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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박 찬 덕 서교사
우리가 잠시 전에 누가복음 6장 17절부터 49절에서 나오는 주님의 그 신성한 가르침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인 요소들에 대한
말씀을 여러분들과 교제를 나눴습니다.
예수님의 인류를 향한 가르침은 첫 번째로 신성한 생명의 요소에 대한 것을 기초로 하고 있고 두 번째로는 말씀의 요소에
기초함으로 말미암아 유대 백성들 곧 유대 백성들 안에 있는 모든 인류들 왜냐하면 누가 복음이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구주의 복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 가르침은 이 신성한 생명과 말씀을 기초로 한 이 근원인 신성한 생명에 대한 말씀을 기초로 하여 가르치심을
통하여 원수를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원수를 선대하며 그리고 모든 자들을 저주하는 자들 미워하는 자들을 축복할 수 있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 근원인 생명은 바로 신성한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내적인 실제는 보이지 아니하는 신성한 생명이지만
그 생명을 외형적으로 드러나도록 말해내는 것이 바로 신성한 생명의 표현인 신성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인 것이고 말씀은 사람들 귀에 주님의 음성을 통하여 들려지는 생명을 외형적으로
말해내는 것과 표현해낸 것이 말씀이라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 요한 선생님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라고
우리들에게 누차 강조하고 계시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1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1:2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
1: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더라.
그래서 성경에서 나타난 이 신성한 말씀과 신성한 생명은 근원이신 신성한 생명으로부터 표현되어져서 외형적으로
말해낸 것이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라 불리울 뿐만 아니라 신성한 말씀과 신성한 생명은 하나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적인 신성한 생명을 통하여 신성한 말씀이 외형적으로 말해내어져서 우리들에게
표현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신성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신성한 생명을 소유받을 때 자동적으로 표현되어진
외형적으로 표현되어지고 말해 내어지는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선대하며 우리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자를 어떻게 축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구주께서만이 가지고 계신 최고 수준의 아름다운 품성을 통한 미덕들인 것입니다.
이 구주께서 지니신 최고 수준의 도덕성은 바로 우리가 그 내적인 신성한 생명에 기초한 신성한 말씀을 통하여
신성한 생명을 가진 자들만이 바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들인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에 신성한 생명을 소유받고 그리고 신성한 생명의 말씀의 표현을 통하여 우리가 외형적으로 사람들에게
그리 대할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생명은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인 생명은 내적인 것이고
말씀은 외형적으로 드러내지고 표현되어지고 나타내지는 것인데 이것이 그 영이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그 영을
소유할 때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말씀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신성한 근원이신 신성한 생명을 통하여 자신의 외형적인 외적으로 말해내는 바로 자신의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께서 영의 몸을 지니신 부활의 영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 생명과 말씀을 소유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신 그 영은 사실은 다름 아니라 죽음을 통과하시고 부활 안으로 들어가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바로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이 영은 내적인 생명이요 그리고 외적으로 말해내는
말씀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7장 1절부터 35절까지 세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첫 번째로는 백부장의 하인이 죽게 되었음으로 말미암아 곧 죽게 될 사람을 이 권위를 가지신 구주께서
고쳐주시는 장면이 7장 1절부터 10절까지 나오고요.
그리고 두 번째 7장 17절에서 남편 없이 사는 그 과부에게 오직 하나 남은 독자인 아들을 남편처럼 여기고
모든 삶을 의존하게 했던 그 독자 그 외아들이 죽음을 당했을 때 그 불쌍한 과부를 동정심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셔서
위로하시고 그리고 죽은 자의 그 관에 손을 대심으로 말미암아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시는 장면이
두 번째 단락을 통해서 기록되고 있고요.
그리고 이 세 번째는 누가복음 7장 18절부터 35절 사이에 선지자로 오신 침례 요한에게 바로 자신이 이 눈 먼 자가 보게되고
다리 저는 자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이가 살아나고 가난한 이가 복음을 듣는다 라고
말하라 라고 자신에게 찾아온 요한의 두 명의 그 제자에게 이 말씀을 전하라고 당부하시는 말씀을 통하여 침례자 요한이
잠시 후에 순교당할 그의 심령을 아주 견고하게 강화시키고자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이 말씀을 전하심으로 말미암아
침례자 요한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죽어가는 그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으로 치료하시고 또한 죽은 과부의 아들을 일으켜
세우심으로 말미암아 권위의 말씀으로 신성의 능력으로 그를 다시 살아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울고 있는 어머니에게
긍휼과 자비를 크게 베푸시는 구주의 모습과 더불어 이 침례자 선지자를 강화시키시는 이 세 가지 사실들은 따로따로
우리에게 어떤 개별적인 계시를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세 가지를 하나 되어 연합되게 하여서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큰 영적인 의미를 계시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지하고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7장 1절과 2절 말씀을 통하여 이 예수님께서 그 모든 말씀들을 백성들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셔서 백부장이 사랑하는 병들어 죽게 된 그 하인인 그 종을 고쳐주시는 장면이
여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 백부장은 로마 군대에서 100여 명의 군인들을 거느리는 높은 지위에 있는 군인이었던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느냐 하면 이 누가복음은 무슨 말씀이라고 했죠?
이방인이었던 누가라는 저자를 통하여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이방인들에게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계시해 주기 위하여 기록된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 믿는 모든 이방인들을 대표하고 있는 자가
백부장인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이방인입니다.
아마도 이방인으로서 이가 나중에 보면 유대민족을 매우 사랑하고 또 유대 민족들을 위하여 오늘날의 교회인 회당을 지어서
기부하는 이방인으로서 구주의 말씀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 모든 믿는 이방인들을 대표하고 있다고
누가복음 7장 7절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7: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①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여러분 유대 민족은 주님께 택정되어지고 선택되어진 민족으로서 선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있었던 민족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주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었던 것처럼 이 이방 사람인 백부장 역시 나 자신도 주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셔서 나의 종을 낫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바로 믿음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 안에서 구원받은 모든 믿는 이방인들을 사실상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이 백부장이 정말 주님의 말씀 안에서 믿음을 가진 자이심을 아시고 집으로 가시고 있는
도중에 백부장의 친구들을 먼저 주님께 보내어서 6절입니다.
7:6 예수께서 함께 가실쌔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는 이러한 얘기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 그저 내가 주님께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하거늘 어찌해서 저희 집에 들어오십니까?저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말씀만 하셔서 내 하인을 낫게 하옵소서라고 친구들을 통해서 간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8절을 통해서 또한 이 백부장은 나도 권위 아래에 놓인 사람이고 내 아래도 수많은 병사들이 있어 이 사람에게 가거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너라 하면 저 사람이 오고 나의 종에게 이것을 하여라 하면 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7장 1절부터 10절에서 기록한 전반적인 이 내용의 기록들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가지신 권위와 그 권위의 말씀을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백부장은 사람으로 오신 구주에게 제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하거늘 지고하신 구주께서 저희 집에
어떻게 방문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권위가 무엇인지 압니다.
제가 제 밑에 있는 군병들에게 이것을 하라 하면 하고 저것을 하라 명하면 저들이 제가 말한 것을 그대로 행합니다.
저는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이 우주 가운데 계신 높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신 권위자이심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어찌해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그 높으신 하나님께서만이 가지고 있는 그 높으신
권위 권세를 어찌 알고 있었을까요? 5절에 의하면 그 사람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며 백부장이죠. 백부장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며 우리를 위하여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7:5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그 정도로 유대민족을 사랑하였고 유대인들을 위하여 회당을 지을 정도로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소식을 접함으로 말미암아
구약 성경에 대한 또한 얼마간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졌을 것이라고 우리가 암시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 백부장은 그 사람으로 오신 구주를 7장 6절에서 주님 주라고 부릅니다.주님 더 수고하지 마십시오.
주 라고 부르는 이 주라는 인칭은 사람 구주께서 참된 권위를 가지신 우주 가운데 가장 높으신 권위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가 인식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참된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주가 되는 우주 가운데 가장 높으신 권위자이심을
그가 인식하고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부장은 자신의 어떤 로마 군대의 높은 지위의 백부장으로서 권위의
말씀에 대한 의미도 알았던 자이기 때문에 이 권위에 대한 것을 스스로 얘기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제 하인 제 종을 낳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라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그 우주 가운데 가장 높으신
지극히 높으신 이의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로서의 권위자이심을 알고 그 권위와 권위의 표현인 말씀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권위는 사실은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인 것이죠. 하나님의 그 지극히 높으신 자이신 하나님께서만이 가지고
계신 그 권위를 외형적으로 드러나서 외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권위로 인한 말씀이라는 것을
이 백부장은 알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부장의 종은 바로 이 사람 구주로 오신 바로 이 권위자로 오신 백부장의 믿음으로 인하여 온전히 치료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7장 9절에서 주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그동안에 찾아볼 수 없었던 유대민족들을 통해서는
전혀 나타나 보이지 않았던 그 큰 믿음에 대하여 크게 놀라셔서 말씀하시기를 7장 9절에서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그에게 놀라시며 돌이켜 쫓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방인 백부장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그 우주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만이 가지고 계신 그 권세를
가진 분으로 알아보았고, 그 또한 그분의 말씀이 치료하는 권세를 가진 말씀이심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권위는 내적인 것이라면 권위의 표현으로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로마 군대의 백부장은 사람으로 오신 구주를 믿고 구주로 인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서
그분의 권위의 표현인 말씀 또한 믿었다는 것입니다. 전에 제가 그런 말씀을 했었죠. 신성한 말씀은 신성한 생명의 표현이라는
말씀을 했죠. 신성한 생명은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인 것이고 말씀은 그 신성한 생명을 외적으로 말해내는 것 곧 외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라고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그냥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요한일서 1장 1절에서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사도요한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으로 칭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로마 백부장은 주님께서 우주 가운데 계신 가장 높으신 이의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분이심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이 오실 것을 청하지 않고 단지 말씀만 하실 것을 청한 것은 그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인 권위의 표현인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권위의 표현인 말씀이 정말 똑같은 것임을 알고 사람 구주에 대하여 주님이 내 집에 오는 것을 저는 감당치
못합니다라는 이 말에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이 백부장의 큰 믿음에 크게 놀라셔서 이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하면 여기에서 곧 죽게 될 백부장의 하인을 주님께서 고쳐주셨을 때 보통 우리는 일반적으로 구주께서
가지신 권위는 보통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지만 그 권위의 표현인 말씀을 아는 것은 극히 드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권위와 구주께서 가지신 그 우주 가운데 계신 가장 큰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의 권위와 그리고 그 높으신
권위의 말씀을 보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지만 그 구주께서 이 백부장과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에게 암시하고 계시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구주의 미덕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주님의 인간적인 미덕들이 어디서 나타납니까?
여러분 잘 보십시오. 말씀으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시는 것은 구주께서 가지신 우주 가운데 계신 권위와 그 권위의 표현인
말씀을 통해서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구주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구주께서는 온 우주의 주인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럼 백부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백부장은 기껏해야 로마 제국의 100명의 군대를 다스리는 백부장에 불과한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 100명을 다스리는 이 백부장의 집에 온 우주의 주권자이시고 권위자이시며 주인이신 그분이 어찌 백부장의
집으로 가실 수가 있답니까? 여러분 가만히 생각을 해보세요. 온 세계를 대표하는 미국의 대통령이 한국의 아주
조그마한 단체의 동네 동장을 만나려고 그 집을 찾아간다면 여러분 이것은 얼마나 기가 막힌 탑 이슈이겠습니까?
온 우주의 주인이신 그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한낱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백부장의 집으로 친히 방문하시려고
발걸음을 옮긴다는 이 사실은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주님의 아름다운 품성이 최고의 도덕적 수준인 미덕들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찌 한낱 로마 군대의 한 장교인 백부장을 보러 그 집을 방문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 백부장의 권위 아래에는 단지 100여 명의 군병이 있을 뿐이지만, 주 예수님의 권위 아래는 수천만의 천사와 온 만물과
온 세상과 온 우주가 다 주 예수님의 권위 아래 굴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바로 백부장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 모습은 신성을 지니신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주님의 인간적인 믿음 안에서 권위라는 신성한 속성이 동시에 표현된 놀라운 계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권위를 알고 있는 이 백부장을 향하여 말씀하셨고, 백부장의 종은 그때 말씀하심을 통하여 온전히 치료가
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서 나타난 백부장의 집으로 발걸음을
온 우주의 주인이신 그분이 단지 100명의 군병만 다스리고 있는 그 하찮은 권위를 가진 그 백부장이라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발걸음을 디디고 있는 이 모습 이 행위는 주님의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 나타난 주님의 신성한 속성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
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온 우주의 주인이신 분이십니다. 천만 천사와 온 우주가 그분의 권위 아래에 있습니다.
100여 명의 군대의 권위자인 그 사람 집에 방문한다는 것 자체는 주님의 그 인간적인 품성을 통한 아름다운 예수님의
신성한 속성들을 지니지 아니하셨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락에서 바로 7장 11절부터 17절에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죽은 아들을 일으켜 세우심으로
그 울고 있는 그 불쌍한 처지에 있는 정말 그 과부에게 자비와 긍휼과 동정심을 베푸시는 장면을 우리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지금 어디에서 이게 기록되고 있습니까?
이 장면은 바로 나인성이라는 곳으로 가셨을 때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절 말씀입니다.
그 나인 성문에 가까이 오셨을 때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사람의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경에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이런 말씀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가복음 7장 11절부터 17절 사이에서 나오는 나인성이라는 이름의 뜻을 알지 못하면 이 성경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7장 11절에서 얼마 뒤에 예수님께서 나인성이라는 곳으로 가시는데라는 이 나인성을 왜
기록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큰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 나인성이라는 이름의 뜻은 사랑스러운 즐거운 이런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갈릴리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나사렛에서 불과 약1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모래산 기슭에 있는 곳이 바로 나인성이고 또한 가버나움까지는 약 한 50k가 걸리는데요.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중에 죽은 자를 살린 일이 몇 번 있었습니까?
첫 번째로 역사적 순서적으로 바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이 첫 번째 죽은 자를 살린 일인 첫 번째 순서인 것입니다.
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린 것은 12살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린 일은 막 죽은 자인데 아버지의 믿음을 통해서 야이로
회당장의 12살 먹은 딸을 고치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바로 누가복음 7장 11절부터 17절 사이에 언급하고 있는 바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아까는 12살 먹은 소녀였다면 지금은 나이를 알 수 없는 보통 청년입니다.
예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딸은 막 죽은 자였지만 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 독자는 죽은 지 얼마 된 바로 그런 자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먹은 딸이 그 회당장 아버지의 믿음으로 다시 살아남을 받았다면 여기서는 순전히 그 과부의
어떤 요청이나 믿음을 전혀 보시지 않고 단지 주님이 크게 불쌍히 여기심과 동정심을 가지고 주님의 오직 긍휼하심을
통하여 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신약 성경을 통하여 공생애 동안에 죽은 자를 살린 마지막 일들 가운데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일인데
이 나사로는 12살 먹은 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달리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먹은 과부의 아들과 달리 나이가
꽉 찬 성년의 나이를 지닌 자였습니다.
이는 회당장 야이로 딸처럼 막 죽은 자도 아니고 어느 정도 죽은 지 하루 이틀 정도 지난 나인성과부의 아들도 아닌
죽은 지 이미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된 자. 이 나흘 된 자를 그 나사로와 야이로의 어떤 믿음이라기보다는 그리고 주님의
긍휼이라기보다는 신약 경륜 안에 있는 그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바로
나사로를 살린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러한 세 번의 죽은 자를 살린 일 가운데 두 번째인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은 여기에 특별한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것은 첫 번째로 나인성 안으로 주님께서 누가복음 7장 11절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성으로 가셨다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조금 전에 나인성이라는 이름의 뜻은 사랑스러운 즐거운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성으로 가시고 있었다 라는 얘기는
사랑스러운 동네에 들어가시고 있는 중이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예 사랑스러운 동네 즐거운 동네에 주님이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이 사랑스러운 동네 즐거운 동네가 되는 것은 주님이 들어가셔서 안에 계실 때 사랑스러운 동네가 될 수 있고
즐거운 동네가 될 수 있지. 주님이 들어가시기 직전까지는 슬픔과 애곡과 눈물과 참으로 비참한 마음의 상태만이 있는
곳의 동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나인이라 칭하는 사랑스러운 동네 즐거운 동네에 주님이 들어가실 때 참 사랑스러운 동네가 될 수 있고
즐거운 동네가 될 수 있지 주님이 들어가기 전에는 진정한 즐거움과 사랑스러운 동네가 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수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스러운 동네 즐거운 동네라 칭하는 이 나인성은 주님이 들어가셔서 계실 때만이 사랑스러운 동네가
되어서 그 나인성의 성읍에 사는 백성들이 바로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를 들자면 삭개오를 통해서나 나사로를 통해서 또는 수가성 우물가 여인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주님께서 오셔서 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그 당사자를 대면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되고 모든 것이 기쁨과 즐거움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스러운 동네라 칭하는 이 나인성이라는 이름의 지명을 가진 이 나인성이라는 동네는 기쁨과 즐거움
대신에 사랑스러운 동네 대신에 슬픔과 눈물만 있을 뿐입니다. 그 나인성 과부는 남편을 잃은 자 입니다.
남편도 잃었는데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인 독자까지 잃었네요.
이때 당면한 그 과부의 마음은 비통함과 눈물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에게 처해진 이 삶의 모습이 원래는 첫 사람 아담을 에덴동산이라는 곳에 두심으로 말미암아 사랑 스러운 동네
즐거운 곳 기쁨의 동산이 되도록 하셨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를 취함으로 말미암아 고통과 슬픔과 비통함만
있게 되어서 이 낙원에 머물 수 있는 자유를 빼앗김으로 말미암아 저주의 땅으로 쫓겨나는 삶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스러운 동네라 칭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나인성의 이 기쁨과 즐거움 대신에 슬픔과 비통함과 눈물만 가득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12절에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데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온다 라는 것은 죽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통하여 사람은 비통한 마음을 갖게 되고 슬픔과 눈물을 가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기쁨의 도성, 즐거움의
도성에 눈물과 사망과 슬픔과 비통함으로 가득 채워짐으로 말미암아 즐거움의 도성, 기쁨의 도성, 사랑스러운 도성 이라
칭할 수 없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그 즐거움의 도성 안에 사망의 슬픔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눈물과 비통함 때문에
그 성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12절에 예수님께서 성문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온다 라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사망으로 인하여 슬픔과 비통함과 고통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 나인성이라 칭하는 그 성에
속해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성 바깥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누가복음 7장 12절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자신의 그 제자들과 함께 그 나인성이라 칭하는 아름다운 동네, 사랑스러운 동네, 기쁨과 즐거움의
동네로 찾아 들어가십니다. 이것이 성육신하신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그분께서 이 세상에 임하심은 즐거움의 도성이요, 사랑스러운 에덴동산과 같은 기쁨의 도성 죽음으로 인하여 슬픔과
괴로움과 아픔과 비통함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 성으로 찾아오셔서 들어가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성 바깥으로 나가는 모든 그 일행들을 과부 어미를 비롯하여 그 죽은 아들까지도 포함한 그 장례 행렬을 따라가는
모든 이들이 다시 그 성으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환호, 그 죽은 자가 살아나는 그 일로 말미암아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영원히 사랑스러운 동네가 된다 라는 것을 전환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그 성을 나오는 일행들 가운데 딱 서셔서 예수님께서 성문 가까이 이르셨을 때 13절에 주님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울지 마십시오 라고 말씀하시고 14절에 다가가셔서 관에 손을 대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그 성에 들어가시는 중에 그 성읍 모든 사람들은 장례 행렬을 따라 그 성을 나올 수밖에 없는
그것이 바로 오늘날에 우리들이 처해 있는 현실에 불행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천년 전에 주님께서는 그 아름다운 동네라 칭하는 기쁨과 즐거움의 도성인 그 나인 성으로 찾아오셔서 그 장례
행렬을 따라 죽음의 행렬을 따라 바깥으로 그 고통과 비통함과 고통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발걸음을 다시
아름다운 도성 정말 그 즐거움의 도성 바로 사랑스러운 동네로 다시 발걸음을 되돌아가서 그곳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 성에 들어가시는 것이 성육신 하신 구주께서 세상에 임하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사람으로 오신 성육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로 말미암은 저주 때문에 사망을 당하게 되어 슬픔과 고통과 비통함과 눈물만 있는 그곳에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그 죽은 자를 신성한 생명으로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눈물과 슬픔과 고통의 동네였던 그곳을 기쁨과 즐거움의 동네로
바꿔 주심으로 말미암아 사랑스러운 동네가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 나인성에 찾아오셔서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바로 이 14절에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주님께서 그 청년에게 말씀하심은 오늘날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불행한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을 때 반드시 만나주셔서 함께 들어갑니다.
주님께서는 삭개오를 만나셔서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에게 오늘 내가 네 집에 유 하여야겠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함께 삭개오가 들어갔을 때 그 삭개오의 집은 잔치가 배설되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이와 같이 주님을 만나 주님과 함께 들어가 먹고 마시는 자들이 될 때 그 아름다운 도성
사랑스러운 동네, 그 사랑스러운 동네는 사망이 없는 슬픔과 고통이 없는 즐거움의 도성, 기쁨의 도성으로 전환이 되어서
바로 현실적으로 잔치를 배설하는 것 같은 신성한 생명 안에 있는 구주를 누리게 됨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의 동네에서
삶을 사는 자들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 지금 이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의 죽음은 어떤 죽음입니까? 청년의 죽음입니다.
12살 먹은 소녀의 죽음이 아니에요. 나사로처럼 어느 정도 자란 성년이 돼서 나이가 꽉 찬 성년의 죽음이 아니라
청년의 때에 가장 싱싱한 나이 생명을 소유하여서 마음껏 활개를 치고 마음껏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정말 모든 것을
사랑하도록 할 수 있는 그 나이인 것입니다.
근데 과부인 이 어머니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자 외아들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상적인 소망이 완전히 단절되어 버리고
세상적인 희망이 다 끊어져 버렸다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여인에게는 전에 남편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남편도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밖에 없는 소망의 끈인 이 외아들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적인 모든 희망과
소망이 완전히 끊어져버린 도무지 살아 가려해도 살아갈 수 없는 그러한 존재자라는 것입니다.
그 외아들의 어머니인 이 과부는 과거에는 남편이 있어서 그래도 희망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 남편은 이제 떠나보내고 이제 하나밖에 없는 독자 외아들을 의지하고 의존하고 소망의 끈을 가지고 살았는데
이 외아들 독자마저 죽음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이 기쁨과 즐거움이 다 사라져 버려서 그 나인성은 도무지 사랑스러운
동네가 전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어머니에게는 과거에는 참 남편이었겠고 지금은 최고의 유일한 소망과 희망이 바로 이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살았던 이 어머니에게 찾아온 그 외아들 독자의 죽음은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소망이
다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다 어떤 것들과도 바꿀 수 없는 독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소망과 희망들이 한꺼번에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이 이 과부의 비천한 처지에 빠진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들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소망인 외아들을 잃어버렸지만,
그 외아들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최고의 소망마저도 끊어져버린 상태이지만 이 여인에게 그가 전혀 결코 아직 알지
못하는 소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그것은 주님께서 그 나인성이라고 칭하는 그 사랑스러운 동네에 들어오고 있다 라는
그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나인성으로 오고 있다 라는 이 소식이 할렐루야~ 기쁜 소식 복음인 것입니다.참 복음입니다.
모든 은혜의 희년을 선포하여서 저주를 축복으로 포로된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고 잃어버린 모든 것을 빼앗긴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해 주고 잃어버린 장자권을 다시 되찾아주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을 되찾아주는 이것이 바로 사람으로 오신
구주 성육신 하신 구주께서 그 나인성으로 들어오고 있을 때 이 소식은 놀라운 기쁜 소식 이것이 참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인성을 향해서 제자들과 함께 그리고 제자들을 비롯한 주님을 따르는 자들, 주님 안에 들어온 자들,
그리고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주님 뒤에 따라오는 모든 행렬들은 언제나 생명의 행렬로서 기쁨과 즐거움을 도래시킬
그러한 사랑스러운 행렬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과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망의 행렬이 주님께서 오심을 통하여 생명의
행렬을 만나게 되는 것이 기쁜 소식 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놀라운 복음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과부는 아무 소망이 없는 세상에 그 어떤 것들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소망인 아들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가 알든지 모르든지 신성한 생명을 소유한 그 구주께서 생명의 행렬을 통하여 이 나인성으로 오고 있다
라는 그 자체가 기쁜 소식 참 복음으로써 그 과부에게는 참다운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참 소망입니다.
그 과부의 아들이 계속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여서 살아가는 것은 언젠가 제한적으로 언젠가 시한적으로 죽음을 맛보게
되기 때문에 그 소망은 영원한 소망이 아닌 것입니다. 그 여인의 진정한 기쁜 소식인 이 소망은 주님께서 신성한 생명을 가진
그분께서 생명의 행렬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나인성으로 들어오고 자신을 만나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그 과부 여자는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구주께서 이 교회를 통하여 구주의 이름이 있는 그곳은 사랑스러운 동네로서 기쁨과 즐거움의 잔치를 배설할 수 있는
그러한 신성한 생명의 행렬이 있는 곳이 오늘날의 교회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립니다.
이 과부를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이 하나밖에 없는 죽음 가운데 처한 이 아들을 보면서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 불쌍한 과부를 보시고 매우 큰 동정심과 긍휼하심을 가지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주님께서 먼저
어떤 요청이 선제적으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간구의 요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대한 그 어떤 요구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자신이 전적으로 스스로 임의로 불쌍히 여기는 그것이 주님의 놀라운 최고 수준의 도덕성을 가진 아름다운
미덕 이라는 것입니다.
13절에 주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라고 말한 다음에 다가가셔서 14절에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던 사람들이 멈춰 섰습니다. 청년이여 내가 그대에게 말합니다. 일어나시오. 신성한 생명을 가지신 구주께서
신성한 생명을 그 청년에게 부여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사는 일이 발생된 것이 참 복음에 대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나타난 이적과 표적과 기사들은 대부분 주님께서 믿음을 요구하는 시험을 요청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울고 있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어 주셔서 죽은 외아들 독자를 살려주시는 이 일은 믿음이 전혀 이 과부에게
어느 정도 있었다 조금 있었다 이런 말씀이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예!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 과부의
예를 통해서는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동정심과 긍휼하심을 가지고 이 과부의 죽은 독자
아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믿음이 먼저가 아닙니다.
믿음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심을 가지시고 긍휼히 여겨지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받아들이기 위하여 믿음이라는 통로 믿음이라는 관을 통해서 우리가 요청을 하고
간구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께서 불쌍히 여긴 후에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인 우리의 믿음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긍휼하심 때문이다 라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주님의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그 긍휼한 마음 후에 우리의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고백을 우리가 구주에게 요구하고 간청하고 간구합니까?
사실은 우리가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구주에게 간구하는 그 모든 것들 전에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동정심과
긍휼함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그 믿음의 고백을 우리에게 후불로 먼저 요구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성한 생명을 가지시고 오셔서 그 신성한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셔서 눈물을 기쁨으로 죽음을 부활로
고통과 슬픔을 사랑스러운 동네로 바꿔주시기 위하여 나인성으로 찾아오시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그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우리의 눈물과 슬픔과 고통을 멈추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30편 5절에서 그 노염은 잠깐입니다. 그 은총은 평생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계속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30:5 그분의 분노는 잠시뿐이요,
그분의 은총 안에 생명이 있나니 밤새 울음이 있을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임하리로다.
그런데 14장에 다가가셔서 관에 손을 대시니 라는 말씀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 손을 대신 것은
여러분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관에 손을 대신 것은 그 관은 죽은 자가 접촉한 부정한 장소인 것입니다.
민수기 19장 14절부터 19절에서 죽은 자에 관해서 손을 대는 것은 그냥 지나가다가 무덤을 밟았을지라도
그것은 7일 동안 부정하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19:14 장막에서 사람이 죽을 때의 법은 이러하니 그 장막에 들어가는 자와 그 장막에 있는 자가 다 이레 동안 부정할 것이며
19:15 그릇에 붙잡아 맨 뚜껑이 없어 열어 놓은 그릇도 다 부정하니라. 19:16 누구든지 빈 들판에서 칼에 죽은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지는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19:17 부정한 자를 위하여 그들이 죄를 정결하게 하는 그 불태운
암송아지의 재를 취해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고 19:18 정결한 자가 우슬초를 취하여 그 물에 담가 장막과 모든 기구와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그것을 뿌리고 또 뼈나 죽임 당한 자나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뿌리되
19:19 그 정결한 자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그 부정한 자들에게 뿌리고 일곱째 날에는 자기를 정결하게 하며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목욕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저녁때에 정결하게 되리라.
그런데 주님이 7일 동안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그 부정한 시체를 담고 있는 관에 손을 대고 있다 라는 것은
주님이 신성한 생명을 소유하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서 주님의 그 거룩함과 그 신성한 생명이 세상의 그 어떤 부정한
것도 모두 깨끗하게 하시고 정하게 하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부정한 것도, 더러운 것도, 냄새나는 것도,
오염된 것도 주님의 그 거룩한 신성한 생명을 오염시킬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거룩한 신성한 생명을 가지고 바로 그 사망의 행렬을 멈추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부정한
시체가 있는 그 관에 손을 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또한 서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어디에 손을 대셨습니까? 죽은 시체가 있는 관입니다.
그 관은 부정한 곳입니다.시체가 있는 곳이에요. 냄새가 나는 곳입니다.
사망이 있는 곳이에요. 기쁨이 없는 곳입니다.
기쁨 대신에 즐거움 대신에 슬픔과 눈물과 고통만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곳에 주님께서 손을 대실 때 우리는 14절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길을 멈춰 섰다라고 한것처럼 우리도 멈춰서야 합니다.
그누구도 당신이 뭔데 이 사망의 행렬을 왜 막습니까 라고 대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주님께서 부정하고 더럽고 오염되고 시체의 썩은 냄새가 나는 그 관을 만지셨을 때 당신이 뭔 이유로 이 가는 길을 죽음의 행렬을 막고 있느냐 라고 사탄이 얘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이 말하지 않고 그 메고 가던 사람들이 멈춰 섰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청년이여 내가 그대에게 말하는데 일어나십시오.살아나십시오 라는 말씀 합니다.
이 말씀은 뭡니까? 이 말은 생명이 무엇을 이긴다 사망을 이긴다 긍휼이 심판을 이긴다.
죄로 인하여 사망과 죽음 가운데 있는 그것을 그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긍휼은 이기고 덥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이 사망을 이기는 말씀이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는데 일어나라 살아나라.
이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사망이 생명을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그 놀라운 신성한 생명은 세상에 서 나타나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그 사망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습니다. 그 신성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말씀을 선포하신 구주께서
그 살아난 아들을 어미에게 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 앉고 말도 하고 모든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랑스러운 동네 기쁨과 즐거움의 동네로서 모든 사람들이 웃음꽃이 피어야 될 그 에덴동산과 같은 저주 받은 그런
그 사망의 행렬이 되어 그 나인성을 모든 사람들이 나가고 있었을 때 신성한 생명을 가지고 오신 이 우주 가운데 놀라운
권위자이신 구주께서 바로 그 생명의 표현인 말씀을 선포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행렬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밖으로
나간 그 사망의 행렬을 다시 나인성 안으로 들어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신성한 생명과 사망의 행렬이 바꾸어져서
합해짐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참 나인성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나인성은 사랑스러운 동네입니다. 나인성은 기쁨의 장소요, 즐거움의 장소 에덴동산과 같은 곳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되어서 그 에덴동산을 빼앗기고 황폐한 이 세상 광야로 내쫓긴 자를 사람으로 오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사망의 행렬 가운데 걸어나오고 있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신성한 생명을 선포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행렬과 함께 합해지게 되어서 참 나인성이란 지명의 이름을 찾게 해 주셨고 회복하게 해주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어머니에게 자비를 베푸신 구주께서는 그 어머니의 믿음의 어떤 요청과 요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슬퍼하는 과부가 불쌍해서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진정 위로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울지 마십시요 라고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먼저는 어느 때인가 하나밖에 없는 남편을 여의어서 슬픔을 당하였고, 이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 독자를 잃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울래야 울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소망을 잃어버린 자가 됐던 것입니다.
그 과부의 외아들인 이 독자가 관속에 죽은 자로 나인성으로 부터 바깥으로 죽음의 행렬 사망의 행렬을 통하여 들려나오고
있었다는 그 불행한 일들은 우리 전 인류에게 해당되는 실제적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구주께서는 그 믿음의 요청과 믿음의 간구함 없이도 그분이 먼저 선제적으로 애정 어린 동정심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 여인에게 울지 마십시오 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구주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과부는 주님께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먼저 선제적으로 긍휼한 마음을 가지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심을 가지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그 부활한 신성한 생명의 권능으로 그 죽은 과부 외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이런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바로 구주의 유일무이한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요. 위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죄인들을 모두 구원하심에 있어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그분의 최고 수준의 아름다운 품성을 통한 아름다운 미덕들을
통해서 나타난 최고 수준의 도덕성이 이 죽은 아들을 일으켜 세우실 수가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인류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고 얼마나 동정하시는지를 봅니다.
먼저 인류는 주님께 요청한 적이 없어요. 주님께서 선제적으로 불쌍히 여겨주셔서 긍휼히 보아주셔서 무한한 동정심을
가지고 그 죽은 자가 갇혀 있는 그 관에 부정한 그 죽음의 장소에 손을 대셨을 때 그 맨 자들이 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신성을 지닌 미덕들 안에 표현된 주님의 신성한 속성들이 그 놀라운 일을 이렇게 나타나게 함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바꾸게 하신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과부의 요청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 과부의 간청에 따라 일을 하신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 과부에게 처한 상황은 인류 모두에게 처한 그 지극히 불쌍하고도 비통한 상황인 것을 보시고 마치 그 죽은 아들이
이렇게 세움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세주로서의 모습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무엇으로 하여금 그를 불쌍히 여기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인간적인 미덕이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미덕을 통해서 발생한 그런 아름다운 품성들을 통하여 나타난 미덕들이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구주의 그 인간적인 미덕 안에서 그 죽은 자인 그 청년을 죽은 상태로부터 일으키심으로 말미암아 사실은 그분의 신성한 속성들이 표현되고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믿음 안에서 그 청년을 죽은 상태로부터 일으키셨을 때 사실은 신성한 속성들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이
표현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 이 과부의 아들을 이렇게 죽은 상태에서 일으키시는 이 일을 통하여 주예수님께서 인간적인
미덕들과 신성한 속성들로 충만하신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바로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죽은 아들 그 독자 아들을 일으켜 살리셔서 그 어머니에게 넘겨주실 때
우리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신성한 속성들이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서 최고의 품성을 통하여 미덕들 안에서 표현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복음 7장 1절부터 10절까지 백부장의 하인의 죽게 될 사람을 고쳐주신 일과 과부의 외아들을 일으켜 세우신
이 두 사건을 기록함으로 계시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백부장의 종을 치료하신 주님의 그 놀라우신 권위를 암시해
볼 수 있지만 과부의 아들을 일으켜서 살리신 사례를 통해서는 그분의 인간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동정심과 큰 긍휼함을 가
지고 크신 애정을 가지신 인간적인 품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 받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크신 긍휼하심과 불쌍히 여기심을 우리가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누가복음 7장 13절에 불쌍히 여기셔서 울지 마십시오 하는 장면과 그리고 관에 손을 대셨을 때
그분의 크신 동정과 애정과 사랑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과부에게는 불쌍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제발 울지 마십시오 하는 인간적인 불쌍히 여기심을 보이셨고,
부정한 관에 손을 대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사람으로서의 동정과 애정과 사랑을 보이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부장의 죽어가는 하인을 고쳐주신 것은 권위에 속한 것이라면 이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신 일은 불쌍히
여기시는 애정 어린 동정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백부장의 하인을 살리시는 것과 그리고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 일을 통하여 신성한 속성들을
가지신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인간적인 미덕, 인간적인 품성을 통한 미덕들 안에서 계신 사람으로 오신 구주의
모습을 우리가 확연히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인간적인 미덕들을 통하여 신성한 속성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그 권위는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하심으로 치료하신 그 권위와는 천지차이 만큼이나
놀라운 권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례를 통하여 우리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 곧 온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인간적인 미덕들로 충만하셔서 권위를 표현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 18절에서 세 번째로 묘사되고 있는 선지자로 오신 침례 요한의 순교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18절부터 35절 사이에 말씀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 안에서 가장 높으신 권위를 가지신 구주께서 또한 이 나인성에 찾아가셔서 이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불쌍히 여기심으로 바꾸신 분께서는 이런 놀라운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행하면서도 요한을 자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하려고 하지 않으신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마치 요한을 잊어버리고 요한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대하시는 구주의 모습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은 이 옥중에 갇힌 침례 요한에게 종종 찾아가서 그 죽어가는 백부장의 하인을 치료하여 살리신 일과
나인성의 과부의 죽은 독자를 살리는 일을 고함으로 말미암아 침례 요한이 마음속으로 많은 의문과 궁금증을 가지고
아니!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 무슨 일조차도 하시는 분이 그 사역자 선지자로 온 침례자 요한을 위해서는
그 어떤 일도 아무것도 하시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하여 마음에 불쾌함과 속상함을 가지고 요한이
그 제자들 중 두 사람을 불러 주님께 보내는 장면이 19절 20절에 나옵니다.
7: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7:20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여기서 침례자 요한의 말은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라는 얘기는 그 사람으로 오신 구주가 그리스도임을 의심하고 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큰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베푸시는데 구주의 일을 위해서 사역자로서 일을 하고있었던 자신을 위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구출하시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라는 것을 보고 제자들을 통해서 얘기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극하여서 자신을 기억하게 하여서 그 옥중에 갇힌 자신을 구출 받도록
그리스도께 의도적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 26절부터 36절까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바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그리스도로서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소개하고 천거하고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장면이 우리가
요한복음 1장 26절부터 36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당시에 그 왕에게 밉상을 보임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수감되어서 곧 죽게 될 운명에 처한 자신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을 구원해 주시고 구출해 주신 것처럼 자신도 또한 그렇게 대해주시기를 기대하고 고대했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많은 일을 행하셨지만 침례자 요한을 위해서는 그 어떤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요한은 이 일 때문에 누가복음 7장 23절에서 실족될 수가 있었습니다.
7: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이것은 누구에게요? 요한으로 인하여 요한과 같은 상황에 요한과 같은 형편에 요한과 같은 환경에 처해진 자는
이와 같이 실족될 위험이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침례 요한과 같이 실족할 수 있는 사람들이 오늘날 아주 상당히 많이 우리 주위에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있구나라는 것을 저는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과 전혀 연관이 없는 믿음을 보였으나 사실은 연관이 없는 백부장과 그 아무 믿음의 간구나 요청을 전혀
하지 않은 그 과부를 위해서는 죽음 가운데 처한 그 외아들을 살리는 그 놀라운 일들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위해서
일한 침례자 요한 자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일도 그 어떤 아무것도 하시지 않은 것을 보고 이 침례자 요한은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그분이 행하시도록 이렇게 일하게 하시도록 하려고 애쓴 것이 두 사람의 제자를 통해서 고하게 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7장 22절과 23절 말씀 통해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7: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침례 요한을 염두에 두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인 우리에게 지금 선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본다.소경이 본다 라는 것은 오직 메시아만이
그런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 라는 분명한 증거를 선지자 침례자 요한에게 전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서 35장 5절 말씀입니다.
소경의 눈을 뜬 것은 역사상 없었던 일입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러한 기적,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그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은 지극히 높으신 자인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자만이 그 일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여서 소경이 보게 하는 것이 가장 먼저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 안에서 가장 먼저 우리에게 행하는 것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그분을 영접하여
그분을 따라 행하게 하는 것을 위해서 그분께서 감겨진 그 눈을 여셔서 소경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보게 하는 것은 그분을 믿고 영접하여 그분을 따라 그분의 일을 하며 그분과 함께 동행하여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앉은뱅이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앉은뱅이는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신성한 생명이 아니고서는 절대 걸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길을 갈 수 없는 주님의 길을 쫓아 동행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게 한 후에 앉은뱅이를 고쳐주신
후에 새로운 신성한 생명으로 인하여 걷게 하는 것이 요한복음 5장 8절 9절에서 말씀한 앉은뱅이를 일으켜세우는 것입니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세 번째 귀머거리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귀머거리는 구원받은 후에 귀가 먹은 자들에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주십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주신다는
요한복음 10장 27절 말씀인 것입니다.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그리고 네 번째로 죽은 자가 살아 난다고 나오죠.
여기서 죽은 이가 살아난다는 것은 과부의 아들처럼 죽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는 이미 죄들로 죽어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렇게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접촉할 수 없는 사람들은 죽은 자들로 치부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후 그들은 그들의 거듭난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통하여 바로 죽은 자가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접촉하고 교통을 나눌 수 있도록 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가난한 이가 복음을 듣습니다.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는 자입니다. 물질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아무것도 없는 자 이 아무것도 없는 자는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없고 또한 그리스도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세상에 그 어떤 아무런 소망도 없는 모든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다
라고 에베소 2장 12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 아무것도 없는 자가 유일한 소망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구주 하나님으로 영접했을 때 그 가난한 자에게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는 하나님 나라가 천국이 저의 것임이 될 것이라고 마태복음을 통해서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복음을 영접하자마자 바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유해진다 라고
에베소서 3장 8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그런데 여기서 제가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아주 중요하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늘날 많은 교회 성도들이
이 침례자 요한과 같은 심성을 가지고 주님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럼 내가 침례자 요한이란 말이야 예 그렇습니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여러분들이 침례자 요한처럼 그러한 의문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구주께 소식을 알림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구원받게 하도록 구출 받을 수 있도록 문제를 해결받도록
하는 것이 침례자 요한이었듯이 오늘날 우리의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 이와 같은 마음의 상태에서 구주를
대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이 침례자 요한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대했던 것입니다.
주님 내가 백부장 하인을 고친 것을 제자들을 통해서 들었습니다.놀랍습니다.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죽은 그 독자의 외아들을 주님께서 신성한 생명으로 살리신 것을 내가 들었습니다.
놀랍습니다. 주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서 보게 하시고 걷지 못한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고, 부정하고 오염된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시고, 듣지 못한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 와 놀랍습니다.
그런데 나의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의 환경, 나의 상황, 내가 처한 상태에서는 그 좋은 소식이 나하고 무관한 나에게는 그 좋은 소식이 별개의 것들입니다.
나는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나는 소경이 아닙니다.나는 앉은뱅이가 아닙니다. 나는 죽은 자가 아닙니다.
나는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주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실지라도 내가 지금 처한 이 문제를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 어떤 무엇도 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여전히 이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 감옥이라는 곳에 갇혀 있어서 지금 꼼짝달싹도 못하고 있는 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포로된 자들에게 희년을 선포하고 놓임을 전파하였다면 주님께서 옥에 갇혀 있는 나를 불쌍히 보아주셔서
옥에서 구원해 주셔야 될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지금 주님께 그러한 의문과 궁금증을 가지고 주님께
기도로서 토로한다는 것입니다.
23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한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침례자 요한은 그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결해 주지 않고 문제를 풀어주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혀 있는 이 침례자 요한을 옥에서 빼내주지 않는 일을 통하여 그가 매우 실족될 위험이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침례자 요한을 의식하여 말씀한 것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님~ 주님께서는 수많은 소경을 보게 하셨습니다.
근데 나는 소경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수많은 앉은뱅이를 걷게 하셨습니다. 근데 나는 앉은뱅이가 아니거든요.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셨습니다.나는 문둥병자가 아니에요. 귀먹거리를 듣게 하어셨요 나는 귀먹어리가 아닙니다.
주님 나의 문제는 바로 이문제입니다.물질입니다. 물질이 없습니다. 물질을 좀 해결해 주세요.
나는 지금 질병 가운데 우리 가족이 또는 내가 질병 가운데 처해서 꼼짝달싹도 못하는 옥에 갇힌 것처럼 나는 지금 비통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주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행동하셔서 구원자로 내보이지만 주님 나를 위해서 내가 교회
안에는 성도로서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하고 봉사하고 주님에 대한 믿음을 보였습니까?
그런데 나를 위해서 주님께서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러이러이러한 것인데, 주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그 일이 아닌 다른 일만을 해주셨습니다라고
얘기를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23절의 말씀을 대신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한 자는 복이 있도다.
주님은 바로 침례자 요한이 승리함으로 축복받도록 그를 위하여 정하신 길을 가도록 정하신 길을 취하도록 그를
강화시키고 위로하시고 매우 격려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왜 그렇습니까? 그는 죽어야 됩니다. 순교해야 됩니다.
그는 이 세상에 큰 빛이신 구주와 작은 빛으로 나타난 침례자 요한 이 두 빛이 두 등불이 있으면 안 됩니다.
큰 빛이 됐던 작은 빛이 됐든 큰 등불이 됐던 작은 등불이 됐던 세상의 빛이 두개로 나타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의 눈이 그 적은 불에도 시선이 집중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불과 빛으로 비춰지는 침례자 요한의 사역을 중단시켜서
깨끗이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큰 빛만을 온전히 세상에 드러내어서 생명의 그 큰 빚이신 자신을 통하여 생명을 사람들이
소유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옥에 가둬 놓고 그를 순교하도록 주님께서 신약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안배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이렇게 설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그 순교함으로 말미암아 축복받도록 침례자 요한을 위하여 순교의 길
죽음의 길, 사망의 정하신 길을 취하도록 그를 강화시키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에게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요한 너에게는 아무 일도 안 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수많은 일을 했지? 근데 니가 생각한 것처럼 니가 마음이
상하고 니가 마음이 아팠던 것처럼 너 당사자 침례자 요한을 위해서는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 그런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침례자 요한 너를 위하여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빛이 두개로 나타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너는 사라져야 되는 빛이다.
나는 드러나야 되는 빛으로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으로 비춰져야 된다.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말라.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옥에 갇힌
그가 곧 자신의 목이 짤림 받음으로 말미암아 순교 당함을 위하여 요한을 강화시키고 견고하게하고 아주 믿음을 강하게
하는 주님의 이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문둥병자 귀머거리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주 안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자로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아무 일도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보고 요한은 마음의 궁금증과 마음의 호기심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주님께 자신을 드러내고
주님을 자극하여서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실 수 있도록 이렇게 행동을 취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한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22절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구주이시구나 그런데 나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내가 주님 앞에서 사라져야 되는가 보다
순교해야 되는가 보다 내가 주님 앞에 제거되어서 주님께서 온전히 그 사역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큰 뜻이 있기
때문인 것이구나 라고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의 안배 속에서 정하신 길을 가도록 그를 격려하신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엘리아는 주님께서 침례자 요한이 잉태될 때 엘리아의 영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리라고 예언된 그 어떤 선지자보다도
큰 자였던 것입니다.그런데 바로 이 자에 대한 격려의 말씀을 하신 후에 누가복음 7장 31절과 32절에서
7: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7: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 이 종교 지도자들 모두는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경험이 많고 아주 의롭다고 칭하며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그래서 32절에서 주님은 그들을 어린아이로 비유하고 있어요 어린아이는 철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못 해요 율법 안에서 경험이 많고 아는 것이 많지만 주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철부지에
불과한 어린 아이들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자 요한을 통하여 피리를 불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하나님 나라의 천국 복음을 전파했지만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로 표현된
이 어린아이들은 구원의 즐거움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의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요한과 주 예수님께서는 또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애곡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했지만 그들은 죄의 슬픔으로 말미암아 울지 않았습니다.
요한과 주 예수님께서는 동시에 그리스도와 침례자 요한은 때로는 피리를 불어서 구원의 복음인 기쁜 소식 희년을 선포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즐거움을 나타냈지만 그들은 이 구원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기뻐하지도 춤추지도 않았고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면서 회개하여서 그 복음에 대한 얘기를 하고 곧 불의에 의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그러한 말씀에
의해서도 그들은 죄의 슬픔으로 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 공의로운 의는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그들은 복종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기쁜 소식인 참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들려졌지만 참 구원 참 복음을 그들에게 제공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33절에서는 침례자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함에 너희 말이 귀신 들렸다 하더니
그리고 34절입니다.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오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침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죄로 인하여 슬퍼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하여 침례자 요한은 아무 관심이 없었다라고 누가복음 1장 15절부터 16 17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침례자 요한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인하여 죄로 인하여 슬퍼하였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통상적인 일반적인 방식으로 먹고 마시지 않고 광야에서 나온 메뚜기와 석청으로 인하여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보존한 것을 보는 것은 바로 자신이 선포하는 그 회개의 복음을 통하여 바로 그들이 죄로 인하여 슬퍼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하는 일을 갖게 하기 위해서 색다른 방식으로 광야에서 구별된 장소에서 색다른 방식으로 색다른 것을 먹고
색다른 것을 마시고 색다른 것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유대 백성인 반대자들은 그를 귀신 들린 자라고
비난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심에 너희들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긴 사람이요
세례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오신 구주로서 죄인들의 친구이셨으며 그들의 모든 문제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의 아픔과 그들의 슬픔과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슬픔과 고통과 자신의 아픔으로 친히 느끼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오셔서 이 불쌍한 죄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희년의 복음을 선포함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기뻐하게 하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누리신 것이 잔치를 배설한 가운데 바로 함께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하여 구원받은 죄인들이 자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시는 일을 이렇게 나타내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7장 31절부터 이렇게 피리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장터에 앉아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았고 장송가를 불러도
너희가 울지 않았다는 말씀을 통하여 그 세대 유대 백성들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이러한 율법사들
모든 자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세대까지 포함한 모든 세대를 한꺼번에 포함하여 꾸짖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심을 통하여 희년을 선포하셨다는 것은 기쁨의 참 복음인 것입니다.
참 구원의 피리 소리와 같은 피리의 연주가 희년을 선포하셨을 때인 것입니다.
그 희년을 선포했을 때에 구주께서는 친히 피리를 연주하는 그러한 연주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세대 사람들은 희년을 선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해방을 주며 그 장자권을 다시 되찾게 하고 잃어버린
땅을 다시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과 지위를 다 찾게 해주고 잃어버린 빼앗긴 그 모든 재산들을 다 회복시켜
줌에도 불구하고 그 세대의 사람들 또한 이 시대의 사람들 모두는 반응하여 춤추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주와 함께 나타난 침례자 요한은 애곡함으로 말미암아 장송가를 불렀을 때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대신 그들은
요한을 귀신 들린 자라 이렇게 말을 했고, 주 예수님을 가르켜 희년을 선포함으로 말미암아 피리를 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잔치를 배설하고 그 죄인들과 함께 자리를 한 그 예수님을 보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오 세례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는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들을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 라고 결론 지으십니다.
이 지혜는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이 희년을 선포하셨고 이 회개의 침례의 선포를 또한 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바로 예수님과 이 침례자 요한을 통하여 구원의 참 복음인 희년을 선포하심으로 말미암아 피리를 불렀을 때
구원의 즐거움으로 그들이 춤추지 않았고 또 애곡하여 회개의 침례를 전파했지만 그들은 죄의 슬픔으로 말미암아 울지 않은
것을 보고 온전히 주님의 그 생명의 말씀 앞에 복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을 모든 자들에게
제공되어져서 들려졌지만 그들이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인 나라 족속인 누가복음에서 기록된
이방인들 모두에게 이 백부장 하인을 고치신 백부장 같이 구원을 얻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 믿는 이방인들인 백부장을 이렇게 계시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여러분들과의 교재를 말씀을 마치고 또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