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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성당60년사(醴泉聖堂六十年史, 1932-1992) [冊] : 예천읍 백전리 109번지 출신인 장병창(張炳昌, 1942- , 베드로, 中等 校長)이 집필한 책으로, 450쪽, 도판, 삽도, 24cm, 천주교 안동교구 예천교회(本堂神父 金榮弼)에서 1995년 6월 6일에 발행, 왜관 분도인쇄출판사에서 인쇄하였다.
서울 국립중앙도서관 중앙대출대에 소장(분류기호 238.209, 청구기호는 238.209-천4510-2, 한국십진분류법→238.209, 듀이십진분류법→282.519)되어 있고, 국립중앙도서관 서고자료신청대에 소장(청구기호 238.209- 천451ㅇ=2)되어 있고, 가톨릭대 중앙도서관 제2자료실에 소장(청구기호 275.19 천7743ㅇ안)되어 있고, 가톨릭대 신학도서관 일반도서실에 소장(청구기호 273.419 ㅇ337ㅇ)되어 있고, 대구가톨릭대 신학대학도서관에 소장(청구기로 271.097 ㅇ337=2)되어 있고, 동 한티신학관에도 소장(청구기호 271.097 ㅇ337+3)되어 있고, 서강대 로욜라도서관 1관 3층 일반도서실에 소장(청구기호 275.199 천7762ㅇ)되어 있고, 수원가톨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KDC 258.2509 3)되어 있고, 예천공공도서관 참고 자료실에 소장(청구기호 참고 236.86-천77)되어 있다.
집필자 장병창은 회고기에서 본당사의 편찬 과정에 대하여 이르기를,
"1982 년 9월 5일, 이영길 본당 신부님이,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을 위해 여러 가지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9월 19일에 이 행사의 일환으로 '본당 50년사 편찬 계획'이 발표되었고, 10월 25일, '기념행사 계획서'에서 '편찬 책임자로 장병창 베드로를 임명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막상 원고를 쓰려니 수집된 자료가 없었다. 하나의 사건, 한 장의 원고라도 쓰려면 자료 수집이 급선무였다. 때마침 본당 신부님이, 김욱태 신부님이 소장하고 계시던 <가톨릭 연구>(1936년판)를 빌려 오시고, 본당의 성세 문서, 혼배 문서, 견진 문서, 구 교적 등을 보면서 원고를 한 장 두 장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들은 귀중할 뿐 아니라 오래도록 본당을 떠나 집필자의 서재에 머물 수 없는 것이어서 시간에 쫓기지 않을 수 없었다. 직장을 퇴근한 후 저녁 시간도 모자라 거의 밤 2시까지 원고지를 달렸다. 특히 연도별 영세자 현황, 연도별 교세 통계 작성에는 많은 시간과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나마도 원고 정리가 끝나니 자료가 또 바닥이 났다. 밖으로 자료 수집에 나섰다. 대죽 공소를 방문하여 역대 공소회장들의 얘기를 정리하고, 점촌 본당을 방문하여 영세문서 1권(1922년부터 수록)을 오성백 주임 신부님께 빌리기도 하였다. 또한 본당의 주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는데, 장 발비나, 사공 바오로 등이 그간 모아 둔 주보를 빌려 주었으나 모두 일부분들이었다.
1985년 1월 8일, 박윤정 바오로 대신학생(예천읍 통명리 출생, 현 신부)과 함께 쌍호공소를 방문하였다. 쌍호 공소에서 조봉덕(趙鳳德) 아오스딩을 만나고, 안동 구담을 거쳐 암천 공소에 들릴 때는 어두어질 무렵이었다. 이 곳에서 김호년(金浩年) 공사가 회장 등을 만나고 오천 공소에서 장병호 야고버 회장을 만났다.
같은 해 1월 16일, 먼 출장길에 나섰다. 간 밤에 내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김천 황금동 본당에 들려서 혼배 문서(1894-1922)를 볼 수 있었고, 밀양에 내리니 저녁 6시 경이었다. 김태호 신부님을 뵈옵고 나니, 밤 12시가 가까웠다. 밤기차로 대구에 와서 18일 9시에 대구교구청을 찾았다. 최 요세파 수녀님의 도움으로 역대 신부님들 중 이기순, 권영조, 김동언 신부님의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19일 오후 2시에 소화 본당에서 신현옥 신부님을 뵈옵고 4시에 상주로 올 때는 함박눈이 시야를 가려 버스가 거북이 운행을 하였다. 상주에서 노광명 전 본당 신부님과 박근하 회장의 아들인 박창호 요셉을 만나고 여관으로 들어갈 때는 밤 12시 경이었다.
1985년 1월 21일, 안동 교구청에 가서 역대 본당 신부 경력, 그리고 <가톨릭시보> 영인본을 보고, 23일에 다시 안동교구청으로 가서 조종률 전 본당 신부님을 만나고, 퇴강 본당의 세례 문서(1923-1932)를 보았다.
1월 31일에는 용문 공소, 대심동 김종석 도비아, 백전동 박종하 다두, 서본동 장순이 발비나, 박봉식 막시모를 방문하고, 2월 2일에는 지보, 신풍, 축동 공소를 방문하고, 도장리에 있는 예천군 최초의 신자 정인진 루까 묘소와 1866년 피난 교우가 숨어살던 옹기굴을 답사했다.
그 후 자료 수집이 어느 정도 마무리 지어졌다. 원고를 이영길 신부님께 드렸다. 본당 신부님은 이르시기를, '본당사 편찬을 위한 예산이 얼마되지 않아 안동교구청에 있는 타자기로 책을 낼 터이니, 미리 타자를 쳐서 가저오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임경 리디아가 타자를 치기 시작하였다. 임 리디아는 원고 분량이 많아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나와 천대용 그레고리오가 합류하였다. 그 후 타자는 마쳤으나, 예산이 없었다.
그러나 예천 성당의 역사를 그냥 묻어둘 수는 없었다. 남학현 본당 신부님에게 주보에 조금씩이라도 실도록 건의하였다. 남 신부님은 쾌히 승락하셨다. 그래서 1990년 10월 14일부터 주보(제1209호)에 실리기 시작하였다.
김영필 신부님이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시면서 본당 설정 6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본당사를 편찬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1991년 10 월 27일 사목회의에서는 결의하기를, '60년사는 자료 수집 및 원고가 완료되는 대로 편집 및 발행을 한다.'라고 하면서 주보의 연재를 중단하였다.
그러나 근래의 자료가 수집되지 않았고, 사제관 신축이라는 매우 큰 행사 앞에서 예산을 세우기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1992년 12월 말에 컴퓨터를 구입하여 집에서 직접 입력하여 출판비를 절감하도록 하였다.
1993년 4월 4일부터는 본당 내에 있는 교적, 각종 성사 문서, 사목회 등 각 단체의 서류들을 보기 시작하여 1985년 이후 조사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보완하였다. 그리하여 컴퓨터로 프린트한 원고를 1993년 4월 10일 부활 전야 미사 때 김영필 본당 신부님한테 제출하였다.
그리하여 4월 29일 정기 사목회의에서 60년사를 발간하기로 결의하였다. <천주교 예천교회 주보> 제1339호(93.5.23)에서 이르기를, '본당 60년사 원고가 장병창 베드로 씨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마무리 단계에 와 있습니다. 본당에 관한 자료(글, 사진 등)가 있다면, 사무실에 보내 주시면 참고한 후 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1993년 6월 8일, 본당사 편찬위원회가 열렸다. 김영필(金榮弼) 본당 주임 신부, 김윤아(金倫我) 마리아 막달레나, 현우택(玄雨澤) 요셉이 모여 편찬 골격을 짜고, 김윤아 마리아 막달레나가 교정을 하기로 하였다. 김윤아는 예천읍 대심리 예천공항 아시아나항공 관사에 살고 있는 가정 주부인데, 모 대학의 국어국문학과 졸업생이며, 현우택은 대창고등학교 국어 교사로서 나의 제자 겸 직장 동료(현 대창중고등학교 교장)이다.
1993년 8월 18일에는 김천 지좌동 본당 주임 신부님이 직장으로 나를 찾아 오셨다. 신부님은 이르시기를, '지좌동 본당사를 준비하다가 보니 일이 확대되어 김천 본당 창설 후 예천 지방을 사목할 때의 공소 현황을 조사하러 왔다'는 것이다. 신부님은 188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의 교세 통계를 갖고 계셨다. 예천, 문경, 상주 지역의 공소 현황이 모두 기재되어 있었는데, 공소의 현 위치를 연구 확인하느라고 밤 11시까지 동본리 집에서 작업을 하였다.
1993년 9월 초, 김윤아 마리아 막달레나가 3개월만에 원고 교정을 끝냈다. 매우 섬세하고 과감하게 교정을 하였다. 이를 다시 컴퓨터로 재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그 도중에 연이은 부모상을 당하여 재정리 작업이 늦어지기도 하였다. 1993년 11월 19일에 김영필 본당 신부님께서 왜관의 분도출판사에 다녀오셨고, 같은 해 12월 28일에 사목회 임원들과 연석한 본당사 편찬위원회를 열어 편집과 출판 계획을 마무리 지었다.
예천 성당의 역사 자료를 한데 모아 정리하는데, 그 동안 도움을 주신 분들께 매우 감사를 드린다. 더욱이 자료 수집에 도움을 주신 분들 중에는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이 계신다. 그분들의 명복을 기원한다. 사라져가는 사료들을 한데 모아 글로 만들어 보았으나, 여러 가지로 미숙한 제가 오히려 하느님의 사업에 애쓰신 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는지 두려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예천 본당에 몸담았던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가호가 있으시길 기원한다. 1993년 10월 24일
장병창(張炳昌) 베드로"
라고 하였다. 그러나 1994년 2월 18일에 성전의 화재로 인하여, 인쇄 중이던 <예천성당60년사>의 출판을 성전 완공 후로 미루기로 하고, 그 부록으로 성전 신축 과정을 게재키로 하였다.(인터넷 야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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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천성당의 역사을 잘 알고 감니다.
늘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