은 하느님과 함께 그분의 본질인 거룩함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일상에서 우리 모두는 어떻게 성화의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 이를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가 아주 명쾌히 잘 설명해 준다. 라너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은총으로 인간에게 당신을 내주셨기에 인간은 원칙적으로 성화되어 있다고 보며, 이 성화는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즉 하느님께서는 구체적 일상의 삶에 현존하실 뿐 아니라 그 일상의 삶을 통해 거룩함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일상의 삶을 벗어난 은둔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고, 흔히 기도 중에 일어나는 어떤 황홀한 경험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삶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출발점으로 하고, 실제로 역사에 현존하셨고 구체적 현실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화도 우리의 육체와 마음, 지성이 통합된 가운데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야 한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에게 성화의 삶이란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현실을 직시하며 하느님뿐 아니라 이웃과 함께 매일 살아가는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의 봉헌 생활의 길은 ‘관계’와 연결된다
보편적 성화의 소명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삶의 길은 각 개인이 맺는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이를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로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자신과의 관계이다. 누구보다 자신을 알고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내가 존재해야 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관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느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배우고 타인에 대해 잘 파악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가장 먼저인데도 그렇게 하기가 가장 어렵다. 그러나 위대한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모든 것은 ‘자신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진정으로 성화되는 것은 자신의 인간성을 수용해야만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행복과 불행의 요인을 타인이 제공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행복과 불행을 내 안에서 체험하도록 최종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바로 ‘나’다. 현대인은 한순간에 동시다발적 행위를 자주 한다. 예를 들면, 커피를 마시면서 이어셋을 끼고 전화를 받고, 한 손으로는 컴퓨터로 검색하고, 그 사이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틈틈이 훔쳐보며, 머릿속으로는 또 다른 생각을 한다. 한편으로 보면 인간의 능력이 이렇듯 위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순간도 제대로 깊이 존재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이러한 번잡함 속에서 자신의 전일성(wholeness)을 위해 작고 고요한 소리로 자신에게 말하는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신학에서 말하는 ‘지금 바로 여기(here and now)’에 머물기는 지금 이 순간의 나의 감정, 생각,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느님과 함께 현존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일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일을 하는데 내가 아닌 타인이 그런 나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현재의 자신이 어떤 배경을 지니고 살아왔는지, 그 배경이 현재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19,19)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을까?
각자 맞이하는 ‘현재’는 과거의 투영임이 인지된 사실이고, 그 과거는 여전히 자신 안에 살아 있다. 그러므로 과거를 보내고 현재를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즉 현재 자신에게 일어나는 긴장, 두려움, 슬픔, 분노의 감정, 생각, 열망, 행동의 패턴 등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지켜보고 정화할 수 있어야 한다. 집회 3,25에는 “눈이 멀고서야 어찌 빛을 보랴? 자신도 모르면서 남을 설득하려 들지 말아라”(《공동번역 성서》)고 쓰여 있다. 놀랍게도 우리는 자신을 아는 만큼 이웃을 알고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한다.
둘째, 이웃과의 관계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인류를 위해 자신이 무엇인가를 기여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각 개인이 자신을 더욱 잘 아는 것은 세상의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 자신을 고귀하게 사랑할 때 자신이 속한 가정, 사회, 세상을 살리기 위해 행동한다.
사람들은 종종 이 세상이 힘 있는 나라들이나 몇몇 정치 지도자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각 개인이 뿜어내는 보이지 않는 ‘생명의 힘’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바로 거미줄처럼 엮인 ‘인간관계의 그물망(web)’에서 나오는 힘의 연계성으로 지구가 존속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무질서는 인간 각자가 창조해 내는 무질서(chaos)의 결과이며, 세상의 조화는 인간 각자가 창조해 내는 조화(cosmos) 덕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삶에 의미를 주는 진리는 사랑이 우리를 어루만질 때 비로소 빛을 주며, 사랑하는 이가 체험하는 진리는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받는 사람과의 일치를 통해 현실을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것이다(회칙 〈신앙의 빛〉 27항 참조).
셋째,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명제를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현실에서는 상황에 따라 하느님을 좋은 분, 나쁜 분으로 판단하며 살아간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하느님은 배워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기에 기도로써 그분을 알아가야 한다. 하느님을 깊이 아는 것은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무지의 구름》에서 말하듯 ‘하느님은 생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시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은 의인 욥은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공동번역 성서》 욥 42,5)라고 고백한다. 욥이 그 전에 하느님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을 깊이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내 삶에서 체험되고 인식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깊이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은 바로 앎과 연결되고 진정한 관계가 맺어진다. 사랑은 불타오르는 감정의 변화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가지고 그 대상과의 관계를 이끌어 가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숨을 쉴 때 드나드는 그분의 숨결(창세 2,7 참조)을 느끼고, 자기 삶 전반에 현존하시는 그분을 느낄 때 하느님의 거룩함은 자신의 전 존재에 젖어들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히브 13,8)이라고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성화’의 삶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일상을 살면서 자신을 정화하고 알고 사랑하며, 동시에 하느님을 섬기고 자신이 세상(이웃)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뭔가로 기여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단지 오늘 이 순간 내 곁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보내는 순수한 한 번의 ‘미소’일지라도 말이다.
세상과 교회의 경계에서 찾는 ‘신앙 감각’
세상을 읽는 ‘감각(sense)’이 있다. 운동이나 예술 영역에 타고난 감각, 또는 숙련된 감각이 있는 것처럼, 세상의 다양한 표징을 읽고 해석하는 데 필요한 감각이 누구에게나 있다. 보통 ‘센스(sense) 있는 사람’이란 주변 상황을 잘 파악해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판단하는 사람이다. 반면 ‘센스 없는 사람’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일어나는 일의 정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만 매여 있는 사람이다. 우리의 감각은 언제나 내가 아닌 타자와 소통하고 교감하여 일깨워지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사제 생활 15년 만에 처음으로 본당 신부가 된 후 신자들과 만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영적 교감과 소통이다. 신자들은 본당 신부가 새로 부임하면 신부의 성향과 관심사, 전례와 사목 방향에 주목한다. 미사를 봉헌하는 모습, 강론 내용, 단체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신부가 교회와 세상을 이해하는 감각을 판단하곤 한다. 본당 신부가 된 후 가장 큰 변화는 혼자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었다. 또 신자들과 눈길을 마주치고 손을 맞잡으면서 신자들의 관심과 교회 생활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세심하게 살피는 일이었다. 예전에 신학교에서 지낼 때 다른 신부님들과 미사를 공동 집전하고 신학생들과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 운동하는 생활 공동체를 이루며 가졌던 감각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인 셈이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이해하는 감각을 갖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교감하고 소통해 왔는지에 따라, 그리고 나의 인격을 성장시켜 주는 좋은 멘토와 친구, 인생의 길잡이가 되는 책과 조언, 삶의 아픔과 고뇌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이해하는 감각을 갖게 된다. 세상과 얼마나 소통하고 교감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읽는 감각도 달라진다. 외톨이로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있지 않고, 관계 속에서 자아를 의식하며 타인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 놓는 자세는 세상을 깊이 이해하는 센스를 키우는 중요한 요소이다. 과거처럼 지식이나 감성만이 중요하지 않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소통하고 관계 맺는 능력이 있는지를 보는 ‘공존지수(NQ: network quotient)’가 오늘날 중요한 삶의 척도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계 속에서 세상을 보지 않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볼 때 감각은 ‘이기적 감각’으로 전락한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동물적 감각’이 세상을 지배할 때 인간 영혼을 감싸고 있는 영적 감각,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심어 주신 영적 소통 능력과 감수성은 퇴락해 버린다. 소통의 부재나 이기적 탐욕으로 인한 소유와 경쟁의 세속적 가치가 중요하게 여겨질수록, 사회는 세상의 표징 속에 숨겨진 영원하고 초월적인 가치를 무시하는 ‘세속화 현상’을 보인다. 지난해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신앙의 해’는 그리스도의 복음적 가치가 상대화하고 세속화한 문화에 밀려 약화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경고다.
‘신앙의 해’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영적 감각을 회복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되찾으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창세 2,7) 넣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떠나 살 수 없지만, 동시에 세상에 매몰되어 살아서도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동물처럼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살지 않고 자기 안에 담겨진 하느님 생명의 숨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와 함께 호흡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적 감각은 하느님 위에 굳게 서는 ‘신앙 감각’이어야
그리스도인의 영적 감각은 우리 영혼의 고향, 곧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신 하느님을 믿고 그분 위에 굳게 서는 믿음의 감각이어야 한다. 믿음은 하느님이라는 든든한 반석 위에 자신의 기초를 세우는 것, 그래서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떠나서는 참된 생명의 숨을 쉴 수 없다는 고백이다.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숨, 곧 영의 힘으로 세상을 새롭게 보고 세상에서 내가 살아온 이유와 살아 갈 이유를 찾게 해 주는 영적 감각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영적 감각을 세상과 교회의 경계에서 발견하고 성장시켜 나간다. 본당 신부가 되고 나서 깨달은 점 가운데 하나는 누구에게나 존경과 인정을 받는 사제의 삶이 아니라, 내 생각에 반대하고 내 행동과 말을 구설수에 올린 이들과, 나를 둘러싼 오해와 편견을 통해 오히려 내가 성장하고 세상을 읽는 감각을 새롭게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 드러난 참된 하느님의 표징, 즉 십자가의 어둠 속에서 하느님의 거룩함과 숭고함을, 가난과 억압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을, 죄악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꽃피도록 헌신하는 아름다움을 식별할 영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속된 세상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하느님 구원의 아름다운 드라마에 감동하는 순간이 필요하다.
교회에 몸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세속화한 세상에서 신앙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초대되었다. 그것은 세상과 교회의 경계에서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진리의 성령께 자신을 맡기는 ‘신앙 감각(sensus fidei)’의 은사를 회복하는 일이다. 신앙 감각은 우리의 감각이 신앙으로 정화되고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갖고 살 수 있게 하는 ‘카리스마(은사)’다. 신앙 감각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파견된 교회와 세상에서 하느님을 찾는 신앙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교회의 감각을 가지고 기쁘게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교회 생활이 세상 밖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개 신앙을 문화생활의 일부로 여긴다. 교회를 떠나 믿음이 성장할 수 없는데도 제도권 교회에 몸을 담는 일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교회 없이 자신만의 신앙에 안주하는 이가 많아졌다. 교회에 봉사하면 사업과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성직자와 수도자와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믿음 전체를 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더 이상 하느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소비와 향락의 문화가 판을 치고, 아무리 애를 써도 하느님께서 밥 먹여주시지 않는다는 자조 섞인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다.
그러다 보니 아예 세상과 담을 쌓고 믿음에 모든 것을 거는 극단적 선택도 생긴다.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종교에 몰두하거나, 자기 주변을 돌보지 않으면서 교회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도 있다. 미사 시간에 혼자 성체조배를 하고, 강론 시간에는 주보를 펴거나 묵주 기도를 하며, 신자들과 친교를 맺기가 싫어 미사가 끝나기도 전에 사제보다 먼저 퇴장하고, 행여 구역과 반모임에 나오라는 말을 들으면 손사래를 친다. 그야말로 ‘선택적 신앙’, ‘카페테리아 신앙’이 대세가 된 모양새다.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신앙생활을 하느라 신자들은 자신의 전 존재를 하느님과 교회에 투신하기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교회 생활은 엄연히 세상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세상은 죄와 악이 판치는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오셔서 육肉을 취하고 사람이 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는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는 대속의 죽음으로 세상을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 바꿔 주셨음을 알아야 한다. 또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을 드러내는 표징과 도구가 바로 교회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숨겨진 하느님의 표징과 흔적을 찾으며 자신을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이 되게 하여, 세상 속으로 들어가 빛과 소금으로서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은 내 신앙이 성장하는 자리이고, 세상 사람들이 모인 하느님 백성의 교회는 하느님을 향한 ‘초월적 갈망’이 시작되는 곳이다. 죄와 속됨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10)고 하셨던 창조의 아름다움을 다시 만나기 위하여 우리의 비뚤어진 감각을 새롭게 정화해야 하는 자리이다.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무는 적지 않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 걱정보다 먼저 성호경을 긋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일. 잠들 때 감사 기도를 바치고, 공공장소에서 부끄러움 없이 식사 전후에 성호를 긋고 기도하며,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도하는 것(1테살 5,16-18 참조). 의무가 아닌 은총의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를 모시고 예수님을 닮고자 하며, 성체 앞에서 자기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 주일 미사 참례를 하지 못한 것뿐 아니라 하느님을 멀리한 모든 삶의 모순과 사랑하지 않은 죄를 고백할 줄 알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일. 성직자과 수도자의 인간적 결함을 신앙의 눈으로 덮어 주고 기도하며 교회를 사랑하는 일 등. 우리는 세상에서 교회의 감각을 가지고 기쁘게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과 교회의 경계 위에 선다는 것은 세상 밖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맹신과 다르다. 가톨릭 신앙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요한 3,16) 하신 하느님의 보편된 사랑에 뿌리를 둔다. 이 보편성을 찾아가는 신앙의 여정이야말로 우리가 지내는 ‘신앙의 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한해를, 불신과 미움의 경계와 한계를 ‘넘어서’ 끊임없이 우리의 영적 감각을 하느님께 향하는 삶이 되도록 이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