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1-5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비판하지 마라 (3)
III. 비판으로 티는 빠지지 않습니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비판을 해서 상대방의 눈 속에서 티를 빼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들 생각에는 비판하면 티가 빠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 빠집니다.
눈을 뒤집어 티를 빼려고 하지만 안 빠집니다.
오히려 눈만 더 충혈시킵니다.
눈속의 티는 눈물로 빠집니다.
눌물을 흘리면 눈물과 함께 티가 삐져 나옵니다.
그래서 울어야 합니다.
울 때 눈물과 함께 티가 함께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하도 울지를 않아서 울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눈물이 매 말라서 티가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울음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특히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웃의 눈에 티를 보면 그 사람앞에서 티를 보며 내가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방도 따라서 웁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가 빠져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가운 비판이 아니라 따뜻한 눈물입니다.
미국 뉴욕의 역대 시장중 가장 유명한 시장중의 한 사람이 “라과디아” 시장입니다.
뉴욕의 리과디아 공항은 바로 이 리과디아 시장의 아름을 따서 지은 이름입니다.
리과디아는 원래 뉴욕시 즉결 재판소 판사였습니다.
판사로 재직중 한 노인을 재판하게 되었습니다.
죄목은 “빵 도둑질”이었습니다.
이 노인은 빵 가게에서 빵을 훔치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가 문습니다.
“노인장님, 왜? 도둑질을 했습니까?”
노인 : 배가 고파서 나도 모르게 빵을 훔쳤습니다.
판사 : “빵을 훔친 것은 죄입니다. 10불 벌금형에 처합니다”하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우리 뉴욕 거리를 헤메고 있는데 내가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은 벌금으로 10불을 냅니다. 나처럼 벌금을 내기 원하시는 분은 벌금을 내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고서 중절 모자를 돌렸습니다.
47불이 걷혔습니다.
판사가 이 돈을 노인의 손에 들려주며 “노인장님, 힘 내십시오”하고 격려하며 보냈습니다.
그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법정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라과디아 판사가 뉴욕 시장에 출마합니다.
그 때 그 법정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선거운동에 앞장 섰던 사람이 바로 그 노인이었습니다.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은 뉴욕시민들은 리과디아를 시장으로 선출했습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이웃의 눈 속의 티를 보고 지적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함께 울면서 티를 빼어 내주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 방법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인간을 내려다보시는데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인간들,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로 소금 치듯 함을 받는 곳으로 가면서도 자기들이 가고 있는 곳이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인데 그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히히덕 가리면서 가는 인간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눈물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오게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인간의 눈 속에 있는 “죄악의 들보”를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보시고 통곡하며 우셨으며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우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히 5:7).
예수님이 우시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울 줄을 모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뒤따라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 나기 시작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눈에서 죄의 티가 씻겨나가고 사망의 들보가 빠져나갑니다.
소경들의 눈이 떠지면서 밝은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울다가 이런 기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죠지 휫필드라고 하는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1700년대 중반 요한 웨슬레, 죠나단 에드워드 등과 함께 영국과 미국의 영적 대각성을 이끌었던 세계적인 부흥사입니다.
그런데 그의 특징은 설교할 때 우는 것이었습니다.
우느라 설교를 중단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심할 때는 몇 분씩 설교가 중단이 되곤 햤습니다.
어느 분이 물었습니다 : “왜, 우십니까?”
그 때 휫 필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내가 우는 것이 여러분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나 때문에 울어 본 적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고 있고 나의 이 설교는 마지막 설교가 될지도 모르고 지금이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이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어찌 울음이 나오지 않겠습니까?”하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죠지 휫필드의 이 울음이 수많은 사람들을 울렸습니다.
그들이 울기 시작하자 그동안 그들의 눈을 멀게 했던 들보가 눈에서 눈물과 함께 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는 것을 본 이웃들이 눈에서도 티가 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맑은 눈이 되어 자신들을 보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보고 “천부여 의지없어서 주께로 옵니다”하고 울며 찬양하면서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리고 맑고 깨끗한 눈으로 이 세상과 오는 세상 그리고 영적인 세계과 정신적인 세셰 그리고 물질적인 세계를 밝히 보고 진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가장 정상적인 사람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영성은 눈물과 정비례합니다.
“내가 언제 울었느냐? 내 눈에 눈물이 있느냐? 없느냐? 내 눈에서 언제 눈물이 말랐느냐?”가 우리의 영성을 진단하는 시금석입니다.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남편이 울 때 그 눈에서 들보가 빠지고 아내의 눈에서 티가 빠지면서 부부가 삽니다.
부모가 울 때 부모의 눈에서 들보가 빠지고 자녀들의 눈에서 티가 빠지면서 가정이 삽니다.
목사가 울 때 목사들의 눈에서 들보가 빠지고 성도들의 눈에서 티가 빠지면서 교회가 삽니다.
지도자들이 울 때 그들의 눈에서 들보가 빠지고 백성들의 눈에서 티가 빠지면서 나라가 삽니다.
우리 DFI Korea 가족들이 울 때 우리들의 눈에서 들보가 빠지고 아이티 사람들의 눈에서 티가 빠지면서 저주의 땅 아이티가 생먕수가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 모두가 울 때입니다.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메마르지 않는 삶을 살아 주님 오실 때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사랑하는 우리 DFI Korea 가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