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건강검진-김명원
시(詩)를 욕심껏 입양해서 키워 본 사람들은 안다
어디에서 문득 시(詩)를 발견해낼지 몰라 전전긍긍
소심하게 더듬이를 무수히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안다
길을 가다가 꽃을 머리에 꽂고 모든 남자들에게
사랑해, 연발하는 여인을 보면 수첩을 펴놓고
열심 스케치를 하였던 시장의 오후,
쓸쓸한 장례식의 뒤에 묻어가면서도
엄청난 죽음의 무게를 시로 생각했던 장지의 숲,
지하철 역사에서 만난 노숙자에게도
눈을 번뜩이며 시상을 구했던 밤의 적막,
나는 한 떄 온통 시어를 구하기에 미쳐있었고
행복했고
내가 간택한 시어들은 한 번도 나를
배반한 적이 없었고
더욱 행복했고,
그들에게 이미지의 옷을 재단해 입혀주며
메시지가 소스로 양념 된 밥을 먹여주며
옹알이를 하던 내 시가 나날이 성장하고
몸무게를 늘릴 때마다 행복은 극치로 치달았고,
배부른 소크라테스의 웃음을 웃으며 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했으므로 행복을 잊었다
어느 날, 시정부(詩政府)로부터
내 시(詩)들에게 건강검진을 받게 하라는 통보가 도착했다.
오래 산 그들의 건강이 염려스러웠으므로
나는 시인들이 줄지어 서 있는 보건소 접수대에서
비로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도 너무 살이 쪄버린 내 시(詩)들은
추할 정도로 비만이거나, 배만 유달리 볼록 튀어나왔거나
두터운 이미지의 화장에 짓눌리거나 지나치게 성형 수술에 길들여져
애당초 어떤 얼굴이었던 지 자신들조차 몰랐던 것이다.
맨 살의 정갈한 뺨,
투명한 실핏줄이 드러나는 피부,
홑 겹 광목 천에 감싸인 부드러운 어깨선,
치장 한 적 없기에 스스로가 확실한
다른 시인들의 시(詩)들은 도도하고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내 시(詩)들도 이미 눈치 챘는지
칭얼대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프다고,
두통이 심하다고,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나는 그들을 줄줄이 업고 다니며 달래야만 했다.
건강검진 결과는 자명한 일,
한 시는 중등도 비만이므로 긴급 다이어트 처방을,
다른 시(詩)는 지방간으로 긴 휴식을,
관절염이 심해 스스로 걷지 못하는 시(詩)는 재활의료과에 입원을,
더구나 끔찍했던 것은
짧은 시(詩)들에게 안락사를 권고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뒤늦게 파양을 결심했지만, 그리하여
그들을 지혜로이 돌보아 줄 현명한 시인들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지나친 성형수술로 주름진 이마며
화려한 화장이 얼룩진 사이로 드러나는 기미며
씻긴 적 없기에 방치된 목에 낀 때를 보는 순간,
누구도 받아줄 것 같지 않은 예감에
연민으로 목이 메었다
온갖 생을 나에게 작부로서 바쳐온 퇴기들을 보듯
그들에게 나는 보건소장의 처방대로 해주기로 했다
그것만이 내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정분이려니
내 시(詩)들이 사육된 축사 문을 열자
어? 무엇인가, 축축하고 어두운 물들이
내 눈에서 떨어진다.
시인의 강-김명원
새로 단장한 분식집 구석에 앉아
후두암 수술을 마친 칠순의 시인과
바지락 칼국수를 먹는다
잘 맞지 않는 틀니의 틈 사이에
오래 씹어야 하는 시간이 어긋날 때마다
낡은 알루미늄 조각으로 오후 햇살들이 튀어내리고
수술 자국 때문에 저절로 생기는 웃음, 입가
버섯 주름을 가만히 들춰보면
수줍은 이끼 아래 고개 드는 스무 살 홍안
휘청 감기는 국수 가락 모양으로 그에게도
긴 세월이 있었으리라
찰진 반죽이 숨결을 골라
치대지고 부대끼며 강해지는 것처럼
근육의 꽃이 피고 싱싱한 핏줄이 폭약으로 터지고
고통의 덩어리로 뭉칠 때마다 완강해지는 사랑을 탄원하던
단단한 국수발 같은 젊은 저 편이 있었을 것이다
그릇 채 국물을 들이키는 얇은 입술이
몇 십 개의 강물을 관악기처럼 빨아들여
마지막 힘으로 바다를 향해 추억을 기울일 때
나의 강이 출렁이며 합수되기 시작했다
내게 남은 따뜻한 국수 국물을 노시인에게 마저 퍼주고
그의 목젖이 내는 음률에 가만히 귀를 갖다 대었다
함께 강바닥에 누워 흘러가는 바람으로 박자를 맞추며
말 못하는 시인의 무수한 말들이
고요히 범람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죽음-김명원
손수 씻을 수 없는 아버지의 몸을
우리가 염해 드렸습니다
매일 새벽미사를 드리러
관절염을 앓던 다리로도 당당히 들어서시던 성당을
우리가 당신을 메고 들어갔습니다
혼자 걸어가실 수 없는 무덤까지
우리가 들어 드렸습니다, 당신의 집에
조심히 눕혀드렸습니다
그토록 신세 지기 싫어 하셨는데 정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김명원
상록회관 4층 그랜드 볼륨 결혼직장
마흔 두 살 신부가 들고 있는 백합 부케가 떨리는 것은
축가를 연주하는 조카아이의 등이
백합 입술보다도 작게 보이기 때문이었을까요
혼자된 언니가 가출한 뒤 갓난 조카를 맡아
스물다섯에 엄마가 되어야 했던 이모 결혼식이군요
온갖 선을 마다하고 연애 한 번 못해 본 이모를
한때는 친엄마인 줄 알았겠지요
큰 소시지 넣은 김밥을 꾹 꾹 눌러 말아 싸주었던 운동회며
회사를 조퇴하고 우산을 들고 서 있던 장마, 하교 교문이며
생활기록부를 쓰면서 잘 나오지 않는 볼펜에게 화를 냈던 밤이며
하얀 건반이 하얀 골격의 추억을 하나씩 드두릴 때마다
햐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저 여인의 눈빛이 붉게 켜지는 것이겠지요
이모는 내 엄마가 아니에요, 잔소리꾼 노처녀, 히스테리 악마,
완강했던 무서운 밤들이 슬프도록 빠르게 다 지나가고,
아이야, 너는 네 엄마는 아니란다, 그러나 엄마란다
아이야, 너는 나의 영원할 첫아이, 첫딸이란다
문득 연주되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뚝 끊기는군요, 아이의 어깨가 숨 급한 폭풍처럼 출렁이며
두 손을 의자에 야윈 가지로 떨구고 고개를 숙이는군요
벼랑의 나날들이 그 숲을 어떻게 일으켜 세웠을까요
불이 난 후에야 비로소 나무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건가요
사회자는 아이의 축가 연주가 처음이라 긴장한 탓이라고
말하였지만 하객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요
더 이상 연주를 듣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린 모두 함차게 박수를 쳤지요
이미 흥건히 젖어 있는 건반 위로 박수 소리가
명징하게 울려 퍼지며 박수로 연주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연주되었지요, 창 밖으로
연둣빛 하늘이 고요히 보이는
4월이었어요
<달빛 손가락> 시학 시인선 006 시집에서
-천안 생
-이화여대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대전대 교수
첫댓글
낙서를 할 줄은 알지만은
시를 쓸 줄은 모릅니다.
낙서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벌써 시인입니다.
낙서는 혼자 하지만 여럿이 읽는 까닭입니다.
나는 왜 저런 표현들을 찾아내지 못할까?.....
이미 찾아낸 것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