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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2장 11-15절. 목회자의 마음 부모와 같은 마음. 요약설교
11-13절. 바울 사도가 자랑한 이유는 자기를 지극히 큰 사도라고 자랑하는 거짓 사도들보다도 바울이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에게 미혹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해명의 말씀입니다.
1. 바울 사도는 어리석게도 자랑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비난할 때, 바울을 옹호해주어야 할 고린도 교인들이 침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1절.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1. 바울 사도는 어리석게도 자랑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비난할 때, 바울을 옹호해주어야 할 고린도 교인들이 침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 바울이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는 말씀은 자기 자랑을 했다는 뜻입니다.
11장 1절과 16절에서도, 자랑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3. 바울이 어리석게 자기 자랑을 한 것을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울이 자기 자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결국 고린도 교인들의 침묵 때문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즉, 거짓 사도들이 여러 가지로 자기 자랑을 하고, 상대적으로 바울을 비난했을 때, 당연히 바울을 옹호했어야 할 고린도 교인들이 침묵했으므로,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회 목회자인 바울 사도를 거짓 사도라고 비방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당연히 자기들의 목회자인 바울 사도를 <우리 교회 바울 사도는 참 사도라>고 옹호해주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 사도를 거짓 사도라고 비난하는데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비난을 가만두고 보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단자들의 말을 묵인하고 동조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보통 우리들 같으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에게 마구 욕을 퍼부으면서 바울 사도를 옹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고린도 교인들은 이단자의 말에 한 마디도 반박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으니, 바울 사도가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들도 이웃 사람이 술 먹고 우리 아버지를 비난하면, 자식 된 우리가 가만있겠습니까?
설령 우리 아버지가 실수를 했어도, 우리 앞에서 아버지를 욕하면 무조건 대들고 보는 것이지요.
이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 사도를 욕하는데도, 가만 보고만 있었다는 말입니다.
참 한심한 고린도 교인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이단자가 목사를 욕하면, 목사 편을 들 것입니까, 아니면 이단자 편을 들 것입니까?
저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과연 목사 편을 들어줄 것인지...
물론 몇몇 교인들은 목사 편을 들겠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이단 편을 들어서 목사를 욕하고 대들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전에 한번 경험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전에 어떤 사람(김*환)이 저를 보고 고려대학교를 나오지 않았는데 고려대학교 나왔다고 거짓말하는 목사라고, 휴대폰마다 문자를 해서 저를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보니까, 제 편을 드는 분은 불과 몇 사람이었고, 상당수가 저를 비방하는 사람 편을 들어서, 저를 의심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지금도 이단자가 저를 비방하면, 안타깝게도 이단자와 함께 저를 비방할 사람들이 상당수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저를 위해서 날마다 기도해주신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수 많은 난관들을 넘어서 오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비방한 데도, 바울을 변호해주지 않고 가만있었던 것입니다.
4.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마땅히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뜻은, 바울 사도가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자기 자랑을 하기 전에, 고린도 교인들이 마땅히 바울 사도 편을 들고, 바울 사도를 칭찬하고, 환영해주었어야 마땅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실상 고린도 교인들은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사도로서 추천서도 없고, 인물도 볼품이 없고(11:7-11), 언변도 모자라고(10:1, 10, 11:6), 치명적인 질병까지 있다고 비난할 때에, 침묵함으로써, 묵시적으로 거짓 사도들에게 동조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를 비방하는 말을 듣고 가만있는 것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비난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 사람들이 있는 데서 누가(?) 저를 흉보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면 의례껏 저를 두둔하고 변호해준 분이 있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럴 때 저를 비방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도 가만있는 사람은 함께 저를 비방하는 사람이고, 비방하는 말을 듣고 야단치는 분은 제 편을 들어주는 분입니다.
바로 바울 사도가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거짓 사도요, 도둑놈이요, 설교도 못 하고 자기 병도 못 고치고, 못생긴 사람이라고 비방할 때, 그 비방을 듣고도 가만있는 고린도 교인들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의 비방을 듣고, “네가 왜 우리 선생님이신 바울 사도를 비방하냐?”고 야단치는 성도는 바울편을 드는 교인이라는 뜻입니다.
5. 김대중 대통령( 1924~2009년) 시절에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약 판매 사원(이*택)이 제주도에 약을 납품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약국에 약을 사러 온 어떤 아주머니가 “김대중이가 어떻고 어떻다”고 비방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약 판매상이 정색을 하고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주머니 방금 뭐라고 했어요?”
그러자 아주머니가 쳐다보니까.
“김대중이가 당신 친구요 뭐요? 왜 우리 선생님을 김대중이라고 하요”고 야단 호통을 쳐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존경하는 분을 함부로 말하면, 야단하고 호통을 쳐버립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 사도를 비방 한데도, 가만 듣고 있으면서, 묵시적으로 동조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이 오늘 말씀을 한 것입니다.
즉 바울 자신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칭찬을 받아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비난에도 가만있기 때문에, 바울이 부득불 자기 자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억지로 시킨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땅히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비방 앞에서도 바울을 칭찬하거나 동조해주지 않았다고 서운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이단자들이 어찌나 공격을 심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목사를 비방하는 말들이 심합니다.
이때 성도님들이 입장을 분명히 표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가만있으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여러분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지경에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냐 우상 숭배냐가 아니라, 목사편이냐 이단이냐가 문제입니다.
즉 이단자들의 최대 목표는 목사를 쫓아내고, 자기들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 지도자를 대신 목회자로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통째로 이단으로 넘어가버리는 것입니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집요한 이단자들의 공격과 비난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복음 진리에 굳게 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6. 바울 사도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바울 자신이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지만, 소위 자신을 지극히 큰 사도라고 자화자찬하는 거짓 사도들과 인간적으로 비교해볼 때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옳으냐 아니냐 하는 시비 문제는 궁극적으로 바울 편을 드느냐 아니면 율법주의 거짓 사도 편을 드느냐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이와같이 지금도 이단 편이냐 예수님 편이냐는 이단 침투자 편이냐 목사 편이냐로 편가름 하는 것입니다.
광주의 동*교회나 벧*교회 같이 큰 교회도 신천지 이단 문제로 학을 떼었습니다.
순천의 어떤 교회는 교회가 통째로 이단에게 넘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율법주의 거짓 사도의 비방 앞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침묵으로 동조한 것을 바울이 탄핵한 것처럼, 신천지와 다른 이단자들이 목사를 비난하는 그 비방에 침묵으로 동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쪼록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고, 정통신앙에 굳게 서서, 우리 교회가 이단의 위험으로부터 승리하고 발전하기를 축원합니다!
12절.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1. 바울 사도는 자신이 참된 사도인 증표가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함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특별히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즉 마태복음 10장 1절에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을 파송하시면서, “열두 제자에게 귀신을 쫓아내며,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마가복음 16장 14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열 한 제자에게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시면서,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 43절에도,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도의 표증이 되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많이 행했습니다.
2. 그런데 사도가 아닌 스데반 집사나 빌립 집사를 통해서도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사도행전 8: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3. 그러면 이런 표적과 기사가 지금도 일어나느냐 문제입니다.
원칙적으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창설하는 사도들에게 특별한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초대교회에도 성경 말씀이 사도들을 통해서 기록된 다음에는 이런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나 지금도 복음 전도의 현장에서는 이런 표적과 기사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해외 선교사들이 선교하는 선교 현장에 이런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특히 박해가 심하게 일어났던 공산당 소련과 중국과 북한 지역에서 이런 표적들이 나타났습니다.
중국 지하 교회에서 이런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났던 기록들을 볼 수 있습니다.
4.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부흥사를 통해서 이런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이성봉 목사님( 1900-1965년)의 부흥회 때 이런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현신애 권사님(1913-1994년) 집회에서도 이런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잘 아시는 조용기 목사님이 집회 시에 이런 병 고치고 귀신 쫓는 기사를 많이 행했습니다.
그런데 조용기 목사님(1936~ 2021년 )은 기도해주고, 묵상을 통해서 누가 어떤 병에서 나았다고 선포를 합니다.
5. 약사이신 어떤 목사님(이*택)은 병원에서 치료하기 어려운 심각한 병도 고치고 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분은 약사이지만, 병원 약은 환자의 상태를 더 악화시키기도 한다고 하면서, 약이란 영양제 외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분은 주로 한의학적인 방법으로 어혈을 빼내고, 알부민이나 고단위 비타민으로 치료를 해줍니다.
특히 이분은 신체에 대한 투시의 은사를 받아서, 병자의 질병 상태를 특별한 투시 은사로 진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환자에게 꼭 필요한 부분을 치료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은사를 보면서도 사람들이 잘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탄식한 것처럼 믿는 사람이 아주 적다는 것입니다.
믿고 간절히 의지하면 불치병도 나을 수 있는데, 병원의 약만 의지해서 병이 더 악화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지난번 저희 교회에서는 이 목사님을 초빙해서 전교인들의 건강 상태를 투시의 은사로 진찰을 받아보았습니다.
그때 어떤 젊은 여집사님은 그 목사님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진찰하자, 그 여집사님이 그 자리에서 통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로 이 여집사님은 극적으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 목사님이 성도들의 건강 상태를 투시 진찰하고, 몇 세까지 살겠다고 예언을 하는데, 그 예언대로 20년이 지난 지금도 103세까지
살고 계신 분(김*옥 권사 어머니)도 있습니다.
6. 제 아내(김*옥)도 갑작스러운 심장병으로 쓰러져서 병원에서 수술했으나 약을 먹고 죽어가던 차에 극적으로 이 목사님을 알게 되어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 목사님의 투시로 심장과 머리에 병이 있다고 해서, 어혈 빼는 부항 치료를 받고, 알부민과 고단위 비타민 주사를 맞으면서 1-3년 치료를 받았습니다.
물론 병원 약은 먹지 않았고요.
그래서 2008년에 죽을 사람이 지금 2024년까지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병원에 가서 심장 검사를 하면, 항상 약을 먹을 필요가 없고 필요시에만 먹으라고 해서 안 먹습니다.
그래도 일상생활에 거의 지장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심장이 약하기 때문에 조심하면서 살고 있고요.
그러나 심장 발작이 일어나서 응급실에 가지 않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7. 근래에 한 사람의 경우를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25살 먹은 여자 대학생이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약대 교수님(최*길)입니다.
그런데 그 딸이 심한 아토피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은사 받은 목사님이 일부러 찾아가서 고쳐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와 딸아이가 믿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심한 아토피 환자도 치료받고 나았는데, 불신하고 치료를 거부하니 어떻게 치료를 해주겠습니까?
이 아토피 환자는 상태가 심해서 시집도 못 가고, 사회생활도 못 합니다.
그렇게 절망적인데도, 불신의 고집이 세서, 절대적인 치료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참담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경기도 지역의 큰 교회에 부흥회도 자주 가셨는데, 의사 면허증이 없이 치료행위를 했다고 고발당하여, 지금은 드러내놓고 사역을 하지 않으신데, 아마 숨어서 사역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8.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즉 누가복음 7장 50절에는 예수께서 죄 많은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8장 48절에는 예수께서 혈루병 여인에게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7장 19절에는 나병 환자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18장 42절에는 예수께서 소경 바디매오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표적과 축복들을 다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13절.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
1. 바울은 다른 교회에서는 선교비를 받았으나 고린도 교회에서는 선교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즉 빌립보 교회에서는 자주 선교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설립하고 이어서 데살로니가에 가서 전도할 때, 빌립보 교회에서 두 번이나 선교 헌금을 보내주었습니다.
즉 빌립보서 4장 16절.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두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도 실라와 디모데가 빌립보 교회에 가서 선교 헌금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처음에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는 천막 장사를 하면서 자비량 전도를 했지만, 나중에는 빌립보 교회에서 선교비를 받아서 오로지 전도하는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8장 5절에는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오매 바울이 말씀에 붙잡혀 고린도에서 전적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2. 이처럼 바울이 다른 교회에서는 선교비를 받았지만, 고린도 교회에서는 선교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다른 교회는 부자 교회이고 고린도 교회는 가난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고린도 교회는 부자 교회이고, 다른 교회는 가난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는 항구 도시라서 부자로 잘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는 선교비를 받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네, 고린도 교회는 아직 3년밖에 안 된 교회이고, 다른 교회와 달리 바울 사도에 대해서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하고, 헌금을 도적질해 먹는 도둑놈이라고 하고, 말을 떠듬거리면서 설교도 못 한다고 하고, 자기 병도 못 고치는 무능한 사도라고 하고, 심지어 보기가 흉하게 생긴 못생긴 사람이라고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비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는 선교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3.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좋아하고, 반갑게 환대하는 곳에 가고 싶지, 자기를 비방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가고 싶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목사가 자기를 환대하든 박대하든 가야 할 곳은 가지만, 그래도 목사를 좋아하고, 목사가 오는 것을 좋게 생각하는 집에 가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성도는 언제 보아도 편하고 항상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할 수 있으면 안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나면 탈을 잡고, 평소에 맨날 괴로움을 주는 사람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일 때문에 할 수 없이 만나기는 하지만,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할 수만 있으면 자주 만나고 싶고, 또 만나면 서로 주님의 일을 더욱 효과적으로 잘 할 수 있어서 늘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즉 우리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 집에 자주 가셨습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늘 예수님 곁에서 도와드렸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수넴 여인이 엘리야 선지자를 늘 자기 집에 모시고 주무시고 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가 3년이나 자기 집에서 살고 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남을 자기 집에 모시고 숙식을 제공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냥 밖에서 식사 대접하는 것은 몰라도 올 때마다 숙식을 제공한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웬만한 친척도 식사까지는 할 수 있지만, 잠자리만은 여관에서 주무시도록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때고 와서 주무시고 가게 한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옛날 믿음의 선조들은 목회자에게 아무 때고 숙식을 제공해드리곤 했습니다.
우리 교회 원로 장로님(홍*표)도 그랬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즉 외부에서 목사님이 오시면, 항상 홍 장로님 댁이 숙식을 제공해드리곤 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의 집도 그랬습니다.
옛날에는 자동차도 없고, 시골에 버스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에서 손님이 오시거나 혹은 장사꾼이 오더라도, 늘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가곤 했습니다.
어떤 분은 안방에서 주무시고 가고, 어떤 분은 사랑방에서 주무시고 갔습니다.
그럴 때면 의례껏 식사를 대접해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겨울이면 손님이 오셔서 한 달을 넘게 숙식을 하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어르신을 기억하는데, 상투를 틀고 다니시는 어르신은 매년 오시면 한 달 이상을 묶고 가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의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한밤중에 손님이 오셨다고 할아버지가 깨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일어나서 불을 때고, 밥을 하고, 음식을 차려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땐가 상투 할아버지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르신들이 그 상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나보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옛날에는 나그네를 자기 집에서 재워드리고 밥을 제공해드리곤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사님들도 성도님들 집에 심방 가서 숙식을 하는 경우들이 흔했습니다.
그래서 부자로 사시는 분은 아예 목사님 방을 따로 마련해두는 집도 있었습니다.
요즘에 도시 큰 교회들은 ‘게스트룸’을 지어서 선교사님들이나 강사 목사님들이나 특별한 경우는 외부 성도들도 주무시고 가게 하곤 합니다.
이처럼 숙식을 제공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미풍양속입니다.
성경에도 아브라함이 나그네 접대를 잘해서, 천사를 영접하기도 했고, 또 여호와를 영접해서 아들을 낳았고, 또 조카 롯을 소돔성 멸망에서 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롯도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영접하고 가족의 생명을 건졌습니다.
삼손의 어머니도 나그네를 접대하다가 천사를 만나 아들을 낳았습니다.
욥도 나그네를 잘 접대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순회전도자들(itinerant preachers)이 시골에 돌아다니면서 설교해주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이런 순회전도자들을 접대를 잘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에서 순회전도자들을 배척하고 접대하려고 하는 성도조차도 내쫓는 나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한삼서 1장 9절에 말한 ‘디오드레베’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삼서 1장 12절의 ‘데메드리오’는 순회전도자들을 잘 접대한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4.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도를 잘 접대했고,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푸대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로부터는 선교 헌금을 받았고, 고린도 교회로부터는 선교 헌금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5. 바울 사도는 다른 교회에서는 선교 헌금을 여러 차례 받았으나, 고린도 교회로부터는 전혀 재정적 보조를 받지 않았는데,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고 용서를 구합니다.
바울을 공격했던 적대자들은 바울이 거짓 사도이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떳떳하게 받지 못한다고 악평을 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다른 교회로부터는 재정적 지원을 받았지만, 고린도 교회로부터는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은 공평치 못한 처사에 대해서, 솔직히 시인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은 것 때문에, 두 가지 오해가 생겼습니다.
첫째는, 바울 사도가 거짓 사도들의 주장대로, 정당한 사도권이 없기 때문에, 재정 지원을 요청하지 못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둘째는, 바울 사도가 다른 교회로부터는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막상 고린도 교회로부터는 재정 지원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오해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은 것은 아직 신앙이 어린 고린도 교회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1.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푸대접한 것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교회에서는 선교비 받았으면서 고린도 교회에서는 선교비 받지 않은 것을 용서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 같으면, 너희가 얼마나 나를 푸대접했으면 내가 너희에게 선교비 한 푼도 안 받았겠냐고 대항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래도 고인도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자기가 고린도 교회로부터 선교비 안 받은 것을 용서해달라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도와주고도 덜 도와주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나, 자식들이 바라는 것만큼 도와주지 못했다고 미안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나 바울이 교인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 절에서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재물을 저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사실 부모님들도 어떤 자녀들에게서는 돈을 잘 받고 필요하면 돈을 달라고도 하는데, 다른 자식에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살면, 편애한다고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은 것은 아직 신앙이 어린 고린도 교회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부모님들도 잘사는 자식에게서는 돈을 받아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지만, 못사는 자식에게서 돈을 받으면 마음이 불편한 것과 같은 이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음 절에서,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을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사랑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과 같이 성도들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성도님들과 직분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4절.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노니>
1. 첫 번째는 사도행전 18장 1절 이하에서 고린도 교회를 전도하여 세울 때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도행전 19장 1절 이하에 에베소에서 3년간 전도하고 있을 때, 중간에 55년에 방문한 것입니다.
즉 바울은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에 분쟁과 부도덕과 재판 문제와 신비파 여성들의 무질서한 예배방해와 바울 사도에 대한 반대 운동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고린도 교회에 방문하였습니다.
그 직전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고린도전서 편지를 들려 보내서, 고린도 교회 문제를 수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가 울고 와서, 바울 자신이 친히 방문한 것입니다.
이 방문을 두 번째 방문 혹은 ‘중간 방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반바울파 운동이 거세서, 바울 자신도 모욕을 당하고 울고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으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절 말씀한 대로 혹독한 편지(중간편지, 눈물의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고린도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러자 디도가 고린도 교회 문제들을 잘 수습해서 일단 안정 국면으로 접어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오늘 고린도후서를 쓰면서 본문에서 말씀한 대로 이번에 세 번째 가면, 정말 고린도 교회와 자기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번에 <세 번째> 고린도 교회에 방문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 하리라.
1. 여기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한 것은 고린도 교회가 믿음이 없어서, 바울 사도에게 사례비 주는 것을 아까와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믿음이 있으면, 목회자에게 물질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목회자에게 물질 주는 것을 대단히 아까워합니다.
요즘에 젊은 성도들은 믿음이 적습니다.
그래서 목사에게 고구마 하나 주는 것도 아까워합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믿음 생활 하시는 어르신들은 믿음이 좋기 때문에, 목사에게 소중한 것들을 많이 주면서도 적다고 오히려 미안해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 이야기가 갈수록 목회 하기기 힘들다고 합니다.
지금 50대 이상의 성도님들은 새벽기도회도 잘 나오고, 목사에게도 잘합니다.
그러나 40대 이하에서는 새벽기도회도 잘 안 나오고, 목사에게 하는 것도 잘 못 합니다.
2. 이것은 목사가 무엇을 받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하나님 대신으로 눈에 보이는 목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마누라를 사랑하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척도는 교회와 목사에 대한 사랑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1서 4장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해보니까, 하나님께 정말 감사하니까 목사님에게 잘하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4장 20절에서 “너희가 나를 생각하는 것이 싹이 남으로 내가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 사도에게 선교비 대주는 것을 좋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1장 16절에서 바울은 자기를 자주 찾아와서 유괘하게 해준 ‘오네시보’를 주님께서 복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42절에서 복음 전도자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 사람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약속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5장 45절에서는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대접한 것이 곧 나를(예수님을) 대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바울 사도에 대해서 얼마나 푸대접을 했으면, 바울 사도가 내가 너희에게 방문할지라도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리라고 했겠습니까?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1. 보통 불신자들은 사람 관계를 할 때도, 결국은 재물의 이익을 얻고자 인간관계를 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복음 사역을 하는 것은, 재물을 얻고자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오직 사람을 얻고자 한 것이 목표였습니다.
2. 영혼 구원은 온 천하보다 귀한 일입니다.
바울 사도의 가치관은 ‘재물과 온 천하와 자기 목숨’보다도 ‘한 영혼의 구원’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6:9).
3. 어느 지혜로운 교회 지도자(장로님)는 재물로, 음식으로, 애경사로 섬기는 일을 잘함으로써, 지방의 유지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얻으면, 다른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은 재물을 취하고 사람을 잃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재물을 소비하더라도 사람을 얻습니다.
4. 옛날 어느 왕실에서 임금님이 여러 후궁들에게 다 궁궐을 떠나가라고 했답니다.
그 대신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각자 한 가지씩 선물을 원하는 대로 주겠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후궁들은 저마다 각종 보물을 요구해서 가져갔답니다.
그런데 한 후궁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아니 너는 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이 후궁은 “저는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고 단지 임금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이 후궁만 왕궁에서 살게 되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임금님만 얻으면 다른 모든 것은 다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원한 것이고, 재물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저축하느니라>
1. 바울 사도는 자기가 고린도 교회에 갖는 심정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무엇인가 주고 싶고, 희생하고, 사랑하는 심정인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철이 없어서, 바울 사도의 심정을 상하게 하고, 배신하고, 심지어 거짓 사도들의 말을 듣고, 참 사도인 것을 의심하면서 패역하게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마음은 마치 예수님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던 것과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비방에 유혹을 받아서 바울이 헌금을 횡령해 먹은 도둑놈이라고까지 의심했지만,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영적 은혜와 물질적 혜택까지 주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아버지를 배반하고 멀리 떠났지만, 아버지는 탕자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자식은 부모를 버리고 제주도에 버리지만, 부모는 그런 불효자식을 용서하고, 처벌받지 않고 사회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자식의 이름과 거주지를 모른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배신적인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영적인 부모의 심정’을 가졌습니다.
2. 이와같이 바울이 배역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가진 것은 바울 자신이 예수님께 용서와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교인들을 박해했지만, 예수님은 바울을 용서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삼는 위대한 사랑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에, 배신적인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부모와 같은’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3. 이처럼 성경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죄인이며 원수인 인간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거짓 사도라고 의심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자녀로서, 예수님의 심정, 하나님의 심장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감동 주시는 말씀입니다.
시편 103편 13절의 말씀처럼,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하나님께서 죄 많은 성도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되어보기까지는 나의 부모가 나를 어떻게 사랑한 것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지도자(목회자)가 되어보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느껴보기 어렵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교인들에 대해서 항상 이런 부모의 심정을 주신 것을 체험했습니다.
바울의 심정이 바로 ‘부모의 심정’이고, 자식을 낳아서 길렀지만, 자식을 이겨 먹지 못하고, 자식에게 애원하면서, 잘 되는 길로 애걸하는 마음입니다.
짐승도 새끼를 잃은 짐승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아끼지 않으면서, 새끼를 찾고 보호하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친히 복음으로 낳아서 기른 고린도 교인들을 율법주의 거짓 사도로부터 건져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심정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님들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 부모의 심정, 교인들을 사랑하는 바울 사도의 심정을 가지시고, 용서하며 사랑하며, 오래 참으며, 기도하며, 서로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영광과 교회의 부흥을 이루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5절.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1.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면 재물을 자녀를 위해서 사용하고, 또 온갖 희생과 봉사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정말 제 아내도 자식을 기를 때 보니까, 아버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희생을 감수하면서 자식을 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아이들이 어릴 때 보니까, 종일 일하고서도 아이가 아프니까 밤새 아이를 엎고, 몇 달을 잠을 자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고서도 다시 이튿날 일하러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 보니까, 아이들이 학교에서 매일 밤 1시에 들어와도 잠을 자지 않고 있다가 아이들 먹이고 2시에나 자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벽이면 일어나서 새벽기도회에 나가고, 그리고 집에 와서는 다시 도시락을 매일 일곱 개씩 싸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남자라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밤이면 아이들이 오기 전에 잠을 자곤 했습니다.
이렇게 아이들 기를 때 7년간을 하루에 몇 시간 못 자고 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돈 주고는 할 수 없는 희생과 봉사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재물을 허비하고 자신까지 허비하겠다고 했습니다.
2. 이런 바울 사도의 희생적 사랑과 봉사를 보면 너무도 존경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어떤 고린도 교인들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비방에 유혹되어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의심하고, 헌금을 도적질해 먹은 도둑놈이라고 의심하고, 말이 어눌해서 설교도 못 한다고 비난하고, 자기 병도 못 고치는 무능한 사도라고 비방하고, 심지어 얼굴을 쳐다보기도 흉측스런 인간이라고 욕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수모와 비방을 당하면, 사랑은커녕 욕만 하지 않아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런 모욕과 비방을 퍼부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해서 재물을 허비하고, 자신까지 허비하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원수를 사랑하는 그런 위대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저 같아도 못할 것 같습니다.
어쩌다 사람이 한번 상처를 받으면,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지만, 한 교회에서 볼 때마다 거짓 사도니 도둑놈이니 무능력자라로 비방을 한다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거짓 사도들의 유혹을 받아서 자기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단자들도 용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이서 1장 10절에서 이단자들에게는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요한복음 18장 23절에서 자신의 뺨을 친 사람에게 왜 내 빰을 치느냐고 대항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사랑하기 때문에 재물을 허비하고 자신까지 허비하려고 하는 고린도 교인들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 자체는 아니고, 바울 자신이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었으나, 지금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비난을 듣고 침묵으로 동조하고 있는 일반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여 한 말씀입니다.
3. 이처럼 바울 사도는 참 목자를 잃고 헤매는 고린도 교인들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사랑을 쏟고 재물을 허비하고 자신까지 허비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과 복음의 말씀과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하면, 좋으신 주님이 건강과 가정과 자녀들을 잘 돌봐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저도 그렇게 열심히 충성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좋으신 주님께서 돌봐주셔서 제가 목사 안수를 27살에 받은 이후로 약 35년간 한 번도 건강이 나빠서 설교를 못 한 적이 없고,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고, 새벽예배를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참 생각하면 기적같은 은혜입니다.
그리고 늘 이사를 다니기 때문에 가정과 자녀들을 잘 돌보기 어려웠는데도, 아이들도 하나도 곁길로 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잘 길러주셨습니다.
또한 3년 전에 아내가 쓰러져 죽는다고 병원에서 내놓았으나, 좋으신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회생시켜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자녀들도 변호사와 의사로 길러주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바울처럼 주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면,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살펴주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처럼 주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좋으신 주님이 성도님과 가정과 자녀들에게 모든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1.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다고,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므로, 물질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따라갔습니다.
오히려, 바울 사도는 재물만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주겠다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의 사랑이란, 어떻게 보면, 요즘 세상 사람들이 스토커의 집착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싫다고 가라고 하는데, 바울 사도는 그래도 사랑한다면서, 돈도 보내고, 자신의 생명도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2. 남녀 사이에서 이처럼 끈질기게 사랑한다고 쫓아다니면, 경찰에 고발을 당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세상 명예의 손상이나, 물질 손실이나, 죽음조차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이 희생하고 사랑하여, 구원하고 세운 교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끝까지 집착하고 있습니다.
3. 바울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한 만큼 고린도 교인들도 자기를 사랑해줄 것을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움을 심으면 미움을 다시 거두게 되고,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다시 거두게 됩니다.
그런데 미워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심으면, 상당히 많이 심어야 미움이 사랑으로 바뀝니다.
옛날 작두샘에서 물을 붓고 다시 붓고 자꾸 부어서 펌프질을 하면, 그 부은 물이 다시 지하에 있는 물을 뽑아 올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미움의 샘에 사랑의 물을 자꾸 부으면, 언젠가 미움이 사랑으로 변해서 사랑의 샘물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대부분의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유혹 때문에 어리둥절해 있을 때, 바울이 사랑의 씨앗을 심음으로써 이 중간파 교인들이 다시 바울 사도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4. 이처럼 이단 문제는 이론으로는 안 됩니다.
오직 사랑으로써만 회복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단에 물든 사람은 이단자들의 논리에 세뇌당하여, 가족도 몰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논리보다도 더 강한 것은 사랑의 감동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녀를 이단에 빼앗긴 부모는 논리로 싸우려고 하지 말고, 끊임없는 사랑의 감동으로 싸워야 합니다.
5.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지식보다도 사랑의 감정입니다.
예화: 이어령 박사( 1933~2022년)는 문화부 장관으로서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인입니다.
그래서 지성적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고,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 이민아 집사 때문에 믿게 되었습니다.
이어령 박사는 이 무남독녀 외딸을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이 딸은 미국에서 검사로 일하다가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갑상성 암을 앓다가 기적적으로 나았습니다.
그리고 그 딸의 아들이 자폐증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나았습니다.
또한 딸의 눈이 망가져서 시력을 잃게 되었는데, 아버지 이어령 박사가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내 딸 민아의 눈을 고쳐주시면 제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기도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주셔서, 사라졌던 망막이 생겨서 눈을 회복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한국 최고의 지성이라는 이어령 박사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어령 교수가 <지성과 영성>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처럼 지식으로는 감화할 수 없어도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서 5장 20절에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이단에 미혹되어 주춤거리고 있는 성도들도 사랑으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방황하고 있는 성도들이 올바른 진리의 길로 돌아와 하나님의 큰 복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