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1일 (일) (백)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요한 10,27-30]
양들을 위해 어린 양이 되신 목자
목자의 꿈
착한 목자이신 주님, 오늘 당신 말씀을 듣노라면 화가 납니다. 오늘 당신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정말 양들이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었습니까? 정말 양들이 당신의 마음을 알고, 당신을 따랐습니까? 그런데 왜 당신께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오 8,20)고 하셨는지요? 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오 9,38)고 하셨는지요?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가 왜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오 13,13)고 하셨는지요?
왜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마태오 16,3)고 하셨는지요? 베드로에게 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오 16,23)고 하셨는지요? 예루살렘을 두고 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를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고 하셨는지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오 26,21)고 하셨는지요? 당신께서 잡히실 때 왜 제자들은 모두 당신을 버리고 달아났는지요?(마태오 26,56)
사람들이 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오 27,22.23) 하고 외쳤는지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당신께서 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오 27,46) 라고 부르짖으셨는지요?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 당신은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남은 게 뭡니까? 달랑 십자가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도 양들을 위해 애써 보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밤도 지새워 보았고, 그들을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양식을 주기 위해 제 주머니도 다 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남는 게 없더군요. 그들은 끊임없이 달라고만 하고, 목자의 희생만을 요구하며, 주지 않으면 이내 달아나 버립니다. 제가 삯꾼이어서 그럴까요?
착한 목자이신 주님, 그래도 당신은 행복한 목자이십니다. 당신은 길 잃은 양 한 마리만 찾으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잃은 양이 아흔 아홉 마리입니다. 당신의 양은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을 따랐지만 저의 양은 아예 볼 수도 없으니 제 목소리를 알겠습니까?
그들은 자기 목장도 잊은 채 남의 목장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풀을 뜯어 먹는 게 더 쉽다고 제 목장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어찌할까요? 저도 제 목장을 버리고 다른 목장의 삯꾼이라도 될까요?
착한 목자이신 주님, 저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싶습니다. 저도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싶습니다. 제 소망도 당신의 소망처럼 제 양들을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저도 당신처럼 저에게 맡기신 그들을 아무도 제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저를 떠나는 이유는 뭘까요?
착하신 목자이신 주님, 이제야 알았습니다. 당신과 저의 차이는 사랑의 깊이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은 양들을 위해 어린양이 되셨고, 저는 목자로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아버지와 하나이듯 양들과 하나가 되셨기에 그들을 알 수 있었지만, 저는 아버지와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양들과도 하나가 되지 못했기에 그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주님, 저도 어린양이 되신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고, 생명의 샘으로 이끌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도록 완전한 사랑으로 저를 채우게 하소서. 이게 양을 잃은 목자의 꿈입니다. 착하신 목자이신 주님, 그 꿈이 이루어질까요?
손 용한 신부 ( 가톨릭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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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월) (백)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0,1-10
이스라엘의 기후는 크게 두 시기, 곧 우기와 건기로 구분됩니다. 우기는 보통 11월부터 그다음 해 3월까지, 건기는 나머지 7개월 동안 계속됩니다. 건기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기 때문에 풀이 무척 귀합니다. 그래서 양들의 주인은 목자들이 양들을 몰고서 여기저기 풀을 찾아 떠돌도록 내맡깁니다. 결국 목자들은 주인의 지시에 따라 일곱 달 동안이나 양들을 몰고 다니며 풀을 뜯게 합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오늘 복음과 에제키엘서 34장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 착한 목자와 악한 목자의 구분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착한 목자는 주인의 뜻에 따라 양들을 잘 몰고 다니며 풀을 먹이지만, 악한 목자는 주인의 뜻을 무시합니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헤매지만, 악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에게서 털과 우유만을 얻는 데 반해, 악한 목자는 양을 잡아먹습니다. 착한 목자는 사나운 짐승들에게서 양들을 보호하지만, 악한 목자는 오히려 양들을 위협합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악한 목자는 양들을 야단치며 큰 소리만 질러 댑니다. 착한 목자는 일곱 달의 여정 끝에 반드시 돌아오지만, 악한 목자는 양들을 데리고 도망갈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착한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지만, 악한 목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양들은 목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조차 힘듭니다. 목자 덕분에 양들은 안전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 먹으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이어 갈 수 있습니다.
4월 23일 (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0,22-30
친구네 집에 한 달여간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마침 그 집에는 백일도 안 된 아기가 있었습니다. 아기가 울면 어디가 아픈 건지, 배고픈 건지, 졸린 건지,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고 애쓰던 부부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아기가 울음을 그치면 그제야 “아, 배고파서 그랬던 거네.”, “많이 졸렸나 보네.”, “응가 했네?” 하며 부부가 함께 웃습니다.
부모들은 아기의 반응에 민감합니다. 그런데 그 아기가 자라 청소년이 되면 아기 때만큼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이 아이가 속상한 일이 있는지, 애교를 부리고 싶은지, 진짜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무덤덤하게 넘어가 버리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아기의 반응에 온 신경을 쏟는 부모처럼 그렇게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나시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또 주위의 사람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양들인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입니다.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2,44-50
죄를 지으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뒤이어 하신 말씀과 모순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예수님 당신께서는 심판을 하지 않으시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심판을 한다는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부모가 자녀에게 자동차를 사 주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부모는 자녀가 염려되어 ‘음주 운전을 하지 말고 과속해서도 안 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당부를 협박이나 경고로 알아들을 자녀는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자녀의 음주 운전이나 과속으로 말미암아 사고가 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부모가 심판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부모의 걱정스러운 그 말이 곧 자녀를 심판한 셈입니다. 부모의 당부를 자녀가 잘 새겨들었다면 그러한 사고를 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없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주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많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말씀의 의미와 그 안에 담긴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 말씀 자체가 우리를 심판할 것입니다.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성 마르코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인 성 마르코(Marcus)는 “마르코라고도 불리는 요한”(사도 12,12-25)과 동일 인물이며,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회합 장소로 사용한 집주인 마리아가 그의 어머니인 듯합니다. 또 그는 성 바르나바(Barnabas)의 조카이며(골로 4,10), 키프로스(Cyprus) 태생의 레위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 몸에 고운 삼베만을 두른 젊은이가 예수를 따라가다가 붙들리게 되자,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던 인물로 여겨지나(마르 14,51-52)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바오로(Paulus)와 바르나바를 수행하여 안티오키아(Antiochia)로 갔고(사도 12,25), 그 다음에는 키프로스로 바르나바와 함께 갔으며, 바르나바와 함께 바오로의 1차 전교여행을 수행하였습니다(사도 13,5). 그러나 밤필리아에서 바오로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사도 13,13).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바오로와의 의견 대립 때문에 바오로의 제 1차 전교여행에는 동행하지 않았습니다(사도 15,36-40). 마르코는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로 갔으며(사도 15,39), 바오로가 투옥되었을 때에는 로마(Roma)에 함께 있었습니다(골로 4,10).
그는 분명히 베드로(Petrus)의 제자였는데 베드로는 그를 애정 깊게 “내가 아들로 여기는 마르코”라고 언급합니다(1베드 5,13). 불확실한 전승이지만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주교였으며, 신약에서 여러 번 언급된 바와 같이 요한 마르코임이 분명합니다(사도 12,25). 동방에서는 이 요한 마르코를 또 다른 사람으로 여기는데, 그는 비블로스(Byblos)의 주교라고 하며 9월 27일에 축일을 지냅니다.
어쨌든 마르코는 60-70년 사이에 복음서를 기술했는데 주로 베드로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였습니다. 소아시아의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는 그가 베드로의 통역자였다고 하며,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로마에서 복음을 기술했다고 전합니다. 마르코는 베네치아(Venezia)의 수호자이며 그의 유해는 그곳의 산마르코(San Marco)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문장은 사자입니다.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4,1-6
언젠가 들은 이야기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유명한 화가의 전시회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든 그림은 저마다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반면, 어느 그림 하나는 너무나 평범하였습니다. 그 그림은 수영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한 여인이 해변 저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림의 제목은 ‘현대인’이었습니다. 도대체 현대인과 해변의 아름다운 여인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곰곰이 그림을 살펴보았더니 이상한 점 하나가 있었답니다. 모래판에 그 여인의 발자국이 없다는 점입니다.
화려하고, 멋있고, 우아한 모습으로 걸어가고는 있지만, 정작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고 살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어쩌면 지난날과 달리 오늘날 많은 사람이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삶의 목적의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으로만 그친 채 실제로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14,7-14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신학생 때였습니다. 어느 날 밤 성체 조배를 하면서 주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주님, 지금 제 귀에다가 대고 무언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저는 그것을 제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겠습니다.”
저는 무언가 제 귀나 눈으로 주님을 느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만 있다면 사제직을 준비하는 데 충분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몇 분이 지났습니다. 제 마음에 이러한 울림이 퍼졌습니다. ‘얘야, 나는 이미 너에게 내가 할 말을 다했단다.’ 저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님께서는 제게 모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성인들의 고귀한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당신께서 제게 하고자 하셨던 모든 말씀을 다 건네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 자신은 그것을 소홀히 여긴 채 무언가 특별하고 새로운 것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필립보처럼, 우리도 성경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과 일상의 수많은 사건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한 채 새롭고 특별한 계시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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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속에 나오는 만나는 어떤 음식인가
빵이 아니라 이슬처럼 내리는희고 단 형성물 -- 하느님 사랑 상기시킨 증거물로 성체의 예표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생활을 할 때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정착지에 다다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가나안 땅 경계에 다다를 때까지 그들은 만나를 먹었던 것이다"(탈출 16,35).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과연 어떤 음식이었을까? 탈출기에 나오는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음식이었다(탈출 16장). 이슬과 함께 내렸다는 하얀 만나는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내렸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긁어모아 양식으로 사용했다.
성경에 따르면 만나는 빵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집안은 그것의 이름을 만나라 하였다. 그것은 고수풀 씨앗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다"(탈출 16,31).
태양이 떠오르기 전인 이른 아침에 광야의 모래 위에서 '흰 서리 같은 것'(탈출 16,14)이 발견됐다.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탈출 16,14-15).
만나는 사막에서 자라는 나무나 관목의 잎사귀에 맺히는 이슬 모양의 형성물이다. 만나는 밤에 기온이 내려가면 비교적 단단하게 굳어지는데 맛이 단 편이다. 만나는 식량이 부족한 사막에서는 오늘날에도 식량으로 사용된다.
오늘날도 시나이 광야를 유랑하는 베두인족은 양식으로 만(man)이라는 것을 모은다. 광야를 뒤덮는 만은 결정화된 낟알로 돼 있는데, 햇볕에 녹는다. 그 낟알들을 두드리거나 찧으면 구울 수 있게 되는데, 꿀처럼 단맛이 나고 성경의 만나와 비슷하다.
만나는 영성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만나는 먹을 양식으로서 생명과 연관돼 있으며, 당신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상기시켜주는 눈에 보이는 증거물이었다. 만나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자연적인 만나를 기적적으로 제공하셨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하느님은 자연적인 일을 기적적인 방식으로 선사하셨다. 예수님께서 기적적인 방식으로 자연적인 빵을 많게 하시고 나눠주셨듯이, 하느님께서도 당신 백성에게 시나이의 만나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주셨다.
사도 바오로는 이 만나가 성체의 예표라고 했다(1코린 10장).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계시하실 때 비유적으로 만나를 들어 말씀하셨다(요한 6장). 예수님은 구약의 만나와는 다르게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만나로서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빵이라고 선언하신다."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8).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거행되는 성찬례 안에도 이와 같은 만나의 의미가 담겨 있다.
허 영업 신부 (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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