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베껴쓰기_248] IT 전당포 / 심윤희 논설위원 / 매일경제신문 / 2015.09.14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을 쓴 1865년은 그에게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 그전해에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정신적 지주였던 형마저 막대한 빚을 남기고 사망했다. 그는 모든 작품판권과 앞으로 쓸 소설 한 편을 3000루블을 받고 출판업자에게 넘긴다. 하지만 도박으로 돈을 다 잃고 전당포를 뻔지나게 드나드는 신세가 되고 만다.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사회의 악으로 지목하고 살해한 사람이 전당포 노파였던 것도 그의 경제적 궁핍에서 비롯된 듯싶다.
전당포는 물건을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는 사금융의 일종이다. 1960~197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는데, 서민들이 패물이나 고가 저당물을 맡기고 돈을 융통할 수 있는 유용한 급전 창구였다. 하지만 남의 딱한 사정을 이용해 수입을 올린다는 측면에서 부정적인 시선도 적지 않았다. 사채업자처럼 빚 독촉을 하지는 않지만 물품 시세의 절반만 쳐서 돈을 빌려주고 기한 내에 갚지 못하면 저당 잡힌 물건을 처분해 버리는 냉혹한 비즈니스다.
전당포는 신용카드가 보편화하면서 급속히 사양화했지만 지금도 강원랜드가 있는 고한·사북 거리에서는 전당포가 성업 중이다. 카지노에서 돈을 잃은 사람들이 물건을 맡기고 현찰을 빌리려고 몰려들기 때문이다.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전당포가 반짝 호황을 누렸던 것은 1997년 외환위기 때였다. 갑작스러운 경기 위축으로 살림살이가 힘들어지자 명품 핸드백, 시계, 귀금속, 밍크코트 등을 들고 나와 돈을 꾸는 명품족이 크게 늘었다.
그 후 전당포 얘기가 쏙 들어간 듯하더니 최근 'IT 전당포'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스마트폰, 노트북컴퓨터 등 IT기기를 주로 취급하는데, 주 고객은 과거와 달리 20·30대다. 통상 물품 시세 50~60%를 현금으로 빌려주고 월 3% 정도 이자를 받는 구조다. 은행보다 문턱이 낮아 취업준비생이나 고시생 등 돈에 쪼들리는 청춘들이 찾고 있지만 연율로 따지면 무려 30%짜리 고금리다. 명품과 달리 IT기기는 유행 사이클이 짧아 대출기간이 3개월로 제한되다 보니 돈을 못 갚아 물건을 포기하는 사람도 10명 중 2명이나 된다고 한다. 핀테그 시대에 구시대 유물인 전당포가 청년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청년실업의 그림자가 그만큼 짙다는 신호다. 최악의 취업난이 만들어낸 '신풍속도'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씁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