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 3(롬8:12-16)-성령의 사람이 사는 방식
1. 로마서 8장 세 번째 시간입니다. 로마서 8장의 유익은 영적 침체에 빠져있을
때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말씀이에요. 로마서 8장을 읽거나 듣고도 영적 침체에
서 벗어나지 못하면 곤란해요. 로마서 8장은 구원의 확신에 도움을 줍니다. 로
마서 8장, 첫 주일에 ‘생명의 은인 성령님’에 대해서(1-4절) 나누었습니다. 사람
이 죄의 노예가 되어 해방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이전 시대에는. 그런데 1-
2절에 신앙의 마그나 카르타(자유 대선언)이 선포되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
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습니다. 죄는 우리를 사망으로 몰고
가지만 생명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케 하여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
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지난 주일에는 성령의 사람에 대해서(5-11절) 나누었어요. 성령님을 통해 생명
을 얻은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었어요. 소유가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육신에
속한 자였으나 이젠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 육
신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다고 하면서 실제는 영의 생각이 아닌 내 생각-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일할 때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야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어요.
2. 오늘은 ‘성령의 사람이 사는 방식’에 대해서 나눕니다. 성령의 사람은 생각
에서부터 육신에 속한 자와 다릅니다. 성령의 사람은 생각뿐만 아니라 사는
방식도 육신에 속한 자와 달라요. 두 가지를 말씀해요, 첫째 성령의 사람은 12
-13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
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
을 죽이면 살리니.” ‘우리가 빚진 자’라 말씀해요. 12절을 새 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좀 더 이해하기에 낫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빚을지
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육신에 빚을 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12절은 우리가 누구에게 빚을 진 것은 밝히지 않고, 육신에 빚을 진 것이 아
니라는 사실만 말씀합니다. 헬라어 성경 원문도 똑같아요. 사도 바울은 왜 여기
서 육신에 빚을진 것이 아님을 말했을까요? 육신(sarks)은 죄에 포로된 몸-하
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세상을 의미해요. 롬6:4-5을 보면, 우리의 육신은 십자가
에 못 박혀 죽었고 육신의 멍에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에게 빚을 졌습니까? 13절은, 성령께 빚진 자라는 말은 하지 않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사도 바울은 이미 1-11절에 성령께
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말했어요. 그리고 빚이란 개념을 통해서 거듭난
우리와 성령님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3. 빚진 자는 빚을 갚기 전에 그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빚지고 고
생해본 사람은 누구보다 잘 이해할 것입니다. 윤락 여성들이 그 삶에서 벗어나
지 못하는 것도, 포주들이 빚을 지게 해서. 이자가 엄청나 비싼 이자를 적용
한다고. 3-4% 대의 은행 이자가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사채 이자로.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게. 처음에는 몇백만 원에 불과한 돈인데, 평생 벗어나지
못하게 묶어버려요. 성노예로 살 수밖에. 전에 서울에서 여자 경찰청장이 이
고리를 풀어주려고 시도했지만, 끝내 미해결된 적이 있습니다. 성령님께 빚을
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3절,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은 거듭난 자의 영이 아니
고, 성령님을 일컫습니다. 13절의 영이 성령인 것은 14절에 바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자의 삶도 여전히 육신을 입고 있기에, 우리의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수는
없어요. 성령님은 다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세요.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어요.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성령님을 하나
님으로 대해드려야 합니다.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대해드리려면, 두 가지를 해야
해요. 하나는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4. 성령의 사람은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며 삽니다. 우
리 말은 육신과 몸을 구분하지 않고 쓰지만, 신약 성경에서 이 두 가지는 구별
됩니다. 몸은 sarks가 아니고 soma에요. soma는 인간 자체를 말해요. 몸의
행실은 곧 사람이 죄를 범하고 사는 행실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육신의 본능대
로 살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없으면 우리가 육신의 본능대로 살아가
요. 육신의 본능대로 사는 삶이 무엇일까요?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이에요.
이 말을 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하지 않아요. 듣는 사람이 듣든
지 안 듣든지, 상처를 받든지 말든지, 시기심을 일으키든지 말든지 말을 해요.
이런 사람은 몸이 가는 대로 행합니다. 술을 먹고 싶으면 참지 못하고 술을 마
십니다. 위에 구멍이 날 때까지 마십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끊지 못합니다.
폐암에 걸려 의사의 경고를 받을 때까지 참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 한계는 있
어요. 의사의 경고는 무서워합니다. 당신 술 담배 끊지 못하면 죽습니다. 그것을
끊든가 죽든가 하라면 끊는 경우를 보았어요. 육체의 건강에 대한 의사들의 위
협이 잘 통합니다. 담배를 끊지 못하던 사람도 수술하고 의사의 경고를 들은 후
끊어요. 의사의 말은 잘도 듣는데 오늘 본문 13절의 말씀은 사람들이 잘 듣지
않아요. 13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5. 의사의 말은 잘도 듣는 사람들이 이 말씀엔 귀를 기울이지 않아요. 이 말씀
을 무시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여전히 자기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딜레
마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빚진 자는 빚을 갚기 전
에 그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우리가 생명의 은인이신 성령님께 빚을
졌으니, 우리 평생 성령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실제는 그렇지 못해요. 롬7:
22-24의 사도 바울의 절규가 있는 것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절규는 거듭난 성도가 몸의 행실을 죽이지 못하는 갈등과 실패를 고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어요. 우리가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8장에서 말씀해줘요, 로마서 7장의 성도들의
절규는 8장이 없으면 죽은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거듭났다고 해도 성령님의
통치를 받지 못하면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죽여야
할 몸의 행실이 무엇입니까?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불의와 욕
심, 성적 욕망, 사이비 이단에 빠지는 것 등이에요.
6. 뉴스에 매일 보도되는 사건들, 최근 n번방 사건-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보여줌. 악마의 삶을 끝내게 해주어서 감사하다고. 우리가 몸의 행실을 죽이고자
하면 매일-매일이 아니라 순간순간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한순간이라
도 성령님과 말씀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누구든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없어요.
성령의 사람이 육신에 속한 자와 다른 삶의 방 두 번째는 15-16절, “너희는 다
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
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종이란 말과 자녀란 말을 비교해요. 종과 자녀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종은 주인
을 무서워합니다. 어떤 일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내가 주관적으로 판단해
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인의 매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에요. 하지 말라고 했는
데 하면 매를 맞아요. 하라고 했는데 하지 않아도 매를 맞고. 자녀는 종과 달리,
매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모든 일을 자유 가운데 행해요. 자기 판단에 따라 일을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매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할 일이기에 행합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사람과
육신에 있는 사람의 차이는 어떤 영의 지배를 받느냐에 따라 정해집니다.
7. 성령의 사람은 어떤 영을 받은 사람이고, 육신에 속한 사람은 어떤 영을 받
았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까? 성령의 사람은 “양자의 영”을 받았고, 육신
에 속한 사람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자입니다. 두 사람의 신분이 하늘
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종이고 다른 사람은 양자에요. 우
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사도 바울 당시 로마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본질상(출신)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하지만 양자로 입양되면 그
의 신분은 급상승했어요. 양아버지와 같은 신분을 받습니다. 신약 신학자 부루스
는 양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후 1세기 로마에서 입양된 아들은 그를 입양한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영원
히 보존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아들
이었다. 그는 친자녀들보다 조금도 열등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애정을 충분히 더
누리고 아버지의 성품을 더 훌륭하게 재현하는 것이 당연하다.” 언더우드(원두우)
선교사의 4대 손, 원한광 박사-원은혜 부부를 제가 만난 적이 있습니다. 부인은
영어 성경공부를 하면서 만났고, 남편은 제가 교육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 초청
을 하여 두 차례 만났어요. 이 부부가 자기 자녀들 이야기를 가끔 하셨어요. 두
자녀를 낳았지만,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 아이들을 좋아해서 두 아이를 입양하여
키웠어요. 두 입양아를 두 자녀와 똑같이 키웠어요.
8. 차별 없이 양육하고 교육받게 했습니다. 두 입양한 아이들이 매우 밝게 성
장했습니다. 당당한 언더우드의 자녀로. 우리가 본질상(출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으나 양자의 영이신 성령을 받으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사랑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이렇게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신분에 맞는 삶을 누리지
못하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를 믿고 분명히 거듭났어요. 신분이 변화되었어요.
문제는 변화된 신분에 어울리는 삶을 살지 못합니까?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습관을 바꾸는 일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에요.
어느 고아가 부잣집에 입양되었습니다. 부잣집 자식으로 살아가기까지는 적응하
는 시간이 걸립니다. 종과 같이 두려움 가운데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어요. 자유 가운데 행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하는 몸의 행실을 죽이
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 신분에 어울리는 모습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유혹을 물리치며 살아야 하는데 옛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이런 삶에서 점차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울리게 살
아가요. 유혹도 점차 이겨나갑니다. 어떻게 변화가 일어날까요? 성령님을 마음
에 초청하고 말씀을 의지하면서부터.
9. 성령의 사람이 사는 방식은 위풍당당합니다. 어깨를 움츠리지 않습니다. 비
굴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확히 구분합니다. 우리
가 양자의 영이신 성령을 받으므로 이런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위풍당당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깨를 움츠립니다. 비굴합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양자의 영이신 성령을 받지 않고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가 영적 침체기입니다.
영혼이 황폐되고 말았어요.
우리는 순간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벗어 버리고 양자의 영이신 성령님을 초청해
야 해요. 성령님을 모셔야 합니다. 매일 매 순간에 초청하고 모셔야 합니다. 로
마 시대 양자는 양부보다 양자 본인의 선택권이 중요했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
세와 태도에 따라 어떤 영의 영향 아래 사느냐가 정해집니다. 사도 바울이 아들
의 영이라고 말하지 않고, 양자의 영이라고 말함은 우리로 겸손하게 합니다. 마
땅땅히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마음에 간직하며 성령의 사람답게 멋진 생애를 누리며 살 수 있기를 주님의 말
씀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