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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크기 / 강길용
가끔 우리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 믿음으로 인하여 커다란 상처를 받
을 수도 있다는 점은 항상 뒤로 돌려 두고 감추려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고 바치고 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들은 사소한 마찰에서 점차 커져 가는 불신과 증
오뿐입니다. 강한 믿음에서 오는 증오는 더 이상 삶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나는 펠리컨 브리프라는 영화를 보며 믿음과 불신의 사이에 잠재해 있는 영혼의 갈
등을 보았습니다. 아니 그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수많은 내 주변 사람들의 삶에서도 보았습
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론은
그 믿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이긴 하지만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중요한 사실들, 결코 좋은 일이 아닌 하나의 사실을 알고 있을 때 위협을
받게 됩니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즉 알고 있는 사실들이 대중에게 알려졌을 때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는 사람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다른 반대편 사람들에
겐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쪽에선 그 사람의 존재가 눈에 가시 같은 것으로 비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믿음이란 것에 대하여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믿음은 상대적이라서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불신을 돌려 받는 경우를 생각진 않습니다. 단지
돈 문제만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돈에 있어서 사람들의 불신은 여전히 대단합니다. 그래서
차용증을 쓰고, 법원으로부터 공증을 받고, 그리고 제 3자인 여러 사람들로부터 증인이 되어
주기를 부탁합니다. 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담보를 설정하고 일
이 잘못되었을 경우 차압을 하거나 경매에 붙일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이익을 보아야 만족한 웃
음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흡족한 걸음으로 퇴장을 합니다. 그 장소가 커피숍이든 아니
면 사무실이든, 거리이든, 공원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마치 개선 장군처럼 당당한 걸음걸이
로 나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습니다. 그 때야 말로 믿을 수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하나의 믿음을 줄 수 있는
보호 장치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믿을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그런
것에서 찾곤 합니다.
이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일까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믿음은 어떤 물질적
인 보증수표가 아닙니다. 믿음은 결국 손해를 전제로 합니다. 아니 날마다 손해를 전제로 하
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운명이란 것을 들먹이며 이야기할 수도 있고 평소의 삶, 또는 사랑이란 것으로 확신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믿음은 언제나 변하지 않을 용기가 있을 때만이 만들
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들어갈 때 그것은 이미 불신입
니다. 믿음은 그런 것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때로 그 믿음이 자신을 속일지라도 괴로워하지
않을 용기가 있을 때 진정한 믿음을 맛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여자 분은 거의 하루에 한번은 전화를 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사랑
한다거나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녀는 나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 편하
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한 이야기를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질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나와 그녀 사이에는 사랑이란 욕망 이상
의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전화를 하고 대화를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서로에게는 약간의 희생이 있습니다. 간단하게는 전화요금에서부터 깊은 밤에 이야기를 나
누고 나면 피로한 몸으로 다음날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희생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개인적인 문제들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가 그녀를 믿고 있듯이 그녀 또한 나를 믿는 다는 것입니다.
믿어야만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도 않습니다. 또한 사랑한다거
나 섹스를 원한다거나, 돈을 원한다거나 그런 것도 없습니다. 단지 서로에게 믿음이란 두 마
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도 어떤 계기가 되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우린 서
로 이럴 때라도 분노하거나 실망하거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거나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아픔을 간직하고 헤어져야 할만큼의 열정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삶이란 항상 그런 것들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믿음이란 것이 중요하지만 언
제나 믿음으로 삶을 다 채워 넣을 수 없는 우리들의 삶, 아니 보통 사람들의 삶이 있기 때
문에 우린 사소한 일에도 불평하고 두려워합니다. 잊혀질까 두려워하고 다시 만날까 두려워
합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서로를 사랑하기보다는
믿을 수 있어야 그 사랑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우리는
마음을 열고 누군가의 출입을 자유롭게 하여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들의 마음을 훔쳐 가는 도둑도 들어올 수 있고,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는 강도
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훔쳐 갈 마음이나 강도에게 죽음을 당할 마음을 가지고 있
지 않다면 안전한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은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을 버리면 모
두에게 희망이 있고 영원한 믿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절대자인 신에게 모든 믿음을
바치듯이 인간에게 믿음을 바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합니다.
96. 5. 10 月山 康吉龍수용인색증(受容吝嗇症)의 사회
비판만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능사는 아니다. 세상의 어떤 논리도 언젠가는 새로운 논리에
의하여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끊임없이 성장 발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비판, 정의의 비판,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비판,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비판이란 것이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의외로 우리 주위에는 입을 열면 남의 잘못과 허물만 트집 잡으려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특히 정치권의 인사들이 그렇다. 그 다음이 경제인들이 그렇다. 말을 한 뒤에는 실천이 뒤따
라야 하고 책임이 함께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경제인들은 어쩔 수 없이 돈이라는 흐름을 따라 자신의
뜻과 판단을 하지만 정치인들이나 학자, 철학을 하는 사람, 성직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
들에게는 진리와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정에는 가정의 룰이 지켜져야 하고 거기에는 따뜻한 애정과 넘치는 사랑, 그
리고 웃음이 있어야 한다. 사고로 형제와 자매를 잃은 슬픔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평
상시 생활은 편안하게 포용해 주는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고 있
는 이 사회, 아니 우리들이 공유하는 이 사회는 그런 분위기에 어색하기만 하다. 모든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오직 자신만이 살아야 하고 타인은 죽어도 상관할 바가 아
니라는 무관심이 팽배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어떤 신문의 한 칼럼은 이러한 사회현상을 '비판 알레르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우리 사회의 '수용인색증'과는 맥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칼럼을 쓴 논객(論客)은 정치를 두고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대
표적인 집단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정치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분야에서 그렇다. 심지
어는 어린아이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전에 길을 가다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들
이 나눈 이야기의 전말을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같은 반 학생에 대해 흉을 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 학생들의 이야기를 대충 정리하면 이렇다.
"그 자식은 만날 한대씩 때려도 그냥 맞고 가만히 있다. 우리 반 애들이 계속 때리는 대도
한참 맞다가 징징 짜기만 하지 싸움을 할 줄 모른다. 나도 때려 봤는데 나한테도 똑같애."
"우리 반에도 그런 멍청한 애가 있어. 날마다 앉아서 책만 보는데 여자 애들이 놀리면 울기
만 하지 큰소리도 치지 못한다. 내가 괜히 쪽팔리더라."
이런 이야기 속에는 보이지 않는 독선이 들어 있다. 자기와 같지 않다고 하여 다른 사람을
바보로 생각하는 아이들의 무서운 논리를 볼 수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하며 자라 왔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던 기억이 난다.
시골의 우리 마을에 정신 질환으로 미친 아저씨가 한 분 계셨다. 마음이 원래 선하였던 그
아저씨는 시골에서 물을 길어다 주면 10원씩 주는데 그걸 언제나 한 손에 꼭 쥐고 물을 길
으러 간다. 갔다 오면 언제나 혼자 사는 한 칸 짜리 집에 들어가서 장판 밑에 그 돈을 묻어
두곤 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나 등교하는 길에 그 아저씨를 만나면 돌멩이를
던지기도 하였고 욕을 퍼붓기도 하였다. 그러다 그 아저씨가 따라올 기색이라도 보이면 무
서워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흩어져 달아난다. 멀리 숨어서 그 아저씨가 다시 자신의 길을 가
면 그 때서야 다른 이야기를 하며 집이나 학교로 가곤 했다. 지금도 가끔 그 당시 생각을
할 때면 역시 철부지였다는 생각을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그 때의 사고나 습관은 쉽게 바
뀌질 않는 것 같다.
이런 성장 환경 속에서 별로 내세울 것 없는 권위를 가지고 상대방을 누르려 하는 태도를
버리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비판 알레르기가 있다는 칼럼 리스트의
말은 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태도를 수용할 줄 모르고 자신의
행동만이 정당하다는 생각, 다른 사람의 주머니는 털어서 먼지라도 끄집어내면서 자신의 주
머니에 들어 있는 돌 조각은 무시해 버리는 비판의 태도, 이 모든 것이 우리 사회의 건강한
정신을 좀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4월11일 총선 때 수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위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겠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은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가히 무색할 정도로 독침과 같은 것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정한 비판은 없고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행적이나 그 사
람이 걸어왔던 인생의 약점을 들추어내서 무자비하게 매도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누가 자신의 약점을 밝히면 기분 나빠하면서도 타인의 어두
운 부분은 더 많이 밝혀 내려고 한다. 고아로 살았던 사람에 대해 문제아라고 비난을 퍼붓
는가 하면, 장애인이라 하여 '병신'이 무슨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느냐는 등의 이야기도 있었
다.
왜 이렇게 우리 사회가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논쟁에 머물러 있는지 모르겠다. 최근의 사
회현상들을 보면 오직 '나'만이 옳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자기는 깨끗하니 남들을
향하여만 더럽다고 한다. 마치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처럼 그렇게 천박
하게 살아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비록 언론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지만 지역 이기주의니 집단 이기주의니 하는 말들도 별로
좋은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런 분위기를 당연시한다. 오직 내
가 존재하는 곳에 평화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곳에 죽음이나 기아나 전쟁이 있어
도 뒷전으로 미루고 마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도 그렇고 버스를 타도 그렇다. 심지어 택시를 잡으려면 질서를 지키는 사람보
다 새치기를 잘 하는 사람이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운전기사의 마음에 드는 코스를 원하는
사람들이 대접을 받고 열심히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하는 사람이 유능해 보인다.
컴퓨터가 가정마다 보급된 지금 통신망의 게시판에는 항상 수백, 수천, 수만의 글들이 올려
진다. 그 중에는 정말로 문화를 생각하고 상대방의 인격을 생각하는지, 아니면 혼자 통신망
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지를 구분할 수 없는 이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원색적인 욕설과
독선적 언사로 인신공격을 하는 글도 보인다.
묵묵히 땀 흘리는 이들을 향하여 박수를 보내기보다는 '바보' 또는 '멍청이', '어리석은 사
람', '병신'이란 말을 서슴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진정한 용기는 없고 사
이비 용기만이 있다. 진정한 비판은 없고 사이비 비판과 비난만이 있다. 학자들의 다수가 그
렇고 종교인의 다수도 그렇다.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은 워낙에 식상해 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는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다.
이제 우리는 비판을 하되 서로의 인격은 존중하면서 하는 문화, 내가 먼저 하되 상대방의
의견도 물어 볼 줄 아는 여유, 나만이 아닌 함께 내지는 더불어 생각하는 공동체 의식, 욕설
대신 칭찬을 아끼지 않는 관용, 비굴한 용기가 아닌 살아 숨쉬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울러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통신망에서도 남을 존중해야 자기가 존중받을 수 있다는 의식이 문
화로 정착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1996. 5. 25 月山 康吉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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