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과 귀엣말한 국정원장…DJ 왜 고집스럽게 보호했나 (100)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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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총선에서 나의 자민련은 17석으로 줄어드는 참패를 당했다. 나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내게 말해줬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마음을 추스르려고 했다.
“호랑이는 평소엔 먹이를 주고 목욕시켜 주는 사육사를 따르다가도 조금만 밟히기라도 하면 사육사를 물고 덤빈다”는 트루먼의 정치 경험과 교훈을 내가 잊은 것이다.
총선 패배는 유권자들이 자민련에 정신을 차리라고 매를 때린 것인 만큼 나는 겸허히 받아들이려 했다.
2000년 16대 총선 3개월 뒤인 7월 22일 김종필(JP) 자민련 명예총재(왼쪽)가 경기도 용인의 은화삼 컨트리 클럽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만났다. 이날 폭우로 골프가 취소된 뒤 회동에서 JP는 이 총재에게 원내 교섭단체 정족수를 20명에서 17명으로 완화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추후 이 총재는 대변인을 통해 “단둘이 앉은 시간은 30초에 불과하며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고 부인해 논란이 됐다. 중앙포토
정치를 하다 보면 여러 기복(起伏)과 시련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숫자가 적다고 할 일을 못하느냐”는 각오로 재기를 모색했다. 하지만 국회 원내 교섭단체(정족수 20석) 미달 상태에서 당의 입지가 옹색해지면서 내부의 동요와 외부의 유혹은 끊이지 않았다.
그때 야당인 제1당 한나라당, 제2당인 집권 민주당 모두 과반수에 미달했다. 나는 그 속에서 생존 공간을 마련해야 했고, 소속 의원들에게 우리 당이 가야 할 길은 ‘실사구시(實事求是)’라고 강조했다. 이를 두고 한나라당에선 노욕(老慾)이니, 줄타기 정치니 하는 비아냥과 비판을 했지만 나는 그대로 주저앉을 순 없었다. 자민련의 위상을 교섭단체로 바꾸려면 국회법 개정이 필요했지만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은 우리를 외면하고 무시했다. 그러던 이 총재로부터 나를 만나고 싶다는 뜻밖의 연락이 왔다. 그 만남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권유 때문으로 기억한다. YS는 “한나라당은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만들어 주고 JP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조언을 하고 있었다. 2000년 7월 22일 낮 경기도 용인의 은화삼 컨트리클럽에서 나는 이 총재를 만났다. 멀쩡하던 날씨가 폭우로 바뀌어 골프는 접어두고 클럽하우스로 들어갔다. 나와 이 총재는 7~8분쯤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이 총재에게 “원내 교섭단체 요건을 17명으로 고쳐줄 수 없습니까. 일본은 3명만 돼도 교섭단체로 인정합니다”고 부탁했다. 이 총재는 “제가 혼자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당의 의사를 모아 검토하겠습니다”고 응답했다. 나와 이 총재는 웃으며 손까지 마주 잡았다. 오랫동안 이 총재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회동 내용을 공개했다. 하지만 이 총재는 교섭단체 이야기를 나눈 것 자체를 묵살하고 부인했다. 그는 대변인을 통해 “단둘이 앉은 시간은 30초 불과하며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아무리 부정해도 하느님은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 아신다”는 말로 반박했다. 이는 가톨릭 신자인 이 총재가 들으라고 한 것이다. 이 총재로서는 97년 대통령선거에서 DJP 공조로 인해 분패한 쓰라림이 흉중(胸中)에 남아 있었겠지만 그런 응수는 상식에 벗어나고 터무니없었다.
국회법 개정안은 DJ의 민주당 주도로 상임위에서 충돌 끝에 통과되었지만 한나라당의 완강한 반대로 본회의에는 상정되지 못했다. 나는 금이 갔던 DJP 공조를 회복시켜 거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말 민주당에서 3명의 의원을 받아들여 교섭단체 신청서를 제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엔 우리 당 강창희 부총재가 ‘당의 정체성 상실’을 거론하며 반기를 들었다. 그는 당에서 제명됐고 얼마 뒤 한나라당으로 가버렸다. 당이 고통과 역경에 처했을 때 어려움과 고난을 함께 나누려 하지 않았다. 그의 빈자리는 민주당 장재식 의원을 추가로 끌어들여 메우고 교섭단체를 만들었다.
2001년 1월 나는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부부 동반 만찬을 하면서 DJP 공조 재가동에 합의했다. 하지만 복원 과정의 곡절만큼 파란이 일었다. 그해 8월 평양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축전 행사가 그 계기였다. 남측 대표단 일부가 김일성 생가에서 보인 ‘만경대 정신을 이어받자’는 행태에 대다수 국민은 분노와 충격에 빠졌다. 그 행사를 주관한 통일부의 임동원 장관에 대해 한나라당은 국무위원 해임안을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