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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시결신인상 당선작 / 걔 (외 4편) 이원재
| 2024 시결신인상 당선작 |
걔 (외 4편)
이원재
쉬는 시간, 조잡하게 편곡한 클래식 음악이 나올 때면 걔는 어김없이 온몸을 흔들었어, 웃긴 춤을 추고 싶었던 건지 춤을 춰서 웃게 하고 싶었던 건지, 아마 네가 걔를 봤다면 등짝이든 뺨이든 어디든 한 대는 치고 싶었을 거야 사지가 나풀거릴 때마다 조금씩 들리던 티셔츠의 아랫단, 푸짐하게 두른 뱃살도 그렇게 조금, 조금씩 보였더랬지
뭐 얼마나 이어졌을까, 싶어도 그 아이는 쓸데없이 포기를 몰랐어 방과 후 청소 시간이 끝난 한참 뒤에도 누가 있나? 하면 걔가 때 낀 손톱으로 때 묻은 걸레를 하나하나 빨고 있었고, 다른 애들 몰래 게임할 때 컴퓨터실 구석 명당자리에서도 그 둔한 곰손이 열심히 한컴타자나 두들기고 있었다는 거 아니니 눈꼴이 좀 사나웠겠어, 그 아이 배만큼이나 불룩했던 안경알은 무
슨 노릇인지 곧잘 떨어지곤 했는데, 설핏 졸 때나 예의 그 춤을 출 때나 하여튼 한두 번이 아니었어 그럴 때면 누가 누가 먼저 밟나 대회라도 열린 것마냥 여기저기서 실내화 세례가 쏟아졌지 때론 그걸 줍는 손도 같이 밟히곤 했어
웃기지, 그쯤 되면 춤은 안 출 법도 한데, 두 번 다시 없을 무대마냥 열렬하게 몸을 흔들어댔어, 다시, 웃긴 춤을 추고 싶었던 건지 춤을 춰서 웃게 하고 싶었던 건지 나야 이제는 알 수 없다만, 옆자리 예쁘장하던 짝꿍도 똑 부러지던 반장도 심지어는 좀 전까지 안경알을 밟아 부숴대던 애도 그때만큼은 모두 웃음바다가 되었지, 조소인지 폭소인지, 아님 둘 단지 모를 웃음이었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겠지 걔도 마찬가지였거든, 웃고 있던 건
독서는 ㅈㄱ다
이제는 읽기 어려운 책이라면 눈부터 감아버리는 내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었지만, 언젠가 읽고 또 읽었던 어려운 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아마 한 교수의 강의를 받아 적고 엮어 만든 짧은 책이었다 그러니까, 그 책은 자기가 책인지도 모르고 책이 된 것이다 들려주기나 할 줄 알았지 보여주기는 생판 한 적이 없으니 이 글자들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 것이며, 자음과 모음 전문용어들 심지어 한숨과 쩝 에 음 소리 하나하나마다 발음되기만 기다렸다가, 교수 타계하고 나서는 아무도 불러주질 않았으니, 얼마나 서운했을 것인가
이건 또 그 책 얘긴데, 어려워서 어쩔 줄 몰랐지만 어쨌든 친구 녀석들에게 어려운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책에 있는 글자 하나하나를 노트에 써가며 책을 읽었다 아니 읽는 척을 한 거다 이 읽는 척은 대단히 효과적이었고 어느새 나는 독서광, 책벌레, 철학자 하여간 불명예스러운 칭호란 칭호는 다 얻어 오늘은 어떤 부분을 읽을 아니 읽는 척을 해보실까 입맛을 다실 참이면, 어김없이 글자들 튀어나와 눈물 대신 흐르려 하고 이제는 없는 교수의 한숨 소리도 내 입가에서 알뜰하게 재현되곤 했다
어쩌다 이런 것도 있었나 싶은 어려운 단어 하나가 머릿속에 불어올 때 이게 어디서 알게 된 거였지, 하다보면 동네 도서관 팔백몇 번대 책장으로 순식간에 날아간다 애써 감췄던 어려움이 아직도 잔뜩 묻어있는 마음은 늘 그 자리에서 벗어난 적 한 번 없으니… 우리는 이렇게 언제나 예상치 못한 재회를 한다 독서가 나를 찾지 않더라도 이렇게 그를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한껏 황당하고 야멸차진 요즘, 학창 시절 사랑했던 남자와 여자가 어색한 미소 또는 경멸로 만나듯, 나는 이렇게 그 책을 기억한 채로 남아있다
빨강 그다음에는
어느새 너와 나는 반만년, 최후까지 함께했던 기억은 공룡처럼 어떤 건 이름이 없고 어떤 건 완전히 굳어 수줍게 적나라하다
누구도 기다리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안부 사이, 얕게 차오른 경멸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까불었다 제 누이와 입 맞추는 시골 아이의 철없는 물장구처럼
어느새 너와 나는 빨강 그다음, 어디서부터 손봐야 할지 모를 무신경함을 겸연쩍게 쥐여주며 앞발을 내밀었다 아, 어쩌지! 발은 손을 대신할 수 없는데!
발과 발 상호 간의 경례, 올리고 나니 넌 그새를 못 참고 대충 큰절을 올린다 무릎께 오는 너의 눈길이 어딘가 슬퍼 보이는 건 어쩌면 내 탓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너와 나는 사진 없는 액자, 액자란 사진이나 그림 따위를 담아둬야 하는데 네가 사진 할래? 아님 내가 할까? 아니 난 못 할래 하며 못을 박았다
아직도 못 뺐다 넌 못했다 나도 못했고 그러니까 우린 모두 서투른 대장장이였던 셈
어느새 너와 내가 우리가 되지 못하는 지금, 빨강 그다음엔 누가 또는 무엇이 와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잠깐 숨 돌릴 틈도 없이 넌 벌써 어디 가고 없다
적막 뒤에 이어지는 폭발, 자명했으니, 멎어야 할 말이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누른다 어떻게든 참아야 산다
그날 꿈에는 매미가 나와 사람 말을 했다
밤도 모르는 매미 소리에 잠이 달아났다
저걸 확, 다 없애버려야지
분한 맘에 창을 꽥 연다
해도 잠에 드신 걸 아는지 모르는지
네놈들, 태양보다 가열차게 배때기를 떨며 공명하다가
숨 막히게 날갯죽지를 비틀어대다
우스꽝스러울 만큼 결연하게 개미나 신발창의 먹이가 될 테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아직 어린 놈은 땅속에서 힘차게 몸을 떨 것이고
다 큰 놈은 정열적인 노랫가락에 힘이 겨울 것이다
어린 놈이 다 커버리는 것
몸이나 떨고 있던 것이 퍼덕이는 날개를 갖는 것
껍질을 깐 단단한 대가리로 들이대 보는 것
초라한 몸에 음악 비슷한 게 담기는 것
어둑한 구석에 숨어있다 뜨겁게 울어젖히는 것
아연한 채 창을 밀어 닫는다
저놈들처럼 충실할 수 있다면
저놈들처럼 한바탕 울부짖을 자리가 내게도 있다면
웃겨, 질투를 다 하고 있네
얼음 팩도 에어컨도 있는 난데
그날 꿈에는 매미가 나와 사람 말을 했다
훗날 어느 풀죽은 겨울
나무둥치에 안긴 내 껍데기를 주워 들고
여름을 그리며 후회나 하지 말거라
믿거나 말거나
만석의 커피 트레이를 든 채 계단을 오를 때면 모든 걸 와장창 쏟아버리는 상상을 하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면서도 쏟은 적 역시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
좋아, 누군가 내 생에 개입해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 아주 곤욕인 일 따위를 막아주고 있는 거라면 감사 정도는 표할 수 있으니 한번 얼굴이라도 맞대주쇼, 하고 싶지만 그런 분은 나타나지 않는다 아니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수억 수조의 우글거리는, 말 그대로 억조창생 앞에 일일이 나타난다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도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위안이 되는 까닭은 설령 있다 하더라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 그러니 있다고 믿어도 그만이요 없다고 믿어도 그만인 셈 가만 생각해보면 짐승과 우리가 다른 점은 이를 두고 말하는 건가 싶다 전능을 믿거나 말거나 하는 힘, 하찮지만 그 무엇보다 숭고한
|당선 소감| 시의 가치는 ‘이런 생각도 있다’가 아닐까
이원재
1999년 서울 출생. 홍익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졸업. 2024년 《시결》로 등단.
이국에서 또 일 년을 보내기 일주일 전, 들려온 기쁜 소식에 출국의 설렘마저 한풀 꺾이는 듯합니다. 행운은 연속으로 찾아온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용케 실현되었습니다.
예상치도 못한 일에 어찌나 놀랐는지 기쁨도 온전히 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시결》의 첫 신인상이라는 영예에 맞게 수상 소감도 번듯이 써야 하겠다는 일종의 책임감까지 느낍니다. 재주가 많지 않아 멋진 인사와 기막힌 수사로 소감을 갈음할 수는 없겠지만, 닿는 대로 얘기해보겠습니다.
산문의 가치가 ‘내 생각은 이렇다’라면, 시의 가치는 ‘이런 생각도 있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그렇습니다. 지리멸렬해 보였다가도 어떤 날엔 갑자기 홱 품에 날아들곤 합니다. 또 어떤 날엔 무뎌 보이던 시가 번뜩이며 가슴이 뜨끔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는 곱씹으며 음미할수록 좋다고 하나 봅니다.
하나 그건 좋은 시에 국한될 일입니다. 그렇기에 모자란 제 글을 하염없이 반추해준 친구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일찍이 작문에 선생을 둔 적 없다며 친구들에게 자랑하듯 떠벌리고 다녔는데, 생각해보니 그들이 제 선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사실이 퍽 머쓱합니다. 문우文友라 명명하면 나중에 만났을 때 낯부끄러워질 게 뻔하니 동아리 친구들이라 하겠습니다. 학생 때는 <담담>, 졸업하고 나서는 <글로 만난 사이>에서 연을 맺은 동아리 친구들, 참 고맙습니다. 많이 배웁니다. 앞으로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그렇게 고마운 친구들과 함께 읽고 썼지만 사실 아직도 시를 모르겠습니다. 확신하건대 평생 모를 겁니다. 오직 ‘모른다’는 생각으로 읽고 쓸 뿐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건 압니다. 진실은 가장 강하고 아름답습니다. 시에서만은 저도 그럴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하고 정진하겠습니다.
한동안 시를 심고 뿌려도 아쉬움뿐인 수확이었으나 보람찼습니다. 비도 오지 않는 황야라 시들해진 탓에 모아 봐야 기껏 한 줌임에도 기꺼이 즐거워했습니다. 함함하고 예쁘진 않지만 봐줄 만은 한 듯해 흐뭇했습니다.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한 제게는 당치도 않은 말이겠으나, 그건 제 새끼를 바라보는 심정과 비슷할 듯합니다.
함함할 것도 예쁠 것도 없는 제 새끼들 사이에서 가능성을 발견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시결》이라는 터전을 마련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덧붙여 부모님과 동생을 비롯한 우리 가족, 부족한 나와 함께 해온 우리 동기와 선후배님들, 각국에 계신 동료 여러분, 내 오랜 친구 영욱, 그리고 내 단짝 유리, 다들 고맙습니다.
비가 오니 이제 문장을 닫겠습니다.
|심사평| ‘참 문학 정신’과 함께할 신인
계간 《시결》은 2024년 가을호 제3호를 기점으로 ‘제1회 신인문학상’을 제정하고 《시결》이 추구하는 ‘참 문학 정신’과 함께할 신인을 발굴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 결과 응모자 백여 명이 지원, 예심을 거쳐 본심에 8명의 작품이 올라왔다.
전반적으로 응모작에서는 다채로운 저마다의 소재로 시어를 채집하는 가운데 펼치는 다양한 사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 의식의 근간에서는 유년, 일자리, 가족, 자연, 생태, 기후, 현장 등 일상과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고투하고 있는 존재들의 배후가 목격되기도 했다. 그것은 예술이 삶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 없듯이, 문학은 순수한 의미에서 길 위의 언어 예술이라는 사실이다.
먼저 예심의 특이점으로 시적 성취를 보이는 작품에 비하여 자의식을 벗어나지 못한 독백체 형식을 가진 시편이 많았다. 파편화된 개인사에 투박한 감정을 섞어 시행에 삽입하는 것만으로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는 점은 응모자들이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완성도 있는 작품은 자의식에 매몰된 사적 공감이 아니라 보편적 이해로서의 공적 공감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일상적 언술들이 주제의식에 맞게 확장된 시공간을 구축하면서 시적 언술로 시상을 전개하진 못한 응모작들은 옥석을 가려내듯이 어렵지 않게 본심에서 밀려났다.
본심에는 박한결의 「기억 클라우드」 외 9편, 이원재의 「걔」 외 9편, 김윤아의 「수유」 외 9편, 구름의 「제비꽃」 외 9편, 이건주의 「가위」 외 9편, 조현빈의 「파운드 푸티지」 외 9편, 김세정의 「부유」 외 9편, 안종진의 「지붕은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외 9편, 등 여덟 분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이들은 창작에 쏟은 시간과 함께 정형적 틀이 제거되고 개성 있는 목소리로 사유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또한 나름의 문학적 탁마를 통한 시성을 가진 작품들로 분류되면서 우리는 후보작들의 작품을 다시 면밀히 검토했다.
공통적으로 본심 작품에서는 신인이 갖추어야 할 언어에 대한 시적 긴장감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신인다운 패기와 고른 호흡을 삼투시킨 산문 형식의 시가 주를 이루었다. 또한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일수록 행간에서 화자의 시선과 언술들이 주제의식과 의미 있게 맞닿고 있다는 점에서 예심 작품들과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주었다. 공통적으로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소재가 주제를 보충하거나, 대리하는데 ‘사물의 말’을 감각적인 시선으로 편철하고 있었다.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적 영토에 상상력이라는 문학의 씨를 뿌리면서 인간에 관한 본질적 질문을 하고 있는 시편들이 최종심에 올라왔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이 바로 이원재의 「걔」 외 9편과 김세정의 「부유」 외 9편이다. 이원재와 김세정은 서정의 관점에서 대상을 다루는 방식이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이미 습작기를 벗어난 듯한 사물에 대한 통찰과 다채로운 시적 발상들, 그리고 신선한 상상력이 뿌리내린 깊이 있는 시 의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에 이원재는 현실의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언술하고 그것을 새로운 이미지로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김세정은 첨예한 현실의 문제를 관통하면서 사물의 말을 새롭게 기록하려고 하는 주제의식이 돋보였다. 심사위원들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작품을 두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데 심사 과정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다. 그것은 무엇보다 《시결》의 제1회 신인문학상 수상자라는 부담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심사위원들은 신인이 갖추어야 할 역량이 있는 작품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 응모작 10편 모두 고른 시 의식을 함의하고 있는 이원재를 수상자로 결정하는 데 의견을 모았다. 김세정과 본심에 오른 후보작들은 안타깝게도 다음을 기약하면서 심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문학의 순수성을 바탕으로 하는 《시결》의 제1회 신인문학상 수상자 이원재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제 이원재 시인이 이 시대 우리 문학을 멀리 깊게 흐르게 할 새 물결이 되어주길 바라면서. 무엇보다 최고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지만, 최초는 바뀔 수 없다는 이치를 상기하기를 또한 바란다. 이로써 이원재가 담백한 언술로 문학의 진정성을 타진하고 《시결》의 이름을 더 높이기를 기대한다. 앞으로 이원재가 척박한 문단에서 길을 잃지 않고 전위적으로 문학적 성취를 이루는 가운데 향후 《시결》의 신인상 수상자들과 함께 큰 물결이 되어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예심 심사위원 : 김금용, 박판식, 이현호
본심 심사위원 : 권성훈(글), 문태준, 박판식
—계간 《시결》 2024년 가을호
출처: 푸른 시인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