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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찬양 감사드립니다. 네, 크리스천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가장 친숙한 말씀이 시편 23편입니다. 언제 읽어도 감동적이고 말씀 암송으로 언제라도 고백할 수 있는 말씀이기에 우리에게 많은 평안과 위로를 줍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내가 읽은 모든 책들 가운데 어떤 책도 성경의 시편 23편이 나에게 준 위로를 주지 못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23편은 세계의 종교 문학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신앙생활의 진수를 나타내는 시편 중에 시편이요 시편의 백미라고 합니다.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들의 기도 묶음집입니다. 우리는 종종 힘들 때 시편을 많이 읽고 또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어려울 때 드리는 기도는 많은 시편에 탄식 기도와 상통하기 때문입니다.
이 탄식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 억울한 상황, 즉 나쁜 사람들은 매사에 형통한데, 오히려 믿는 내가 그들의 먹이가 되고 희생자가 되는 상황, 또는 나를 억울하게 압지하는 사람들에게서 놓이게 해달라거나 아니면 그들을 벌해 달라고 하는 기도, 또는 하나님을 상대로 공정하신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 인자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러실 수 있겠습니까라며 원망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비어서 토설하는 탄식 기도드립니다.
또한 기쁠 때나 감사할 때도 우리는 시편으로 찬송과 경배를 합니다. 그 감사가 더 이상 인간의 감정으로 표현하기 힘들 때는 은유법을 써서 시편 24편처럼 문들아 너의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라는 등의 표현될 수 없는 최대의 표현을 하여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드립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든 감정과 생각과 행동이 기도의 형식으로 온전히 나타나는 시편에 그 중에서도 백미라고 하는 이 시편 23편을 통해서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보았으며 또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였는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절에서 3절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이 이 시편을 쓰던 당시의 상황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궁에서 쫓겨나와 유다 광야에서 피난 생활할 때였습니다. 언제 압살롬의 군대들이 다윗을 쫓아올지 모르는 상황에 그때 도착한 유다 광야에서 보이는 것은 황량한 광야에 부는 모래 바람과 가시덤불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바라보며 시편에 쓴 유다 광야는 푸른 풀밭이 가득하고 시냇물이 흐르며 수많은 양들이 물을 마시며 평화롭게 풀을 먹는 모습들이었습니다. 그가 바라본 평화롭기 그지없는 그림 같은 풍경은 단순한 환상이나 바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는 그의 확신이었습니다.
다윗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고백을 한 이유는 바로 그가 하나님과 계약으로 이루어진 관계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히브리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애굽 땅에서 해방시킨 사건을 기억하며 살아왔습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떠돌이, 유랑자라는 뜻으로 광야를 방랑하며 살았던 볼품없던 소수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 방랑자 떠돌이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돌보셨다는 기억을 그들은 늘 학습해 왔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 6절에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이 히브리 민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이 언약의 관계가 바로 다윗과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였으며, 다윗과 히브리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 계약을 통하여 다윗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출애굽하게 하셨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출애굽할 때 얼마든지 형통한 길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험난한 광야의 길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목마름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이방인의 위협을 받으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히브리 민족에게 40년 동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면서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를 넓히라는 사명이 있었기에 그들은 그 광야에서 훈련받았던 것입니다.
억울하게 쫓기는 신세가 된 다윗이지만, 하나님과의 언약 속에 그 앞에 펼쳐진 황량한 유다 광야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하나님의 사명을 이룰 최고의 푸른 초상임을 깨달은 다윗.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최고의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살면서 뜻을 발견하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뜻은 사명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하늘 문이 열리며 온 천하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려주신 성령의 성령께 세례를 받으신 후에 그 성령에 이끌어 광야로 나가 시험을 받으십니다. 광야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40일간 굶으시고 사단의 시험을 받은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세웠던 뜻, 인간 구원의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뜻이 주어졌기에 감당해야 할 시련 역시 함께 주어졌던 것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였듯이 우리 인간도 배고픔을 잘 참지 못합니다. 그리고 남보다 조금 나아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똑같아지고 싶지 않고 남보다 조금 위에 서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보면 당연히 힘 갖기를 원합니다. 남에게 힘을 행사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인생을 꿈꾸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만약 이 세 가지 유혹의 뜻을 굽혔다면 성령에 의해 내몰리신 광야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것이며, 그 후에 뜻을 펼치는 공생애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황량한 유다 광야에 서 계셨던 경험과 아직 서 계시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굳이 광야에 서지 않아도 될 이유가 많은데, 그럼에도 지금 황량한 광야에 서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그 결말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다윗과 같은 믿음과 예수님께서 나를 향하신 뜻을 새기며 남들이 보지 못하는 너무도 아름다운 광경을 눈앞에 목도하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고백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구합니다.
다음은 4절 봉독하겠습니다.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시편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그림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2절, 3절에 푸른 초장에 시냇물이 흐르는 아주 아름답고 평화, 평화로운 정경에 풍경화를 상상할 수 있는 반면에 4절에 사망의 음침하고 어두운 깊은 골짜기와 원수가 마치 내 앞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과 절망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4절의 문구만 없었다면 이 시편 23편은 나의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내게 여호와의 잔치를 베푸시는 천국의 모습과 같은 시편이어서 우리가 마음이 즐겁고 편할 때 부르고 감사하며 읽을 수 있는 여러 시편 중에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의 말씀 한 절로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어서 평안에서 불안으로, 기쁨에서 두려움으로, 빛에서 어둠으로의 가장 큰 콘트라스트를 조정합니다. 바로 이 큰 콘트라스트가 다윗의 인생이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마음에 합당한 자요, 하나님의 눈동자와 같이 사랑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에 쫓기고 가장 친한 벗 요나단을 잃고 아들 압살롬에게 쫓깁니다. 훗날 그 아들 압살롬의 죽음에 아버지로서 심히 통곡하고 또 장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얻기 위해 우리 아를 죽여서 범죄함으로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얻은 첫 아들을 잃었던 다윗입니다.
바로 그 다윗의 인생 그림이 4절 말씀인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잘잘못을 고백하고 어려운 시기가 있었음을 고백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용기 있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가 병원에서 임종하시는 분들에게 마지막 임종 예배를 드립니다. 어느 정도 의식이 있으신 분들과의 예배에서 그분들이 얼마나 죽음을 두려워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제가 사역하는 동안 기쁨으로 임종을 맞이하신 분은 아주 소수이십니다. 사망이 그들의 코와 눈앞에 다가와서 수시로 으르렁거리며 그들의 삶을 위협할 때 그 어떤 외부의 조언과 위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가짜 기독교인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저와 여러분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았으며, 천국의 소망에도 소망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황량한 광야와 같은 상황과 환경에서 다윗이 보고 느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눈앞에서 확신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다윗과 같은 믿음과 영혼을 가지고 보일지라도 느끼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고백할 담대한 믿음의 용기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망과 절망과 고통의 그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다윗, 그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을 그는 입술로 고백한 용기 있는 다윗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용기 있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신뢰하며 그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내가 당장 죽을지라도 죽게 될 정도의 깊은 고통과 절망과 어둠 속에서 거의 죽음이 내 눈앞에 다가와 이제 죽는 것이 확실함에도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는 주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끊임없는 생각과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결코 두렵지 않다고 용기 있게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용기 있는 고백에 다윗이 바라보는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어떤 위험과 사망 속에서도 그를 지켜주시며 그의 마음을 위로하시는 안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서 뜻을 발견한 존재들입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지금 이 세상에서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지녔기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어쩌면 더 힘들고 더 어려운 곳에 놓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삶이 지리적으로나 상황적으로, 또 관계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광야와 같은 곳에서의 삶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새로운 장소, 새로운 환경, 새로운 학습,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광야와 같이 고독과 외로움과 어려움이 넘실되어도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위해 치열하게 견뎌내셔야 합니다.
오늘 다윗을 통해 이러한 광야와 같은 삶 속에서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믿음을 고백하는 용기임을 깨닫습니다. 용기는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용기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세간에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에 대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는 자신과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하여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윗과 골리앗 다윗이 골리앗을 마주하였을 때처럼 생각은 믿음이 되었으며, 그 믿음의 용기 있는 고백은 하나님의 승리하심을 온 세상이 보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스스로가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정해도 부정될 수 없는 사실,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인간을 사랑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 주님의 능력, 주님의 신실하심, 주님의 도우심, 그리고 그 주님을 믿는 나 이 사실을 생각하시고 거듭 생각하시면 생각의 변화로 나의 믿음이 성장하고 그 믿음이 현실로 이루어져 주님을 향한 고백의 용기 또한 더 커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생의 두 상반된 그림 이 콘트라스드의 차이가 어떠하든 우리는 날마다 다윗의 시편을 용기를 내어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만 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아니하시나이다.
마지막으로 5절과 6절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5절과 6절의 다윗의 고백은 이 시편 23편의 절정이며,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의 최고치를 보여주는 기도문입니다. 나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사망과 절망과 고통의 모든 것들에서도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여호와가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심을 고백하자마자 여호와가 이제는 나를 위하여 잔칫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어 나를 최고의 귀빈으로 대접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원수들이 내 앞에서 나를 당장 삼킬 것 같이 내 눈앞에 여전히 있음에도 여호와께서는 내게 향연을 베푸시오 나를 그 자리에 주연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환대하심이 차고 넘치자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렇게 다윗은 자신이 받아야 할 잔의 양보다 훨씬 차고 넘치는 후한 대접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감히 선언합니다.
내 평생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 평생을 그리 살겠다는 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인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다윗 자신을 평생 뒤따를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라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인 선함과 인자하심이 평생 다윗과 함께 하되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선함과 인자하심을 다윗 평생에 뒤따르게 하신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역설입니다. 모순 같지만 올바른 진리를 역설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유다 광야에서 깨달은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며 약할 때 오히려 강함되며 종국에는 죽음에서 부활을 이끄시는 역설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하시는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뜻에 머물러 있겠다는 다윗 신앙의 역설이 바로 그의 고백입니다.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과 그의 삶을 전 영역에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겠다는 다윗의 결단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마침내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희들에게는 2천년 전에 이 땅에 성육신 되어 오신 우리 예수님께서 이미 사망과 고통과 절망과 어둠의 공중 권세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이미 큰 잔치를 우리 앞에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앞에 큰 상을 차려주시고 우리들의 머리에 성령의 기름 부음을 베푸시어 귀한 주님의 백성 제사장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고백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힘들고 어려운 해외 생활이지만 그 어려움 너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실 그 뜻을 생각하며 다윗과 같은 믿음과 용기로 우리 모두가 주님의 잔칫상에 초대되어 내 잔이 넘침을 고백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