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중요한 사상가이다. 기대승의 가문은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함께 희생된 숙부 기준(奇遵)으로 인해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자리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어린 시절 고봉은 병으로 죽을뻔한 적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8세에 모친을 여의였고 10살 때 누이가 병사했다.
병약한 탓이었을 수도, 여러 가지 형편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기대승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일곱 살에 학문을 시작했다. 23세에 사마시(司馬試)를 합격했지만 25세에 응시한 알성시(謁聖試)에서 부당하게 낙제하여 귀향하였다. 그러나 28세에 동당향시(東堂鄕試)에 장원을 하며 그의 학문을 과시하였다. 또 32세에 『주자문록』을 완성하였고 33세에 문과 을과에 1등으로 급제하며 퇴계 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율곡은 이 시험에서 떨어졌다. 23세에 치러진 별시에서 초시에는 장원을 했는데, 대과에서 낙방한 것이다.
당시 '동방의 주자'로 추앙되던 퇴계와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었다. 막 과거에 급제한 고봉은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퇴계를 방문하였고 퇴계의 학설과 성리학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졌다. 四端(사람의 본성인 理,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七情(사람의 감정인 氣, 희·노·애·락·애·오·욕)은 성리학 연구의 중심주제였다. 그들은 깊은 사상적 교류를 통해 26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었고, 두 사람의 편지는 이황이 별세하기 한 달 전인 1570년 11월까지 계속되었다.
퇴계는 고봉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기도 했고 고봉 역시 퇴계의 학문과 인격을 존경하여 그의 의견을 수용하며 논쟁을 끝맺었다. 당대 최고의 학자에 버금가는 젊은 고봉의 높은 학식도 대단하지만 한참 어린후배에게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경청하며 끝까지 유연한 자세로 임했던 퇴계의 겸손 또한 되새겨 보아야할 소중한 유산일 것이다.
▶이황과 기대승은 편지 일부 처음 만나면서부터 견문이 좁은 제가 박식한 그대에게 도움 받은 것이 많습니다. 서로 친하게 지낸다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하지만 한 사람은 북쪽에 있고, 한 사람은 남쪽에 있으니 제비와 기러기 같습니다. ..... 이 시대를 소중히 여긴다면 자신을 소중히 여기시오. 삼가 황은 고개를 숙입니다.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평생을 우러르면 그리워했는데, 제비와 기러기가 오가는 것처럼 되었으니 어찌합니까? 함께 논하고 싶은 학문과 세상일에 대한 생각이 산과 구름처럼 싸히고 말았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깊이 그리워하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 만은 아닙니다. 광주에서 기선달! <기대승이 이황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출처 : MBC 다큐멘터리 선비의 길 |
출처 : 문화재청 <문화유산 여행길_호남 성리학의 와룡봉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