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훈 미국 LA 주님의영광교회 목사 간증<2>
선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 갑상선, 기능저하, 영양실조, 이명현상이 나타났다.
치료를 위해 한국행 비행기를 탔음에서도 내 머리 속은 아프리카에 벌여놓은 사역들로 꽉 차 있었다.
교회 신축공사, 신학교 공사 등 여러 공사들을 마무리 지으려면 6만 불(7천만 원)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하나?
한국에서 진료를 받은 뒤 오 집사님을 만났다.
오 집사님이 “목사님, 선교비로 드립니다”라며 무작정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5만 불이 들어 있었다.
“아니, 이렇게 돈을 많이 벌었습니까?”
내 물음에 그 분이 허허 웃으면 답했다.
“아닙니다. 실은 사업형편이 너무 안 좋아서 힘든 상황입니다만 오히려 절박한 상황에서는 마지막 남은 것 다 끌어 모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요. 목사님께서 기도 많이 해주세요.”
그 분이 믿음으로 주시는 5만 불에다 여기저기에서 주시는 선교비가 보태져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후원 받은 선교비를 계산해보니 정확하게 6만 불이었다.
1년 뒤 오 집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목소리는 잔뜩 들떠 있었다.
“목사님,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좀 더 드릴 걸 그랬어요. 주님께 드린 금액에 꼭 10배를 벌게 해주셨어요. 한 해 동안 지난 10년간 보다 더 많이 벌었답니다.”
아프리카에 기독교 학교가 하나 둘 세워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사이족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이들은 “지난 40년간 우리가 사는 지역에 외부인들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 원시지역이다. 꼭 한 번 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게 오지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던 터라 며칠 뒤 마사이마을에 도착했다.
내가 온다는 소식에 주민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4km 이상 걸어온 사람들도 많았다. 원시인같이 사는 사람들이 마사이족 사람들이었다.
나를 열렬히 환영하는 그들에게 내가 말했다.
“하나님의 큰 도우심을 받으려면 이곳에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자 한 젊은이가 물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은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비가 오게 해주세요. 3년 반이나 오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3년 반이나 비가 안 왔다고. 내가 엘리야냐. 나는 기가 막혔지만 사태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래 한 번 해보자.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태연한척 말했다.
“자 나를 따라하세요. 하나님 비를 주세요.”
내 말을 따라 그들 모두 힘껏 외쳤다.
“하나님 비를 주세요.”
나는 그 말을 백 번 넘게 외쳤다.
그렇게 기도했지만 하늘은 파랗기만 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일곱 밤 자고 북을 치면 이 나무 아래로 다 모이세요.”
집에 돌아와 마음을 졸이며 내내 기도했다. 나는 일주일 후 그 지역으로 가면서 스스로 물었다.
“과연 비가 왔을까?”
차를 몰고 가면서 풀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야속한 풀들은 비를 맞지 못해 누렇게 떠 있었다.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하나님 비가 안 왔으면 교회 못 세웁니다. 이제 제가 가서 무슨 말을 합니까. 나는 못 갑니다. 하나님이 대신 가세요.”
잔뜩 불편한 마음을 토로하며 운전하던 순간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 보니 내가 갔던 그 마을만이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비가 온 것이다. 마을의 풀과 나무들이 쏟아진 비를 머금고 초록의 모습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눈물 나게 감사한 순간이었다.
비가 얼마나 많이 왔던지 내 차가 진창에 빠져버렸다.
그곳과 마을의 거리는 4km 정도였다. 그런데 마사이족 군인 15명이 그곳에 나타났다.
그들이 차를 밀어줘 내 차는 무사히 진창에서 빠져 나왔다.
차를 타고 싶다는 그들을 모두 봉고차에 태워 기세당당하게 마사이족 마을 나무 아래 도착했다.
그곳에는 마사이족 사람들이 일주일 전 보다 훨씬 많이 모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노인 한 분이 감격스런 마음으로 말했다.
“내 평생 이렇게 많은 비를 본 것은 처음이오.”
나는 그들 모두 모인 자리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 후 그 지역에 학교와 교회가 세워지게 됐다. 지금은 100명 넘게 모여 공부하고 있다.
그곳에서 20km 떨어진 곳의 주민들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에게도 학교와 교회를 세워주세요.” 라고 부탁했다.
오이치 마을에 교회가 세워진지 2년 만에 그 마을 사람들의 옷과 삶이 멋지게 바뀐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던 어느 날 나는 한국에서 좋아하던 팥빵과 양갱을 먹고 싶었다. 아프리카에서는 구할 수 없는 식품이다.
“팥빵과 양갱 중 하나만 먹었으면 정말 좋겠다”란 생각에 사로잡힌 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깜짝 놀랐다.
식탁 위에 양갱이가 버젓이 놓여 있었다.
아내는 그날 낮에 일본 친구가 다녀갔다고 했다.
친구가 말했다.
“신 목사님이 팥빵을 좋아한다고 해서 일본에 다녀올 때 팥을 한 대 가지고 와서 팥빵을 만들었다”며 팥빵 5개와 일본에서 사온 양갱 2개를 주고 갔다는 것이다.
“어떻게 아프리카에서 양갱을 먹게 되나”
나는 너무 감격해서 울기 시작했다.
“생각만 해도 응답하시는 좋으신 하나님, 주체 못하는 내 울음소리를 듣고 아내가 ‘뭐 이런 것 가지고 울어요’ 할까봐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통곡하며 울었다.
내 마음의 생각까지 읽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해 펑펑 울었다.
한 번은 아내가 “라면이 떨어지고 없네요”라고 했다.
나는 “어, 그래”하고 말았다.
아프리카에서 라면은 매우 귀한 음식이라 떨어졌으면 다시 찾을 생각을 말아야 한다.
그런데 그 주간에 귀한 라면이 10박스나 들어왔다.
아프리카로 단기선교 온 팀이 3박스를 가져왔고, 다른 선교사님이 2박스를 가지고 나를 찾아 오셨다.
케냐에 사는 한 교포가 한 박스를 주셨고, 다른 분이 나머지 라면을 보내주셨다.
나는 그 주간에도 많이 울었다.
에베소서 3장 20절 말씀대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능히 주시는 분이셨다.
예비하시는 하나님,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며 살아갔다.
특별히 선교지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뜨겁게 나타난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선교사는 물론 현지인들에게 생생히 보여주는 것이다.
선교사의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임을 고백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구나, 나는 도구일 뿐이구나.”
어느 날 신학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빨리 오세요 선교사님, 귀신이 나타났어요.”
신학생들이 모여 새벽예배를 드리는 중 한 자매에게 들어 있던 힘센 귀신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남자 3명이 그 자매에게 맞아 떨어져 아무도 그녀에게 접근을 못한다고 했다.
“나도 귀신들린 자매에게 한 방 맞아 떨어지면 어떡하나. 내가 신학교 학장인데 잘못하다가 신학교 문을 닫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신학교가 엄청 부흥하더니 이대로 사역을 접어야 하나”
생전 처음 겪는 귀신 소동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 이름에 능력이 있다고 했으니 이번 기회에 그 이름을 사용해 보자.”
예수이름의 권세를 떠올리자 두려움과 불안은 확신으로 바뀌었고, 신학교에 도착할 즈음에는 마음이 평안했다.
귀신들린 자매가 현관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한다. 악한 귀신은 자매에게 떠나가라.”
나의 단호한 선포에 귀신들린 자매는 두려워하는 눈빛에 안절부절 했다.
“어, 되나 보다”
이번에는 좀 더 자신감을 갖고 외쳤다.
“예수 이름으로 명한다. 이리 와”
자매는 순순히 내 앞으로 왔다.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니 귀신이 떠나갔다.
그 자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했다.
그 자매는 건강을 회복해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다.
한 번은 한 지역에서 집회를 했다. 한 무당이 그곳으로 구경 왔다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주님의 이름을 아프리카의 더러운 귀신들을 굴복시키고 결박시켰다.
그 이름의 권세로 오지의 땅 아프리카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주의 백성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