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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강 창세기 18:1~15 능하지 못할일이 있겠느냐 1.00.38
26.09.30(수)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엘샷다이 전능자이시자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생각 속에 당신이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심을 아브라함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나안으로 이주해서 정착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기간에 자기에게서 나지 않자 자기 집 집사 엘리에셀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 아내가 권해준 대로 여종 하갈을 씨받이로 받아서 그 사이에서 난 서자 이스마엘을 하나님의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때마다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긴 믿었지만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으로 빚어낸 하나님의 우상을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99세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생각을 아브라함의 모든 계획을 초월하시는 분이심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네가 아무리 늙었어도 네 아내가 생리가 끊어졌어도 나는 너희 둘 사이에서 아이를 태어나게 하고 그 아이와 영원한 언약을 맺고 그 아이에게 내가 너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영원한 소유로 준다고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아브라함에게 재천명해 주셨습니다.
그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집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다 불러서 함께 다 같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그 언약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다 믿음으로 받아드린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표징을 그 언약의 표징을 자기 몸에 새긴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그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자기를 온전히 맡긴 것입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자기 생각으로 믿고 있던 하나님의 우상의 찌꺼기까지 버리고 온전하신 하나님에게 자기를 온전히 내어 맡긴 것이죠.
그래서 그 이후로부터 아브라함은 다시는 자기와 자기 아내 사라로부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창세기 18장은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영접하는 내용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본래 이 18장의 내용은 19장의 내용 그러니까 롯이 소돔에 살고 있는 롯이 자신을 찾아온 천사들을 어떻게 영접했는가 비교해서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18장에 드러난 아브라함의 참 모습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항상 19장과 비교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듣고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할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자기 권속들을 끌고 아브라함을 따라가지 않습니까?
가나안 땅에 정착했는데 아브라함의 짐승 떠 가축 떼 그리고 롯의 가축떼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초지는 한정이 되어 있는데 양 집안에 가축 떼가 많아지니까 두 집안의 목자들끼리 서로 싸움이 붙었죠. 서로 좋은 초지를 차지하려는 것이죠.
그때 아브라함이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까?
우리 13장 한번 잠시 보실까요?
창세기 13장 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거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본래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롯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만약에 두 가정이 결별해야 될 것 같으면 선택권을 아브라함이 먼저 행사해야 합니다.
롯아 이 땅은 본래 하나님이 나한테 주시지 않았니 그러니까 내가 여기 할게 넌 저리로 가라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양보해 주었습니다.
네가 먼저 택해라 네가 오른쪽 땅 택하면 나는 나머지 왼쪽 땅 택하고 네가 왼쪽 땅 택하면 나는 나머지 오른쪽 땅 택할게 그러면 조카 롯이 아유 삼촌 무슨 말씀입니까? 삼촌이 먼저 택 하십시오. 이렇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조카 롯은 당연히 자기 권리인 양 자신이 먼저 선택권을 행사하지요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여러분 여호와의 동산과 애굽동산은 절대로 같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동산 이 땅에 있었던 에덴 동산과 애굽동산은 정반대 개념이죠.
이집트가 어둠이라면 여호와의 동산은 빛이고 이집트가 죄의 소굴이라면 에덴은 생명이고 이집트가 죽음이라면 여호와의 동산은 구원의 상징 아닙니까 절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그곳이 롯에게는 마치 여호와의 동산처럼 보이고 애굽동산처럼도 보인 것입니다.
뭐가 좋고 왜 좋은지 구별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롯이 소돔과 고모를 먼저 선택해서 가버립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우리가 잘 아는 구절입니다.
13장14절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자기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했던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엄청난 제안을 하셨습니다.
너 눈을 들어 동서남북 보거라 너 눈길이 닿는 땅 다 줄게 네가 종으로 횡으로 다녀보라 네 발길이 닿는 땅 다줄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지수표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다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나이키 신고 뛰어다닐 것 같은데 아브라함은 뭘 했는가
18절
이에 아브라함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라함은 이 지상의 공간적인 땅을 더 얻기 위해서 뛰어다니지 않았습니다.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수풀에 거주하면서 거기에서 여호와께 단을 쌓았더라
헤브론 마므레는 지명이기도 하지만 보통 명사이기도 하다 그랬죠
헤브론의 뜻이 뭐라 그랬습니까? 교제의 자리다 마므레라고 하는 곳은 뜨거운 열렬한 이런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으므로 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주실 것을 아브라함은 믿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더 중요한 것은 이 땅이 아니라 땅을 주시는 분이 더 중요한 겁니다.
10:16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뜨겁게 교제하는 믿음의 자리를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특정 공간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중심이 세상의 땅 세상의 소유에 우선순위를 두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 자신의 모든 우선순위를 드리는 믿음의 축을 바르게 설정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것이 롯과 아브라함의 차이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도 그 중심이 헤브론 마므레 하나님과 뜨겁게 교제하는 믿음의 중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지금 관계를 맺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롯은 세상의 향락을 따라서 세상의 욕망을 따라서 세상의 부름을 따라서 소돔에 가 있습니다.
그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달라지는 자세로 하나님께 응답하는가? 하는 것을 18장과 19장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18장 1절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이 마므레 상수리가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헤브론이죠. 그렇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여전히 그 중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믿음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또 아브라함을 찾아가셨습니다.
1절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하나님께서 이날 아브라함을 찾아가신 시간이 언제인가 날이 뜨거울 때입니다. 이 히브리 말 원문을 보면 그 날의 뜨거울 때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햇볕이 가장 뜨거울 때였다. 그 뜨거울 때 아브라함은 뭐하고 있었는가 장막문에 앉아있었다.
이게 지금 어떤 상태를 표현하는 내용인가 하면 중동지방은 덥지 않습니까? 그 폭염은 정말 무섭거든요.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태양이 뜨겁기 전에 서늘할 때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폭염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대개 그 더운 낯 동안은 텐트 밑 그늘에서 앉아서 쉽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이날 아침에도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고 가장 태양이 뜨거울 때 휴식시간이 되어서 지금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내가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때만 내 곁에 계신 게 아닙니다.
내가 앉아서 쉴 때에도 내 곁에 계십니다.
내가 잠을 잘 때에도 내 곁에 계십니다.
언제나 내 곁에 계십니다.
그분이 내 곁에 계셔서 내게 쉼을 주시고 안식을 주셔야 내가 쉼을 누리고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시간 동안 쉬면 뭐 합니까?
내 마음속에 온갖 불안이 꿈틀거리고 걱정이 나를 억압하고 내 마음이 초조와 불안에 떨고 있다고 하면 그게 쉬어지는 것이겠습니까?
내가 쉴 때에도 하나님께서 내 옆에 계심을 믿고 나의 쉼이 그분으로 인해서 내게 주어지는 것을 내가 믿을 때에 재창조를 위한 안식을 우리가 평안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절
눈을 들어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아브라함이 장막 그늘에서 고개를 숙이고 쉬고 있다가 눈을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 세 사람이 지금 나타나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러자마자 아브라함이 그들을 보자마자 곧 장막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보자마자 달려나가서 그들을 영접하면서 몸을 땅에 굽혔습니다.
몸을 땅에 굽혔다 이 말이 히브리말로 샤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예배에 대해서 배울 때 그 예배하다라는 말이 헬라말로는 프로스키네오. 히브리말로는 샤하인데 부복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보자마자 지금 가서 아브라함이 부복한 것입니다.
본래 이 유목민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이 있으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극진하게 대접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농경 민족들 하고 달라서 유목민들은 이번 달에는 여기 텐트를 쳤다가 다음 달에는 저기 가서 텐트를 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떠돌이 삶이죠. 언제 만날지 모르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서로 좋지 않은 악감정을 품게 했다고 하면 어디 어느 자리 어느 어디에 가서 텐트를 쳤다가 보복당할지 모른단 말이죠.
그러니까 훗날을 위해서 하여튼 지나가는 모든 사람은 잘 접대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손님이나 나그네에게 가서 샤하 엎드리는 법은 없거든요.
성경에 샤하라고 하는 이 단어가 사람에게도 쓰여지는 경우가 있지마는 주종 관계 자식이 부모에게 혹은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경우가 아니면 샤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왜 가만히 앉아있다가 그 세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가가지고 신을 경배하듯이 그냥 샤하해버렸는가
3절 보니까
이르되 내 주여 그 세 사람을 향해서 아브라함이 뭐라고 불렀느냐 하면 내 주여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내 주여라고 하는 이 주어가 단수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그 세 사람 모두를 아브라함이 똑같이 대접했다고 하면 나의 주님들이라고 복수로 써야 됩니다.
근데 아브라함이 나의 주여하고 단수로 썼거든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그 세 사람이 나타나자마자 그 중에 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두 사람은 천사 하나님과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자기 앞에 현현하셨음을 즉각 알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가서 아브라함이 부복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장막에서 쉬는 시간에도 어떤 시간에도 하나님에 대해서 늘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영적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3절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십시오.
주님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이 말이 히브리 말에 내가 당신의 눈 속에서 은혜를 보았다면 이 말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러 오셨음을 안 것입니다. 그 은혜의 눈빛을 지금 본 겁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 본 이 당신의 은혜의 눈빛이 틀림없다면 저를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원컨대 제발 그냥 지나가지 마십시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제게 은혜 베풀러 오셨다는 것을 제가 압니다. 제발 저를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에게 늘 깨어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늘 은혜 베푸시는 분이심을 내가 알고 그분에게 대해서 민감하게 응답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분의 은혜 속에서 우리는 사람다운 복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4절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주님 내가 물 좀 가져올게요 그래서 발 좀 씻으시죠.
물 가져오면 어떻게 됩니까? 내 공로가 되죠.
아브라함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십시오. 사역형으로 썼습니다.
20:14
나더러 물 가져오라고 명령 좀 해주십시오.
물 가져오겠습니다. 자기가 물 가져오지만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에게 순종하는 행위로 하겠다고 지금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발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좀 쉬십시오.
그러고 가십시오. 그게 아니라
5절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여기에서 상쾌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흡족하다 내가 떡을 좀 가져올 테니까. 당신들 마음을 흡족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십시요.
여기 우리 성경이 떡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건 다 빵으로 바뀌어야 된다.
그랬죠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떡은 주식으로 쓰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그죠 간식으로 쓰는데 이거 떡 좀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꼭 그 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내 다과 좀 가져올 테니까 다과 조금 들고 가세요. 이 말처럼 들리는데 그게 아니라 내가 식사상을 차려오겠습니다.
그 사람에게 그쪽에서는 빵이 주식이니까 지금 그 말이죠 흡족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십시오.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이 빠져있는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습니이다. 그 앞에 왜냐 화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당신이 나를 찾아와 주시고 내 앞에 임재해 계신다는 것 자체가 내가 당신을 섬기고 당신에게 순종하고 내가 당신을 떠받들 충분 이유 조건이 됩니다. 그 말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간청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드렸더니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그래 내가 네 제안을 받아들일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그 제안을 기꺼이 수용하셨습니다.
19장으로 한번 가보십시다.
1절입니다.
저녁 때에 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가실 때는 그 하루에 일을 열심히 하고 날이 가장 더울 때였습니다.
그런데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저녁에 두 천사가 소돔의 롯을 찾아갑니다.
그러니까 주님 또는 주님의 사자는 낮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저녁에도 함께 하시고 두말할 필요가 없죠
그런데 아브라함을 찾아갈 때는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가셨음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 일행인지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롯을 찾아갈 때는 두 천사가 아에 천사의 모습으로 롯이 인식하게끔 찾아갔거든요. 그랬더니 그때 롯은 뭐 하고 있는가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있다가 중동지방은 해가 빨리 집니다.
근데 저녁이면 이미 지금 해가지고 땅거미가 졌는데 그때 롯는 뭘하고 있는가 성문에 앉아있습니다.
구약시대 그 문화에서 성문이라고 하는 것은 헬라시대의 아고라와 똑같다고 했습니다.
아고라가 시장도 열리고 법정도 열리고 거기에서 무슨 사교도 일어나고 거기에서 무슨 놀이 문화도 일어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데거든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시원할 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일하고 이때 쉬고 있을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졌는데 이 롯은 저녁이 되어서 땅거미가 졌습니다.
그때는 야시장이 없습니다.
시장은 단 낮동안에 하는 것이어요 해가 지면 시장은 파하는 겁니다. 해가 지면 법정도 다 파합니다.
그런데 지금 롯은 시장에 나가 있습니다.
무슨 재미있는 놀이걸이 없는가 그 롯은 자기에게 주어진 매일매일의 삶의 성실하기보다는 세상의 무슨 놀이 거리를 찾아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지금 보여줍니다.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롯도 두 천사가 천사의 모습인 것을 인지하도록 나타났으니까 그들을 영접하고 땅에 엎드러 샤하 부복하는 것 여기까지는 똑같습니다.
근데 그 다음에 어떻게 했는가
2절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아브라함은 뭐라고 했습니까?
종으로 하여금 물을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십시오.
그런데 롯은 물 가져다 줄 의사도 없습니다.
우리 집에 와서 들어와서 발 씻으십시오. 그리고 잠자고 느지막이 일어나가 아니라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그 말한 모든 그 무게가 어디 있는가 가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 집에서 쉬시라는 겁니다. 음식 드시라는 겁니다. 당신들이 오셨으니까 내 집에서 좀 머무시라는 겁니다.
그런데 롯이 말하는 방점은 어디 찍혀있는가
빨리 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롯이하는 이 말을 이 정황에 따라서 좀 더 쉽게 풀이하면 이런 말이에요.
어 우리 집에 들어와서 저기 목욕탕이니까. 당신네들 발 씻고 저기 침실이니까. 저 방에 가서 잠자고 내가 좀 아침에 늦게 일어나니까 나한테 그 저 거슬리는 행동하지 말고 해 뜨기 전에 일찍이 아무도 모르게 빨리 가시오.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께서 어디 가셨는데. 그 집 주인이 이렇게 얘기하면 그 집에 들어가겠습니까? 사람도 안 들어갈 텐데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가겠습니까?
2절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안 들어간다 너나 잘 자라 하나님의 사자들이 안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자 18장으로 되돌아가 보십시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라 네 말대로 한번 해봐라
6절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지금 이 뒤에 보면 그 일행을 맞이하는 자리하고 사라의 장막하고 아주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걸어가도 돼요.
그런데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어라
자기 아내에게 고운 밀가루 세 스아로 빵을 만들어라 여기에 아브라함은 급히 장막으로 가고 사라에게 속히라고 우리말로는 다르게 번역이 되어 있는데, 히브리말로는 다 똑같지 마하르입니다. 하여튼 시간을 지체하지 말자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에게 말하기를 여보 고운 밀가루로 빵 3개 구워서 저분들 대접해 이게 아닙니다.
최상급 밀가루 세스아로 빵을 만들어라 이게 세스아라고 하는 것이 한스아가 4되입니다.
4되 그러니까 1대가 1.8리터잖아요.
젊은이들은 한 되 이런 걸 잘 모를 테니까. 1.8리터라고 생각 뭘 생각하시면 되는가 하면 콜라 페트병 큰 거 있잖아요. 거기에 네 병이 한사거든요. 그러니까 세스아라고 하니까 콜라 페트병 12병의 지금 고운 밀가루입니다.
30:17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은 몇 사람 세 사람 그러니까 1인당 콜라 페트병 4병분의 밀가루로 빵을 만듭니다.
얼마나 많이 만듭니까?
그런데 아까 아브라함이 뭐라 그랬습니까?
5절
내가 떡을 얼마만큼 가져온다고 조금 가져오려니 히부리말로 조금이 파트 조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내 빵 한 조각 가져올 테니까 하나님 마음 흡족하게 하고 가십시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게 가져왔는가 페트병 12병에 해당하는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온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조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그것도 작은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 아브라함이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이 말을 할때 그 아브라함이 말할 때의 어감을 우리 상상할 수 있죠.
주님 제가 떡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마음 흡족하게 하십시요. 그리고 그 큰 떡을 만들어 오면서도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에게 많은 것을 드린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 조각 밖에 안 드린다 왜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온 것이거든요.
오늘 예배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들 부르신 찬송 가운데에 조셉 스웨인의 95장 찬송을 여러분들이 부르셨습니다.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뿐일세
밤낮 불러서 찬송 부르면 하나님 내가 이만큼 찬송했습니다. 자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뿐이다.
왜 내 행동을 보면 내가 대단히 많이 한 것처럼 생각되고 착각되지만 그분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삶을 살든지 간에 내가 한 것을 보느냐 하나님의 은혜를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얼마만큼 달라질 수 있는지를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도 나는 뒤 안 돌아본다 바꾸어 말해서 내가 한 일 절대 안 돌아본다 바울이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왜 내가 뒤돌아보고 한 일을 보면 내가 대단한 사람처럼 여겨져요 나는 한 일 뒤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촛대를 향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향해서 나아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푯대를 내가 보면 교회를 짓밟던 폭도인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내가 뭘 했다고 자랑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나는 푯대만 보고 나아간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은혜만을 내가 보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 무엇을 순종하든지 그 순종이 겸손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지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보다도 내가 한 일을 내가 더 중시한다고 하면 우리도 자만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6절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아내에게 급히 가서 말했는데 이제는 가축 떼가 있는 우리로 달려갑니다.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그 가축들 중에서도 그 나이 많아 늙은 소가 아니고 그 제일 좋은 송아지 본래 그 송아지 고기가 연하고 맛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하인 요리사에게 줬습니다.
그랬더니 그 하인 요리사가 급히 요리했다.
이것도 아까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고 아내에게 속히 이 고운 가루 세 스아로 빵을 만들라 그 말하고 다 똑같은 마하르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브라함의 온 식구들이 한 공감대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가? 급히 요리를 했습니다.
8절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엉긴 젖은 요즘 말로 하면 요구르트입니다.
당시의 요구르트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서메 그들이 먹었니라
그러니까 그렇게 정성껏 요리한 송아지 요리 그 다음에 빵 또 요구르트 우유를 전부 다 식탁에다가 차리고 그 옆에 지금 아브라함이 모셔 서 있는 겁니다.
그리고 드십시오 그러니까 식당을 우리가 연상한다고 하면 지금 웨이터가 옆에 하얀 그 수건을 탁 이렇게 들고 지금 서 있는 겁니다.
드시다가 명령만 내리십시오.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롯은 어떻게 했는가 한번 가보십시다.
2절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하나님의 사자들이 안 들어간다 그랬더니 롯이 간청했습니다. 아유 그러실 수 있습니까? 여기까지 찾아오셨는데 들어오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들어갔더니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었는데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었습니다.
무교병이 뭡니까? 이스트 넣지 않은 빵 누룩 없는 빵 이것은 자기네들 식구끼리는 급하거나 할 때 먹을 수 있지만 손님 대접하는 빵은 아니거든요.
손님을 대접하는 빵에는 반드시 이스트를 넣어야 합니다. 송아지가 아니라 치킨 한 마리 안 잡았습니다. 뭐 요구르트 우유는 말할 것도 없고 맹물 한 잔 없습니다.
그러니까 대접은 하는데 그 이스트를 넣는 한 과정 다 생략하는 겁니다. 제일 손쉽게 할 수 있는 무교병 한 장 턱턱 구워서 자기로서는 대접한 겁니다.
자 이 아브라함과 롯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납니까? 아브라함은 그렇게 지성으로 하고 그 고운 가루 세 스아로 빵을 만들면서도 하나님 이거 한 조각입니다. 조금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그 자세 그 중심이 정말 섬김의 참 마음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헬라어로 섬긴 섬김이라고 하는 그 단어가 디아코니아인데 그 디아코니아는 섬김이 섬기는 사람 디아코노스에서 파생되었는데 디아코노스는 본래 식탁을 차리는 사람의 뜻이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식탁을 차리는데 팁을 받는다 돈을 받는다 그것 봉사 아니죠. 직업입니다. 어머니가 식탁을 차리는 것 자식한테 돈 안 받거든요. 남편한테 돈 안 받거든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식탁을 차리는 것은 참 섬김의 본으로 간주되는 것이죠.
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러주시고 언약을 주시고 자기를 구원해 주셨기에 아무 조건 없이 그 식탁을 차려서 하나님을 옆에서 모셔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똑같이 부복하고 자기 집에 들어오라 하시고 다 하는 것 같은데 형식적으로 끝나버립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헤브론 사람인가 소돔 사람인가 차이는 그것입니다.
내가 중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믿음의 중심을 지니고 있는가 겉으로 보면 외형적으로는 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 같은데 내 마음속에 세상 소돔이 가득 차 있는가 그 차이밖에 없는 겁니다.
40:52
그래서 이처럼 온 중심으로 헤브론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 아브라함 가정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들어 쓰시는가
또 18장 지금 본문 이후가 같이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에 소돔을 가득 채우고 형식적으로만 하나님을 대하는 롯 가정이 어떻게 파멸했는가 붕괴했는가가 19장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예배당을 찾아서 예배 드리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아무리 우리가 종교 행위를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소돔을 가득 채우고 세상을 가득 채우고 살아간다고 하면 우리의 몸이 예배당 안에 있어도 우리는 롯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내 중심으로 섬기는 헤브론의 사람으로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면 내가 일이 있어서 무슨 사정 때문에 내가 지금 소돔 한 가운데에 앉아있다 할지라도 실은 나는 헤브론 한 가운데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9절입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여기에서 그들이 누군가 10절 보면
그가 이러시되 그러니까 그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람의 형상으로 현현한 그 세 분 가운데에 하나님은 10절로 그가 라고 표현했고
9절에서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사자를 의미하죠. 하나님의 사자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안에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지금 하나님의 사자들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해서 어디 있냐고 묻는가 아닙니다. 다 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 이유는 저 뒤에 가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마는 지금부터 아브라함에게 하는 모든 이야기가 실은 사라에게 하는 이야기임을 처음부터 상기시켜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10절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
자 사람으로 현연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자들이 지금 아브라함의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옆에 아브라함이 모셔 서 있습니다.
바로 그 아브라함 뒤에 사라의 장막 텐트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라는 지금 하나님이 오셨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궁금하겠죠.
그러니까 자기 텐트 안에서 그 입구에서 지금 귀를 기울이고 지금 듣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지요
17장 21절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그러니까 사라가 아들을 낳는다고 이삭에게 이미 약속을 하셨는데 그 약속을 지금 사라를 통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사라에게 지금 전해주시는 것이죠.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부부는 한 몸이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부부에게 동일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11절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았다.
이때 아브라함은 99세 또 아브라함과 사라는 10살 차이니까 사라는 89세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말로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다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는데 히브리말은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날들 안으로 들어가서 늙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의미심장하죠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우리가 걷는 걷는 날들은 다 동일하지 않습니까?
내가 젊음의 날들을 걷는 때가 있고요.
중년의 날들을 걷는 때가 있고요.
늙음의 날들을 걷는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늙음의 날들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날을 걷고 있는가 인식하는 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올해로 우리 나이 65살이면 저는 이미 늙음의 날들 속으로 들어간 겁니다.
제가 이걸 인식 못하고 제가 40대 30대처럼 살아간다면 제 인생이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매듭 지어지겠습니까? 제가 늙음의 날들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내 날의 의미는 달라져서 내가 이것을 깨달을 때 내 인생이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마무리되지 않겠습니까?
10대의 날을 걷든 20대의 날을 걷든 중년의 날을 걷든 늙음의 날들을 걷든 어떤 날들을 걷든 상관없이 한 가지 공통점인 것은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만 그 날들의 의미가 허망하게 부서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날들을 주셨기에 하나님과 동행할 때만 그 날들의 의미가 영혼으로 건져 올려진다는 것입니다. 또 11절 하반절에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 말이 히브리 원문에는 사라는 여성의 길에서 끊어졌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당시 그 여자에게 있어서 아기의 잉태를 가장 중요시하던 그 시기에 여성의 길이 아기를 잉태하는 길로 보고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사라에게는 여성의 길이 끊어졌다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내가 남자의 길을 걷든 여성의 길을 걷든 사회인의 길을 걷든 교육자의 길을 걷든 정치인의 길을 걷든 어떤 길을 걸어도 그 길도 하나님과 동행할 때만 그 길의 의미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죠.
그 엘 샷다이 안에서만 그 의미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죠.
12절
사라가 속으로 웃고 자 장막 안에 있습니다.
사라는 지금 공간적으로 하나님과 사라는 대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혼자서 지금 장막 안에 있기 때문에 겉으로 편하게 웃은 것이 아닙니다. 장막 안에서도 속으로 혼자서 웃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지난 시간에 보니까 똑같이 웃었죠.
너 사라가 너한테 아들을 낳아줄 것이다. 그랬더니 아브라함도 그때 웃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사라도 지금 똑같이 웃습니다. 어 거 참 하나님이 내 몸을 모르시네 내가 지금 생리가 끊어졌는데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오 내게 어떻게 해산의 즐거움이 있겠느냐 이 말이죠.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오 하느냐
지금 공간적으로는 하나님과 사라가 서로 안 보이는 공간에 처해 있는데 사라가 웃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아셨습니다. 속으로 웃는 것까지 아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질타해야 되어요
사라를 질타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50:11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려 하느냐 14절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나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여기에 능하다 라고 번역된 이 말이 히브리말로 파라인데 그것을 더 좀 쉽게 번역하자면 이런 말입니다.
나 여호와께 어떤 일이 경이로울 수 있겠느냐 생리가 끊어진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너희들은 경이롭다고 하니 그 일이 나한테 경이로울 수 있겠니 또 나 여호와께 어떤 일이 어려운 일일 수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생리가 끊어진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고 하면 그게 너희들한테는 어려운 일이니 나 여호에게도 그게 어려운 일일 수 있겠니 하나님에게는 어떤 일도 경이로운 일도 아니고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엘샷다이 전능자이시고 그럴 만한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든지 경계해야 될 것은 하나님을 내 생각의 울타리 속에 가두어 두려고 하면 안 된다.
내 하나님을 내 생각의 울타리에 가두어 두려고 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우상숭배자가 되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다.
14절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여기에서 기한은 아까 10절에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그러니까 내년 이맘때가 되면 이럴 때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절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 사라는 장막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속으로만 웃었는데 하나님께서 다 아셨단 말이죠.
그래서 사라가 사악해서 거짓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에 자기도 모르게 내가 웃지 않았습니다 라고 부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지금 차이점이 하나 나타났죠. 그 이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3인칭으로 얘기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가서는 네가 웃었다
사라에게 2인칭으로 얘기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앞에 아브라함에게 사라에 대해서 3인칭으로 이야기하신 그 모든 것도 사라야 이건 내가 너한테 한 얘기야 이 말이죠.
왜 하나님께서 장막 안에 있는 사라에게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야기하시고 마지막에 이 모든 것이 너를 위한 말이다고 이야기하셨겠습니까?
사라야 나는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님이야 이것 가르쳐 주는 겁니다.
너 지금 장막 안에 아무도 없지 내가 너 안 본다고 생각했지 너 겉으로 웃지 않았지 속으로 웃었지 나는 알아 다 알아 그러므로 내가 하는 말 믿어라 네 생리가 끊어졌어도 내년 이맘때쯤 너를 통해서 내가 언약의 아들을 줄 것이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니다. 네가 웃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거는 너 왜 그렇게 거짓말 해 사라를 정죄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라의 두려워하는 그 중심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 시공을 초월하는 영원한 언약을 사라의 가슴 속에 깊이 세겨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해서 사라 역시도 더 이상 하나님께서 자기의 닫힌 태를 통해서 언약의 아들을 주실 수 있는 엘 샷다이 전능자이시자 충분자시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은혜가 인간이 간구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던 것이죠. 중요한 단어를 하나만 더 우리가 생각하고 끝을 내십시다.
10절입니다.
그가 이르시되 하나님이 이르시되지요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내 안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내년 이맘 때 우리말로는 내년 이맘 때 라고 번역된 이 말이 히브리 말로는 카예트 하야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거를 그대로 번역을 하면 그 말 뜻은 뭐냐 하면 생명의 때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년 이맘때는 의역한 것이고. 그 본래 글자 그대로는 생명의 때에 더 풀이하자면 만물이 소생하는 때에 이 말입니다.
더 설명을 가하자면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되면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내년 이맘 때쯤 내년 봄은 내년 봄이니까 내년 이맘때라고 번역을 했거든요. 여러분 봄이라고 하는 계절의 특성이 뭡니까?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입니다.
그동안에 사라는 89번이나 계절적인 봄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사라의 태는 죽어 있었습니다. 사라의 태는 한 번도 봄을 맞았던 적이 없습니다.
아이가 가장 중요한 재산인 그 시절에 사라의 태가 봄을 맞은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은 89년을 살면서 사라가 계절적인 봄은 89번을 맞았지만 그 인생이 진정한 의미에서 봄을 맞은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년 이맘때쯤 이 말이 어떤 의미로 승화됩니까? 만물이 소생하는 내년 봄에 자연만 소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 너의 태도 소생하고 네 인생도 소생할 것이다.
그 내년 봄에 이츠하크 웃음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정말 그 부부가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참된 행복 참된 웃음을 누리는 믿음의 조상들로 세움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이 당신의 언약으로 우리 곁에 와 계시는 것입니다. 또 지금 계절적으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우리의 생각속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는 하나님의 우상을 움켜쥐지 말고 그 하나님의 우상을 다 내던지고 온전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드림으로 말미암아서 우리 모두의 인생이 새 봄을 맞고 여러분의 인생 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스하크가 아름답게 결실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이 밤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우리와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대하는 소돔의 롯이 아니라 온 중심을 다해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헤브론의 아브라함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엘 샷다이 하나님 전능자이시자 충분자이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내가 그동안 만들어 왔던 하나님의 우상을 다 버리게 도와주시고
하나님께 내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리는 이 시대의 아브라함 사라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이 사라의 태처럼 죽었던 인생이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영혼이 소생되고 인생이 소생되는 새 봄을 맞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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