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날 두고 간 님은 용서하겠지만 날 버리고 가는 세월이야 정 둘 곳 없어라 허전한 마음은 정답던 옛동산 찾는가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영원한 청춘“ 산울림 ”
Rock 음악이 그다지 대중화되지 못했던 암울한 시기 70년대,
트로트와 포크음악 등 단조로운 장르의 음악이 주류를 이루며 새로운 시도를 용납하지 않던 1977년,
그 해가 다 저물어갈 즈음, 갑자기 등장한 노래 <아니 벌써>는 ‘야 이거 희한하다’하는 반응과 함께 신선한 충격으로
국내가요계를 강타합니다. 드럼에 막내 김창익, 베이스와 보컬의 둘째 김창훈, 기타와 보컬로 팀의 리더였던 맏형 김창완.
간단한 악기 구성과 뭔가 허술해 보이는 차림과 태도, 전혀 때묻지 않은 목소리의 삼형제 그룹 <산울림>.
이들의 혜성같은 등장은 신중현에 의해 60년부터 주도되었지만 국내 정서와 유신체제속의 사회상으로는 안전한
정착이 어려웠고 결국 대마초사건으로 주춤했던 Rock 음악 부활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산울림>이 가요계에 뛰어든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합니다.
김창완이 고교시절이던 1972년 500원짜리 기타를 들고 오면서 형제끼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고
얼마 후 둘째 김창훈이 기타를 하나 더 장만하자
할 것이 없던 막내 김창익은 전화번호부와 노트 등을 방바닥에 놓고 드럼흉내를 내며 음악을 표현하다
결국 드럼까지 장만하여 세형제가 취미로 연주를 하게 되었고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 ‘無異’라는 이름으로 참가해
후일 1집에 수록한 곡 <문 좀 열어줘>로 예선 1위를 했으나 맏형인 김창완이 그해 이미 졸업한 상태였기 때문에 본선에는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김창완이 그동안 만든 노래 약 150여곡이 아까워서 정리하는 기분으로 우여곡절 끝에
레코드회사의 허락을 받아 녹음을 하게 되었는데 녹음 날이 공교롭게 취직시험일과 겹쳤던 김창완은 시험을 과감히 포기하면서
녹음을 강행하였고 그해 12월 15일 역사적인 첫 음반이 발매됩니다. <산울림>은 그렇게 탄생되었습니다.
우연찮게 발매되었던 77년 1집 <아니 벌써>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78년엔 노래 전주가 2분이나 되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를 머릿곡으로 하는 보다 완성도 높은 2집의 발표와 대히트로 실험적인 프로그래시브 락 사운드라는 평을 받으며 산울림을 국내
가요계의 앞서가는 포크 락 그룹으로 자리잡게 합니다.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중을 의식하지 않고 보다 실험성이
강한 3집 <내마음>을 같은 해 발표하는데 현재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18여분에 달하는 초유의 대작 <그대는 이미 나>라는 곡을
B면 전체에 담을 만큼 파격적인 시도를 계속해 나갑니다.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79년 두 동생의 군 입대로 활동의 큰 공백이
예상되었지만 불과 1년 만에 세 장의 명반을 발표했던 것처럼 김창완의 솔로앨범과 동생들의 휴가기간에 녹음을 마무리한
4집에서 6집까지를 1년여 공백 기간 동안 발표하였고 81년 다시 뭉쳐 84년까지 7집에서 10집까지 발표하며 그들의 음악을
다양하게 펼쳐보입니다. 그리고는 전문 음악인이 꿈이 아니었던 그들 형제는 미련없이 각각 개인 기업에 취직하면서
사실상의 해체와 함께 김창완의 솔로시대를 맞이합니다.
일본의 음악전문지에서도 ‘세계수준의 천재’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김창완은 97년 13집을 끝으로 음반활동을 중단한 채
음반기획을 통해 후배를 양성하며 방송진행, 영화와 드라마 음악작업, 최근에는 연기자로 자주 브라운관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1회 대학가요제 대상곡이던 <나 어떡해>의 작곡자 둘째 김창훈은 형 못지 않은 음 악적 재능으로 음악계를 떠나 있는
동안에도 댄스가수로서 한 획을 그은 김완선의 1, 2집 음반작업에 참여하는 등 그 영향력을 발휘한 바 있습니다.
2005년에는 팬클럽이 마련한 13집 음반발매 후 8년 만의 산울림 콘서트를 통하여 그들의 여전한 음악적 열정을 보여 주었으며
그들 셋이 모두 모인 마지막 공연은 2006년 7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의 데뷔 30주년 기념공연이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뭉쳐 못 다한 노래를 부르고 들려주리라는 확신과 기대는 안타깝게도 2008년 1월
막내인 김창익이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함으로 더 이상 꿈꿀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산울림의 데뷔는 파격적인데, 이는 천재 뮤지션들과의 음악적인 연결고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영미권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그다지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할 수 있고, 특히 1~3집에서
보여준 기타와 오르간의 독특한 어울림, 그 안에서 형성되어 나오는 그루브(느낌있음)는 이전에도 없었지만 이후에도 찾기 어렵다.
(경향신문)』라는 평가와 함께 1집부터 3집까지 무려 3장의 앨범이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꼽힌 산울림의 음악은 펑크락,
사이키델릭, 헤비메탈인가 하면 발라드에서 동요까지 장르에 국한시켜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순수성’이 아닌가 합니다. 누구나 그들만큼은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이 어설프게 들리는 리드 보컬 김창완의 가창과 특유의 음색,
높은 톤으로 질러대는 생소리의 통쾌함, 거친 듯 신선하며 풋풋하고 과장하지 않는 솔직함과 파격적인 실험을 거듭하는 그들의
아마추어리즘은 때로는 몽환적이고 때때로 순수한 동심속을 뛰놀며 처연하고 서정적인 소녀적 감수성으로 응시하는 듯한
그들만의 독특한 시적 상상력과 일상속의 구어체로 생동하여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유신과 5공의 검열시대를 살아남았고
준비와 긴장을 요구하지 않는 자유로운 그들의 노래는 다변화된 시대흐름을 타고 대중들을 열광 시킨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문 좀 열어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어머니와 고등어> <빨간풍선> <가지마오>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 <독백> <청춘> <회상>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소낙비> <너의 의미>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등이 실린 정규앨범 13장,
<개구쟁이> <산할아버지> <꼬마야> <안녕>등 동요음반 4장과 다른 가수들에게 준 노래까지 숱한 히트곡들에 비해 그들이
정식으로 활동한 기간은 불과 2년 정도일 뿐이라고 하니 잘 만들어진 맞춤형 상품같은 트렌디 음악 주류의 현 가요계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음악성과 대중적 인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Rock의 신념인 사회비판을 비껴가는 일류대 출신의 나약하고
이기적인 형제음악그룹이라는 혹평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산울림은 격동의 7,80년대 한 복판에서 오롯이 살아남은 그들만의
향기와 어법으로 인기에는 아랑곳없이 한 시대를 이끌었고 자다가 일어난 것처럼 늘 부시시한 모습 속에서 놀랍게 발현되는
짐작키 어려운 풋풋함과 따뜻함, 기발함으로 다시 나타나 아직 무궁무진할 그들의 못다한 음악을 울려 우리를 들끓게 하리라
기대하게 합니다.
김창완의 솔로앨범인 산울림의 11집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감성적인 발라드가 주류를 이뤄 고정팬들에겐 다소 실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