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그 오랜 병상
이현정
조가비 다문 입이 희미하게 들렸다
음울이 녹진녹진한 생사의 가장자리
고통은 습관이지만 매일같이 또렷했다
내게도 뚝딱 뱉을 재주가 있었다면.
속 깊이 들어와 살점 아래 자리 잡은
끝끝내 거르지 못한 마지막 모래 한 알
흰 살로 덮고 묻어 바래지는 이 불순물
금속보다 단단한 그 무엇이 되려는지
치열한 자가면역에도 임계점이 다가오고
죽지 못해 참아온 몽니를 도려낸 날
다시 입을 닫으려다 스며 나온 단말마,
이제는 그만 아프고 싶어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유성우
과묵한 어둠의 손바닥 그으며
빈 땅의 과녁에 빛살이 꽂힌다
무심코 돌이켜보니
몇 억 년을 날아왔다
강력한 이끌림 가눌 수 없어서
뜨거운 대기권 맨몸으로 통과한
유성우 흰 부스러기
소매 끝 스치면
간절히 손을 모은 누군가와 누군가는
애끓는 손가락 끝 서로에게 묶인 채
달뜬 밤 짙은 맘으로
눈먼 이 만나겠지
ㅡ『시조시학』(2020, 여름호)
미역, 그 갸륵함에 대하여
ㅡ미역을 기리며
딸부잣집 넷째 딸은 날 때부터 덤이었다 해산 후 미역국도 못 받은 산모처럼 한평생 생일상 한 번 맘 편히 받지 못했다
제 밥그릇 타고나니 냅둬도 살겠지, 파도가 우는 대로 파랑이 밀치는 대로 그 누가 돌보지 않아도 발아하던 생의 포자
먹이 사슬 맨 아래, 빛만 먹고 살면서도 제 몸의 몇 배 되는 포식자를 이고 지고 바위틈 아무 데에나 무덕무덕 피어나던
해풍에 머리 물도 다 빠진 흰 노파는, 땅 위의 숨탄 것들 젖어미 되어 주는 바닷속 돌미역같이 살았노라, 말했다
쇠소깍* 연가
모든 만남, 반가움에 요란하진 않겠지
돌개바람 홰를 치며 질투심에 수선해도
유정한 물길과 물길 깊이 해후하는 곳
모든 연심, 설렘으로 들썩이진 않겠지
지상의 연정이 밤낮으로 붉을 때에도
잠 못든 새벽이 고여 비색으로 짙어진 곳
모든 이별, 슬픔으로 흩어지진 않겠지
애닯은 맘 자분자분 쌓아올린 벽이 되어
파도도 부스러지며 눈물부리다 가는 곳
*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지, 제주도 서귀포시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자연하천.
ㅡ『한국동서문학』(2020, 가을호)
곰팡이
창이 안 난 방이라고 오만원 싼 207호
그늘을 양분으로 먹고 사는 생명체는
식빵의 가장자리에서 푸르게 피어난다
상경하던 그 날도 푸르른 꿈이 피었지
시나브로 닳아버린 허리춤에 손을 얹고
생계를 잇대어가며 슬어버린 날을 센다
저 푸른 미물도 생명을 살린다는데
펼칠 날 손꼽으며 가녀리게 숨을 쉬는,
내 속에 곰삭고 있는
이 푸른
꿈 한 줄
ㅡ『정음시조』(2020, 2호)
시나위
이현정
첫 음을 감아올려
청을 맞춘 나팔꽃에
봉숭아 수줍어도
장구재비 한몫하고
자줏빛 패랭이 돌기
잘박으로 화답한다
백일홍 붉은 맨살로
혼미하게 젖는 사위
늘어져 다스리는
능소화 진양장단
무반주 제 몸빛으로
무아지경 아물리는
ㅡ『정음시조』(2019년, 창간호)
시작(詩作), 시작(始作)
이현정
희부연 첫 새벽
해산달 어미소
맏배를 보았다
긴 울음 몇 번 끝
태반을
핥으며 만난
또 하나의
가쁜 숨결
어둠 물린 돋을볕
함께 썰어 넣으며
여물통 넉넉하니
쇠죽 끓이던 손길 위
잘 크게,
혼잣말 미소
고요히
번지는 그때
ㅡ『시조시학』(2019, 봄호)
2018년 중앙신인문학상 수상작(시조 무문)
뿔, 뿔, 뿔
고요했던 순물질
비등점에
닿는 순간
최선의 방어이자
최후의 공격으로
뿔, 뿔, 뿔
들끓어 오르지
맹렬해진
심장의 서슬
차오르던 역한 기운
포화점을
넘는 찰나
한 모금 혼돈주로도
솟구치는 혀의 돌기
이맛전
짓이겨져도
치받아버리지
뿔
뿔
뿔
ㅡ중앙일보, 2018. 12. 21.
이현정 : 2018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201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