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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부 전선과 베티고지, 화살머리고지, 백마고지, 저격능선(6)
어르신은 아주 총명하고 건강해 보였다. 실제 광덕초등학교 운영위원장도 5대는 했다고 하고 실제 지금 자제분중 한분은 대학교수로 재직중에 있기도 하단다.
그래도 문패 옆에는 참전용사의 집이란 명패가 붙어있어 휴전말기 전방이 아닌 지리산에서 공비토벌 했다지만 명예스러워 보인다.
모두가 군에 가면 죽는다고 있는 빽 없는 빽 다 동원하고 심지어 이장 빽까지 동원하여 군에 가지않으려 했던 시절에 17의 나이에 학도병으로 지원하여 군에 갔으니 위대한 결단 아닌가.
할아버지 말에 의하면 가평 목동지역에 살고 있을 때에 학교가는 것이 부러웠는데 매일 나무나 하러 산에 가다보니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되려는 꽃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어르신은 굴하지않고 남보다 나무도 몇다발 더 하려 노력했고 이곳 광덕리로 피난아닌 먹고 살기 위해 넘어온 후에 12살의 나이에 학교를 갔는데 그당시는 그게 흉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의 후휴증과 조선시대의 양반 문화에 젖어 있던 시절이 갑작스레 해방으로 어리둥절하게 되어 그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38도선이 그어져 졸지에 형제지간에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친구집에 놀러갔다 몇일 있었더니 쏘련군이 보이고 한순간에 북에 머룰거나 야밤에 도망쳐 나와야 했던 시절이다.
지금과 다른 점은 38선이 형식적인 철조망이나 목책정도가 처있고 통제하는 군인도 그렇게 살벌하게 눈을 까고 경계근무를 하는 것도 아니였다고 한다.
"찐 옥수수들고 넘어가 나누어 먹고 감자캐서 구워 먹고 다시 넘어 오기도 했지."
할아버지도 10살에 아닌 말로 월북하는 집안을 따라 왔다. 그러니 가까운 친척들이 모두 가평쪽에 있었고 이곳에는 외가쪽 친척들이 있었다 한다.
처음 본 쏘련군은 말타고 나타나 아주 폼잡고 지나가곤 하고 북한군이 뒤따르며 뭐라 주고 받는데 그게 지금 생각하니 남침하려고 병력배치나 지형정찰을 위한 것이였단다.
사실 목동에서 처음부터 다 넘어 온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단 둘이서 왔다가 한명한명 데려온 것이 가족이 전체 온 것이 되었다.
그때 12살이면 세상물정 다 하는 아주 어른과 같았다. 학교에 선생이라야 동네 형이나 누나뻘이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17에 학교에 글 배우려 온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8살과 비교해 보라, 웃기는 것이지. 하지만 그때는 형 형 하면서 그래도 일제시대에는 꿈도 못 꾸던 것을 하게 되니 모두가 학교라는 신식 교육이 흥미로워 다들 모여 들었다.
처음 38선이 생겼는데 모두들 철조망이 처음보는 것이라 서로들 찾앙와서 만져 보기도 하고 거기에 총을 들고 서성거리는 군인 아저씨에게 총을 만져 보자고 하여 만져 보고 그게 그렇게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다. 저 넘어에는 담배를 물고 삣닥하게 서서 우리를 지켜보던 북한군 병사가 꼭 큰 형같아서 불러 보기도 하고 그러면 어떤 때는 다가와 손을 내밀어 악수도 하고 "너 학교에 안 가니?"물어 보기도 해서 못 간다고 말했더니 왜 못가느냐고 물어와 집에서 안보내준다고 대답도 했단다.
어느날은 옥수수를 쪄서 먹는데 몇개를 몰래 숨겨서 들고 나와 사전에 알아 놓았던 개구멍을 이용하여 춘택이를 만나 나누어 먹으며 그가 가지고 있는 학교 책을 보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지금이야 넘어가다 지뢰밟아 죽고 총 맞아 죽겠지만 처음의 38선은 어떻게 보면 낭만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던 친구들은 친구집에 가서 자고 오기도 하고 연애하는 누나의 편지를 들고 넘어가 전달도 하고 적절한 팁을 받고 즐거워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할아버지는 넘어 왔는데 새로운 동네에 와 보니 같은 동네에 살던 형이 나타나 아는 체를 하여 '형'하고 좋아라 했던 아스라한 추억이 살아온다.
학교를 갔더니 책도 주고 장백산가를 가르치고 김일성 원수님을 떠받드러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나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시절인가 하면 분명 남쪽 세상인 목동에 살때도 아무런 통제를 받지않고 누가 가르치는지 장백산가를 불렀다고 한다.
뭔지도 모르고 덩달아 불렀는데 밤에는 몇몇이 모여 해방군이 온다는둥 별별 이야기를 하여 무슨 소리인지 아버지에게 물었더니 알 필요 없다고 내몰차게 정색을 하던 기억이 있다.
사실 지금이야 자유니 공산이니 하지만 그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민족끼리 잘 사는 것인양 현혹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갑짝스레 인민군이 늘어나고 저기 보이는 화악산을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뭐라 하고 떠나가곤 한다. 이제는 대포가 나타나 밭에 들어가 숨는다.
아침에 보니 군인은 한명도 보이질 않고 있다. 벌써 가평까지 내려갔다고 이야기가 돌았다. 그렇다면 원래 살던 동네도 이제 북한이 된 것이다.
어린 마음에 함께 놀던 친구들도 만날 수 있다고 좋아라 했던 할아버지다.
정말 평온하게 얼마가 지나갔는데 다시 동네에 군인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후퇴하는 병사와 부상병들인데 바른 행군으로 지나가고 지나가고 해서 길거리에 서서 바라만 보았다.
이때 예전에 본 적이 있는 동네 형이 어디서 나타나 길거리에 있지말고 집으로 들어가 있으라 한다. 뭔가 수상한 느낌이 들어 집에 뛰어 들어와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지, 지금 군인들이 걸어가는데 다친 형들도 있어요?"
"너 나가면 이제 잡아서 압록강으로 데려 간다. 나대지 말거라."
"그 형을 길에서 만났는데?"
"다시는 만나지 말라. 지금 인민군이 전쟁을 일의켜 저 대구까지 갔다가 유엔군이 들어아 도망치고 있단다."
"대구가 어디에요?. 유엔군은 뭐고?"
사실 그당시 대구가 어딘지 알지 못했다. 유엔군은 더욱 몰랐다. 15살의 나이가 되었지만 덩치가 작아서 누가 군에 데려가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밤에 어딘가에 갔다오곤 한다. 옆 집에서는 밤에 나간 사람이 안들어 온다고 울고 불고 난리도 나고 어느 집에 누가 죽었다느니 밤에 누가 들어와 먹을 것을 다 가져 갔다느니 뒤숭숭하게 50년 가을은 혼란 스러웠다.
당시 학교에 인민학습 선생이 여자인데 굉장한 미인이다. 서울에서 왔는데 이화여대라고 한다. 그당시도 연세대나 고려대, 이화여대는 지금의 서울대와 같이 유명세를 타고 있었기에 다들 흠모의 대상이다. 나이가 들어있는 할아버지와 또래의 몇몇은 서로 남녀로 생각을 하고 있기도 했으며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늦게 들어갔으니 아무래도 이해도가 빠른 학생이라 선생님이 관심을 가져 주었다. 그걸 행여 흔한 말로 사랑의 감정인줄 알고 설레여서 잠 못 이루던 웃지 못 할 추억이 있다.
나이가 20살이 다 되어 가는 형들도 한두명 있는데 짓궂은 농담도 하고 장난을 치는가 하면 어린 애들을 시켜서 선생님을 놀래주려 개구리를 잡아 오게 한다던지 심한 경우는 뱀을 잡아서 갔고와 교탁 밑에도 슬며시 놓기도 해 기절할 뻔한 사건도 있다.
할아버지는 전쟁중에도 학교를 계속 다녔으며 공부를 잘한다고 칭찬도 받고 그래서 결석하지 않고 꼬박꼬박 학교에 다녔다.
도중에 학교를 도망치거나 가다말고 옆길로 새는 그런 경우는 한번도 없었단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그러리라 본단다. 학교가 재미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얼마 안지났는데 갑작스레 학교를 그만 나오라고 한다.
지금보니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유엔군이 올라오니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안선생님이 불러서 갔더니 공부 잘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며 눈물을 글썽이고 이제는 만나지 못한다고 했다. 표현하지 못하는 이성이 꿈뜰거렸는데 무척 큰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선생님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전선으로 간단다.
전선이란 단어에 고개를 갸우뚱하자 전쟁터에 사상교육을 시키러 간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 못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선생이 이지역 세포조직의 책임자였던 것이다.
선생님은 더났다. 학교도 문을 닫았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학교에 나가 서성거리며 혹시나 그 선생님이 올까 기다려 보았다.
"지금에야 말하는 할아버지의 첫사랑은 선생님이었다."
드디어 총소리가 가까이 오고 탱크소리도 난다.
포탄이 떨어지기도 하고 비행기는 계속하여 날아서 북쪽으로 간다.
국군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길거리에 나간다. 어디서 구했는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도 부른다.
순경들도 들어와 집집마다 뒤지고 난리다.
사실 38도선 접경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북한군이나 소련군에게 나쁜 짓을 당해본 적이 없다.
물론 어디서는 쏘련군이 여자를 좋아해 한 동네에 모두가 상처를 입은 경우도 있다지만 집을 수색하여 있는 것 없는 것 다 들춰내고 누가 누구를 고발했느니 인민군에 협조를 했느니 안했느니 살벌한 광경이 시작 되었다. 예전에 목동에 있을 때의군인이 아니였다.
"차라리 북으로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이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가고 할아버지 집은 그대로 남았다. 물론 아버지는 자주 불려 다니며 고초를 당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생활이 어려워서 이곳으로 온 것이지 어떤 공산당이 좋아서 온 것이 아니기에 모든 의문은 해결 되었다.
국군이 북으로 올라 가 이제 곧 통일이 된다고 난리다. 동네는 어수선하게 빈집도 많고 치안대란 사람들이 순찰을 돌고 가끔은 어디서 잡아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허름한 옷을 입은체로 끌려와 학교 운동장에 열뎃명이 꿇어 앉아 있을 때도 있다.
어느날은 교실 안에서 비명소리에 살려 달라는 처량한 소리도 나고 또 어떤 날엔 어여쁜 아가씨들이 붙들려 와서는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들이 계속 된다. 소문에는 어느 계곡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느니 목동사람도 있고 사창리 사람도 있고 그 가족들이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동네에 있던 형들은 아무도 없고 애들과 나이먹은 사람 밖에는 없다.
이장이 나서 밥을 해야 한다고 집집을 돌아다니며 식량을 걷어낸다. 아니 인민군 시절에도 없었던 일이 자꾸 벌어지니 주변에서 한탄하는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대놓고 뭐라고는 못하는 분위기에 눈치로 그 탄식하는 소리를 알아듣고 있던 할아버지다.
전쟁이 있던 해는 무척이나 비도 많이 왔고 엄청 더웠으며 눈도 많이 내렸다고 한다.
10월이 지나 가는데 동네에 들어오는 군인의 숫자가 늘어난다.
소문에 이제는 중공군이 처들어 와서 유엔군이 다 죽었다고 한다.
보이지 않던 사람이 어디서 나타나 기웃거리기도 하여 뒤숭숭하다.
아버지는 이번에는 가만히 있으면 곤란하다며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어머니 여생생 하나를 데리고 우리 집은 남쪽으로 그렇게 다시 내려갔다.
그런데 목동은 있을 곳이 못 되었다. 여기저기 총소리가 나고 아직도 국군과 숨어있는 잔적들간에 전투가 종종 벌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걸어서 가평읍내를 지나 양평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여기저기 검문소에서 헌병들이 짐을 조사하고 몸수색도 한다. 이미 소문으로 다 들었던 내용이라 별 탈없이 양평 읍내까지는 왔는데 갈 집이 없다. 주변을 돌아다녀보던 아버지가 아무도 살지않은 집을 하나 발견하여 그곳에 들어가 짐을 내려 놓는데 보니 에 천정이 구멍이 크게 뚫려 있다.
"방 가운데에 포탄이 박혀 있고 지붕은 무너지기 직전이다."
주변은 불에 타버린 흔적들이 있는 걸로 보아 폭격이 있었고 다행히 집에는 불이 안붙었으나 포탄이 지붕을 뚫고 떨어져 터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놀라서 아마도 여기 가족들은 모두 다른대로 피난을 가버린 모양이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몸을 눕힐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그래서 짐을 풀었다.
이곳은 광덕리보다 목동보다도 군인이 훨씬 많이 지나 다녔다. 군 주둔지 같았다.
아버지는 미군부대 안에 일을 하나 얻어 우리들 먹을 것을 조달하고 있었다.
본인은 할 일이 마땅하게 없어 사실 빈둥거리고 있었는데 당시에 키가 조금 크면 다 잡아가는 판국에 다행히도 키가 작아 군에도 아직 가지않는 행운을 안고 살았다.
그런데 갑짜기 군대들이 술렁거린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네를 떠나라고 방송이 계속 된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깜깜이 세상에 누구한테 물어 볼 수도 없다.
그저 눈치껏 주변을 살펴 요령있게 행동하는 것이 상책이다.
모두들 떠나는 곳으로 또 가족이 다 간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붙들고 본인은 군에 지원하여 가겠다고 매달렸다.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4대 독자인데 유교 집안에서 안 될 이야기다.
다시 간곳이 여주 어디쯤 되는데 벌판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옆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어디 남한강변이라 한다.
어디서 우막을 칠 것이라도 구해야 하는데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서 구하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땅을 파고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사는 모양인양 표현하기 힘든 겨울나기를 했다.
그래도 다른 집에 비해 어린 아이들이 없고 철들은 본인과 여동생뿐이니 좀 괜찮은 편이다.
눈이 내려 쌓이기도 하고 갑작스레 햇빛이 여름같이 쨍쨍 내리쬐어 눈이 녹아서 땅속으로 흘러들어 고생하던 생각이 아련하다.
나무떼기와 골판지를 그래도 어떻게 구해서 움막같은 집이 아닌 토굴을 만들어 겨울을 나고 있다.
불평불만이 있을리 없다. 살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 군인들이 다시 북쪽으로 몰려간다.
이제는 긴 머무름의 시간속에 알게된 군인아저씨로 부터 유엔군이 다시 38선으로 올라간다고 들었다. 주변의 같은 피난민 대열에서도 같은 지역 사람을 만나 이런 저런 소식도 듣는다. 사람이란 이렇게 집단을 형성하며 살아가고 서로간에 이익관계를 따라 또다른 소집단으로 분리되고 하는 역시나사회적 동물인 것이다.
군부대에서 일해주고 먹고 살고는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얼켜 지내다 보니 또 그속에 알 수 없는 간계들이 생겨나고 미인계도 있고 별별 소문이 다 돌았다.
하루아침에 옆 움막집의 아저씨며 아들이 어디론가 잡혀가 돌아오지 않고 어느집에는 처녀가 사라져 알고 보니 군인 차에 실려가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이 파다해 먹고 살기도 힘든 마당에 그 소문이란 괴물에 재미들을 붙이고 잠시나마 시름을 잊는 웃지못할 인생사였다.
그러다 여름이 오는데 목동까지는 들어갈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나는 아버지와 걸어서 올라가 사실을 확인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전쟁이라는 것이 하는 사람은 죽고사는 문제지만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은 때로는 볼거리도 있다고 한다. 미군전차는 그중에서도 모두가 부러워하는 군대였다.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모습이 대단하고 가다말고 서서 포탄을 쏘아대는 폼이 최고다.
지나는 길 군데군데에 헌병초소가 있어 오가는 사람들을 귀찮게 한다.
그러니 잘못이 없어도 붙이면 그만이니 피해가는 것이 상책이다.
이제 논농사도 밭농사도 남쪽 늘녁에서는 바쁘게 농부들에 의해서 햇살을 타고 있다.
하아버지와 아버지는 그 사이를 이용하여 어떻게 목동까지는 왔는데 말이 아니다. 모두가 불타 버리고 집이라곤 몇채 보이질 않는다. 지금 전쟁은 38도선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전쟁처럼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게임에는 경우에 따라서는 체구가 작아서 살아남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할아버지 경우다.
"형이 체구가 작아 군대에 안가고 동생이 키가 커 군대에 가는 이상한 시대의 현실"
그당시에 나이 불문 체격이 좋으면 이상없이 붙들려 전쟁터에 먹이사슬로 투입 되었고 나이가 많아도 체격이 작아 어리다고 하면 인정되어 군에 안가던 웃지못할 일화들이 참 많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상현이네 형은 21살이고 상현이는 17살인데 체격이 좋아 형은 군대에 안가고 동생이 군대에 가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당시에 누가 호적이나 주민증을 까서 확인하는 제도적 밑받침이 없었고 대부분 피난중에 군대에 들어가니 어느 집은 큰 아들을 장손이라고 군에 보내지 않으려는 사회적 풍습과도 무관하지 않다.
"일본인 사장의 큰 아들대신 군에 입대한 조선인 사환"
그러한 풍습은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 군대도 이런 일이 많았다. 전라남도 나주의 금성산에 가면 어느 시대 왕들의 묘보다 큰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그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호화 분묘가 조성된 사연은 기억에 남는 것이 이렇다.
일제시대 먹고 살기 힘드니 일본으로 들어가 어느 철강업을 하는 가계에 사환으로 취직을 하여 열심히 생업을 하였다.
그런데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니 우리 조선에서도 강제 징요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내에서도 웬만한 남자는 다 잡아다 태평양 전쟁에 몰아 넣고 그 길은 곧 죽음 이었다.
그런데 이 가계의 주인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는데 첫째가 나이가 도어 군대에 끌려가야 하는데 대신하여 사환인 조선인이 대신하여 입대하였다.
그러나 너무 어린 탓에 이를 수상히 여긴 감찰부의 조사로 되돌아 오게 된다. 그 동네나 우리 동네나 같은 문화권이니고자질 문화는 별반 뭐가 다르겠는가. 그래서 이번에는 가업을 이어나가는 그들의 장인정신과 연계하여 작은 아들이 군에 대신 출병 하였다가 전사하게 된다.
그러다 전황이 너무 긴박하여 미군에 항복해야할 지경에 이르자 큰 아들마저도 붙들여 전쟁터로 나가 결국 전사하게 된다.
그러니 집안의 남자들이 다 죽어버리니 주인은 망연자실 슬픔에 빠지게 되지만 지금 사환으로 들어와 일을 하고 있는 조선인 사환이 너무 성실하고 거짓과 배반의 기질이 없다는 것을 그동안의 관찰로 익히 알고 있기에 번창하여 굴지의 기업이 된 가업을 미련없이 한국인에게 물려주게 된다.
'죄는 미워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문처럼 비록 일본놈의 재산이지만 그 당시에 목숨으로 자주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군이나 안중근 이봉창 의사등의 애국 헌신에야 못 미치지만 그래도 얍삼한 일본인에 비해 하고 있는 일에 최선과 성의를 다한 모습은 귀감이 됨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받은 가계가 전후 일본의 복구과정에 엄청난 성장을 하여 굴지의 기업이 되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 내 할 일을 주시요!"
이미 일본으로 들어간지도 많은 세월이 흐르고 일본의 패망으로 대한민국의 광복이 찾아왔지만 어린 사환은 기업의 총수가 되어 있었고 일본 국적도 얻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돌아가 고향산천에 가서 다시 지게 지고 살 것인지 아니면 이곳 일본땅에서 비록 적국이었지만 믿어주고 재산까지 송두리채 남겨준 의붓아버지의 대를 이어 기업을 번창하여 정말 나라에 필요한 시기에 도움을 주는 행동을 할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많이도 고민했다.
일본에 남는다고 성공이 보장받는 것도 아닐 것이고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조국이 현해탄 건너에 있는데 혼자서만 잘 살겠다고 남는다면 또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을 것인가.
그런데 조국에 전쟁이 났다. 6.25전쟁이다.
아직 늙지않은 나이다. 군대에 갈 수 있는 나이다. 많이도 고민하고 고민하는 과정에도 기업은 더욱 성장하게 된다. 전쟁물자를 납품하여 특수효과를 본 것이다.
그래도 듣기로는 높은 벼슬은 않이라도 고려때부터 뼈대 있는 집안이며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던 가문이라는 사실에 항상 자부심을 갔고 있었던 복심이 있었다.
사실 태평양 전쟁중에도 그리고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한 후에도 일본에 잔류한 재일동포들 사이에 파벌이 많아 서로를 의심하고 사상적으로도 많은 문제점들이 있어 북한을 지지하는 세력과 남한을 지지하는 세력간에 갈등은 존재 했다.
어린 나이에 가난을 면하고자 조선을 떠나 일본에 정착했다. 어쩌다 운좋아 아니 인간다운 주인을 만나 이렇게 되었는데 마음의 갈등은 심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청년들이 조국을 위해 싸우러 간다고 남한으로 가는 세력과 북쪽으로 가는 세력들이 갈라져 배를 타고 떠났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리고 전쟁은 무승부로 원점으로 돌아 갔다. 서로가 조국의 안위를 위해 싸웠다고 또 난리다.
솔직히 그 당시는 편을 나눈다면 어느 편이 옳은 것인지 잘 몰랐다.
그래서 기부금도 그 당시로는 엄청난 금액을 솔직히 북에 주었다. 물론 대한민국에서는 손을 내밀지않아 망설이며 지나 이제는 동포사회에 북한파로 분류 되기도 했다.
이승만 시대가 가고 박정희 시대가 왔다.
경제개발을 한다고 재건운동을 한다고 난리라는 소문이 퍼진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한단다.
잘살아 보자는 구호아래 새마을 운동도 일어나고 도시와 농촌이 긴 잠에서 깨어나 많은 변화가 있고 포항제철도 건설한다고 하고 고속도로도 만든다고 한다.
어디서 연락이 온다. 나라를 위해 큰 역활을 해 달라는 정중한 부탁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이제 나이도 중년을 넘어섰는데 청소년 시절에 보았던 고향을 한번 가보고 싶었다.
어렵사리 고국 방문이 실현되고 금성산 자락에 찾아와 조상의 뿌리를 찾아 엎드렸다.
너무도 감격스럽고 고맙고 미안하고 많은 소회가 눈 앞을 갈렸다.
그로부터 얼마후 고속도로 건설에 천문학적인 금액이 지원되고 조건은 이곳 금성산에 조상의 사당을 짓는 것이었다. 왕묘보다 더 크게 묘역이 조성되며 호화분묘란 구설수에 올랐지만 시간속에 지나갔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권력의 실세 몇몇을 빼고는... .
이렇게해서 본인이 태어난 조국에 조금이나마 기여를 하고 일본에 사는 자랑스런 조선인이 되었다.
이렇게 저렇게 검문소를 피해 가본 목동은 삭막했다.
집이라곤 대부분 불타던가 무너져 내리고 사람마저 별로 보이질 않았다.
이웃에 함께했던 사람들도 없다. 하지만 더 이상은 갈 수도 없다. 전쟁 지역이다. 갈려면 저 높은 화악산이나 매봉을 넘어야 하느데 먹을 것도 없고 쉽지가 않아 다시 돌아 왔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 전쟁도 종료되어 곧 휴전이 된다고 소문이 파다하다. 어떤이들은 벌써 짐을 싸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살던 광덕리와 사창리는 큰 전쟁이 있었다니 그나마 있던 초가집마저 불타버리고 남아 있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집안은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때는 머슴살이도 많이 했지만 주인을 잘 만나야 대우받고 떠날 때는 논 몇마지라도 살 돈을 챙기게 되는데 그런 집이 별로 없다.
머슴살이해서 얻는 것은 밥 겨우 먹는 것이며 이것도 식구가 많으면 곤란했다.
할아버지는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군에 지원해 가기로 아버지와 논의를 하여 학도병으로 입대하게 되는데 마침 지리산지역에 공비들이 준동하여 만흥 인원들이 그곳으로 당시에 배치 받아 할아버지도 그곳으로 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38도선 이북지역에 살던 사람들 대다수가 남쪽으로 갔다고 한다. 혹시라도 전방에 있으면 북쪽으로 갈 수도 있기에 그러했다는 풍문이다.
"장군 비행기가 떨어지고 전사했다고 한다."
지리산에 갔는데 거기도 온통 산밖에는 보이질 않았다. 운봉이라는 곳에서 주로 함양 장수 남원일대에 공비토벌을 다녔는데 휴전이 다 되어가던 '53.6.24일, 기억에 남는 것은 전쟁이 6월25일인데 하루전 날이란 것 때문에 안다고한다. 비행기가 떨어졌다며 요란 하게 병력ㅇ 공비토벌 작전 나가다 말고 사고 현장으로 ㅏ려 간다. 본인은 가보지 못했지만 나중에 들으니 이용문 장군이라 했다.
"이용문 장군님,수유리에 잠들다."
인연이란 묘한 함수관계를 가지고 사람의 흥미를 끄는 마력이 있다.
우린 익명의 등산객이 6.25참전용사의 무덤이 방치되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대구 동명에 금암리에 시립공원묘지가 있다. 일제시대부터 있던 곳으로 지역공동묘지였다 지금은 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우리가 제보를 받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관리인을 만나 묘지의 성격과 관리 되어온 내력을 살펴보았다. 이곳이 그 유명한 낙동강 전투의 최후보루였던 왜관-유학산-팔공산지역의 전투지였다.
그당시에 이곳에서 멀지않은 곳에 육군병원이 있었으며 동네분들의 이야기는 많은 전사자의 화장이 이곳에서 있었다고 한다.
"동백꽃이 빨갛게 피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제보지역을 안내받아 찾아나섰다. 하지만 묘역관리 대장만 갔고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때는 풀이 자라나는 '11년4월로 어느 묘지에는 동백꽃이 피어 마치 전쟁터 피한방울과 같이 보인다.
"대위 조영호", 지금 우리가 찾는 참전용사님이다.
떠나 오기 전에 병적 자료를 확인했다. 하지만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분이였다.
물론 여러가지 정황이 그럴수도 있지만 어딘지 확인해야 할 것들이 많아 보였다.
같은 팀원인 해병대 조원사를 유족을 탐문하도록 하고 우리는 대구로 왔다.
서울에 있는 조원사에게 연락이 왔다.
화곡동에서 어렵지않게 그 유족으로 동생 한 분을 찾아 확인하니 분명 맞는 유가족이다.
그래서 조심스레 아버지 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은 한양대 기계공학과를 다니다 군대에 갔다는 이야기와 지금 현충원에 계시는데 원래는 남원 운봉에서 비행기 조종사를 하다 떨어져 함께 타고 있던 높은 분만 시신을 찾아서 안장되고 본인 아버지는 찾지 않고 그대로 그곳에 방치되어 있었단다.
"방치되어 있던 시신을 사위가 나서 직접 현장에서 발굴해서 현충원에 모셨다."
그때는 함부로 말도 못하고 지내던 시절이라 얼마 지나서 조심스레 사위 되시는 분이 요로에 알아보고 뼈를 찾아오면 된다고 해서 남원으로 달려가 직접 지역주민들과 그 현장에서 발굴해서 모셔와 화장하여 안장하게 되었다고 하니 참 안타까우면서도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할 말이 없는 미안함만 있어 알께다고 돌아 나와 연락이 온 것이다.
그리고 우린 드디어 들풀 속에 있는 묘비를 찾았다.
콘크리트 말뚝에 분명 참전용사 "조영호 대위"라고 쓰여 있다.
제보자의 이야기대로 누가 제대로 풀을 깍지않고 관리를 안하다 보니 봉분은 흘러내려 겨우 형태만 유지하고 있다.
관리자 이야기로는 몇번이고 유가족 찾는 노력을 했지만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참전용사라는 것 때문에 남겨 두었단다.
원래는 일정기간 지나면 파서 화장처리하거나 납골당 같은 곳에 보관하다가 일괄처리 되어 버린다.
우리는 잡초를 제거하고 묘비를 반듯하게 세우고 간단한 약식제례를 올렸다.
"일동 차렸, 경례"
그리고 차를 달려 그 사위분이 있다는 충남 연기로 갔다
사위분은 군에 반찬거리를 납품하는 회사의 사장이었다. 서울에 본처가 있고 여기서는 젊은 여자와 산다. 경리사원이었단다. 나이는 벌써 70줄이다.
사연을 말하니 어이 없다며 본인이 직접 처남되는 분을 남원 운봉에서 지역주민이 도와주어 찾아가지고 이장관에 실고 와서 절차를 통해 현충원에 안장 시켰단다.
그러면서 지금이야 말하지만 높은 분이라고 함께 비행기 사고가 난는데 모셔가고 그래도 장교 계급인데 이렇게 천대하면 되겠느냐고 한 말씀 하신다.
그래서 우린 사실관계를 확인 중인데 분명 함께 그 당시에 발굴 되어 대구에 1차 묻혀 있었고 그곳에서 성대하게 의식행사도 있었다고 말하고 그 높은 분이 추서되어 진급된 이용문 당시 준장 이었다고 알려 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지금 이용문 장군은 수유리에 묘지가 엄청 잘 조성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건 그 훨씬 후에 5.16혁명이 나고 박정희 장군이 대통령이 된 후에 그 사실을 알고 유족의 뜻을 받들어 서울로 안장하게 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이용문 장군의 매화장 보고서를 찾았다."
우린 유해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억울하다던가 잘못된 이해관계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한 당사자들에가 필요한 것을 알려주거나 조치를 하기도 한다.
물론 할 수 있는 능력 범위에서다. 그것이 지프라기라도 잡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아니 귀찮다고 시치미 떼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의 양심이며 도덕이다.
장군님의 매화장 보고서를 찾아서 확인해 보니 분명 옆에 조영호 대위님의 묘소도 있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
"한가지 사안은 가장 쉬운 접근법으로 국군묘지 만들고 흩어져 있던 유해를 동작동으로 모셔 올 당시에 유족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그대로인 경우와 한 가지 사안은 처음부터 유가족에게 거짓 정보를 주어 아예 찾는 것 자체를 포기토록 하였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위의 어느 경우도 이 묘소와 관련된 접근 방법이 못 되었다.
"굳이 이유를 대면 아마도 비행기 추락으로 충격이 컷던 당시에 기장과 장군을 바로 모셔서 합동 용결식을 하면서 유족에게 통보를 했으나 통보가 제대로 전달 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처리 되었으리라 판단되어 사후 처리가 미진했다고 본다.
조영호 대위님의 유해를 현충원으로 옮긴 시기와 이장군의 대구근교에서 수유리로 옮긴 시기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용문 장군의 유해는 '53.6.24에 전사하여 당시 육군본부가 있던 대구근교 즉 지금의 동명리에 기장과 같이 안장 되었다가 '61년 5.16군사정변 후에 박정희 당시 국가 최고회의 의장이 이장 위원화 위원장을 맡아 이장 되었으며 이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8년부터 '이용문 장군배 승마 대회'가 개최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는 군에 재직 당시에 여러번의 정치파동에서 이용문 장군의 어떠한 회유에도 굴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무척이나 당시 박정희 군인이 좋아했다고 한다.
"이제는 사실을 이야기 할때가 되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대구 동명에 오빠의 묘가 있습니다."
"네~?' 무슨 말씀 이에요. 그럼 지금 동작동에 있는 오빠의 묘는 뭐예요?"
"사실 저희들도 사실관계 정립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처남 되는 분은 직접 본인이 남원에 가서 모셔왔다고 하지, 하지만 분명하게 함께 전사한 이용문 장군과 함께 대구근교에 안장된 것이 확실합니다. 그건 오빠 되시는 분이 병기병과 장교 1기생이고 함께 남부지구 사령부에 근무하던 ㅈ우 또는 육군본부에 근무하며 영결식에 참가한 동료분을 직접 찾아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입니다."
"그럼 어떵게 된 거예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현재 확인된 묘소를 발굴하여 DNA검사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유해가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 없다면 확인이 어렵습니다."
이렇게 되어 유가족이 DNA감식을 위한 샘플채취에는 동의 하였지만 만약에 일치하지 않는 다던가 유해가 없다면 공허한 결과만 가져온다는 사실에 많은 부담이 되고 사실 우리도 잘못하면 웃음거리로 전략하여 생색내기만 해놓고 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너구나 그 6.25전쟁 당시에 처리된 자가봉송 유해의 진실게임이 솔직히 진행형이고 누구도 섣부른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는 시간이 지나 잊혀지고 있으며 누구도 먼저 나서지 못하는 상태로 있다.
할아버지는 용감하게 지리산일대의 공비토벌을 하고 있을 때에 이미 휴전은 되었다.
집하고 연락이 되어 지금 목동에 친척 집에 머물고 있고 어쩌다 한번씩 광덕리에 산을 타고 들어가 보지만 아직 통제 되어 들어가지 못하고 있단다.
그러는 어느날에 집에서 연락이 왔다.
"군대에서 집을 지어 주어서 고향으로 살던 곳으로 들어 간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빨리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전역을 하여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다. 미군이 갔다 준 우유덩어리며 밀가루 옥수수 가루를 배급받아 먹고 살지 않으면 안된다.
젊은 나이에 이제 산에는 아버지대신 올랐다. 그렇지만 나물을 캐서 먹고 산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이고 장가도 가고 많은 식구가 살려면 뭔가 색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배운 것이 겨우 요즘 초등학교를 나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이외는 사실 뽀족하게 내밀 본인만의 자랑거리가 없는 것이 현실인데 뭘 크게 바랄 수가 없는 형편이다.
그래도 여타의 집보다는 병든 사람없고 전쟁통에 죽은 사람없어 다행인 것이 다행이었다.
군에서 나와 집에 올라와 보니 방한칸에 부엌과 화장실이 딸려있는 1자 집이었다. 어디서 몰려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쭉 길게 길을 따라 지어진 집에서 살아가는데 천태만상이다.
부모중에 한사람이 없거나 다 없는 경우, 혹은 가족중에 전쟁중에 다쳐서 부상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려운 분이 한두명이 있는 집도 있고 젊은 사람이 모두 북으로 갔는지 아니면 행방불명 된 집이 있는가 하면 모두 전쟁터에 나가서 전사해서 나이들은 부모님만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린 아이들 데리고 혼자사는 아낙네도 있고 시집가던날 전쟁이 나서 첫날밤도 없이 전쟁터로 갔던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처녀과부도 있고 어떻게 결혼해서 사는데 남편이 어느날 사라져 이유도 모르고 혼자 수절하고 있는 여인네도 있다.
"배운 것으로 하자, 그 길이 심마니였다."
정말 주위를 돌아보니 사연이 없는 집이 없다.
행복을 논하는 여지조차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자체가 행복이었다.
아버지와 산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밑에서 아들인 할아버지는 높은 곳으로 올랐다.
앞에는 1,400여미터의 화악산 줄기가 발달했고 뒤에는 광덕산맥이 있어 동서남북이 다 산이다.
특히나 전쟁터인 화악산 매봉, 광덕산 백운산, 그리고 도마치봉 국망봉이 있고 국군 6사단이 가장 피해를 많이 받았다는 사창리 동북방의 두류산 장군산 백적산이 있어 처음엔 탄피를 캐서 파는 일을 했다. 당연히 이곳에 살때도 산이요 군에 가서도 지리산을 넘나들던 체질이니 누구보다 많은 탄피를 캐서 돈으로 바꾸어 살림에 보탰다.
"어느 산이나 시체가 다 있었다."
하지만 탄피는 큰 돈은 되지 못한다. 심지어 원정팀을 만들어 전국의 전쟁터로 1~2개월씩 떠다니며 유랑객처럼 사는 것이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마지못해 하는 것이다.
이것마저도 너도나도 하다보니 곧 할 곳이 없어진다.
더구나 이러다 보니 자연 불발탄을 만지게 되어 현장에서 즉사하는 사고도 있고 이걸 집으로 갔고 들어와 잘못 건드려 터져서 그나마 군에서 지어준 학고방이 날아가 버리는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동네마다 이로인해서 손목이 절단 되거나 발이 절단되는 등의 사고로 부상자도 많았다.
그래서 이건 비젼이 아니다 싶어 아버지와 상의하여 산심을 캐서 파는 일을 하기로 한다.
당시만 해도 돈은 있어도 치료할 약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시대였기에 그 휘귀성이 높은 것들이 좋은 값을 받았다. 처음에야 잘 모르니 빈털이로 내려오는 경우도 있지만 점점 찾아내는 실력이 늘었다.
바로 앞산이 범암산이며 석룡산인데 어느 날에 정말 멋진 꿈을 꾸고 산에 올랐다.
하지만 찾는 산삼은 없고 5부능선인데 큰 바위가 있고 그 밑에 비를 피할 수 있는 턱받이 같은 곳이 있길래 고개를 돌려 보니 "왁, 사람이다!"
군에서 보아온 총맞아 죽은 공비하고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벌써 전쟁이 끝난지 얼마인데 저렇게 엎드려 있을까하는 의구심에 다가서서 보니 옷은 입었는데 마크가 국군 6사단이었다. 옆에는 총이 있고 수류탄도 뒹굴고 있다.
산신령님을 만나는 좋은 꿈이라고 나섯던 것이 죽은 군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 두구가 아니였다. 주변에 적어도 6구는 되어 보였다."
그래서 바로 하산하여 군 부대에 신고했다. 군부대가 투입하여 유해를 거둬 절차대로 처리되고 할아버지는 감사장을 받았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다음날 다시 산에 올라 그 인근에서 정말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는 엄청 큰 산삼을 발견하게 되고 이것이 그당시 주앙 신문에도 소개 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받고 갑작스레 동네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논10마지에 밭 10마지기, 그리고 좋은 기와집을 한체 구입했다.
보란듯이 장가도 가고 자식을 낳았다.
그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여 지금 한명은 한방병원을 춘천에서 운영하고 한명은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후에도 몇번의 횡재를 하여 학교에 기부금도 내고 운영 위원장은 5대정도를 했단다.
명패에 '6.25전쟁 참전 유공자의 집'이란 자랑스런 명예도 얻었다.
모든 것이 그당시 산에서 발견되는 유해를 정중하게 보호조치하고 신고하여 처리되도록 한 복이었다 한다. 아마도 본인이 신고 하여 발굴된 유해가 3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어르신, 그럼 지금 가서 발굴 할만한 곳이 어디 없을까요?"
"무슨 소리야, 너무 많아. 저기 보이는 모든 산이 시신으로 덮혀 있었어."
"네, 그곳이 정확하게 여기서 보입니까?"
"보이고 말고. 하지만 산불이 열번을 나고 수해가 나고 지금 어디서 찾아."
"그래도 어느정도 위치만이라도 알려 주시면 저희가 다시한번 탐사해 보겠습니다."
"아니, 뼈밭골을 내가 누가 와서 알려 주었는데 거긴 발굴했나요?"
바로 오늘 만난 분이 영배가 만나서 뼈밭골에 들어 왔다는 분이었다.
"예, 3구 발굴 했습니다."
"예이, 그건 말도 않돼요. 그 바위가 죄다 폭탄맞고 무너녀 내린 것인데 그당시 정말 뼈밭이야."
이 증언에 기초하여 우린 다시 광범이한 조사를 정밀하게 되었고 2009년도에 무려 43구의 유해를 찾아 발굴했다.
"얼굴이 반쪽만 그리고 턱뼈만 남아 있는 전사들, 참나무 뿌리에 얽힌 허벅지뼈... ."
규모는 100미터 곱하기 100미터정도의 지역에 제대로된 유해는 한구도 없었다.
우리 팀장인 곰돌이가 굴러내린 바위의 틈새에도 팔뼈 하나가 끼여 있고 바위들을 이리저리 굴리며 찾아보니 정말 사람이 이렇게도 죽어간다는 비참함을 한눈에 보고 있었다.
죽어가는 그 대상이 비록 적군이라 할지라도 이건 이닌 것 같았다.
"나무야 나무야 너는 알고 있지~!"
살아야 한다.
'계곡으로 붙어라', 소대장님의 목소리 들린다.
물소리 들리어 인기척은 모를게다
하늘에는 비행기 돈다
적군을 찾는 그 조종사 눈아래 보이는 계곡
'방공표지판도 없다', 적군일게다
겨우겨우 살아서 만난 전우들이다
굶은지는 4일째, 여름날 궂은비에 연락마저 끊겼다
혼미한 정신, 조금이나마 눈이라도 붙이련다
깊은 계곡에 물줄기 거세지고
바로 옆 바위군에 기대어 했볕이 들어오길 기다렸더니
아아, 비행기 소리 비행기 소리다
찢어지는 육신을 붙잡을 수도 없다
떨구어지는 목숨을 안고 피 토할 뿐~!
하늘로 솟구치는 바위, 그리고 부서지는 육신이여
나무야 나무야, 너마저 부러져서 꺽이면 어떻하니
그래, 너는 뿌리라도 있잖아 살아 나거라
하늘마저 울더니 하얀 비 내리고 60년이다!
나무야 나무야
너는 알고 있지, 아군이니 적군이니?
"아니 아니 난 몰라요, 다만 나는 그 피를 먹고 자란 나무라는 것!"
참아온 설움
"흩어진 육신이나 얽어메어 장사라도 지내주오"
피밭골에는 눈물이 계곡을 덮고 있었다.
우린 할아버지의 장대한 이야기를 다 듣고 다음은 광덕산으로 오른다.
전사에는 대부분 우리 6사단이 중공군과 '51년 4월 사창리 전투에서 패할 때 많은 피해가 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6사단은 광덕산이 아니라 사창리에서 56번도로를 타고 북으로 실내고개를 넘어 길 좌우측으로 연대가 공격을 위해 진출하던 상황이었다.
2연대가 우측에서 백적산으로 진출하다 중공군 40군의 포위망에 빠지고 19연대는 조금 빠르게 진출하여 복주산에 이르다 중공군 20군에 포위 되었다.
"6.25전쟁중 3대 비극인 사창리지역 전투속에서 무슨 조직적 전투가 이루어졌을까?"
우리 전사는 산자의 기록이다. 처음부터 누가 그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전후에 짜집기 식으로 전사가 편찬되면서 당시의 영향력 있던 인물의 눈치를 피하기란 쉽지 않했을 것이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 아닐까.
국군 1사단이 그렇고 3사단 6사단이 그렇다고 봐야 한다. 대표적 지휘관들이 백선엽, 백인엽, 유재흥장군등은 사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많은 특혜(?)를 입은 대상이라면 어떤 평가를 내릴지?
가장 만만한 사단은 5사단으로 5사단은 제대로 전투한 기록이 별로 보이질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런 희생을 담보한 사단이 있기에 인접사단이나 아니면 상대하는 적의 전투력이 저하되어 다음 상대하는 사단은 수월하게 승리하는 여건이 마련 될 수도 있기에 그 희생은 더 겂진 것이라 사료되어 난 추모의 옷깃을 여미게 된다.
이러다 보니 증언하는 참전용사님들도 일부인원은 과장되게 본인들의 영웅담을 만들어가는 경우가 없지않아 있다고 느껴지게 된다.
물론 정형화된 전쟁이 아니고 더구나 죽고사는 전쟁인데 어찌 계획대로 진행이 되었겠는가.
개인별로 떨어져 나가기도 할 것이다.
분대단위 소대단위로 건재가 유지되어 움직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개개인으로 흩어진 인원들이 어떻게 모여서 그러한 단위대를 만들어 움직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호구덩이마다 시체가 들어 있어요!"
특히 이곳 광덕산 전투에 대해 많은 검토가 되어야 하는 것은 처음 유해발굴 지역으로 결정할 당시는 2007년도에 잠곡 저수지가 있는 잠곡3리 마을회관에 가서 제보를 받는 과정에 그 당시 이장되는 분이 독바위근처에 유해가 호마다 들어 있다고 해서 시작이 된다.
지금은 그 이장분은 죽고 아들이 그 집에서 살고 있는데 탐사 다니면서 듣던 이야기중 놀란 만한 이야기 였다.
"이장님은 고향이 여기인가요?"
"아니요. 난 평강에서 살다 부모님따라 여기 왔어요. 전쟁때는 5살밖에 안되었지요."
"그럼 지금 말한 저 독바위는 전쟁 끝나고 한참 후에 산에 올라갔다 목격한 것입니까?"
"우리가 중학교때쯤 되니까 한 50년에는 저 산뿐만이 아니라 전수 다 있었고 나중에 지금부터 한 20년전에도 올라가니까 독바위 일대는 그대로 있는데 다른 곳은 안보이더라고."
"그럼 최근에 올라 간것이 언제쯤 되시나요?"
"글쎄 한 20년 되나요."
이곳은 원래 내 장인어른이 나에게 말씀을 하셨다.
우리 장인집안은 대대로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살아오고 있는 김씨 가문인데 그러니 전쟁전에는 38도선 북쪽으로 북한지역 이었다.
어르신 나이가 그 당시에 20살인데 워낙 키가 작아서 군에 안갔다가 휴전후에 국군으로 부산 병기창에서 근무를 하셨다.
그러니 당연히 전쟁통에는 이곳 신술리, 바로 잠곡 마을 인접에 살았고 죽어있는 시체를 처리하러 산에도 올랐고 때로는 적군이나 아군의 보급대 역활도 했어야 했다.
중공군이 내려왔을 때는 바로 집 뒤의 방공호에서 함께 잠을 자기도 했고 그들의 보급품을 메고 각흘봉에서 명당산으로 국망봉으로 걸어 가평까지 걸어갔다 걸어 오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이 업무를 하게 되었을 때에 그러니까 2000년말인데 아군이 '51년 5월말 이곳으로 진출후에 경찰 통제로 산에 올라가 시신을 호마다 매장 했다고 하셨다.
그당시는 적군이다 아군이다 그런 것을 따지는 것보다 시체가 죄다 찟기어 팔 따로 머리 따로 다리 따로 흩어져 있는 것을 괭이로 긁어서 묻어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많은 유품은 중공군 방망이 수류탄이었고 박격포탄, 파편, 신발, 미군 시레이션등 수없이 널려 있었다고 했다.
나는 신이 났다.
지금도 그렇치만 내가 가장 기뻐하는 것은 유해가 어디에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바로 발굴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누가 누구와 전투한 것인가?"
산에 올라가 보니 정말 큰 바위가 움크리고 능선에 앉아 있고 능선에는 전수 개인호다. 일정구간 별로 끊어져 교통호도 있고 수없는 개인호가 널려 있었다.
"광덕산, 그 기상관측소에는 수많은 용사들이 묻혀 있었다."
이어지는 개인호를 따라 움직이다 보니 광덕산까지 왔다. 상해봉 위에 올라서니 철원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불현듯 스치는 것이 있다.
북한의 김일성이가 "철원평야와 화천 발전소만은 확보 하라"고 언명을 했다고 하지 않했는가.
그 이유를 이곳에 올라서니 느낌이 온다. 그 광활한 평야다.
후삼국 시대에 태봉의 궁예가 도성을 이곳 철원평야에 구축한 이유는 만민을 배불리 먹이려 했다는 그럴싸한 논리가 맞아 보인다.
광덕산맥은 이곳 상해봉으로 오르기전 우측으로 회목현이 있고 하오고개가 있으며 작은 복주산으로 해서 북주산 수피령고개 대성산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잠곡리와 방화동은 광덕산맥과 독바위가 있는 능선 사이에 들어가 있는 마을이다.
정말 그 당시는 산골중에 산골로 임꺽정이 조선시대때 날 뛰어 다녔고 매월당 김시습이 숨어들었다고 해서 붙혀진 매월당 폭포가 장엄하게 복계산 좌측 지맥 끝에 자리 잡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곳의 전투는 '51.1.4후퇴시부터 시작 된다.
그전이야 공산치하였으니 전투가 초기에는 없고 우리가 압록강 두만강변으로 진출하던 '50.10월에도 첩첩산중이라 북으로 북으로 도망치는 우리가 쫒아올라가는 정황에서는 주로 도로를 따라 북으로 진출했기에 전사책에 나올만한 전투는 없다.
그러나 중공군이 들어왔던 '50.10.19이후부터는 조금씩 상황이 달라져 미쳐 북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지리산이나 태백산맥등 깊은 산속에 숨어들었던 잔당들이 고개를 내밀고 우리 아군과 유엔군의 후방을 교란하기 시작한다.
북에서 전투는 고사하더라도 그당시 큰 전투가 철원과 가평, 춘천지역에서 후방지역 작전을 하던 국군 2사단과 5사단에 물리적 힘이 가해져 가평지구에서는 2사단 32연대장 권동찬 대령이 전사하는등 우여곡절을 격게 된다.
물론 국군 6사단의 전곡과 동두천 일대 전투, 소양강변으로부터 양양까지의 중동부전선을 책임지던 3사단과 9사단 그리고 8사단 지역에서도 전투는 벌어졌다.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에 무슨 축차작 진지 편성인가?"
이곳 가평-화천 진격전은 그리고 철원으로 진격하는 와이오밍선 진출전은 계획된 공격작전과 급편방어진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가 쌍방간에 발생하게 된다.
'51.4월에 국군과 유엔군은 '51.3.7~31일까지 실시된 절단작전을 통하여 '51.3.15일에 서울을 재탈환한데 이어 미제 9군단이 춘천을 확보하고 서부의 미제 1군단이 문산을 점령하고 동부의 국군 제 1군단이 양양에 진출하자 38도선 확보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이때 선정된 방어선이 임진강 남쪽 제방을 연하여 동쪽으로 뻗어 화천저수지-양양으로 연결되는 선을 캔사스선이라 한다.
그리고 이 캔사스선으로 진출하는 작전을 러기드작전이라 하고 중서부의 미제 9군단이 바로 철의 삼각지대라는 철원-평강-김화선을 공격하기 위한 진출선을 와이오밍선이라 하였다.
이에따라 9군단은 좌전방에 영27여단, 중앙에 국군 6사단, 우전방에 미 제1기병사단으로 '51.4.3일 공격을 개시하여 6일에 캔사스선에 도달한다.
그러나 화천댐을 확보하려는 미 제1기병사단의 공격이 계속 돈좌되어 결국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이곳으로 투입된 국군 제1해병연대에게 인계하게 되었다.
결국 4.11일에 와이오밍선으로 진출위한 공격인 불굴작전(돈트라스)을 개시하게 되는데 바로 이날이 미 트르만 대통령이 괘씸죄(?)를 적용하여 맥아더 사령관을 경질하는 날이였다.
이에따라 "리지웨이 8군사령관"이 연합군 사령관으로 밴플리트 중장이 새로운 미8군 사령관을 인수받아 4.20일을 전후하여 미 제1군단의 미3사단이 연천을 미25사는 금학산을 미24사는 문혜리를 그리고 영 27여단이 사창리로 진출하게 된다.
'51.4.21일에 와이오밍선 지눌을 위한 2단계작전이 개시되어 미 제1군단의 미 24사와 25사단이 철원-김화를, 우전방 미 제9군단의 국군 6사와 미 해병1사단이 김화-화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 한다. 하지만 바로 중공군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바로 사창리의 비극을 초래함은 물론 서부전선에서는 영국군 황실대대 글로스터 대대의 비극도 이 시기였다.
"사창리-가평축선의 위기"
중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9군단은 죄안접 미 제1군단의 미24사와 병진하여 국군 6사단이 김화로 우측은 미 제 1해병사단이 화천저수지 북쪽의 와오밍선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51.4.21일에 6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석룡산-화악산에서 육단리와 복주산(1057고지)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제 19연대가 상해봉(1019고지)을 우전방 2연대가 백적산(883고지)를 중간 목표로 확보하였다. 그러면서 전방부대들이 중공군이 출현한다는 상황보고에 급편방어진지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바로 큰 문제점이 노출되는데 19연대가 방화동에 2연대가 백적산에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한다고 하는데 이건 저사가 잘못 기록 되었거나 아니면 짜집기에 급급한 지면편성의 예이며 어떻게 적이 바로 눈앞에 나타났는데 특히 19연대가 상해봉에서 지금의 잠곡저수지 뒷편 방화동으로 진지편성 했다는 사실은 아닌 것 같다.
지도를 상세히 살펴보면 백적산과 56번도로를 종으로 동서로 마주보는 산은 복주산이고 상해봉은 하오고개를 동쪽으로로 463번 지방도로를 종으로 복주산과 마주하여 도저히 백적산과 상해봉은 마주할 수 없는 지형이다.
"무슨 소리요, 우린 길따라 좌측으로 이동하다가 중공군에게 포위 되어 급편방어진지는 고사하고 다시한번 북으로 올라갔다가 운산에서 포위되어 죽다못해 살아나온 악몽에 조직은 무너지고 서로가 살겠다고 동쪽으로 도망쳐서 복주산을 타고 하오고개에서 광덕산으로 도마치고개로 줄행랑쳤는데 무슨 전투요. 그건 다 거짓말이요!"
내가 인왕산을 탐사하다가 내려서며 무악동 노인정에 들러 마침 청주에서 딸집에 올라왔다가 심심해서 나와 봤다는 6사단 19연대 참전용사님을 우연하게 만나 정말 그날의 전투상황을 리얼하게 들었던 행운 아다.
본인은 선봉 수색대원으로 들어갔다가 제일 먼저 중공군을 발견하여 보고하였다고 한다.
"그럼 용사님은 운산에 들어갔을 때는 어디까지 올라가 보셨나요?"
"고풍까지 올라갔다가 포위되어 벽동으로 해서 동창으로 내려오는데 요소요소에 중공군이 다 있어."
"그럼 다시 운산으로 다시 들어왔을 것같은데 어떻게 포위망을 빠져 나오셨나요?"
"고생이야 말도 못하지요. 그때 우리는 장교 한명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그사람이 통제해서 한 20명이 움직이는데 한명도 낙오안하고 나중에 알고보니 대령강 줄기라 하던데 그쪽으로 해서 태천으로 나와서 아군에 합류하여 나중에 평양에 들어와 사단으로 다시 합류했지요."
"어떻게 대령강이라고 아셨는지요?"
"대령강가에서 물을 먹는데 누군가 이곳이 압록강이라 해서 그런줄로 처음에는 알았어요."
그러니 11월말인가 포위되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잘 먹어야 산골에서 옥수수죽이나 보리밥을 얻어 먹고 용케도 죽지않고 견디어 오다 보니 정신도 비멍사몽하기 일쑤고 지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니 어던 경우는 하루종일 산맥을 타고 걸었는데 아침에 보면 다시 그곳인 경우도 있었단다.
처음 벽동에서 압록강을 바라보니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저 너머 중국땅이 제대로 보이지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가 이에 압록강이 맞느냐고 반신반의하며 급하게 지나쳐 왔는데 이번에도 압록강이라하여 원래 강이 크고 길게 되었으니 그런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령강이었단다.
이런 분들은 유난히 기억력이 좋아보인다.
웬만한 당시 전우들의 이름이나 분대장 소대장 이름을 기억하고 계신다.
그래서 이곳 사창리에서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올라가다 포위되어 그때의 공황이 떠올라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탈출에 급급했다고 한다.
"아니 남쪽이 적에게 막혔으니 어디로 가야겠소, 우측 2연대도 마차나지인데 그래서 산을 타고 걷다보니 어느새 몇개의 산을 넘은 거지."
"그때에 광덕산이라고 알으셨나요?"
"알긴 누가 알아, 넘다보니 그래도 4월이라 춥지는 않찮아. ㅁㅈㄱㅈㅇ 남으로 가는 거야."
"혹시 소대원이나 중대원이 함께 탈출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살겠다고 계급장 다 떼고 도망치는데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요."
"얼마나 와서 이제는 살았다고 목이 말라 계곡에 내려가 물을 먹는데 '쏼라쏼라'하는거야... ."
그래서 다리야 나 살려라 하고 다시 산으로 기어올라 도망쳐 내려갔는데 5월말에 진격하면서 알아다고 한다. 그곳이 도마치고개 밑에 있던 국망봉에서 니리는 계곡이고 본인이 도망쳐 가평으로 빠진 산이 국망봉다라 갔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6사단 참전용사, 그중에서도 김용철 상사가 너무 큰소리로 논리를 펴니 그런가 했다고 봐야 함이 맞을 것 같다.
대부분의 6사단 병력은 사창리와 명월리 일대 그리고 도마치고개에서 화악산으로 가평으로 이어지는 길게 75번도로와 391번도로를 따라 후퇴하고 많은 인원이 촉대바위일원과 지천천과 수밀천을 끼고 삼일리 일대에서 전사 또는 포로가 된다.
실제 기록이야 없지만 2,800여명이라고 하며 당시 우측의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6사단을 화력으로 지원하련 전투지원부대들은 사창리 우측 용담리로부터 북한강이 지촌천과 합류하는 서오지리의 56번도로상에서 포병대대의 화포가 60여문 파괴되는등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당시 사단의 에베인 7연대의 중대장 무전방 이었던 경북 현풍의 김달현 용사님의 증언은 그 실상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당시 나는 사창리에서 강가에 차를 대놓고 무선교신을 하고 있었는데 포탄이 날아와 중대장은 바로 현장에서 전사하고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무조건 강따라 내려갔는데 오탄리라는 시골 동네를 새벽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침인데 길거리에 대포며 탱크들이 즐비하게 널려서 불타오르고 차량은 수백대가 쭈욱 길거리에 방치돼 있었다."
"그럼 선배님은 포로가 안되고 어떻게 빠져 나왔어요?"
"맟미 비행기가 나타나 차량대열에 포탄을 퍼부어 콩볶는 것처럼 차량들이 불타는데 얼마나 펑펑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어 그 틈새에 계속하여 강따라 내려 왔더니 신포리까지 와서 독전대에 발견되어 원대복귀 하였지."
"그럼 그때까지 많은 인원들이 희생을 당하여 부대가 건재유지가 어려웠을건데요?"
"건재가 어딨어, 숫자 헤아려서 다시 편성해서 내려간 곳이 가평거쳐 용문산지역으로 밀리는데 무슨 방어가 어딨어. 그냥 길따라 내려가고 중공군은 길따라 내려오고 그러다 포위되어 흩어지기도 하는데 홍천강을 건너서니까 더이상 안따라와 그때부터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설악 엄소리 352고지에 방어선을 편성하는 시기가 5월 중순이야."
"누가 축차방어했다고 해?, 그건 거짓말이고 허겁지겁 뒤로 밀려나는 것이고 겨우 야삽으로 개인호를 파다말고 어디서 따라락따라락 하고 괭과리 소리나면 바로 후퇴야."
솔직히 중대장 무전병도 하고 대대장 무전병도 하고 암호를 사용하여 통신하게 되는데 그때는 축차라는 단어자체가 없었고 "야, 바로 뒷산으로 가라 아니면 옆산으로 가라 강건너가 저기 보이는 산에서 만나자"이런식이었다고 한다.
사창리에서는 전투를 한 것이 아니라 진출하다 보니 중공군이 바로 조그만 개울 뒤에서 나타나 손들어라고 하는 무방비로 당하여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거나 포로가 되었단다.
"전사한 중대장은 어떻게 처리 하셨나요?"
"정말 죄송스런 부하의 모습이지만 뭐 어떻게 처리할 겨를도 없어요. 차에 박격포가 떨어졌는데 시신을 어디서 찾아. 깜깜한 밤에... ."
지금도 중대장을 생각하며 미안함과 많은 전우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한 그곳에 전후에 3번이나 다녀 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서 명복을 빌었단다.
우린 방화동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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