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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349. [역경의 열매] 조명숙 <1-15> ‘잘생긴 교목과 말하기’ 내기하다 나가게 된 교회
“예수가 누구예요” 묻자 40여분 설명… 출석 첫날 성찬식 포도 주스로 “건배”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이 집무실에서 교과 과정을 살펴보며 탈북 청소년 교육 방향을 점검하고 있다.나는 서울 중구 소파로 여명학교(교장 이흥훈)에서 탈북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나를 빈민촌에서 태어나게 했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섬기게 했으며, 중국에서 탈북자를 구출하고 국경을 건널 수 있도록 돕게 하셨다. 비록 그때는 힘들고 포기하고 싶었지만 통일세대를 키우는데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음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다.
나는 서울 상계동 노원마을이라는 빈민촌에서 나고 자랐다. 대부분의 가장들은 공사판에서 일했다. 온종일 자신이 가진 에너지의 배 이상을 짜내며 일해야 했다. 아버지들은 새참으로 나온 막걸리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아버지들은 당신이 처한 삶의 무게를 견뎌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아버지는 중동의 노무자로 가셨다. 수입이 생기자 어머니는 집에 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거지들에게 “우리 집에서라도 따뜻한 밥을 먹으라”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챙겨주셨다.
아버지가 중동에 가신 이후 어머니는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부엌에서 작은 막걸리 가게를 시작했다. 어머니 음식 솜씨가 좋아 단골이 늘어갔다. 주린 배와 고픈 술을 막걸리로 채우는 사람들이 가게 앞에 많았다. 그들 중에 몸이 불편한 한 아저씨를 잊을 수 없다. 다른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만 보면 “요놈, 이쁜 놈들” 하면서 안아주려고 했다. 처음엔 치한인줄 알고 도망치기도 하고 놀리며 돌을 던지기도 했다. 아저씨는 다른 어른들과 다른 눈빛으로 아이들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점점 신경 쓰여 잠까지 오지 않을 정도였다. 아저씨는 정말 아이들을 예뻐했다. 너무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그런 눈빛을 보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한번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아저씨의 눈빛을 통해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다. 미션스쿨인 정의여고에 입학해서 하나님을 알게 됐다. 공부도 못하고 꿈도 없었지만 성격은 좋아서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다. 하루는 친구들과 떡볶이 내기를 했다. 내기 방법은 ‘잘생긴 교목님과 누가 더 오래 이야기를 하나’였다.
자신 있었다. 내기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교목실에 들어가 굳은 표정으로 “목사님 예수가 누구예요?”라고 물었다. 목사님은 나를 앉혀놓고 40분 이상 예수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해 주셨다. 이미 내기에서 이길 수 있는 시간은 한참 지났다.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표정을 읽은 목사님은 웃으며 말했다.
“돌아오는 주일부터 교회에 나가거라. 그 약속만 하면 보내 줄께.” 겨우 목사님과 약속을 하고서야 교목실을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주일에 용기를 내어 교회에 나갔다. 마침 성찬식이 열리고 있었다. 포도 주스를 포도주라고 생각하고 마시라는 목사님의 말씀에 성도들을 따라 목사님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잔에 주스를 받았다. 처음 겪는 일이라 이후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 나는 옆에 있던 다른 학생에게 잔을 내밀라고 눈짓했다. 그리고 유리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외치곤 단숨에 들이켰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나의 행동에 목사님을 비롯한 예배당에 모인 성도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누구 한 명, 이런 나의 행동을 탓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다음에도 나오길 권면하며 기다려줬다. 우리 동네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이들을 교회에서 만났다. 문득 예수님이 그들을 그렇게 변화시켰다고 생각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 [역경의 열매] 조명숙 <1> '잘생긴 교목과 말하기' 내기하다 나가게 된 교회
* [역경의 열매] 조명숙 <2> 잘못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외국인 노동자와 인연
* [역경의 열매] 조명숙 <3> '교사의 꿈' 미룬 채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 열어
* [역경의 열매] 조명숙 <4> 27일간 농성 계기 외국인 근로자도 산재보험 혜택
* [역경의 열매] 조명숙 <5> 탈북자 처참한 현실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울 뿐…
* [역경의 열매] 조명숙 <6> 백두산 자락에 움막… 탈북자 끼니 챙겨주기 시작
* [역경의 열매] 조명숙 <7> '남한 망명' 막힌 탈북자들 도와 제3국 탈출 시도
* [역경의 열매] 조명숙 <8> 공안 단속에 불안감 높은 탈북자들 툭하면 화부터
* [역경의 열매] 조명숙 <9> 탈북자 13명과 국경 넘다 베트남 군인들에 붙잡혀
* [역경의 열매] 조명숙 <10> 20일 만에 베트남서 중국으로 쫓겨난 탈북형제들
* [역경의 열매] 조명숙 <11> 6평 지하방에 '자유터' 열자 탈북 청소년 몰려들어
* [역경의 열매] 조명숙 <12> 시간 지나도 매사에 비판적인 탈북형제들에 당혹
* [역경의 열매] 조명숙 <13> 북한서 몸에 밴 암기식 공부 습관 고쳐주느라 고생
* [역경의 열매] 조명숙 <14> 6년여 노력 끝 탈북자 대안학교 첫 학력인정 받아
* [역경의 열매] 조명숙 <15·끝> "탈북형제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통일의 사도"
◇약력=1970년 서울 출생, 단국대 한문교육과 졸업, 연세대 교육행정 석사, 두레자연고등학교 한문·사회교사, 자유터학교 교장, 현 피난처 이사, 여명학교 교감, 통일준비위원회 전문위원.
***[역경의 열매] 조명숙 <2> 잘못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외국인 노동자와 인연
다급히 “영어 할 줄 알면 도와달라” 숨진 파키스탄 노동자 장례까지 맡아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오른쪽 두 번째)이 생활 여건이 열악해 여름휴가를 가지 못한 외국인 노동자 가족들과 함께 한강 수영장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나는 부모님의 어려운 삶을 그대로 닮아갈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가르쳐 가난의 대를 끊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눈빛으로 흘러내리는 좋은 기독교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끝날 무렵 기독교 교사의 꿈이 생기고서야 철이 든 나는 삼수 끝에 단국대 한문교육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대학 3학년 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성경 구절을 읽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됐다.
나는 늘 도움을 받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내게 도움울 주었던 분들은 늘 겸손했다. 덕분에 강했던 내 자존심이 상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나도 겸손한 마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나누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났을까. 집에 잘못 걸린 전화가 왔다. 누군가를 찾는 절박한 전화였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어눌한 발음에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파키스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라고 답했다. 나는 그가 잘 알아듣도록 영어로 전화를 잘못 걸었다고 “You got the wrong number”라고 말했다. 그는 당황하며 “미안 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가 왔다. “당신이 영어를 할 줄 알면 나를 좀 도와 주세요”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려서부터 빈민촌의 어려운 사람들 틈에서 살았던 나는 그들의 표정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 분간할 수 있었다.
상황을 들어보니 친구인 파키스탄 노동자가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가 폭발해 사고를 당했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해 아는 사람에게 급히 전화를 걸다가 번호를 잘못 누른 것이었다. 나는 환자가 누워있다는 고려대 구로병원으로 향했다. 중환자실에서 나보다 두 살 어린 파키스탄 환자 노만과 그를 간호하기 위해 빵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파키스탄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을 위해 죽을 순 없지만 친구로서 도울 수는 있을 것 같아 간호를 시작했다. 당시 나는 수업을 받다 중환자실 면회시간인 저녁 6시가 되면 서울의 남쪽 끝자락인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환자 간호를 했다. 이어 역삼동으로 가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한 뒤 병원으로 돌아가서 병문안을 온 파키스탄 친구들의 저녁밥을 사주고서야 서울의 북쪽 끝자락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면 밤 12시가 훌쩍 넘었다. 그렇게 15일 정도 간호했는데 어느 날 중환자실에서 혼수상태로만 누워있던 노만이 깨어났다. 그는 내게 “누나 고마워요. 내가 다 알아요”라고 말했다. 그동안의 피로가 싹 가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노만은 이튿날 숨을 거두었다. 그는 국내 산업현장에서 일하다 산업재해로 죽은 첫 번째 외국인 노동자였다.
노만이 죽은 뒤에도 그와의 연결고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친구를 애도하기 위해 멀리서 달려온 파키스탄 노동자들에게 장례식장에서 라면을 대접하고 청소하는 일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당시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가 있었는데 사고 처리, 장례 절차와 관련해 건건이 부딪히면서 파키스탄 친구들이 도움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너무 안타까워 “왜 전문가들의 제안을 거절하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상담소 사람들은 한국인이라 우리 파키스탄 사람들의 입장을 모를 것이고, 종교도 가톨릭이라 이슬람인 우리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러니 미스 조, 네가 보호자로서 도와줘”라고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했다. 나는 망자의 주검까지 확인해야 하는 보호자로 나를 지명하는 파키스탄 친구들에게 화도 나고 무서워서 “야! 나도 한국사람이고, 게다가 기독교인이란 말이야”라고 울먹였다. 그들은 울먹이며 내 눈을 응시하곤 “미스 조, 너는 친구잖아”라고 말했다. 나의 외국인 노동자 사역은 그렇게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조명숙 <3> ‘교사의 꿈’ 미룬 채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 열어
한국업체와의 문제 도움받은 무슬림 “개종 어렵지만 기독교인 도와주겠다”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오른쪽 두 번째)이 2001년 설날 아침에 방글라데시 외국인 노동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노만의 죽음으로 나는 가난한 나라의 외국인 노동자에게 도움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과 마주한 나는 교사의 꿈을 잠시 내려놓고 그들을 돕는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고 관련 지식도 짧았지만 뜻을 같이하는 법률가들의 도움으로 1994년 작은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를 열었다. 임금체불 산재문제 성폭행과 더불어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한국인 노동자와 다른 문제들이 있었다. 일을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사장들이 월급을 주지 않고 내쫓았고, 일 잘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겐 다른 공장으로 갈까봐 여권을 압류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어하던 외국인 노동자들은 내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럼 나는 문제가 일어난 현장으로 바로 달려갔다. 법률적인 근거를 토대로 상황을 설명하면 대부분의 사장들은 못내 아쉬워하거나 약간 화를 내고는 문제를 해결해줬다. 그러나 몇몇은 24세 된 내게 “술 한잔 같이 하면 여권을 주겠다”거나 “왜 한국 사람이 한국인 사장들을 돕지 않고 외국인들을 돕느냐” “왜 멀쩡하게 생겨서 외국인들하고 붙어 다니냐”며 모욕을 주곤 했다. 어떤 사장은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서 있는 내게 손찌검을 하려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내가 그 일을 그만둘까봐 눈치를 살피며 초조해했다.
나는 외국인 친구들 앞에서 한국인 사장들에게 강하게 응수했다. “사장님, 저희 아버지도 사우디에서 일했던 외국인 노동자였거든요. 제 아버지에게 사우디 사람들이 이렇게 대했다고 하면 절대로 그 나라 상품은 하나도 사지 않았을 겁니다. 즉시 본청 업체에 해결을 요구할 겁니다.”
대부분 하청업체인 그들에겐 ‘본청업체와의 계약해지’가 큰 위협으로 여겨졌고 두 눈을 부릅뜬 나의 강경대응에 사장들은 꼬리를 내리곤 했다.
한번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 두 개가 잘린 방글라데시 형제가 물었다. “누나는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하세요? 내가 보기에 월급도 없고 누나도 부자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우리 문제를 풀어 주면서 전도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당시 외국인 노동자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공장에서 일하다 일요일에만 상담소를 찾아왔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외국인 노동자로 인해 주일성수를 거의 하지 못했다. 솔직히 성경 지식이 부족한 나는 전도한다면서 그들과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 종교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이슬람 외국인 노동자가 의문을 가진 것이다.
나는 방글라데시 형제에게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좋아서 너희들의 친구가 돼서 돕고 싶은 거야. 하나님께서 너희들도 사랑하고 또 너희들이 힘들다는 걸 아시고 나로 하여금 돕기를 원하셨으니까”라고 답했다. 이에 대한 형제의 대답은 더 놀라웠다.
“누나가 내 손가락 잘린 사고를 해결하기 위해 도와줬다고 내 목숨보다 귀한 종교를 바꿀 수는 없어요. 하지만 누나가 나랑 종교가 다른데도 아무 조건 없이 나를 도와줬으니까 내 나라에 가서는 핍박받는 기독교인이 있으면 그들을 도와줄게요. 그들이 감옥에 간다면 내가 빼줄게요.”
주위에서 나와 형제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도 서로 자기도 그렇게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이미 이들 마음속에 전도의 싹이 트고 있음을 느꼈다. 전도나 선교는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경의 열매] 조명숙 <4> 27일간 농성 계기 외국인 근로자도 산재보험 혜택
상담소 법률자문 봉사자와 결혼 결심… 신혼여행지 중국서 탈북자 처음 만나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오른쪽)과 남편 이호택 피난처 대표. 조 교감은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이 믿는 바를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어 결혼을 결심했다”고 고백했다.나를 포함해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에서 근무하던 네 명의 사회운동가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무엇이 문제인지를 밝히고 싶었다. 당시 외국인 노동자들이 심각하게 겪고 있던 문제는 일하다 다쳤을 때 보상에 관한 것이었다. 대부분 불법체류자로 간주돼 산업재해(산재) 보험급여(보상금)를 받기는커녕 업주들의 신고로 오히려 벌금을 내고 추방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우리는 제도를 바꿀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자 일하다 손과 발이 절단된 13명의 외국인 노동자들과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신의 손발을 앗아간 이 나라에 대한 원망보다 짧은 순간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뒤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사회적 무관심에 더 실망했다.
나는 지쳐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격렬했던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냈다. 27일간 이어진 농성이 불쏘시개가 되어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우리 사회의 공감대를 만들어냈다. 결국 불법체류 중인 외국인 노동자라도 일하다 산재를 당하면 노동자로서 보험급여를 지급하도록 법이 개정됐다.
이후 좋은 소식들이 들려왔다. 당시 5인 이하 사업장에서는 산재보험 가입이 의무사항이 아니었기에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근로자들도 산재보험급여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에게 보험급여를 지급하도록 법이 개정된 뒤 1인 이상 사업장에서도 산재 가입이 가능하도록 법을 고쳐 사각지대에 있던 한국인 근로자들도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며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약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면 그 위 계층의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풀린다는 것을 배웠다.
풍족하지 않은 상담소 여건상 법률 전문가를 영입하는 것은 어려웠다. 자원봉사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난민지원 단체 피난처의 이호택 대표도 자원봉사자였다. 못생긴 외모에 나이도 열한 살이나 많고 월급이 없던 사람이라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일하다 지쳐서 쉬고 있을 때마다 상담소 한 구석에서 묵묵히 법률 자문을 해주는 그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 그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커져가던 어느 날, 조심스럽게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가난했지만 공부를 잘했던 이 대표는 서울대 법대 졸업 후 대학원 시절에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부터 이상하게도 글씨가 제대로 써지지 않아 사법시험에서 1차만 합격하고 논술형으로 시험을 보는 2차는 계속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또 자신은 신장 하나를 선교사에게 기증했다고 고백했다. 깜짝 놀라 이유를 물으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제겐 단순히 나누는 일이지만 그분에겐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에 기증을 했습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그가 다르게 보였다.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이 믿는 바를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평생 존경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시작한 지 4년 만인 1997년 4월 동역자인 이 대표와 결혼했다. 나는 결혼 전 필리핀에서 6개월간 체류하며 수십 명의 산재 대상자들을 찾아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하다 다치고 귀국한 중국인 중에는 산재 대상자가 너무 많아 일손이 크게 부족한 상태였다. 결국 이 대표와 나는 동료들이 일하고 있는 중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아예 서울 관악구 난곡동 신혼집을 중국 선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하다 중국동포들의 소개로 탈북자들을 처음 만나게 됐다.
***[역경의 열매] 조명숙 <5> 탈북자 처참한 현실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울 뿐…
백두산 숲과 옌볜에서 만난 그들은 도움이 절실한 공포에 떠는 생명체
1997년 말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이 보호하던 탈북자들이 은신처에서 식사하는 모습. 이 사진은 조 교감이 KBS ‘일요스페셜 13인의 탈출’에 방송됐던 장면을 캡처한 것이다.1997년 신혼여행차 방문했던 중국에서 접한 탈북자들의 현실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들이 당면한 현실은 그동안 외국인 노동자 지원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안타까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남편과 잠시 귀국해 본격적으로 탈북자들을 돕기 위한 여정에 돌입했다. 그동안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온전하게 외국인 노동자 사역에 열정을 쏟아 좋은 결과들을 얻었듯이 탈북자 돕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렸다. 그런데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어느새 나는 외국인 노동자 사역 전문가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이런 사역을 두고 다시 바닥부터 고생하며 목숨까지 위협받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게 솔직히 두렵기도 했다. 그동안 쌓아올린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남편은 나보다 과감했다. 결국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다른 단체들에 맡기고 남편의 뒤를 따라 중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중국교포들의 소개로 탈북 형제들을 만났다. 그들의 현실을 보고 잠시나마 투덜거렸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들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형편이 어려울 뿐 공포는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탈북자들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공포가 심했다. 백두산 숲에서 만난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었지만 그 눈빛은 사냥꾼에게 몰려 떨고 있는 여린 생명체 같았다. 한번은 옌볜에서 한 노(老)교수가 내게 꼭 보여줄 게 있다며 뒷산으로 데려갔다. 그곳엔 작은 움막이 있었는데 그 앞에는 플라스틱 그릇과 잡다한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노 교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우리 민족이 이렇게 처참하게 살았던 적은 없습니다. 지금 북한 여성들은 전쟁 상황도 아닌데 참담한 일들을 겪고 있습니다. 일제 때는 우리 민족이 힘이 없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여성들을 돕지 못했지만, 지금 우리들은 힘이 있음에도 북한 여성들을 도울 마음이 없어요. 그러니 이렇게….”
당시 한국에 코리안 드림을 안고 입국한 조선족 중 대부분은 위장 결혼으로 비자를 받아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고 있었다. 그 수입이 상당했기에 중국 동북3성(지린·랴오닝·헤이룽장)의 결혼 적령기 여성들이 한국으로 몰리면서 결혼시장에 균형이 깨졌다. 그때 인신매매단이 중국으로 식량을 구하러 탈출한 북한 여성들을 결혼시장에 팔아넘겼다. 인신매매단을 피했던 탈북 여성들은 산속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다. 이를 알게 된 사람들이 먹을 것과 돈을 주면서 그들을 유린했다. 그 현장을 노교수의 인도로 내가 본 것이다.
움막 앞에서 충격에 빠져 있던 내게 한 조선족이 “두만강 인근에 시체 한 구가 있는데 그걸 찍어서 신문에 기사로 내면 사람들이 북한의 현실을 알고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를 따라 두만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두 눈을 의심할 만큼 끔찍한 현장을 목격했다. 물 위에 뜬 시체를 까마귀들이 물어뜯고 있었다. 그 조선족은 내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조 선생,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소? 선생이 믿는 하나님은 이 광경을 어떻게 보시겠소? 북한 사람들은 너무 못 먹어 두만강을 건너다가 넘어지고 빠져 죽습니다. 까마귀는 그 살을 뜯어 먹지요. 남한 사람들은 중국에 보신 관광을 와서 까마귀가 정력에 좋다고 한 마리에 10만원씩을 주고 삶아 먹데요. 이 현실을 선생이 믿는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나는 아픈데 형제인 너는 어떠하냐.”
***[역경의 열매] 조명숙 <6> 백두산 자락에 움막… 탈북자 끼니 챙겨주기 시작
옌지 아파트에도 몰려와 10여명 살림… 아이들은 전기밥솥 등 보며 신기해해
굶어죽지 않기 위해 북한을 떠나와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의 도움을 받던 탈북자들이 중국 변방도시로 이동하는 모습. 이 사진은 KBS ‘일요스페셜 13인의 탈출’에 방송됐던 장면을 캡처한 것이다.우리는 두만강가나 백두산 자락에서 만난 탈북자들을 돕기로 했다. 당시 백두산 자락에서는 조선족들이 약초를 재배하고 있었는데 그중 인정 많은 조선족 한 분이 식량을 얻으러 온 탈북자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곤 했다. 하지만 금방 소문이 나 찾아오는 탈북자가 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우리는 산 아랫자락에 자리 잡은 움막에 함께 머물면서 탈북자들의 끼니를 챙기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2시쯤 한 탈북형제가 문을 두드리며 움막으로 들어왔다. 전날 옌볜을 다녀오며 장시간 이동을 했던 나는 조선족과 얘기를 나누는 그의 실루엣과 그가 데려온 작은 짐승을 누운 채로 바라봤다. 잠에 취해 몽롱한 상태여서 뚜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작은 몸뚱이에 앙상한 척추가 살갗 밖으로 드러나 있어서 ‘웬 치와와를 데려왔나’ 싶었다. 피로가 누적돼 있던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 어젯밤 희미한 기억 속에 있던 짐승을 자세히 본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치와와라고 생각했던 동물은 다름 아닌 돼지였다. 어안이 벙벙한 내 표정을 보고 탈북형제는 쑥스러운 듯 두 손을 부비며 말했다.
“제 딸이 평양에 있는 예술학교에 다니고 우리도 북에서는 나름 먹고 살 만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으로 식량난이 계속되니 참…사람들도 못 먹고 사는 판에 돼지를 잘 먹일 수가 없어 돼지가 이름값도 못하게 됐습니다.”
조선족에게 그냥 도와달라는 게 민망해서 집에서 애지중지 기르던 돼지를 가져온 것이었다. 내가 “돼지가 어떻게 꿀꿀거리지도 않았느냐”며 용하다고 했더니 그는 말했다.
“술을 먹여서 돼지가 취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놈 때문에 적발이라도 되면 큰일이지요. 조금 있으면 깰 텐데 힘들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돼지는 잠에서 깨어났고 계속 “꾸엑”거리며 구토를 했다. 우리는 일단 속병을 앓는 돼지를 위해 죽부터 끓여 먹여야 했다.
국경에서 만난 탈북자들 중에는 식량이나 물품을 얻어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돌아가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체제의 두려움을 느끼며 목숨을 내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억지로 사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옌지에 아파트를 얻어 준비되지 않은 통일살이를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늘어난 가족은 어느덧 열 명을 훌쩍 넘겼다.
어른들은 한동안 긴장하며 우리의 정체에 의심을 품었지만 아이들은 금방 마음을 열어 친해졌다. 북한에서 어른들을 도와 밥을 지을 때 땔감을 구해오던 아이들은 집안에서 단추만 눌러 불을 켜는 가스레인지와 전기밥솥을 보고는 “우와. 여기선 우리가 나무하러 가지 않아도 되네요”라며 신기해했다. 아이들이 가장 행복해 했던 것은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에선 늦은 밤이나 추운 날 야외 공동화장실 가는 게 무섭고 불편했을 뿐 아니라 급해서 뛰어가도 여러 사람이 줄을 서 있으면 낭패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밥상에 올라오는 고추와 옥수수의 크기를 보고서도 놀라워했다.
“선생님, 이거 사자고추(피망)예요? 그냥 고추예요? 이 강냉이(옥수수)는 왜 이리 커요? 남조선 것도 이만해요? 우리 북조선의 야채들은 세 개를 훔쳐 먹어도 배가 안 부른데 여기 것은 한 개만 먹어도 배부르겠어요(웃음).”
북한은 땅의 지력이 다해 농작물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2배 이상 큰 중국의 채소들을 보며 아이들은 놀라고 신기해했다. 아이들의 순수한 반응들은 언제 잡혀갈지 몰라 끊임없이 경계하고 의심하던 어른들에게 웃음과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역경의 열매] 조명숙 <7> ‘남한 망명’ 막힌 탈북자들 도와 제3국 탈출 시도
외부 활동 못하고 집에서 지내는 동안 탈북 형제들, 대화로 마음 열기 시작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이 중국에서 보호하던 탈북 어린이가 그린 그림. 어린이는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은 꿈을 담아 새를 그렸다. 이 사진은 KBS ‘일요스페셜 13인의 탈출’에 방송됐던 장면을 캡처한 것이다.남편과 나는 중국 주재 한국대사관에 “식량난으로 탈북한 형제들을 보호하고 있다. 한국으로 가게 해 달라”고 보호요청을 했다. 하지만 대사관은 “외교적 부담이 크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당시 황장엽씨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망명하면서 국제적인 관심을 받은 지 3개월 정도 지난 시점이라 탈북자들의 남한 망명이 한국 정부에게는 굉장한 외교적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탈북 형제들은 “지위 높은 탈북자만 살려주고 우리처럼 이름도 직위도 없는 탈북자는 모르는 척하는 건가”라며 섭섭해 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정부의 입장을 이해해야만 했다. 그리고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가기 위해 다시 국경을 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몸이 약한 나를 제외하고 다른 동료들이 경계가 취약한 국경을 찾아 탐사를 할 동안 나와 탈북 형제들은 집에서 기다려야 했다. 외부 활동이 철저하게 제한된 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며 서로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하나씩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어 갔다. 그러던 중 아이들 앞에서 어른들의 체면을 세워주고 싶어서 이런 상황이 어른들의 탓이 아니라 지도자의 탓이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김정일이 지도자라면 백성들은 먹였어야죠. 배급으로 생활하게 해놓고 배급을 안하면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요. 지도자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 백성들을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 거라고요.”
탈북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곤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어떻게 우리 장군님을 김정일이라고 그냥 부를 수 있습니까?”
나는 깜짝 놀라 “아니 그럼 식량난이 인민들 탓이에요? 인민들이 뭘 잘못했어요?”라고 쏘아붙였다. 자신들은 짐승 몰골을 하고 목숨까지 걸어가며 조국 땅을 등진 채 숨어 살면서 지도자라는 사람의 호칭 때문에 이렇게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이 황당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시위 한 번 안하는지 속 시원하게 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하기도 전에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옆에 있던 한 탈북 여성이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제 중국 친척이 그러더라고요.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굶어 죽어 가면서 자기는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며 유서를 쓰고 죽느냐고. 북한은 자살할 자유도 없는 나라라고. 그 얘길 듣는데 기분이 나쁘더라고요. 정말 우리가 이상한 건가 싶기도 하고,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거부하고 목숨을 끊은 자살자의 가족들이 무시당하고 성공할 수도 없기 때문에 가족을 생각해서 유서를 쓰는 것인데 그게 잘못된 것인지 정말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러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배웠구나, 다르게 배웠으니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하겠다고 이해했어요. 저 분들도 처음으로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쁠 거예요. 그러다 밤잠 못자고 생각하다 보면 스스로 깨닫게 될 겁니다.”
그들은 북한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당과 인민과 수령은 일체다’ ‘북한은 사회주의 지상낙원’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지도자가 욕을 먹으면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또 북한체제 안에서 당을 거부하거나 반대하면 가족까지 혹독하게 처벌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제야 의문점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좁디좁은 내 생각의 테두리 안에 그들을 가둔 채 차갑게 쏘아붙인 것이 한없이 미안했다.
***[역경의 열매] 조명숙 <8> 공안 단속에 불안감 높은 탈북자들 툭하면 화부터
집안일 외면 훈계라도 하면 욕설까지… 아이들 가르치는데 먼저 집중하기로
중국의 은신처에서 보호하던 탈북 어린이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오른쪽). 이 사진은 KBS ‘일요스페셜 13인의 탈출’에 방송됐던 장면을 캡처한 것이다.탈북자들과 함께하는 중국에서의 삶은 철저하게 제한됐다. 중국 공안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서는 식료품을 배달시키는 것도, 함께 시장을 보러 가는 일상적인 일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집주인이 이해하기 힘든 광경을 보여줘야 했다.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한쪽 어깨에는 10㎏이 넘는 쌀가마니를 얹고 다른 손에는 채소를 한가득 사서 집으로 날랐다. 당시 체중이 40여㎏밖에 나가지 않던 나는 힘이 들어 눈물을 흘리면서도 식료품들을 날랐다. 이웃들이 ‘몸도 약하다는 새댁이 웬 먹성이 저리 좋아 쌀가마니를 저렇게 자주 나르나’ 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 같았다. 땀범벅이 되어 쌀을 집어던지듯 내려놓고 쓰러지면 탈북 형제들은 내 주변으로 몰려와 미안해했다. 아이들은 손부채질을 해주며 연신 볼에 입을 맞추고는 죽지 말라고 울었다. 어른들도 매일 힘들게 일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측은해했다. 그들은 그렇게 마음을 열어갔다.
내가 식료품을 구입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길어지는 날이면 어른들은 혹시나 단속에 적발된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해했다. 그 불안감이 커지고 신경이 예민해지는 날엔 고성이 오가며 다툼이 생기기 일쑤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행여나 이웃들이 신고할까 걱정되어 남자들에게 “다 큰 어른들이 아이들 보는 데서 이러면 되겠느냐”며 훈계하면서 말렸다. 가부장적인 북한사회에서 살던 남자들은 여자인 데다 어리기까지 한 내가 훈계한다며 화부터 냈다. 그들에게 “쌍간나 개간나 종간나”라는 ‘3박자 간나’ 욕을 들어야 했다.
북한 체제에서 살아오면서 가부장적 문화가 몸에 배어 있던 어른들을 뒤로한 채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지식과 예절, 복음을 함께 받아들이며 날마다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예쁘고 기특해 열심히 가르치다 어느 날 저녁식사 시간을 넘겼다. 밥을 안 준다며 짜증낼 어른들이 두려워 허둥지둥 주방으로 발을 옮겼다. 깜빡하고 싱크대에 쌓아 둔 점심 설거지부터 하려고 가 보니 한 아이의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부엌 근처에는 가지 않는 것이 북한 남자들의 습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있잖습니까. 사발가시기(설거지)는 남성 동무들이 해야 벅벅 잘 까셔짐다(닦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다음 말이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짐을 덜어드릴 테니 우리 아이들을 좀 배와 주세요(가르쳐 주세요).”
늘 듣던 ‘3박자 간나’ 대신 ‘선생님’이라고 나를 부르는 그를 보며 깜짝 놀랐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3대를 “수령님 장군님 원수님”으로 부르며 나이 많은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만 ‘님’자를 붙인다. 회사 사장이라고 해도 ‘지도원 동지’라고 부르고 유일하게 직업에 ‘님’자를 붙여주며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직업 혁명가로 칭송받는 선생님들이다. 다음세대에게 북한의 사고방식을 세뇌시키기 위해 제일선에서 교육하는 교사에게 권위가 있어야 학생들이 잘 따르고 제대로 배우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아이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나를 선생님으로 인정해준 것이다. 자기 아내가 아파도 주방일만큼은 손 하나 까딱 하지 않는 것이 북한 남자들인데 40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은 설거지를 해가며 나를 돕겠다는 그 아버지 모습을 생각했다. ‘북한 사역은 아이들을 통해 부모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 사역으로 접근해야 효과적이겠구나’라고 말이다.
***[역경의 열매] 조명숙 <9> 탈북자 13명과 국경 넘다 베트남 군인들에 붙잡혀
국경초소서 부대로 이송돼 신문 받아 아찔한 상황서도 하나님의 보호 느껴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이 탈북형제 13명과 함께 건넜던 중국과 베트남 국경의 강가. 이 사진은 KBS ‘일요스페셜 13인의 탈출’에 방송됐던 장면을 캡처한 것이다.수차례 국경을 탐사한 끝에 우리는 다른 국가에 비해 한국인에게 호의적인 베트남을 향해 탈북형제 13명과 함께 떠났다. 육로는 지뢰가 많아 강이 흐르는 국경을 택했는데 거센 물살에 떠내려갈 것 같아 동아줄을 베트남과 중국 쪽 나무에 묶은 뒤 그것을 잡고 건너기로 했다. 중국 쪽에선 남편과 동료 두 사람이, 베트남 쪽에선 다른 동료 한 명이 탈북형제들을 돕기로 했다. 그들이 국경을 넘는 동안 관광객으로 위장해 베트남 국경수비대를 따돌리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잠시 눈을 질끈 감고 나는 국경수비대를 향해 손을 흔든 뒤 숲으로 냅다 뛰었다. 예상은 했지만 5분도 안 돼 뒷덜미를 잡혔다. 국경의 작은 초소에서 신문을 받으면서 시간을 버는 동안 탈북형제들이 무사히 국경을 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탈북형제들은 얼마 가지 못해 국경수비대에 붙잡혔다. 베트남 군인들은 본격적인 신문을 위해 우리를 큰 부대로 이송하려 했다. 진술이 엇갈릴 것에 대비해 오직 나만 영어를 할 줄 안다고 했고 그들은 고민 끝에 나만 큰 부대로 데려갔다.
부대로 이송된 후 나는 12명의 군인이 둘러앉은 신문실 가운데에 통역관과 함께 앉았다. 너무 무서워 “하나님, 도와주세요”라는 기도밖에 드릴 수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누군가 나를 무릎에 앉히고 뒤에서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군인들이 무섭게 신문하면 할수록 포근한 느낌은 더 강해졌고 그때마다 미소가 절로 나왔다.
나의 기이한 행동을 보고 군인들은 ‘대한민국에서 온 정신 나간 관광객’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때 키 180㎝가 넘는 중견 간부가 벌떡 일어섰다. 그가 보기에 나는 너무 수상한데 다른 군인들이 모두 속고 있어서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는 내게 따라오라며 손짓하더니 작은 쪽문으로 들어갔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문을 잠갔다. 희미한 백열등 때문에 음침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음흉한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머릿속에는 온갖 불길한 상상이 맴돌았다.
‘성경에서 신혼 1년은 전쟁터에도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신혼기간을 모두 하나님께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탈북형제들만 사랑하시고 나는 험한 일을 당해도 괜찮으신가?’
불길한 상상에 서글픈 생각까지 더해지던 그때 누군가 내 머리를 한 대 내려치는 것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힘없는 분이 아니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어디서 그런 담대함이 샘솟았는지 나를 음흉하게 쳐다보는 군인을 향해 그가 하는 것처럼 똑같이 위아래로 쳐다보며 웃었다. 그렇게 눈으로 기를 뿜어내며 서로를 쳐다보기를 5분여. 간부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비비는 시늉을 했다. 돈을 달라는 것이었다.
내게는 국경을 넘을 때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면서 생긴 잔돈들이 겉주머니마다 있었다. 20달러를 쥐어주니 그는 신이 나서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는 조금 전까지 나를 신문하던 군인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200달러 정도를 나눠줬더니 그들은 우리를 모두 풀어줬다. 허겁지겁 그곳을 탈출했다. 안전지대에 와서야 하나님께서 죽을 고비에서 우리와 함께하셨다는 것에 감사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만약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탈북여성이었더라면,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분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찔했던 그 일을 떠올리니 탈북여성들이 겪고 있을 고통에 더욱 가슴이 아파왔다.
***[역경의 열매] 조명숙 <10> 20일 만에 베트남서 중국으로 쫓겨난 탈북형제들
9명 중 한 명이 간신히 전화로 알려와… 언론에 공개하고 그들 찾으러 현지로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이 보호하던 한 탈북 어린이가 트럭에 몰래 타는 장면과 북한의 식량난민들을 그린 그림. KBS ‘일요스페셜 13인의 탈출’에 방송됐던 장면을 캡처한 것이다.베트남 국경에서 간신히 풀려난 우리는 한국대사관이 있는 하노이로 향했다. 하지만 국경수비대에게 신문을 받느라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우리 일행은 굳게 닫힌 대사관 문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비자나 여권이 없던 탈북형제들은 호텔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고된 여정으로 탈진하기 직전인 그들을 거리에서 재울 수는 없었다. 묘안이라고 생각해낸 것이 관광지 하롱베이로 가서 배를 빌리는 것이었다. 밤바다를 좋아한다고 선장을 설득해 배를 띄운 뒤 선상에서 밤을 보냈다. 하롱베이의 밤바다와 야경은 물론 아름다웠지만 생사의 기로에 있던 우리에게는 잔인한 장면일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으로 들어갔다. 대사관 직원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13명의 탈북형제들이 무사히 대사관에 진입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우리 부부 등 네 명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와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대사관과 외교부에 탈북형제들의 안부를 물으며 입국 일정을 계속 확인했다. 담당자들은 “곧 들어갈 테니 기다려 달라”는 답변만 반복했다.
대사관에 진입한 지 20일쯤 지났을까. 탈북형제 중 한 명이었던 금실이 언니가 전화를 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언니는 대사관에서 베트남 정부로 보내져 신문을 받다가 갑자기 중국 국경으로 보내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13명 중 한 명의 건강이 악화돼 갑자기 쓰러지면서 그 일가족 4명만 대사관에 머물러 무사했고 나머지 9명은 신문을 받다가 불법으로 국경을 넘은 것이 탄로 나 중국으로 보내졌다는 것이다.
“중국 쪽 국경에서는 한 무리 사람들이 베트남 국경으로 다가오더니 총을 겨누면서 베트남 국경으로 돌아가라고 위협했어. 베트남 국경에서는 반대로 우리 일행을 향해 총을 겨눴어. 너무 무서워서 뿔뿔이 흩어져 국경지대 지뢰밭으로 도망친 거야.”
그 과정에서 금실이 언니는 구사일생으로 중국 국경마을까지 빠져나와 나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다른 형제들의 행방을 물으니 언니는 “모르겠다”며 눈물만 쏟아냈다. 우리는 당장 기자회견을 열고 ‘13인의 탈출’ 여정을 공개하며 한국 정부에 “그들을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언론은 남한 국민이 북한 인민의 탈출을 돕다가 벌어진 초유의 사건을 집중 조명했다. 중국과 베트남 국경에서 벌어진 이 일에 ‘핑퐁 난민사건’이라는 제목까지 달았다. 그러나 관심만 있을 뿐 누구도 현장에 달려가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탈북형제들을 찾으러 현장으로 가기 위해 다시 짐을 쌌다. 혹 무슨 일이 생기면 한국에서 뒷일을 감당할 사람이 필요했기에 4명의 팀원 중 내가 남기로 하고 남편과 팀원 2명이 중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6개월 만에 탈북형제들을 모두 찾았다는 기적 같은 소식을 전했다.
감격스러운 재회와 함께 그동안의 역경들이 간증처럼 터져 나왔다. 형제들은 평지로 가면 지뢰를 밟을 것 같아 산으로 올라갔는데 산속에서 오징어 같은 뱀들이 나왔다고 한다. 늑골을 편 코브라가 그들 눈에는 오징어같이 보였던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직감한 탈북형제들은 우리가 은신처에서 함께 기도했던 일들이 떠올랐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저희 좀 살려주세요’라고 매일 기도드렸어. 그랬더니 어디선가 다른 오징어 뱀 한 마리가 나타났고, 우리를 노려보던 뱀들이 그 뱀을 따라 다른 곳으로 떠났어.” 내 생각엔 때마침 나타난 암컷 코브라를 수컷 코브라들이 따라간 것 같았다. 어쨌든 탈북형제들은 “하나님께서 숱한 고비 가운데서도 우리 기도를 들어주셔서 살 수 있었다”며 마음밭에 믿음의 씨앗을 뿌렸다.
***[역경의 열매] 조명숙 <11> 6평 지하방에 ‘자유터’ 열자 탈북 청소년 몰려들어
자본주의 체제 적응 안된 아이들에게 기독교 정신 바탕 세상지식·신앙교육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왼쪽)이 아들 이시헌군(오른쪽)과 함께 외국인 난민 지원활동을 펼치는 모습.핑퐁난민사건이 알려지면서 신원이 노출된 남편과 나는 중국을 떠나 한국에서 사역을 이어가야 했다. 당시 중국 공안들에게 탈북자를 난민으로 대우해 달라고 하면 그들은 “중국은 동남아시아 출신 난민들을 잘 받아주고 있다. 한국전쟁 때 전 국민이 난민이었던 한국이 지금은 난민을 한 명도 받아주지 않으면서 탈북 난민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느냐”고 냉담하게 이야기했다.
남편은 “탈북자 문제를 난민 지원 방식으로 접근하려면 한국 땅에서 난민들을 잘 섬기는 것이 우선”이라며 난민지원 단체인 ‘피난처’를 설립했다. 외국인 노동자들 틈에서 숨죽이며 살았던 난민들은 난민사역 전문 단체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행복해 했다. 우리 부부는 어린 아들, 딸과도 사역 현장에 동행하며 열심을 다했다. 가끔 내가 힘들어하면 남편은 “태어날 때부터 박해를 받으며 사랑을 전한 예수님이 난민의 전형”이라며 나를 독려했다.
남편이 ‘피난처’를 통해 간접적으로 북한 형제들을 지원하는 일에 나섰다면 나는 그들을 더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해 탈북가정의 남한 정착을 도우면서 통일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진홍 목사님께서 설립한 대안학교에서 2년 동안 한문과 사회를 가르치면서 말썽꾸러기 학생들이 사랑으로 변화되는 경험을 한 것은 학교 설립의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2003년 1월 나는 서울 대림역 근처에 18㎡ 남짓한 반지하방을 빌려 야학인 ‘자유터 학교’를 개교했다. 이곳에 탈북청소년과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문제를 풀라고 시킬까봐 숨죽이고 있던 탈북청소년들은 자유터에 들어오면서 “이제야 살 것 같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들은 “북한에서는 배고파 못 살겠고 중국에서는 잡혀갈까봐 무서워 못 살겠고 남한에서는 몰라서 못 살겠다”고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중국에서도 아이들에게 ‘이자’의 개념을 가르칠 때 “선생님 우리 돈을 도둑놈들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은행이 우리 돈을 밤낮없이 지켜주는데 왜 우리한테 웃돈을 줍니까? 오히려 우리가 보관료를 내야죠”라는 말을 듣곤 했었다. 외국인 노동자나 아프리카 난민들은 ‘이자’라는 한국말은 몰라도 영어로 설명해 주거나 그들의 모국어로 설명하면 금방 이해했는데 탈북형제들은 사회 체제가 달라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해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외워. 은행, 이자, 통장”이라며 몰아붙이기도 했다.
이렇게 배운 탈북형제가 한국에 입국한 뒤 하나원을 거쳐 임대아파트에 거주했는데 이사 온 첫날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분명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굴까’라며 떨리고 무서운 마음으로 “누구십네까”라고 물으니 문밖에선 웬 50대 아주머니가 “네. 통장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놀란 탈북자는 “제 통장은 서랍에 있슴다”라고 대답하며 문을 안 열어 주고는 승강이를 벌였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자유터에서 공부하던 탈북청소년들은 친구들을 데려오면서 “선생님, 제 친구인데요. 얘도 저처럼 사랑해 주세요”라며 소개하곤 했다. 나는 몰라서 못 살겠다는 아이들을 남한 땅에 제대로 정착시키는 방법은 세상의 지식과 더불어 하나님을 바로 알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들을 근본적으로 살리는 길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교육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조명숙 <12> 시간 지나도 매사에 비판적인 탈북형제들에 당혹
졸업생까지 학교에 비판적이어서 허탈… 남북 달라진 생활·시각 이해하니 풀려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이 2006년 스승의 날에 학생들로부터 받은 카네이션을 들고 감격스럽게 웃고 있다.2004년 여명학교 설립 후 나는 교감으로 사역하게 됐다. ‘자유터 학교’까지 함께 운영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잠자고 화장실 가는 시간 외에는 탈북형제들과 함께했다. 하지만 그들을 가르치면서 언젠가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민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는 것이 많아졌다. 하지만 탈북형제들은 지식을 습득하는 데 어딘가 막혀 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아무리 좋은 교육 프로그램을 시도해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교육 환경이 열악했지만 여명학교 교사들은 최선을 다했고 학생들은 행복해했다. 그러나 졸업생들에게 여명학교에 대해 물으면 비판적으로만 답했다. 그때마다 속상하고 허탈했다. 이런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내게 졸업생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천진한 얼굴로 다가와 안아줬다. 오히려 그 모습이 학교를 비판할 때보다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자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야 탈북형제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60년 가까이 분단된 채 살아왔기에 우리는 북한 사람들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면서도 북한 관련 사역을 할 때는 남한의 방식과 시각으로 그들을 변화시키려고만 했던 것이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 서운했고 오해가 깊어졌던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일할 때는 기본적으로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고 배려할 점부터 찾았더니 그들과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탈북형제들을 위해 일을 할 때는 ‘그들이 남한에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앞섰다.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헤매고 시행착오만 쌓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탈북형제들에게 그간 궁금했던 것들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평가할 때 비판적으로만 이야기하지? 너희들이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걸 아는데도 너무 비판적인 말 때문에 상처받을 때가 많아.”
나의 돌직구 질문에 탈북형제들은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내게 조목조목 설명했다.
“선생님, 우리는 북한에서 여덟 살 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생활총화’라는 것을 해요. 학급 친구를 비판하는 것인데요. 10년 넘게 이렇게 살다 보니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면 습관처럼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비판을 제대로 해야 선생님들이 빨리 끝내주니까 심하게 하는 거죠. 그렇지만 그 마음이 진심은 아니에요. 북한은 남한처럼 장난감이나 게임기가 없기 때문에 친구가 제일 소중하거든요. 그래서 서로 심하게 비판해도 다 이해하고 손잡고 집에 가요.”
그제야 그들이 왜 비판적으로 발언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게 됐다. “남한에서 그렇게 하면 함께 손잡고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가 끊어진다”는 조언에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또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에도 학생들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선생님, 북한은 여기처럼 개인마다 시계나 휴대폰을 갖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약속도 정확하게 시간으로 하는 게 아니고 내일 보자는 식으로 해요. 그래서 학교 갔다가 오는 길에 들러서 있으면 보고 없으면 그냥 가요. 정말 중요한 일이면 올 때까지 기다리죠.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어떤 집사님하고 낮 12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제가 30분 정도 늦었어요. 전화를 처음 접하고 시계도 처음 차 보니 늦는다고 연락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어요. 길도 잘 모르고요. 그래도 열심히 달려갔는데 오히려 그분은 굉장히 기분 나빠 하시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니 저도 속상하고 기분도 나쁘더라고요.”
그렇게 그들의 문화를 알아가니 이해할 수 있었다. 예수님과 성경을,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가며 이해하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조명숙 <13> 북한서 몸에 밴 암기식 공부 습관 고쳐주느라 고생
원리 따지지 않고 무조건 외우기 익숙… 논리적인 글 작성 못하고 질문을 안해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왼쪽 위)이 탈북청소년들과 함께 떠난 수학여행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통일을 기원하는 작품을 만든 뒤 활짝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탈북형제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선 그들이 북한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생활했는지를 먼저 공부해야 했다. 북한의 교육환경을 공부하던 우리 교사들은 북한에서는 시험 문제가 주관식으로만 출제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를 즉각 반영했다. 다가오는 시험 기간에 탈북청소년들에게 익숙한 방식인 주관식으로만 문제를 냈다. 그런데 잘볼 줄 알았던 탈북학생들이 논술 문제는 두 줄도 못 쓰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거의 비슷한 답을 썼다.
‘충성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쓰시오’라는 문제에 대해 탈북학생들은 거의 똑같이 ‘하나밖에 없는 조국을 위해서 둘도 없는 목숨을 바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답했다. 또 ‘해바라기’라는 시제를 주고 시를 짓게 하면 학생들은 ‘태양 같은 수령님을 바라보는 우리는 해바라기’라는 식으로 대동소이한 작품을 썼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 북한의 국어 교과서를 살펴봤다. 그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북한 청소년들은 교과서 본문에 제시된 원문을 읽고 그것을 외워서 쓰는 방식(원문통달식)으로 시험을 봤던 것이다. 거기에서 한 글자라도 틀리면 점수가 깎였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쓰는 것 자체가 생소했던 것이다.
북한에서의 교육은 체제를 유지하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었다. 국어 교과 시간에 북한 학생들은 ‘말하기’ ‘읽기’ ‘쓰기’는 하는데 ‘듣기’ 교육은 받지 않았다. 그저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라고 외치며 살도록 가르칠 뿐이었다. 북한에서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비판하며 자신의 논리를 이끌어내는 교육은 원천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의 말을 잘 듣고 이해한 뒤 반박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막무가내로 관철시키려고 했고, 주장은 강하게 하는데 설득은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사들은 탈북청소년들이 공부를 포기하지 않게 하려고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려 노력했다. 작정하고 시험 문제를 쉽게 낸 적이 있다. 평균 90점 이상 나올 것 같아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채점한 결과 평균 40점 정도가 나왔다. 너무 황당해서 “얘들아, 이렇게 쉬운 문제를 왜 틀려?”라고 물으니 솔직히 하나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잘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봐야지, 왜 묻지도 않니?”라고 다그치자 학생들은 “선생님, 다 알고 몇 개를 몰라야 물어 보죠. 다 모르는데 어떻게 다 물어 봐요”라며 울먹였다. 또 다른 학생은 “우리는 북한에서 배울 때 ‘왜’라는 질문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당이 결정하면 무조건 따라야지 ‘왜’라고 물으면 그건 반동이잖아요. 공부할 때 원리를 묻지 않고 외우니까 모르는 건 그냥 넘어가게 되는 거죠”라며 스스로 문제점을 진단했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학생들은 수업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학생들의 대답을 듣고 나는 마음이 짠해졌다. “선생님께서 열심히 가르쳐 주시는데 어떻게 모른다고 할 수 있어요.”
한 탈북청년은 “북한은 군사문화가 일상생활에 자리 잡고 있는데 군인들은 절대로 자신의 약점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이 모른다거나 못 알아듣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할까봐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것이 공부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우리는 남한청소년들의 교육방식으로 수업을 하고 검정고시를 보는 미인가학교의 형태로는 탈북청소년들에게 적합한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을 설계하고 시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건물도 운동장도 없는 학교에서 학력인가를 받는 기적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역경의 열매] 조명숙 <14> 6년여 노력 끝 탈북자 대안학교 첫 학력인정 받아
검정고시만 되면 자퇴, 정상교육 안돼… 정부에 탄원으로 학교 인가 규정 바꿔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왼쪽 첫 번째)이 학교 관계자, 학생들과 함께 탈북민들의 현실을 그린 영화 ‘크로싱’ 특별시사회에 참석해 배우 차인표씨(뒷줄 오른쪽 다섯 번째)와 기념촬영하고 있다.우리나라 교육제도 안에서 학력을 인정받는 학교가 되려면 건물과 운동장이 학교 소유여야 한다. 가난하게 시작했던 여명학교는 정식 인가를 받지 못해 탈북 학생들이 검정고시를 쳐서 학력을 인정받아야 했다. 탈북 학생들도 학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남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검정고시 합격을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선생님 수학 문제도 아닌데 여기서 왜 거리가 나와요?”라고 묻기에 문제를 살펴봤다. ‘다음 중 본문의 내용과 거리가 먼 것은?’이라는 국어 문제였다. 문제 방식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무작정 시험을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음이 급한 탈북 학생들은 여명학교를 ‘말이 통하는 검정고시 학원’ 정도로 여겼고 검정고시에 합격만 하면 학교를 그만뒀다. 여명학교가 껍데기만 남한 방식인 학생들을 키워내는 형국이었다.
나는 다시 교육제도를 면밀히 검토했다. 그리고 탈북 학생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학교를 대안학교로 운영하되 검정고시 부담을 없애야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 반드시 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곧장 가용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정부에 탄원과 민원을 하기 시작했고 성도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로부터 “브리핑 기회를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브리핑을 진행한 뒤 한 달여 만에 ‘대안학교 설립 운영규정 개정’이라는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여명학교뿐 아니라 탈북민과 다문화 가정 자녀, 학교 이탈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는 임대 상태에서도 학력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됐고 우리는 임대 상태의 학교로는 처음으로 2010년 3월 학력 인가를 받았다. 개교 후 6년여 동안 이어온 노력의 결실이었다. 나는 선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결국 이뤄주신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다.
2012년 2월 어느 날 한 여명학교 졸업생이 전화를 했다. “지난밤에 누나가 탈북하다 잡혔습니다. 김정일 사망 애도 100일 내에 탈북한 사람들은 그 가정까지 처벌한다는데 제발 좀 도와주세요.”
자칫 잘못하다간 오히려 가족들의 신원이 공개돼 더 힘들 수 있으니 기도하며 기다리라고 다독였다. 그런데 이튿날부터 이 일이 정치적 이슈가 됐다. 화가 난 졸업생은 “선생님은 내가 이렇게 힘든데 왜 가만히 계세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고난을 이용하잖아요”라며 울었다. 힘없는 탈북 형제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정치적인 힘에 의지했고 나중에는 그 힘에 휘둘리는 것이었다.
밤새 기도하고 고민한 끝에 직접 나서기로 했다. 당장 기도의 동역자가 필요했다. 평소 여명학교를 돕던 배우 차인표씨에게 기도해 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탈북자들의 현실을 담은 영화 ‘크로싱’의 주인공이었던 차씨는 내 문자를 보고 바로 전화했다.
“어떻게 그 어려운 일에 혼자 나서려고 하느냐. 함께 하자”며 그는 다른 연예인들과 함께 중국 대사관 앞에서 펼치는 ‘탈북자 북송반대 캠페인’에 동참했다. 우리는 전 세계 국민들에게 탈북자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고 중국 정부도 이들을 돌려보내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 일이 불씨가 되어 세계 각국에서 캠페인이 벌어졌다.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듬해 라오스에서 북송된 탈북 청소년들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전 세계에서 즉각적으로 성명을 내어 북한이 함부로 이들을 처결하지 않도록 보호할 수 있었다. 모든 과정을 통해 나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이 작은 공동체도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여명학교를 통해 통일의 길목에서 많은 기적을 허락하신다는 것도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조명숙 <15·끝> “탈북형제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통일의 사도”
통일은 비용이 아닌 투자로 준비해야… 남북한 치유·회복의 역사 일어날 것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오른쪽 세 번째)이 지난달 13일 여명학교를 방문해 탈북학생들과 대화를 나눈 뒤 조명숙 교감(오른쪽 두 번째)과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나는 통일에 대해 공부하면서 독일 아데나워 재단의 소개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독일 사람들과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한국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통일의 민낯을 발견했다.
“왜 한국 사람들은 독일 통일을 이야기할 때 모두 통일비용에 대해서만 묻는 거죠? 독일 통일은 철학적인 차원에서 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분단으로 인해 겪는 고통을 해결하고 자손들에게는 발전만 하면 되는 나라로 물려주려고 통일을 한 것입니다.”
“독일이 많은 통일비용을 들여 지금도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통일투자’입니다. 통일비용 운운하는 것은 엄살이에요. 지금 유럽에서 가장 건실한 재정을 운영하고 있는 나라가 독일입니다. 한국 사람들도 너무 겁먹지 않았으면 해요.”
독일 사람들은 “동서독은 전쟁도 없었고 서독의 경제력으로 통일을 감당할 수 있는 저력이 있었기에 갑자기 닥친 통일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며 “한국도 저력이 있다”고 말했다. 그게 무엇이냐고 묻자 그들은 “바로 통일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답했다. 또 “탈북자들을 중심으로 통일 이후 북한지역 재건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면서 “통일 준비에 드는 비용은 통일 후 그 몇 배에 달하는 경제적 효용을 낳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통일된 지 25년이 지난 지금 독일의 대통령과 총리는 모두 동독 출신이다. 지난달 13일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이 여명학교를 방문했다. 가우크 대통령은 학생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며 “통일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이기에 대가를 지불하고 이룰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바로 북한 형제들이 남한 사람에게서 듣고 싶어 하던 말이었다. 그는 “정말 잘 왔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통일이 희망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통일 한국의 지도자가 되십시오. 저도 여러분과 한반도 통일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격려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목회자로서 동독의 평화 시위를 주도했던 가우크 대통령은 통일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며 탈북 형제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통일의 사도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나는 통일을 하면 큰일 난다고 말했던 크리스천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통일을 하면 남북한이 모두 혼란을 겪고 특히 남한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것”이라며 통일이 마치 무거운 십자가인 것처럼 말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마음도, 철학도, 부모세대로서의 책임감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듯 북한 사람들에게도 아버지이다. 자녀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부모가 가장 바라는 것이다.
때때로 통일은 우리에게 십자가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나온 내 삶을 돌아보면 십자가로 보이는 고난을 자발적으로 짊어지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웃으시며 십자가의 위치를 내게서 당신에게로 바꿔놓으셨다. 돌이켜보면 나는 한번도 십자가를 지고 간 적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이 짊어진 십자가를 타고 간 적이 많다. 통일도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최근 입국한 탈북 청소년들을 보면 북한이 많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체제에 의존하던 사람들이 스스로 먹고살면서 자의식이 싹트고, 식량난 때문에 국경을 넘었던 사람들이 북한 정권의 이야기를 다 믿지 않게 되었으며, 다양한 경로로 유입되는 남한 매체들이 북한 사람들의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더욱 속도가 붙고 있으며 북한 정권의 강력한 제재는 오히려 그들의 저항력을 키울지도 모른다.
반면 남한의 젊은이들에겐 통일에 대한 열망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힘들게 해서라도 통일을 희망으로 만들어가시는 것 같다. 취업문이 막히고 미래도 불투명한 젊은 세대들이 통일로 인해 활기를 찾고 남북한을 함께 회복시키는 ‘치유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