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최린 ㅡ
최린
작성자:추월(가을 달)
작성시간:2019.12.09
조선 오백년!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이완용 그늘에 덮힌 친일 민족반역자들
ㅡ나라도 배신하고 사랑하는 여인도 배신한 최린! ㅡ
"민족 대표의 한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를 재판을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소에 사지를 묶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을사오적도 아니었다.
경술 국치때도 이완용, 민영휘, 송병준, 박영효처럼 나라의 막중한 책임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민족 반역 매국노 역할을 해 나라를 팔아 먹고
일제로 부터 작위를 받거나 포상금을 받지도 않았다.
그러기 보다는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대항하여 싸운 독립투사 였다.
당시 천도교 지도자로 3.1운동에 참여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최린'이다.
최린의 생애는 망국의 시대에 태어나 망국을 직접 겪고 3.1운동 당시 33인의 민족대표로서 독립투사였으나
3.1운동의 주동자로 3년간 투옥 후 변신해 철저한 친일파가 되어 해방을 맞이한다.
그리고 1949년 반민특위에 잡혀가 최후 진술에서 위와 같은 참회의 말을 했다.
반민특위 공판정에 같이있던 이광수가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한 것이다"라고 하자
최린은 이광수에게 강하게 반발하며, "입 닥쳐''라고 소리질렀다.
이처럼 최린은 그나마 양심은 남아 있었다.
당시 반민특위 공판에 나온 친일파들은 대다수가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난 살고자 친일을 했을 뿐, 되레 나만큼 나라를 생각한 사람이 어디있는가? 라며
정당화(이광수와 최남선이 대표적)하거나
일본이 전쟁에서 질 줄 몰랐다.(서정주),
지금 인재도 희귀한데 다른 놈들 갈구지 말고 차라리 나 한놈만 죽여라.(박중양),
아예 적반하장으로 날 재판에 세워두는 건 죄다 빨갱이 새끼다처럼
큰 소리치고 욕하고 악쓰는 이들까지 있었다.(대표적으로 이종형과 노덕술)
반민특위 재판장에서 최린이 참회의 말을 했다고 해서 친일민족반역이 용서 될 수 있는 것일까?
또 최린은 여성화가이자 여성 선각자인
나혜석과도 염문을 뿌린것이 당대의 톱 뉴스가 될 정도로 유명했다.
이처럼 최린은 3.1운동 이전 독립운동에 앞장 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후 친일파로 변절하였고,
해방 후 다시 자신의 친일 행각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진솔하게 참회한 이력의 특이한 인물이다.
최린은 일제시대 초기에는 독립투사였으나
3.1운동 이후 변절한 최남선, 이광수, 서정주, 김성수 등 조선의 지식인들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최린의 행적을 쫒아 가 본다.
최린은 구한 말 1878년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한학을 배우고 대한제국의 하급 관리로 출발했다.
최린은 1904년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하게 된다.
이후 동경 제일 중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한다.
1909년 귀국 후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고,
33세의 나이에 보성 고등 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지도자로서 3.1만세운동의 33인 민족대표로 참여했다.
최린은 경술국치 이후 3.1운동까지 그는 “독립 운동가”로 영향력이 컸다.
그러나 3.1 운동 때 체포되어 구속되었고,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후,
1920년대 초에 출소하여 그 이후 “민족 개량주의 노선”을 취함으로서 변절해 갔다.
당시 변절한 지식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일제는 3,1운동으로 조선민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겉으로나마 무단통치 대신 문화정치를 실시한다.
여기에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이 넘어갔다.
대표적인 인물이 최린, 최남선, 이광수. 서정주, 김성수 등이다.
이들이 주장한 민족개량주의 운동은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경제적으로 실력을 기르고
사상적으로 민족성을 개조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운동' 이었다.
특히 이광수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실어 민족성 개조를 주장하고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 이라는 사설을 실어 자치운동의 이론적 배경을 주장했다.
'민족개량주의 운동'은 '실력양성론'에서 '자치론'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극단적 친일노선으로 변질해 갔다.
'자치론' 이들의 논리나 내용은 그럴듯 했다.
그러나 자기들은 이런 논리로 일본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면서 조선의 젋은이들을 일본의 전장터로 몰아 냈다.
당시 일본은 눈꼽만큼도 조선에게 자치를 허용할 마음이 없었고 이들을 이용했을 뿐이다.
이들도 이런 일본의 속셈을 몰랐을 리 없다.
'빛좋은 개살구처럼 자기들만의 친일을 위한 명분쌓기에 불과했다
이 시기에 최린은 우리나라 최초 여성화가 나혜석과
뜨거운 염문을 뿌리고 추잡한 소송에 걸려 있었다.
나혜석은 한국 여성 최초의 세계 일주를 한 사람으로,
당시 변호사이자 일본 외무성 관료로 일했던 남편 김우영을 따라
2년여에 걸쳐 만주, 러시아, 유럽, 미주, 하와이 등을 여행했다.
나혜석이 파리 체류 중 당시 30개국 여행 중이던 최린을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당시 한국인 유학생 사회가 너무 좁으니 파리 한인 사회에서
나혜석은 최린의 작은댁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나혜석과 최린은 스무살 가까이 나이 차가 있었음에도 둘은 사랑에 빠졌다.
나혜석은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고 선언해
당대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며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하며 봉건적 남성 중심주의에
과감하게 맞서 여성의 인간적 권리를 요구한 투사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였기에 유부녀로서 스무살 연상의 최린과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의 결혼도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순정파 김우영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무리한 나혜석의 일본 유학시절 너무 사랑해 죽고 못살았던
그러나 폐병으로 일찍 세상을 뜬 시인 '최승구라는 남자 묘비를 세워 주라'는 것도 포함된
공개적인 혼인 약속 요구를 다 받아 들여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 순정파 김우영도 나혜석의 최린과의 불륜은 참아낼 수 없었다.
당시 잠시 베를린에 가서 공부하던 김우영은 불륜 소문을 듣고 몰래 파리에 돌아와 둘의 불륜을 목격한다.
이후 귀국하여 둘은 이혼한다.
정작 이혼후 솔로가 된 나혜석을 부담스러워 한 최린은 그녀를 매몰차게 모른체 한다.
나혜석은 최린 때문에 이혼 당했는데 최린이 나 몰라라 하니
최린을 정조 유린죄로 당시 돈 12,000원의 손해 배상(위자료)과 함께 고소한다.
최린은 이것에 대한 기사를 막으려고 동아일보 기자를 매수하고,
나혜석에게 2,000원이라는 돈을 주고 소 취하를 종용한다.
결국 나혜석은 패소하고 최린으로 부터 합의금조로 몇 천원을 받아 내는데 그친다.
이 일로 나혜석은 아주 부도덕한 여자로 몰리고
경제적으로도 최악의 상황에 빠져 여러 곳을 전전하다 해방 후 도로에서 객사를 하는비극을 겪는다.
지금도 이런 경우는 여자에게 수없는 손가락질 할 것인데 당시는 얼마나 심했을 것인가?
이런 일을 겪은 최린은 아예 내놓고 친일의 길에 나선다.
나혜석과 소송 중 권력의 큰 힘을 느꼈을 것이다.
1933년말 “대동방주의(대동아공영권의 전 모델)”를 내세우면서 이후부터는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완전 변절한다.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1938년에는 총독부 어용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이 된다.
1939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단장이 되었다.
최린의 창씨개명 명은 “가야마 린”(佳山麟)이다.
변절 이후 심지어 최린은 이런 말까지 남기며, 자신이 독립운동한 과거를 후회하였다.
“루스벨트여! 귀가 있으면 들어보라. 내가 윌슨의 자결주의에 속아 천황의 역적 노릇을 하였다.
이 절치부심할 원수야! 이제는 속지 않는다.
나는 과거를 청산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라!”
최린은 해방 이후 미군정으로부터 발표된 포고령에 따라, 조선 총독부 중추원직을 박탈당했다.
이어 천도교측은 그의 친일의 죄를 물어서, 그에게 은퇴를 권고하였으나 최린이 이를 거부했다.
결국은 천도교에서 영구 제명 당하고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최린은 1949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재판의 공판을 3차례 받았고,
이 과정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친일 행위를 시인하고 이 글 제일 위에 썼던 말처럼 솔직한 참회를 했다.
최린은 6.25 전쟁때, 북한에 납북되었고 이후 행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게 없다.
다만 1958년에 사망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최린은 당대의 지식인이었고 종교계의 최고 지도자였다.
젊었을 적 정신은 깨어 있었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었다.
최린은 3.1 운동 바로 직전, 33인 민족 대표로서 이름을 올렸는데
당시 일본 형사로 일하던 조선사람 신철은
최린이 3.1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최린은 신철을 찾아가 간곡히 설득 시켰다고 한다.
최린이 돈을 건네고 회유하려 했는데 신철은 최린의 간곡한 설득에
오히려 스스로 마음을 돌려 3.1 운동에 대한 허위 정보를 퍼뜨려
일경들을 엉뚱한 곳에 배치하게 만들었다.
3.1 운동 이후에 이런 신철의 행각이 발각되어 구속되자
신철은 유치장에서 숨겨둔 청산가리를 먹고 자결했다.
그런데 이런 신철을 간곡히 설득해 마음을 돌린 최린이
후에 악질 친일파로 변했다는 건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최린은 우리나라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염문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결국 나혜석이 이혼을 당하게 만들었는데 당시 나혜석만 욕먹었고
그는 모른 척 하였기에 요즘 여성 단체들이나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엄청 씹히기도 한다.
최린은 나라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큰 죄를 짓는 역사에 오명을 남기고 말았다.
♡♡♡시골해평 댓글ㅡ
한남자와 한여자의 이야기가 참으로 재미를 안기기도 하는건
우리의 역사적인 굴곡을
뼈저림을 주면서도
그 변질을 그대로 오르내린 사실과
또 인정하는 정신이
참으로 기특함이런가.....
우리네 썩은 출세욕이
국가와 민족보다는
아무래도 이기적으로 더 흐르고 있음을
그냥 인간이라고 이해 하기엔
꺼림직 스럽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