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간 신문에서 참 재미있는 글을 본 일이 있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이란 유머였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직업이나 전공에 따른 무수한 해법이 제시돼 있는데 그중 최고의 해결책은 그냥 “엄마!”라고 외치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 엄마는 000다’라는 괄호 안에 단어를 넣도록 했더니 ‘성공의 손길’, ‘조련자’, ‘내비게이션’, ‘개인 매니저’라는 대답들이 돌아왔다고 한다. 엄마가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현상들이 이러한 유머로 그치는 게 아니라 심각한 우리나라 엄마들의 실상이요 자화상이다. 유달리 다른 아이와의 강한 비교 성향이 엄마의 역할마저 왜곡시키고 있고, 남들보다 더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만들기 위해 엄마들은 아이들의 총감독이자 학습 매니저로 변해가는 것이다.
왜곡된 엄마들의 손과 발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고생 한 번 없이 금지옥엽金枝玉葉 뒷바라지하여 일류대학에 진학시킨 어떤 어머니는 자식의 수강신청도 대신하고, 성적이 잘 나오지 않으면 교수에게 항의하는 것은 기본이고, 자녀가 대학을 졸업한 후 취직을 위해 면접시험을 보는 장소까지 동행하며 이런저런 간섭을 쏟는다. 심지어 취업 후에도 부서배치에 직접 간섭하며, 자기자식이 소속된 부서가 야근이나 회식이 많다고 항의하는 부모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인사부서장들의 하소연이다.
필자도 2년전 신입사원 면접을 치면서 유사한 경험을 한일이 있다. 자기차례가 되어 1분동안 자기소개를 시키자 머뭇거리면서 자기소개를 하지 못하여 맨 나중에 하기로 순서를 바꾸어주었다. 그러나 자기 차례가 다시 돌아왔는데도 얼굴이 붉어지고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해 있기에 왜 자기소개를 못하는지 물었다. 그 대답은 놀랍게도
“예, 저는 오늘 면접장에 오기 싫었는데 엄마가 차로 실어다 주는 바람에 억지로 와서....”
요즘의 자식사랑 세태는 거의 한심한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국민 신조어로 떠오른 ‘엄친딸’, ‘엄친아 신드롬’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 하지만 아이가 1등만 한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행복한 것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한 사람들은 남들과 비교해 거의 영향을 받지 않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남들보다 못하다는 피드백에 자기평가 점수가 급격하게 낮아진다. 자신의 행복이 타인의 비교에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OECD 국가들의 청소년들이 느끼는 행복지수 순위를 보면 우리나라는 전체 평균에도 못 미칠뿐더러 OECD 주요국 중 꼴찌다. 세계 178개국을 대상으로 한 행복지수 또한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보다 낮은 102위다. 자녀의 성공이 엄마의 대리만족을 위한 것인지, 내가 지금 아이에게 올인 하고 있는 것이 누구를 위한 어떠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때다.
실제로 어린 시절 부모님의 제대로 된 교육을 충분히 받고 자란 사람은 마음에 뒷심이 있어서 웬만한 어려움은 여유롭게 넘어간다. 그러나 그저 무조건적인 사랑만을 받고 자란 사람은 작은 일에도 쉽사리 좌절하게 된다. 소위 강하게 누를수록 더 강하하게 튀어나오는 용수철처럼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부족한 것이다.
자식 교육으로 유명한 유대인 엄마들은 성인식에 세 가지 선물을 준다고 한다. ‘성경, 시계, 축의금’이다. 축의금은 이 돈을 가지고 10년 뒤에는 출가하여 완전 독립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한국의 엄마를 잘 그려내어 베스트 셀러가 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2008년 한국에서 발간된 후 이른바 ’엄마 신드롬’을 불러오며 15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후 미국 뿐 아니라 유럽, 아시아 등 22여 개국에 판권이 판매돼 미국에서도 영문판 (Please Look After Mom)으로 출간되었다.
책이 나오자 뉴욕타임스가 신경숙 씨의 소설 서평 기사를 실었다. 뉴욕타임스는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소개했다. 어머니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슬프게 담아냈는데 소설의 주인공인 엄마를 단순한 순교자 정도로 표현한다면 너무 슬픈 일이 될 것이라면서 이 책에서 엄마의 존재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온몸으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을 우리주변에서 자주 만난다. 어려서 조기유학을 시키고 생이별을 하면서 기러기가 된다. 국내에 있더라도 좋은 학교를 보내기 위한 헌신과 전쟁을 방불케 하는 노력들이 시작된다. 여기에는 이제 할아버지의 재력까지 동원된다.
그러나 지나친 엄마의 헌신과 삐뚤어진 자식사랑은 부메랑으로 되돌아와서 자녀가 자신을 떠나서는 살지 못하게 하려는 무의식적인 압박임을 알아야 한다. 즉 이러한 부메랑은 때로는 자식의 인생만을 일그러지게 만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쏟아 부은 엄마한테로 다시 독이 되어 되돌아온다. 이러한 독은 결국 부모들의 가슴에 못을 박기도 하고 심지어 원수 같은 자식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수년전 ‘엄마가 뿔났다’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었다. 이 드라마의 뿔난 엄마는 한 사회의 일원이라기 보단 그저 한 남자의 아내, 며느리, 3남매의 엄마로만 살아왔다. 이 엄마에게 ‘나 자신’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왔다. 어쩌면 세상이 이런 엄마를 당연시 여겼으며 우리들의 엄마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헌신적인 엄마의 마음에 뿔이 났다.
엄마도 더 이상 ‘나 자신’을 외면하고 살수는 없었다. 가족들에게 1년의 휴가를 청하고 엄마는 집을 나섰다. 드라마이긴 하지만 실제로 일어났으면 하는 참으로 유쾌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엄마는 가끔 뿔이 나야한다. 누구나 엄마의 뿔은 본 적이 없다. 엄마의 뿔은 뾰족한 사슴의 뿔 같은 방어의 무기이기도 하지만 필요할 때는 꾸짖어 주거나 화도 내는 뿔을 내는 것을 말한다. 엄마의 뿔은 감춰져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의 수많은 자식들은 자신의 자식을 키우면서 드디어 어머니의 뿔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자식들을 바르게 키우려면 다 줄 것이 아니라 적절히 주어야 한다. 부드럽기만 하기보다 때로는 엄격함이 같이 묻어 있어야한다. 정신의학자 스캇 펙M.Scott Peck은 “사랑은 지각 있게 주는 것이며, 또 지각 있게 주지 않는 것.”이라 고 말했다.
누구든지 사회에 나오면 엄마가 없다. 그래서 사춘기는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는 제2의 이유기離乳期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요즘은 서른이 넘도록 젖을 떼지 못한 젊은이가 많이 눈에 띈다. 엄마 없이는 살 수 없는 캥거루족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대선을 앞두고 온갖 공약들을 보라. “무엇을 해달라”는 요구는 단 하나도 없고 “내가 다 해주겠다.”는 엄마형型 문구들뿐이다. 저성장 고령화 사회로 치닫고 있는 우리 현실 속에서 감당할 자신도 없이 약속해 놓고 나중에 일이 틀어지면 이번에는 “어떤 엄마”를 찾을 것인가가 궁금해진다. 지금 우리사회에는 때로는 뿔난 엄마가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