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3-27
그 무렵 23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24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26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27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시 / 공생활 둘째해
185. 폭풍이 가라앉다
1944. 1. 30.
…모든 사람이 잠든 지금 저는 제 기쁨을 신부님께 말씀드립니다. 저는 오늘의 복음을 ‘보았습니다.’ 제가 오늘 아침 그 복음을 읽으며 ‘이것은 내가 결코 보지 못할 복음서의 에피소드로구나. 왜냐하면 이것은 환상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으니까’ 하고 생각했다는 것에 유의하십시오. 그런데 반대로 제가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있을 때에 그것이 와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것이 제가 본 것입니다.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배 한 척이 있다. 그것은 위에서 대여섯 사람이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어선이다. 그 배는 아름다운 감청색의 겐네사렛 호수의 물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여느 때처럼 흰옷을 입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왼팔에 머리를 얹고 계시고, 여러 겹으로 접힌 회청색 겉옷을 그분의 양팔과 머리 밑에 놓아두셨다. 그분께서는 배의 바닥에 누워 계시지 않고 앉아 계시며, 그분의 머리를 고물 끝에 있는 판자에 얹고 계신다. 나는 뱃사람들이 이 판자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그분께서는 조용히 주무시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지쳐 계시고, 평온하시다.
베드로는 키를 잡고 있고, 안드레아는 돛을 보살피고 있으며, 요한과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다른 두 사람은 아마 밤에 고기잡이하려고 준비하려는 것처럼 배 밑창에서 밧줄과 그물들을 정돈하고 있다. 해가 이미 서쪽에서 지고 있는 것을 보니 날이 저물어 가는 것 같다.
모든 제자들이 더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고, 노, 걸상, 바구니, 그물 따위를 지나서 배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데 있어 자기들의 옷에 방해받지 않으려고 그것들을 걷어 올리고 있다. 그들 중 아무도 겉옷을 입고 있지 않다.
나는 하늘이 구름들로 뒤덮이고, 한 야산 꼭대기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소나기구름으로 인하여 해가 가려지고 있는 것을 본다. 바람이 구름을 호수 쪽으로 빨리 몰고 온다. 지금 당장은 바람이 높이 불고 있어 호수는 아직 잔잔하다. 다만 그것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고, 그 수면은 더 이상 완전히 잔잔하지는 않다. 아직 파도들은 일지 않지만, 물은 출렁이기 시작한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하늘과 호수를 살펴보고 배를 부두에 대기 위하여 조종하려 한다. 그러나 갑자기 바람이 호수를 덮쳐 몇 분 사이에 모든 것이 부글부글 끓고 거품이 인다. 끓어오르는 파도들은 사람들을 서로 부딪치게 하고, 배에 부딪쳐 배를 들어 올렸다 내려놓았다 하며 배를 사방으로 이리저리 돌려 키를 조작하지 못하게 하고, 바람은 돛대에 붙잡아매야 하는 돛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것을 방해한다.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신다. 제자들의 걸음들과 흥분한 목소리들도, 거센 바람 소리와 뱃전과 이물에 파도가 부딪치는 파도들도 그분을 깨우지 못한다. 그분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리고, 물방울들이 그분에게까지 미친다. 그래도 그분께서는 여전히 주무시고 계신다. 요한은 이물에 있다가 고물로 가서 한 널빤지 아래서 자기의 겉옷을 꺼내와 섬세한 사랑으로 그분을 덮어드린다.
폭풍은 점점 더 광포해진다. 호수는 마치 잉크를 쏟아 부은 것처럼 시커멓고 파도들의 거품으로 줄무늬가 생겨 있다. 물이 배 안으로 넘쳐 들어오고, 배는 바람에 밀려 호수 가운데로 점점 더 깊이 밀려들어간다. 제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배를 조종하고 쏟아져 들어온 물을 퍼내고 있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은 이제 무릎까지 차오르는 물속에서 철벅거리고 있고, 배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다.
베드로는 침착성과 참을성을 잃는다. 그는 키를 아우에게 맡기고, 비틀거리면서 예수께로 가서 그분을 세차게 흔든다.
예수께서는 잠에서 깨어나시며 머리를 드신다.
“선생님,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빠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외친다(들리게 하려면 큰 소리로 외쳐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사도를 응시하시고 다른 제자들을 바라보신 다음 호수를 바라보신다.
“너는 내가 너희를 구해줄 수 있다고 믿느냐?”
“빨리요, 선생님”
베드로가 외치는데, 그때 정말 산더미 같은 파도가 호수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그 보잘것없는 배를 향하여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그 파도가 얼마나 높고 무서운지, 그것은 회오리바람에 불려 올라가는 큰 물기둥처럼 보인다. 그것이 오는 것을 보는 제자들은 무릎을 꿇고 이제는 끝장이라고 확신하며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붙잡는다.
예수께서는 일어서신다. 그분께서는 고물에 있는 널빤지에 올라서신다. 검푸른 호수를 배경으로 그분의 흰 얼굴은 두드러져 보인다. 그분께서는 그 파도를 향하여 양팔을 뻗으시고 바람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멈추어라. 그리고 잠잠해져라.”
그 다음에 그분께서는 물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잔잔해져라. 나는 그것을 원한다.”
그러자 그 물기둥은 스러져 거품이 되어 손해를 끼치지 않고 마지막 포효가 속삭임이 되어 사라지고, 바람소리도 휘파람이 되었다가 한숨으로 변한다. 하늘은 진정된 호수 위에서 다시 맑아지고, 그 동안 희망과 믿음이 제자들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나는 예수의 위엄을 묘사할 수 없다. 보지 않고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내면 깊은 곳에서 그 위엄에 경탄한다. 왜냐하면 그 위엄은 여전히 내 마음에 현존하며, 예수의 잠이 얼마나 평온했는지, 바람과 파도에 대한 그분의 명령이 얼마나 위압적이었는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복음서를 다른 모든 사람이 해석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설해주지 않고, 복음서의 이 대목에 선행하는 상황을 명백히 밝혀주겠다.
내가 왜 자고 있었느냐? 혹여 내가 폭풍이 불어올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었느냐? 아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아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자고 있었느냐?
마리아야, 사도들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착한 뜻으로 충만해 있었지만, 여전히 아주 많이 ‘사람들’일 뿐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항상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가 실제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될 때 그는 오만과 자기의 ‘능력’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차게 된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훌륭한 어부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배를 다루는 일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훌륭한 ‘선생님(Rabbi)’이었지만, 뱃사람으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자기들을 도와줄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은 갈릴래아 바다를 항행하는 배 위에서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니 그저 앉아 있기만 하라고 청했던 것이다. 내가 어떤 물질적인 일을 하기를 원치 않았던 그들의 생각의 이면에는 나에 대한 그들의 애정도 있었지만, 그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집착이 애정보다 우세했던 것이다.
마리아야, 나는 예외적인 경우들 외에는 내 뜻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체로 나는 너희를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기다린다. 그날 나는 피곤했었다. 그들은 유능한 자신들이 알아서 할 테니 쉬라고 나에게 말했었다. 그래서 나는 잤다. 내 잠에는 사람은 역시 ‘사람’이라는 것과 사람은 하느님께서 그를 도와주시기만을 바라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제 힘으로 일하기를 원한다는 확인도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영적인 귀머거리들’, 그 ‘영적인 소경들’에게서 ‘자신들의 힘으로 하기(to do by themselves)를 원했기 때문에’ 세기들을 통하여 파멸로 가게 될 모든 영적인 귀머거리와 소경들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도와달라고 호소하기를 기다리며 그들의 필요를 들여다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베드로가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을 때 내 고민은 돌처럼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냥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사람이다. 나는 너희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너희는 너희의 충고나 도움을 거절한 누군가가 곤경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설사 너희가 그것을 기뻐할 정도로 악하지는 않다 해도, 도와달라는 그의 호소에 냉담한 채 경멸적이고 무관심하게 그를 쳐다볼 정도로 몰인정하다. 그런 너희의 태도는 이런 뜻이다. ‘내가 당신을 도와주려고 했을 때 당신은 내 도움을 거절했지요? 자, 이제 당신 혼자 해보세요.’
그러나 나는 예수다. 나는 구세주다. 그래서 나는 구해준다. 마리아야, 나는 언제나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자마자 구해준다.
그 불쌍한 사람들이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께서는 왜 폭풍이나 태풍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십니까?’ 만일 내가 내 능력으로 악(Evil)을 없애버린다면, 그것이 사실은 내 선물인데도 너희는 너희 스스로 선(Good)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너희는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않게 될 것이다.
가엾은 내 자녀들아, 너희에게 아버지께서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려면, 고통이 필요하다. 굶주렸을 때에야 자기에게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을 기억했던 그 탕자처럼 말이다.
불행들은 너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수많은 오류의 원인인 너희의 무지, 수많은 슬픔과 고통의 원인인 너희의 악의, 스스로 벌어들인 벌의 원인인 너희의 잘못, 그리고 내 현존, 내 능력, 내 착함을 너희에게 믿게 하는 데 필요하다.
이것이 오늘의 복음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가엾은 내 자녀들아, 현재의 ‘너희’의 복음 말이다.
나를 불러라. 그는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가 고뇌 가운데 있을 때를 빼놓고는 자지 않는다.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나는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