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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2019년8월12일 10:40-16:00 약14키로 서울역-남대문-남산-장충동길-동대문-혜화역-종로5가역-광장시장
참가자:김진석,황인남,정한보,산취객
9호 태풍의 영향으로 많은 비가 내린다고 해서 산행을 취소 하고 번개로 한양순성길 트래킹을 나선다.비가 오락가락하지만 오랜만에 걷는 길은 너무 좋네요.
오늘의 기록
오늘의 지도
남대문:숭례문은 조선시대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일명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하는데, 서울 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고, 문화재청 숭례문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쯤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누각의 90%, 1층 누각의 10% 정도가 소실되었다. 이후 2010년 2월에 숭례문복구공사를 시작한 이래 2013년에 완공되어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남대문을 배경으로 한장
남산:산의 높이는 262m이며, 목멱산·인경산·마뫼로도 불렸다.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북쪽의 북악산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조선 태조 때 능선을 따라 도성을 축성했으나 현재는 성곽의 일부만 남아 있다. 남산타워라고도 하는 N서울타워는 산정에 솟아 있는 높이 236.7m의 송신탑으로 사방으로 펼쳐진 서울의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휴식·관광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총면적 2,971㎢의 남산 일대가 시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90년부터 서울특별시의 ‘남산 제모습찾기 종합계획’이 추진되면서 남산의 옛 모습 복원을 통해 남산의 역사적 위상과 자연경관을 회복하는 동시에 시민 휴식 공간으로써의 기능을 하고 있다.
남산의 명소는 N서울타워·팔각정·장충단공원·남산케이블카·야생화원 등 다양하다.
남산순성길을 배경으로 안단테
단세포는 좋아하는 노란우산을 받쳐들고 한장
이시영선생동상:1885년(고종 22)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형조좌랑·홍문관교리·승정원부승지·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관직을 물러난 뒤로는 중형 이회영(李會榮)·이상설(李相卨) 등과 근대학문탐구에 몰두하였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계기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1906년 재차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었고, 근대학교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 뒤 1907년 중추원칙임의관, 1908년 한성재판소장·법부 민사국장·고등법원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이회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피탈 후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의거하여 6형제의 가재(家財)를 재원으로 삼아, 1910년말 서간도(西間島)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로 가족을 거느리고 망명하였다.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설립을 주도하였다. 경학사 초대사장에는 이상룡(李相龍)이,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었다. 1912년 통화현 합니하(通化縣 哈泥河)에 토지를 매입하여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확대 발전시켰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는 유하현 고산자로 이전하였고, 합니하의 교사는 분교역할을 하는 등 1910년대 서간도지역 독립군양성의 총본산이 되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 때까지 재만항일독립군의 핵심 간부로 양성된 독립군들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1920년대 국외독립전쟁의 골간으로 성장하였다.
1913년 9월 북경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정부와 한·중연합전선의 결성을 도모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사망으로 중단되기도 하였다. 1919년 1월 고종황제의 죽음을 계기로 북경에서 이동녕·조성환(曺成煥)·이광(李光)·이회영 등과 국내 3·1운동에 호응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상해(上海)로부터 북경에 온 여운형(呂運亨)·현순(玄楯)과 논의하고, 이회영·이동녕·이광 등과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초대법무총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재무총장을 거쳐 1926년 무렵까지 임시정부국무위원으로 재임하였다.
그 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 감찰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31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거 때에는 미리 항저우[抗州]로 가서 임시정부요인들의 피신처를 마련하였다.
1933년 중엽 자싱[嘉興]에서 김구(金九)·이동녕·송병조(宋秉祚)·차리석(車利錫)·조완구(趙琬九)·김붕준(金朋濬) 등과 함께 임시정부 활동을 재건하고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1934년 『감시만어(感時漫語)』를 저술하여 한국사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1935년 10월 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지원정당인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여 감사를 맡았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한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재무부장·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며, 광복 직전 임정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과 함께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환국한 이래 1946년 봄 성균관총재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종교(大倧敎) 활동에 진력하여 사교교질(司敎敎秩)·원로원장·사교(司敎)·도형(道兄) 등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또한,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고, 이후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2회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일시 침체국면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
한편, 1947년 9월 공직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전횡에 반대하여 1951년 5월 9일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정부를 떠났다.
이어 1952년 8월 5일 시행된 제2대 대통령선거 때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 뒤 국민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호랑이 앞에서 안단테
김구선생동상: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웠다.
14세에 『통감』·『사략』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에 정진하였고,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았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으나,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李奉昌)의거와 4·29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안중근의사: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한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순흥, 자는 응칠, 세례명은 토마스로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1906년부터 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9년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해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가 회담을 마친 뒤 환영군중 쪽으로 갈 때 권총 3발을 쏘아 사살했고, '대한만세'를 외친 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사형을 언도받아 1910년 여순 감옥(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남산타워:서울 어디서나 보이는 N서울타워는 서울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산 정상에 하늘을 뚫을 기세로 선 N서울타워는 TV와 라디오 방송을 수도권에 송출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세운 종합 전파탑이다. 1969년 12월 착공해 1975년 7월에 완공했다. 1980년 일반에게 공개되면서 명실공히 서울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2000년 YTN이 인수한 뒤 리모델링을 거쳐 2005년, 남산타워라 불린 지 30년 만에 N서울타워로 변신했다. '남산(Namsan)'과 '새롭다(New)'를 상징하는 알파벳 'N'을 합성한 이름이다.
남산은 해발 262m, N서울타워 높이는 236.7m다. N서울타워 높이가 남산의 높이와 엇비슷하다. N서울타워의 전망대 높이를 고려하면 적어도 370m 높이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는 셈이다.
남산길
인왕산 백악산 구름에 쌓여있고 앞에는 한국은행 사거리
창경궁 방향 앞에 리라초등학교
안산 인왕산방향
사랑의 열쇄
봉수대:남산은 봉수대가 다섯 개 있고 봉수대 아래로는 민가들이 부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양부는 행정 조직상 5부(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52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동부 12방, 남부 11방, 서부 11방, 북부 10방, 중부 8방이다. 남산 봉수대는 남부 11방에 속하며 각각의 지방으로 뻗은 산줄기의 뿌리를 이루는 산마루에 자리 잡았다.
남산 팔각정에서 안단테 단세포 휴식
남산 팔각정:1959년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우남정을 지었다가 1960년 4.19의거 때 철폐되었다가 1968년 11월 11일 다시 건립되었다. 이팔각정은 남산정상에 세워져 있어 서울시가가 눈아래 펼쳐진다
남산 N타워
말나리에 나비가 있네요
용산쪽
남산타워를 뒤돌아보고
용산미군기지쪽
관악산쪽은 구름에 쌓여있네요
남산 순성길
비에 젖은 노송
수표교: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길이 27.5m, 너비 7.5m, 높이 4m.
이 다리는 1406년(태종 6) 인공으로 만든 개천(청계천) 위에 가설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청계천에 수표
이 다리의 원래 명칭은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 경도 개천조에 "수표교는 장통교 동쪽에 있는데 수구에 자[尺]과 촌(寸)의 눈금이 새겨진 석주가 있어 수량의 가감을 알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다리 옆에 수표가 세워진 다음부터 수표교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다리의 기둥은 2단으로 쌓은 4각형의 큰 석재로 되어 있는데 아래의 것은 다듬지 않은 것이고, 그 위의 것은 모를 죽여 다듬은 것이다. 기둥 위에 긴 휘대를 걸치고 천판석을 깔아 다리의 바닥을 만들었으며, 천판석 사이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지주석을 세웠다. 지주석 중간에는 6각형으로 깎아 난간석을 끼웠고, 난간석 중앙에는 받침돌을 놓아 견고하게 받치도록 했다. 1760년(영조 36) 수리할 때 다시 다리 옆에 눈금을 새긴 수표를 세우는 한편, 다리의 교각에 '경진지평'이라는 수준을 새겼다.
원래 이 다리는 청계천 위에 놓여 있었는데,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 공원 입구로 옮겨졌다. 물 속에 있던 수표석(보물 제838호)도 함께 장충단 공원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장충족발집에서 점심식사에 한잔
경동교회:1945년 해방 이후 조선신학교 교장 김재준이 미군정청과 교섭하여 인수한 일본 천리교(天理敎) 건물(장충동 1가 26-1)에서 선린형제단 단원과 이북 출신 학생·청년 30여 명이 첫 예배를 드린 것이 경동교회의 시작이다. 당시 강원용(姜元龍)·조향록(趙香祿) 등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김재준 목사가 1946년부터 주일설교를 담당하였으며, 교회명칭은 ‘성(聖)야고보 전도교회’였다.
1947년에는 경리노회의 요청에 따라 ‘경동교회’로 개칭했으며, 교회 신인회(新人會)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국기독학생연합회(KSCF)가 결성되었다. 경동교회는 당회와 제직회 대신 각종 위원회가 치리권(治理權)을 행사했으나 1948년 당회와 제직회를 조직하고 노회에 가입하였다. 1950년 6·25전쟁 기간에는 피난지인 부산 광복동 신생회(新生會) 사무실에서 예배를 계속했고 청년들은 구호 및 봉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3년 4월 장로회 제38차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가 파면되고 조선신학교 교장에서도 면직되자 동년 6월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분립되었다. 1958년 예배당이 완공되었으며 김재준 목사가 은퇴하고 강원용이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1959년 강원용은 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를 결성했고, 1960년 4·19의거 때는 이 교회의 학생·청년들이 많이 참여했으며, 1995년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남북인간띠잇기대회’에도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였다.
1974년에는 추석에 맞추어 강강수월래 합창과 탈춤이 포함된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렸고, 1995년 전통식 디자인의 예배복을 입고 첫 예배를 드렸으며, 1996년 기존 찬송가와 전통 찬송가를 묶은 ‘경동찬송가’를 출판하는 등 한국교회의 토착화운동을 선도하였다.
또 1970년대 이후 김재준과 강원용을 비롯한 많은 청년·학생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가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1976년 청계천 노동자를 위한 야학을 설립하했으며, 1990년 경동도서실을 개관하고, 1993년 어린이집을 개원하는 등 지역사회를 위해서도 봉사하였다. 강원용에 이어 김호식(1986~1991), 이동준(1992~1999), 박종화(1999~) 등이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서울디자인 프라자
2편에 계속
첫댓글 또 다시 걷고 싶은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