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자연의 대화
유동환
1. 절제와 조화를 꿈꾸는 건축, 유교건축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草廬三間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 김장생金長生
당연한 소리지만 한국의 건물을 ‘한옥韓屋’이라 부른다. 그런데 한국인이 살아가는 집은 더 이상 한옥이 아니다. 이 땅에 아파트라는 매우 ‘편리한’ 주거형태가 들어오자, 수천 년 동안 ‘살아온’한국인의 살림집은 우리 곁에서 떠났다. 남아 있는 대부분의 한옥들은 매일 매일을 ‘사는’ 집이 아니라 용인민속촌이나 하회마을에 가서 ‘보는’ 집이 되고 말았다. 이제 이 글에서는 전통적인 삶의 배경이었던 유교건축을 통해서 조상들이 추구했던 이상적 주거공간의 모습에 대해서 알아보자.
유교, 정확히는 성리학이 조선의 모든 사회문화 속에 뿌리 내리면서 건축의 조영에도 그대로 영향을 주었다. 건축은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담는 그릇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건축설계자의 정신을 규정하는 이념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유교건축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유교의 사회규범인 ‘예禮’에 바탕을 둔 건축형태와 구조라고 정의된다.
구체적인 건축 부문에서 보면, 유교문화는 크게는 도성都城 건축에서 시작하여 작게는 재실齋室이나 가묘家廟건축을 거쳐 살림집인 班家의 건설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의 많은 건축에 매우 일관된 모범을 제시하고 백성들이 따르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개념이 바로 초가삼간草家三間이다. 매우 가난한 집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지만, 이는 유교건축의 최소 주거단위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건축을 구성하는 3개의 공간을 의미 단위로 나눈다. 그 하나는 집안 내부공간이고, 하나는 울담으로 둘러싸여 있는 외부공간이며, 마지막 하나는 울담 밖의 자연공간이다. 이 3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유교건축의 이상이다.
그러므로 유교건축은 건축 자체의 완결성보다는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다. 현실의 예법을 중시하면서도 자연과의 조화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건물을 짓기 위해 자연의 흐름을 끊거나 잘라내지 않는다. 오히려 건물의 존재가 자연의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거나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대우주인 하늘과 땅이 소우주인 사람의 공간과 조화롭게 만나는 것이야말로 유교건축의 지향점이다.
거칠게 보면 불교건축은 상징성과 추상성을 많이 내포하며 장엄함을 추구한다. 각 종파가 이상으로 여기는 세계를 건축으로 구현해 내려 하기 때문이다. 출세간의 종료로서 불교는 현세 자체보다는 내세에, 현실성 자체보다는 상징성에 강한 의미를 둔다. 그래서 건물하나 공간 하나가 모두 외형적으로도 그런 상징성을 드러낸다.
그에 비해 유교 건축은 대체로 검소하고 담백하다. 유교는 현세 중심, 즉 인간이 발 딛고 서있는 삶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유교의 이상 경지인 중용이란 바로 ‘평범한 일상성’이다. 건물을 지나치게 내세우거나 꾸미지도 않고 너무 구차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정연한 구조 속에서 그 건물의 목적을 수행하고 주변 환경과 조화를 잃지 않는 것이 유교건축이다.
2. 유교 이상을 실현하는 관영건축 - 궁궐과 관아
화산 남쪽 한강수 머리에
범 걸터앉고 용 서린 여기, 하늘이 지은 구역
성스런 군주께서 일어난 신성한 도읍을 정하시매
점들이 다 들어맞아 사람의 계획과 딱 맞았도다
- 윤회尹淮
조선의 건국과 함께 일어난 최대의 건축사업이 바로 한양 천도이다. 자세히 말하면 수도의 경계와 방어를 위한 성곽, 나라의 뿌리를 상징하는 종묘사직, 통치의 구심점인 궁궐의 건설이다. 근래에 와서 무학대사로 대표되는 풍수지리 관념만으로 수도와 궁궐의 터잡기를 해석해 왔던 태도들에 대한 수정이 가해지고 있다. 북한산을 주산으로 하고 남산을 안산으로 하며 청계천의 물길을 내수구로 한다는 전형적인 풍수지리적 터잡기가 한양 천도의 민간 신앙적 설득력의 근거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조선 건국의 주역인 성리학자들은 유교의 이상에 다라 나라의 정신적 지주인 종묘사직을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배치하고, 성균관에 문묘를 두어 유교국가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특히 궁궐의 설계와 궁궐 건물 이름은 조선 건국의 핵심주역인 정도전이 맡았다. 그런 만큼 궁궐은 왕이 스스로를 수양하며 백성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을 구현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를 모범으로 삼은 조선의 관아官衙건축은 이러한 이상을 전 조선으로 확대시킨 공간형태이다.
궁궐의 배치도 유교건축의 지침인 『주례』「고공기」에 보이는 삼문三門과 삼조三朝, 즉 세 개의 문과 그 사이의 세 개의 구역이라는 제도를 따랐다. 고문庫門 ․ 치문雉門 ․ 노문路門의 삼문은 경복궁의 광화문 ․ 홍례문 ․ 향오문이 각각 해당한다. 치조治朝 ․ 연조燕朝 ․ 외조外朝의 삼조는 경복궁의 근정전과 사정전 등이 치조이고, 강녕전과 교태전 등이 연조이며, 광화문 내 각사가 외조이다. 여기서 치조는 왕의 등극 의식을 거행할 때나 사신을 접견할 때, 그리고 조회를 볼 때 사용된다. 연조는 왕의 정침과 왕비의 정침이 있는 곳이다. 연조 건물은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인데 왕이 용이기 때문에 없앤 것이라고 한다. 외조의 중심건물인 빈청은 당상관들이 모여 정사를 의논하는 곳이다. 그밖에 승정원 ․ 홍문관 ․ 예문관 등의 관아들이 있다.
유교 관념에서는 왕과 신하가 만나서 정사를 펼치는 치조가 궁궐의 중심이다. 그리고 그 뒤쪽에 왕의 생활공간인 연조가 있고, 앞쪽에 입궐한 신하들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대부분의 궁궐이 삼문삼조의 원칙에 따라 건설되었지만, 나라의 정궁인 경복궁만큼 이 원칙에 충실한 궁궐은 드물다.
유교의 통치이념을 전국으로 전파하는 중앙과 지방의 행정기관을 관아라 한다. 관아는 조선의 통치체계와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이다. 행정기능을 충족하기 위해 매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고, 이를 중심으로 각 고을은 매우 정교한 공간분할이 이루어 졌다.
서울에 있는 관아는 궁궐 안 외조에 속한 관아들 이외에는 광화문 남쪽 대로변에 모여 있었다. 동편에는 의정부 ․ 이조 ․ 한성부 ․ 호조가 있었고, 서편에는 예조 ․ 중추부 ․ 사헌부 ․ 병조 ․ 형조 ․ 공조 등이 있다. 각 관아에는 당상관부터 하급 관리까지 집무를 볼 수 있는 건물이 있었고 휴식 공간도 마련되었다.
지방관아로는 8도에 설치된 감영과 주부군현에 설치된 동헌東軒과 객사客舍가 대표적인 시설이다. 감영은 관찰사들이 머물며 업무를 보는 곳으로, 정청인 선화당宣化堂이 있고, 그밖에 관풍각과 포도청 등이 있다. 동헌은 감영의 하위 군현의 관아로 감영에 비해 규모가 다소 작을 뿐이지 역할에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러한 지방관아에는 그 규모에 따라 조선시대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반영된 10여 가지 관청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중요 건물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객사는 고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왕을 상징하는 전궐패를 모신다. 지방 수령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정성껏 이 위패들과 외국의 사신이 머무는 여관 구실도 아울러 했다. 재미있는 점은 객사가 일종의 거리를 잴 때 기준점이 되는 도로원표 역할을 하여 한식경이니 마장(약 400m)이니 하는 재래식 거리 단위도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다음으로 반드시 있는 곳이 수령의 가족들이 생활하는 내아內衙이다. 당시 지방 관리들은 새로운 임지로 옮겨갈 때 가족과 가계를 꾸려 이사를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향청鄕廳은 처음에는 지방 양반들의 자발적인 대의기구인 유향소留鄕所를 위해 만든 건물이다. 덕행이 뛰어난 양반들이 해당 관아의 수령을 규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관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하여 수령과 결탁하지 않게 배려했다. 향청에서는 향음주례와 향사례를 주관했으며 향약도 이곳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이들을 통치에 끌어들여 세금을 거두는 기구로 변화시켰고, 이 때문에 양반들이 이를 통해 지역사회의 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밖에 사신의 접대가 빈번한 객사 주변에 배치된 교방敎坊은 기생방이고, 관노청官奴廳은 노비 숙소이며, 민원 접수처인 헐소歇所와 감옥인 형옥刑獄은 양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기관이다. 게다가 민속신앙의 대상인 성황당 역시 지방 토호를 견제하기 위해서 수령의 통제 속에 두었던 당당한 관아 건축의 일부분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궁궐과 관아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유교국가의 심장부인 경복궁이 일제 총독부에 자리를 내주며 참담하게 파괴되어 그 복원을 놓고 지금까지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방 관아의 경우는 더욱 비참하다. 500년이란 긴 역사 동안 견고한 통치체계를 뒷받침하며 10여 개의 다양한 기능을 하던 관아 가운데 온전히 유지된 곳은 단 한군데도 없다. 일제는 관아 건물 가운데 한 채나 두 채만 남겨서 일본 헌병대나 주재소 건물로 함부로 개축하고 훼손해 차라리 터만 남는 것보다 못한 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3. 제사와 교육을 아우르는 교육건축 - 향교와 서원
수도로부터 지방 고을마다 학교 없는 곳이 없으니 서원이 또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마는 ... 선비의 학문이 오로지 서원에서 세를 얻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현명한 인재를 얻는 것도 또한 반드시 이 서원에서 구하니 저 국학이나 향교보다도 뛰어난 점입니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은 위대한 유학자를 제사지내는 ‘尊賢’과 선비를 길러내는 ‘養士’의 두 기능을 건축 공간에 철저하게 반영하였다. 대표적인 교육기관인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 ․ 서원은 모두 이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국립대학인 성균관이 있었지만 실제로 유교이념을 전국에 전파한 교육기관은 향교와 서원이다. 지방에 학교를 세운 것은 과거제도가 처음 시행된 고려시대부터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지방학교는 관학인 향교와 사학으로 크게 나뉜다. 이들 향교와 서원은 설립주체나 배향 인물, 설립시기 등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형태나 기능 명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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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이념을 모든 백성에게 보급시키기 위해 ‘1邑 1校’의 원칙에 따라 모든 군현에 향교를 건립하였다. 그러므로 군현이 없어지면 향교도 폐교되었고, 새로운 군현이 생기면 더불어 향교도 세워졌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향교는 유교건축 가운데 가장 많은 231개나 된다. 1905년 가장 늦게 세워진 충남 보령의 오천향교는 조선 관영건축의 마지막 사례라 할 수 있다.
지방 수령의 일곱 가지 필수직무( 事) 가운데 하나인 ‘학교 부흥’興學校)의 임무는 바로 향교의 진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문헌자료와 고지도를 살펴보면 대부분 관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향교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립학교인 서원이 수령의 간섭을 피해 한적하고 경치가 수려한 곳에 위치하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향교는 공간의 상하 위계성을 지닌 종적 ․ 횡적인 축선에 질서와 균형을 강조하는 건축 형태를 보여준다. 그래서 제사공간과 교육공간의 엄격한 구분과 위계질서가 반영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건축의 특징은 비대칭성의 균형과 조화에 있다. 이에 반해 향교건축은 기능에 따른 기준 축선의 대칭성이 공간 질서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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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죽음과 삶을 이어지는 침묵의 기념비 - 종묘와 재실
제사란 못다 한 봉양을 좇아하고 못다 한 효도를 길이 이어가는 것이다. 효도란 기르는 것이다. 도리를 따르며 인륜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야말로 기르는 것이다.
--『禮記』「祭統」
관혼상제 가운데 가장 까다롭고 종류가 많은 것이 바로 ‘제례’이다. 『주자가례』에 등장하는 제사의 종류만 해도 시조제 ․ 선조제 ․ 기일제 ․ 묘제 등 총 8종류나 된다. 웬만한 종가라면 제사로 한 해를 시작하고 제사로 한 해가 마감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제사 자체가 사대부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제례를 치르려면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건축공간인 “廟‘, 다시 말해 祠堂이 매우 중요하였다.
제사건물인 ‘묘’가운데 대표는 역시 종묘와 사직으로 大祀라 한다. 종묘는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고, 사직은 토지와 곡식의 신을 제사하는 곳이다. 다음으로 유교국가의 정신적 지주인 공자와 4성 등의 위패를 모신 문묘를 中祀라 한다. 대성전이라 부르는 문묘는 성균관과 향교에 똑같이 세워졌다. 그리고 서원의 사당에는 한국 유학자의 위패를 모신다. 또한 큰 공적을 남긴 지역이나 가문의 인물을 기념하기 위한 祠宇가 세워지고, 한 문중의 조상을 모신 齋室이 있었으며, 양반가마다 家廟를 세웠다. 이러한 시설들을 小祀라 부른다.
공자는 제사건물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지혜롭지 못하다고 보았다. 고인을 기리는 신성한 장소인 유교의 제사건물들은 대체로 엄숙하면서도 소박하게 만든다. 유교에서 제사란 주인의 그리움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 기복의 의미는 없다. 그러므로 제사 건물 역시 최대한 단순하고 정갈하게 가꾸는 것은 주인의 그리움을 소중히 간직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또한 귀신을 공경하지만 삶을 귀신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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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종묘건축에는 의례공간의 위계질서가 철저하게 반영되어 있다. 정전과 영녕전 건물의 기단과 처마와 지붕은 위계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며 서로 호응하고 있다. 정전의 신문 처마와 지붕에서 최종적으로 (종묘의)정전 신실의 지붕으로 점차 높이가 올라가면서 천상으로 이어지는 공간을 암시하고 있다. 기단 역시 정전 뜰로부터 조금씩 높아지고 계단에는 무지개처럼 휘어 오른 소맷들을 장식하여 구름 위에 공간으로 상승하고 있음을 상징하였다.
이러한 종묘는 제례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화려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종묘의 모든 건축 처리는 매우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다. 최소한의 공간만 남겼을 뿐만 아니라 단청도 극도로 절제되었다. 이러한 구성 ․ 구조 ․ 장식 ․ 색채의 간결함과 단순함을 종묘건축은 상징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그리하여 옆으로 곧게 펼쳐지는 듯한 廟廷(공신 배향) 월대(섬돌)는 올바름을, 무한하게 반복되는 듯한 기둥의 배열은 만 년토록 끊이지 않을 왕위의 이어짐을, 증력을 거부하여 수평으로 끝까지 펼쳐지는 듯한 지붕은 무한함을 연상케 한다.
종묘건축의 단순하고 절제된 구성은 그 자체로 완결되고 기품 있는 풍경을 보여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 깊은 곳의 상징적인 의미까지 읽게 한다. 그것은 마치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여 그 속에 죽은 자와 산 자와 한 데 어울려 영적인 교류를 가능케 하는 듯하다. 이 모두는
조선왕조가 개국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펼친 성리학적 이념과 질서를 종묘건축에 투영시키고 노력한 결과다.
수도에 나라와 왕족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종묘가 있다면, 지방에는 어떤 제사건물이 있을까? 보통 서원의 사당이나 班家의 가묘를 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 사대부 가문과 씨족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제사시설은 재실이다. 지역에 따라 齋舍 ․ 齋宮 ․ 齋閣이라 불리는 재실건축은 조상의 묘소에 묘제를 지내기 위해서 널리 세워졌다.
재실은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17세기 이후 문중 단위의 종가를 중심으로 건설된다. 다시 말해 유렴이 향촌의 사회 ․ 경제적 지도층으로 자리 잡으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씨족인 ‘土姓’을 형성한다. 중요한 사회세력인 토성 문중은 자연스럽게 지역 씨족공동체의 입향조 뿐 아니라 중시조, 또는 파시조까지 추모하였다. 그리하여 재사건축은 거대문중을 바탕으로 지역과 혈연의 공동체의식과 상호결속력을 다지는 매우 큰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중략---(재궁>재사>재실)
... 재사의 건축유형은 다음과 같은 구성상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첫째, 재사는 묘소 근처에 세워진다는 입지 조건을 갖고 있다. 당연한 조건이지만 음택인 묘소와 양택인 건물에 적용하는 풍수론은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느 정도 묘소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지만, 누마루의 방향이 묘소 쪽을 지시하도록 맞추어 상징적인 연관성을 강조하였다.
둘째, 묘제의 절차와 행위를 수용할 수 있는 기능적 조건이다. 제수의 상차림과 음복례 등 의례를 위해 대청과 누마루가 동시에 필요하며, 제례 동선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두 개의 대문이 설치돼야 하는 기능적 원칙이 세워지게 된다. 게다가 일시에 대규모의 이용인원을 위해 어느 정도의 규모를 설정해야 하는지, 또 관리영역과 제사영역의 관계를 어떻게 구성 할 것인지에 의해 건물의 규모와 형식이 결정된다.
셋째, 가문 내의 위계질서를 상징할 수 있도록 내부공간의 관계를 만들고,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가문의 결속력을 과시할 수 있는 형태를 가져야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재사들이 밖으로는 폐쇄적이며 강렬한 형태를 갖는 반면, 내부로는 개방적인 구성을 취하게 된다. 특히 묘제는 철저하게 종손과 원로의 지휘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안마당을 중심으로 모든 방들이 노출되어 관계를 맺는다. 또한 방들의 배열과 공간 구성 역시 가문내 구성원의 위계에 따라 엄격하게 질서지워진다.
이러한 요건을 갖춘 형태는 한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먼저 한 일(一)자의 강당형 재실은 서원 ․ 향교나 서당 등의 형태를 빌려서 만든 형식이다. 소규모 재실에 많이 적용되고 가장 일반적으로 채택된 형식이다. 그 다음 요사채 활용형 재실은 기존의 불교 사찰이나 암자를 개조하던가, 사찰 목재를 다시 사용하여 만든 형식이다. 비교적 대규모의 재실들인데 안동의 가창재사와 금계재사가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안동지방의 口자형의 구조를 따른 민가형 재실이 있다. 민가의 기능과 재실의 기능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누마루가 전면에 부가되는 등 다양한 변화가 있다. 안동의 남흥재사와 서지재사가 그러한 유형이다.
옛 속담에 ‘신주 모시듯’이라는 말이 있다. 위로는 나라로부터 아래로는 각 가문에 이르기까지 소중한 신주를 모시는 제사공간은 유교건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주가 들어가는 대중소 묘제의 설치와 세부에 관해서는 법령이 매우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이렇게 재사시설을 중시한 이유는 바로 유교사회의 ‘정통성’ 때문이다. 왕조의 정통성, 문중의 정통성, 서원의 정통성, 향교의 정통성, 반가의 정통성의 핵심에 재사 건축의 자리가 놓이게 된다.
<출처>유교건축 읽기-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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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면서 <문화답사기> 책이 잘 팔린적이 있었지요. 딱히 틀린말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딱 맞는 말'이라고 인정하긴 약간 주저됩니다. ... 아무튼 - 아래에 <한국의 미>와 관련된 글들을 올렸습니다. 아마도(짐작) 우리의 아름다움을 설명하기에 적당한 표현들이 있지 않나 해서요. ... 모르고 우리문화를 보는 것과 알고 보는것에'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한 듯 합니다. 정독 아니면, 대충이라도 읽어보시길 청합니다. ^^
네^^*. 꼭 읽어보렵니다.
유익한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