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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거부의 사랑
33: 3-5
3.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4.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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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거부도 사랑이다! ?
오늘 말씀은 참 이해하기 힘든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동행을 거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럼 혹시 하나님께서 동행을 거부하셨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뜻일까요?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철회하신다는 것일까요?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오히려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동행하실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동행을 하다가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약속을 철회하실까, 사랑하는 백성에게 진노하여 이들을 멸망시킬까 염려가 되어 동행을 거부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차갑고 냉정하게 보일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유명한 크리스천 개그작가인 전영호 씨의 책에 아주 재미있는 비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쥐 잡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에는 모든 집에서 쥐약을 놓았습니다. 때로는 학교에서 잡은 쥐의 꼬리를 가져오라고 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쥐를 잡기 전날에는 개들의 울부짖는 소리도 함께 들게 됩니다. 이유인 즉, 어느 집의 개 주인이 쥐약을 묻혀서 놓는 먹이를 가지고 개를 부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으려고 하면 주인이 사정없이 때립니다. 순간 개는 큰 배신감을 느끼지요.
꼬리를 흔들고 왔는데, 먹을 것을 준다고 불러서 왔는데, 먹자마자 때리는 주인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분한 마음이 들었겠지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주인이 부릅니다. 아까와 같은 먹이를 가지고 말입니다. 주인이 왜 때렸는지 이유를 모르는 개는 그 음식을 보자 군침이 돌고 다시 먹으려고 합니다. 그 순간 주인이 사정없이 또 개를 때립니다. 개 패듯이. 영문도 모르고 얻어터진 개는 이제 그 음식만 봐도 치가 떨리게 됩니다.
다음날 온 동네에 쥐약을 놓습니다. 그런데 하루를 지나고 나면 쥐만 죽는 것이 아니라 개와 고양이도 거품을 물고 죽어 있습니다. 오로지 개 패듯이 맞았던 개만 살아서 돌아다니게 됩니다.
시편 119편 71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전영호 씨는 자신의 삶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잘나가던 때, 돈을 좀 벌던 때, 이제는 작가로서가 아니고 사업을 하겠다고 거들먹거리던 때, 자신의 마음대로 세상을 살 것 같았던 때에 깨닫게 된 것이 있답니다.
세상을 다 얻고도 주님을 잃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사업이 망하고, 건강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얼마나 사랑하면 안 죽을 만큼 때렸을까?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할까봐 모질게 매질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 학교 선생님 아들과 함께 절친하게 지내며 수업을 빼먹고 빵집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려서 학생부로 끌려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학생부 선생님이 자기는 출석부로 몇 대 때리고는 훈계만 하는데, 그 친구는 죽지 않을 만큼 때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신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데 다음날 게시판에 그 친구는 특별지도 7일, 자신은 정학 7일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맞지 않는 것이 그렇게 후회가 되더랍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은혜를 깨닫고 나니까 그 정학 7일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고백이 되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신앙의 고백과 경험이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은 패역하여 목이 곧은 백성에게 베푸시는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차갑게 보일지 모르지만, 너희를 죽일 수 없기에 동행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까봐 잠깐 유예하시며 기다리시는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패역함 가운데서 “동행 거부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동행 거부”도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했기에 동행을 거부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김우영 목사님은 “동행 거부의 가슴 아픈 사랑”을 설교하셨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동행거부의 사랑에서 “동행하는 사람의 축복”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너희를 진멸할까…”
오늘 말씀 가운데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우리를 진멸하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동행을 거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어떤 백성이기에 하나님께서 동행을 거부하십니까? 본문 3절입니다.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목이 곧은 백성”
여기에서 ‘목이 곧다’라는 말은, 흔히 동물에게서 사용되는 말입니다. 농부가 일을 시키려고 하는데 말을 잘 듣지 않는 소나 말 등에 쓰는 말입니다. 성경은 수없이 목이 곧은 교만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욥기 22장 29절에서도,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Living Bible]에서는 ‘목이 곧다’는 말을 두 가지 단어로 표현합니다.
“stubborn and unruly”
'stubborn'이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완고하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올바른 충고를 듣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출애굽기 33장 3절의 말씀이 기록되기까지의 이스라엘의 행태를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4장부터는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막과 제사장에 관한 모든 규례를 말씀하셨고, 출애굽기 31장에서는 안식일의 규례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일을 보십시오. 출애굽기 32장 1절입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가진 금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진멸될 위기에 처합니다. 이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 유명한 모세의 중보기도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출애굽기 32장 31-32절입니다. “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바로 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동행 거부’를 선언하십니다. 이들의 죄로 봐서는 죽어 마땅하기에, 잠시 유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럼 성경이 이러한 그들의 죄를 ‘목이 곧은’이라고 표현하는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들을 멸할 정도로 심각한 죄를 행한 근원이 무엇일까요?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결론을 내려 보았습니다. 영어성경에서 표현하는 “stubborn and unruly”라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을 기준으로 하는 교만함이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이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게 된 이유도 보면, 지도자인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규례를 정해주고 계셨는데, 정작 이들은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stubborn" 완고하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이란 자신의 생각이 고쳐지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점차로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교정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은 연수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께 맞추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겸손함이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신의 뜻을 꺾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을 보세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지금까지의 나의 나 된 것이 내가 잘나서 된 것이라는 착각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 요인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생긴 일입니다.
대성전 출입문을 너무 오래 사용한지라 문짝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예배시간은 다가오고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 교회의 새신자 중의 한 명이 등록을 했는데 직업이 목수입니다. 그 사람이 재빨리 나서서 완벽하게 고쳐 놨습니다.
목사님은 무언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었는데, 혹시 그 사람의 헌신을 무안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성도님 이 지갑은 우리교회 창립 기념일에 만든 선물입니다. 감사의 뜻으로 받아 주세요.
목수: (화를 버럭 내며) 목사님 제가 이런 것을 받으려고 문짝을 고친 줄 아십니까?
목사님: 아니 그럼 어떻게 해드려야죠?
목수: 그 지갑 대신 10만원만 주세요. 교회라서 싸게 해 드린 것입니다.
목사님: 그러세요. 그것 참 감사한 일이네요.
그러면서 목사님은 그 지갑에서 10만원을 꺼내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지갑에 30만원을 넣어서 무안하지 않게 사례를 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내가 이루어 놓은 일에 대한 보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장애 요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삶에 대해 보상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일반 경영의 원리에서도 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 된다고 경고합니다. 트라이 포드의 창업자인 보 피버디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운에는 능력이라고 하는 치명적인 유혹이 따르게 마련이다.
길을 가다 돈을 주었을 때,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반면 비즈니스 세계에서 행운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순전히 행운이 따라줘서 돈을 번 게 아니라 뛰어난 능력 덕택에 자신이 성공을 거머쥘 수 있었다고 믿는다.
행운과 능력을 혼동하는 순간 여러분은 몰락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첫 번째 성공을 운으로 돌리느냐 아니면 자신의 능력으로 돌리느냐 하는 것이 그 다음번 성공과 실패를 가릅니다. 성공을 행운으로 돌리는 사람은 연속적으로 행운이 찾아오는 것을 기대하는 대신 철저한 준비를 합니다. 반면 이를 능력으로 돌리는 사람의 자만심은 반드시 실패를 불러오게 됩니다.
이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제 멋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내가 하나님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나아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고, 광야 가운데 길을 내시고, 물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완악한 백성에게 당연히 따라오는 현상이 바로 ‘unruly’입니다.
‘unruly'라는 말의 뜻은 법을 잘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삼으실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을 만들어주셨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선택의 자유뿐 아니라 “순종의 자유”임을 알아야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되, 순종하면 축복하시리라는 약속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 여기에 있는 사람의 대부분이 그런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학창시절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예상했던 결과와 많은 점수 차이가 났던 때가 없었습니까? 가만히 가서 보면, 시험은 잘 봤는데 지시사항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이 곧은 자의 특징은 지시 사항을 잘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교만으로 나타납니까? 아주 간단한 일인데 신분과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누군가의 지시를 잘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멋대로 하려는 특징 때문입니다.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아야 자신이 뭐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계에서 어떤 회의를 한다든지 선교대회를 하면 어려움을 당하는 것 중의 하나가, 목회자들이 인도자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 지시를 따르는 일이 힘들고, 귀찮고, 무시당하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만이 하나님 앞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높임을 받은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무시하려고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를 통하여 영광을 받기를 원하시는데, 그 영광을 자신들이 가로채려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자녀를 통하여 말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아주 중요한 신앙적인 물음을 물으십시오.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까?”
“오늘도 당신은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며 존중하셨습니까? 아니면 조급하므로 하나님의 법을 깨고, 불의를 행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법을 깨고 살아가는 여러분과 하나님은 동행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당신을 징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동행을 거부하며” 순종하는 백성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떠난 것이 아니라 진노하심을 면하고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의 삶에서 순종의 선택하지 않음으로 인한 대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동행하는 사랑으로
축복은 “동행 거부의 사랑”에서 “동행하는 사랑”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도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받고 사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축복도 받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인생은 절대로 동행하지 않으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도, 동행이 거부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니까,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하나님의 경고를 이스라엘 백성이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회개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동행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동행하는 사랑으로, 축복의 삶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여기에서 ‘황송한 말씀’이라는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히브리어의 의미로는 ‘불길한 말씀’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심각하게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회개했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회개도 축복이다!”
회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가 이루어져야 하나님과의 동행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지닌 분이시지만, ‘불의’와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것이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의 측면입니다. 공의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사랑이 축복이 됩니다. 공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징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지 않으시면 누가 우리를 구원하며, 누가 우리를 막아 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동행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세상에서, 사단의 세력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지 않는 이 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을 때, 우리는 단순히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우리에게 접근해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심판을 유예하고 계시지만, 결국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이 개인적 종말이든지, 세상의 종말이든지 말입니다. 단지 그 죄에 대한 심판이 연장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너희를 진멸할까”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의 표현에 보면, “I would be tempted to destroy you”라고 되어 있습니다. 목이 곧고 제멋대로인 이스라엘을 보면 하나님께서 멸망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까봐 동행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에는 ‘공평’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교만함과 잘못 살았던 과거에도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충족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며 슬퍼하고 몸에 단장을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는 것은 예배자로 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제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하던 백성이 이제는 겸허하게 말씀 앞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갔음을 말입니다.
이런 옛날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소에 효가 뛰어나고 근검절약하기로 소문난 백성 3명이 궁궐로 뽑혀 올라갔습니다. 이들은 왕을 만나기 전에 상벌을 책임지는 관리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관리는 세 사람에게 묻습니다.
“이제 임금님께서 상을 내리실텐데 소망이 있으면 한 가지씩만 얘기해 보라”
백성 1 : “저의 소망은 집 한 채를 가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소망은 없습니다.”
백성 2 : “저의 소원은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곡식을 창고에 채워 수시는 것입니다.”
이제 관리는 세 번째 백성에게 묻습니다.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백성 3 : “예, 저는 임금님께서 딱 하룻밤만 저희 집에서 유하시고 가신다면 가문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자 주변의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아니 인생에서 다시 올수 없는 기회를 잡았는데 아깝게 되었구만.”
이 세 백성의 뜻은 임금님에게 전달이 되었고, 모두의 소원을 들어주시겠다는 윤허를 내렸습니다. 큰 집과 곳간을 가득 채우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룻밤 이지만 임금님이 묵을 그 집이 너무나 누추한 것입니다. 냄새가 나고 바람이 숭숭 드는 곳에서 어떻게 임금님이 잠을 잡니까?
또한, 문제는 그 집엘 가기 위해서는 좁디좁은 도랑 길을 건너가야 하는데 도저히 임금님의 행차가 불가능합니다.
어쩔 수 없이, 집을 고치고 다시 짓게 되었습니다.
모든 식구는 임금님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비단 옷으로 갈아입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가구가 바뀌고, 곳간이 채워지고, 주변의 환경이 정리되고, 널찍하게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미련한 자는 자신의 것을 채우려하지만, 겸손하고 현명한 자는 그분을 모시려합니다. 그분을 모시면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오시는 것만으로도 자신과 가정에 얼마나 큰 영광인지를 생각하기에, 그분이 오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셔서 우리의 삶에 동행자가 되시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거하면, 그분의 영광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영광스럽게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동행 거부의 사랑이 아니라 동행하는 사랑의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단지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고, 내 마음에 들어오시기를 요청하면 됩니다. 그분을 요청하기 위해서는 내 고집과 내 기준이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 속에 그분의 자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내 속에 들어오시면, 내 속에서 인격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도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의 말씀에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실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근심과 두려움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Leonard Sweet 교수의 설교를 기억하시나요? 당신의 삶에 광풍이 일어나고 있다면 이미 그 광풍을 이기시고 저 건너편에서 우리를 넉넉하게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을 보며 그 속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를 해하는 수많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단의 세력들이 우리를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나의 삶을 고집스럽게 만들어 갔을지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나의 나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동행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여러분을 영광스럽게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동행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축복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