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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초 이상화 기념사업회의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상하이, 항저우, 난징)에 동행했던 행적을 ‘기행문’으로 남겨보았습니다. 방문지마다 생각이 붙들려 글이 좀 깁니다. 간자체의 중국어가 카페에 올리자 번자체로 바뀌어 버린 점 미리 알립니다.(이상화기념사업회에 낸 원고와 같습니다)
난징南京의 바람 / 하재열
길 떠나면 잠 못 이루는 것도 병이려나. 나흘 여정의 마지막 밤을 더 뒤척인다. 10시가 넘은 밤 난징南京의 新城商務酒店, 붉은빛을 흘리는 호텔 카운트 앞에 줄을 섰다. 한 사람씩 얼굴을 촬영하며 미리 거두어간 여권의 사진과 본인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라 했다. 일행의 얼굴빛에 피로함이 더 역력했다. 잠자러 들어가며 사진 찍히는 일도 처음이지만 검열 당했다는 기분에 슬며시 부아가 치민다.
이 나라 통치자 시진핑의 상하이 방문 보안을 위해 인근 도시까지 내려진 경계령이라고 했다. 대구에서 서울만큼이나 떨어진 곳인데도 그랬다. 중국답다며 웃어넘기면서도 짓눌러 오는 대륙의 얼굴이 새삼 버거워진다. 이상화기념사업회의 상하이上海, 항저우抗州, 난징南京의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의 걸음을 훑어보며 한스러움, 분노와 놀라움으로 뒤엉킨 심사를 추스르며 비몽사몽 한다.
상하이엔 90년대 초 공무로 발을 디뎌본 후 두 번째 걸음이다. 중간에 한번 스쳐 지나친 적은 있지만 생판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시가지의 때깔도 사람도 달라 보였다. 부티를 풍겼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인 홍커우虹口공원 들어가는 길부터 기억과는 낯설었다. 전에 없던 기념관에서 거사 때의 흑백 영상을 보며 옷깃을 여몄다. 충남 예산의 기념관을 찾았을 때의 일도 떠올리며 지금 이 시대에 丈夫出家生不還(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나라의 어려움에 이처럼 나설 젊은이가 있을까 싶어진다. 25살의 나이였다. 나오는 길목에 한 노인이 막대 끝에 둥글게 붙인 천 뭉치에 물을 적셔 땅바닥에 글을 쓰고 있었다. “윤봉길 의사 영원히 기림, 우리의 독도! 주권. 안녕히 가세요. 다음 또 오세요. KOREA, 박수 만세.” 쓰는 얼굴이 진지했다. 입 벌이 일인가 싶어 주머니를 만지다가 그만두었다. 한 푼 돈으로 그의 정성을 사려는 얕은 짓 같아서였다. 일본의 상하이 파견군 대장을 폭살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한국에서는 가물거리는 역사가 되었지만 여기는 오늘이었다. 그 중국 노인이 이방인이 된 우리에게 그걸 알려주고 있었다.
붉은 벽돌조의 건물 임시정부청사, 입구 현관 왼쪽에 표지판이 걸렸다. 大韓民國臨時政府舊址라 중간에 적혔고, 윗줄에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뜻인 黃浦區文物保護單位, 아래엔 馬當路 306弄4號란 주소와 끝줄엔 1990년 6월5일 공표 날자와 설립처인 黃浦區文化局立이란 글씨가 힘을 부리듯 했다. 현대사에 부대낀 우리의 흔들림이 배였다. 중국과의 길고 긴 줄다리기 오천 년 역사의 한 자락도 너울댔다. 그래도 그때 일제에 맞선 같은 뜻이었다는 연유로 선각의 숨 쉴 터를 내어준 인연에 고마움을 느낀다. 김구 선생의 흉상 앞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달리 말이 무에 필요할까. 셈을 달리하며 좌우 불문 국내 정객이 고개 숙여 내 편이라고 하는 곳이니 저세상 선생의 심사가 어떨까 싶다. 청사를 나온 가로엔 플라타너스 낙엽이 굴렀다.
황푸강黃浦江의 밤은 찬란했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양안의 야경에 압도되었다. 강 맞은편은 허름한 얕은 건물과 갈대밭 같은 벌판 풍광이었다는 기억인데, 그 푸둥浦東은 듣던 대로 별천지였다. 관광의 명소로 이름 알렸던 東方明珠塔(468m)도 뒤이어 건설된 세계금융센터, 상하이 타워(632m)에 그 위용의 자리를 내어주었다고 한다. 밤하늘에 솟아오른 스카이라인에서 벌어지는 조명 쇼가 일대 장관이었다. 강 양안의 모든 건물이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듯 하나의 움직임으로 빛의 점멸이 어우러진다니 그 경이로움에 놀라다 못해 질린다. 배를 승선한 푸시浦西쪽 열강들의 조차지였던 고색창연했던 옛 건물들이 어디였는지 어림이 안 되었고, 상하이의 얼굴은 그때의 조차지 주인의 돈을 빨아드려 오동통 살이 쪄 있었다. 121층, 비틀며 하늘로 치솟는 용을 형상화한 상하이 탑이 그 상징이었다. 시진핑이 참석하는 국제회의를 앞둔 때라 평소에 안 하던 조명을 더 화려하게 연출했다고 하니 덤으로 좋은 구경 한번 크게 한 셈이다. 부다페스트의 다뉴브 야경보다 좋았다는 생각을 하며 용이 되려는 중국의 실체를 체감한다.
몇 묘비가 눈을 끌었다. 항일 투쟁에 함께 했던 외국인을 기리는 만국공묘萬國共墓에서다. 손문孫文의 부인이자 중국의 국모로 일컫는 ‘송경령宋慶齡 능원’으로 불리는 넓고 웅장한 묘역의 한 쪽이다. 盧伯麟, 朴殷植, 申圭植, 金仁全, 安泰國, 우리의 독립 운동가다. 잔디밭에 묻은 조그만 직사각형 대리석 위에 새겨진 이름이다. 밑줄에 한글 이름을 병기해 놓았고, 그 아래에 1993年 8月 5日 移葬大韓民國이라 새겨져 있다. 국내로 봉환한 유해의 그 자리를 보존해놓고 있었다. 이름만 건성으로 들어 흘리고는 이분들의 독립운동 자취도 모르니 송구스럽다. 급히 둘러보는데 아무래도 한국인 같은 묘비명을 만난다. YAN PUNG HAN, CHAO SANG SUP, 영어로 이름만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 한국인으로 확인되었거나 추정되는 14기의 묘가 있다고 한다. 넓은 묘역의 한 모서리에서 누구인지도 밝혀지지 않은 채 한국 관광객의 발걸음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서럽고 아린 평생을 품고 누웠다.
嘉興이라는 큼지막한 붉은 초서체의 간판이 눈을 사로잡았다. 3시간 거리의 항저우로 가는 고속도로의 중간 휴게소 이름이다. 한자의 글체가 미려하다. 상해에서도 시가지 곳곳에서 체제를 홍보하는 선전물을 보았지만 여기서도 만난다. 마오쩌둥毛澤東, 저우은라이周恩來, 등샤오핑鄧小平의 업적을 선전하는 홍보판이 주차 광장 길목에 세워졌다. 사람이 많이 쳐다볼 목 좋은 곳이다. 사회주의의 일사불란함에 덮인 이 거대한 땅의 통치엔 언필칭 자유와 민주가 들어앉을 자리가 영 없을 것 같고, 어쩌면 황제의 얼굴을 내세우는 게 맞을 성도 싶다. 사람들의 표정엔 체제에 익은 무덤덤함이 바위 같았다.
서호西湖의 유람선을 탔다. 둘레가 15킬로나 되는 반 자연, 반 인공의 장대한 호수, 중국의 10대 명승지다. 때마침 일몰의 시각이다. 산 너머로 기우는 석양의 붉은 빛이 수면에 잦아드는 경이로운 풍광, 기막힌 시간을 잡은 행운이었다. 이곳에서 뱃놀이하며 서호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던 시인 묵객들이 남긴 시구가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 터 잡고 한 시절 살았던 소동파의 시(飮湖上一初晴後雨) 한 수를 옮겨본다.
水光瀲灩晴方好
물빛이 빛나고 맑으니 마침 좋구나.
山色涳濛雨亦奇
산색이 비 오는 모습과 어우러져 또한 기이하네
慾把西湖比西子
서호를 서시에 비유해 보고 싶은데
淡粧濃抹總相宜
옅게도 짙게도 때 없이 다 아름답구나
항저우는 옛 남송의 수도였고 지금은 저장성浙江省의 성도다. 항저우임시정부가 있었던 건물의 외관만 차창으로 바라보기만 해 무척 아쉬웠다. 저녁 宋城景區의 거대한 공연장에 들어섰다. 세계 3대 쇼라는 ‘宋城歌舞 쇼’, 공연의 규모에 압도당한다. 남송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었는데 그 한 토막에 난데없이 등장한 아리랑 가락과 부채춤에 뜨악했다. 셈 밝았다던 송나라 상인들의 후예, 떼돈으로 몰리는 한국인 관광객을 잡으려는 그들의 장삿속이라는 걸 이내 알아차렸지만 좀 어리둥절했다. 하나의 테마파크로 놀이시설, 상가가 조성된 위락단지였다. 공연이 끝나자 곧장 경내를 소등하는 바람에 빠져나오는 길이 바빴다. 시내를 벗어난 외곽지인 云鯉悅酒店 호텔에 밤늦게 들어와 누웠다. 무사들의 거대한 칼싸움의 무용담에 끼인 아리랑 가락이 가물가물 귓전을 맴돈다.
난징으로 출발했다. 3시간 30분의 거리인데도 가이드의 입은 금방이라고 한다. 땅이 넓다 보니 시간 개념도 다르다. 밤새 비가 내린 모양으로 도로가 젖었다. 산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평지다. 곳곳에 늪지와 작은 샛강이 흐르는데 물이 탁하다. 물의 흐름이 느린 탓이라 한다. 호텔 수돗물을 먹지 말라는 말의 뜻이 와닿고 한 병씩 쥐여주던 물병이 고마워진다. 그 금방이 지루해질 무렵 오른쪽 차창으로 타이후太湖 라는 바다 같은 호수를 한참이나 스쳐 지난다. 거대한 탁류였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에 들어섰다.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능가한다는 비극의 현장이다. 외부 입구에 설치된 동상들이 그때의 참상을 몸짓 웅변으로 풀어내고 있다. 부러지고 잘리는 고통스러움에 몸을 비트는 기괴한 사람의 형상이 가슴을 짓누른다. 내부의 어둑한 조명이 엄습한 기운을 쏟아낸다. 1937년 12월, 일본군에 의해 중국군 포로와 일반 시민 30만 명이 살해된 전쟁 범죄로, 731부대의 생체실험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벌인 가장 끔찍한 만행으로 꼽힌다. 학살이 자행된 구릉 위를 덮어씌우듯 건립한 어마하게 큰 규모의 기념관이었다. 살해당한 수많은 인골이 곳곳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참상을 목도하고 전율했다. 인간의 잔인함이 어디까지인지. 일본은 부풀려진 사건이라고 항변한다고 한다. 1985년에 지어 1995년 증축을 하였고, 2007년 12월 13일 난징대학살 70주년에 맞춰 다시 확장 개관했다. 전시관 끝 출구 벽에 걸린 말이 걸음을 붙든다. “历史可以宽恕 但不可以忘却. 前事不忘 后是之師 / 歴史は許すことはできるが、忘れてはならない。過去を記憶し、未来の師とすべきである。” ‘역사는 용서할 수는 있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기억해 미래의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라는 문구가 중국어와 일본어로 위아래로 적혔다. 일본에 던지는 무서운 역사의 말이었다. 중국의 의연함이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우리는 어떤가. 용서 못할 일이라며 과거에만 매여 미래의 길을 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 것인지.
“내가…, 내가 있던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2003년 11월 21일 중국 난징, 백발의 한 노파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모두의 눈이 쏠렸고 노파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다. 이곳의 위안부였던 평안남도 출신 박영심朴永心(1921~2006, 일본명 우다마루歌丸)할머니다. 이 할머니의 증언이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진열관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2015년 12월 1일 개관한 이래 암울했던 한 시대, 역사의 절절한 한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진열관은 면적 총 3,000㎡ 규모에 약 1,600여 점의 전시물과 680장의 사진이 생생하게 보존돼 있다. 난징 대학살이 일본군 위안소를 설치하기 시작한 원인이었다. 당시 수많은 여성에 대한 강간이 자행되어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고, 일본군에 성병이 번지자 아시아 40여 곳의 위안소 중 최대 규모로 만들었다고 한다. 난징시의 중심지로 개발 여론의 반대에도 그때의 8개 동 건물 가운데 6개 동이 온전한 형태로 복원되었다. 노변의 안내 철책을 따라 마당에 들어서니 오른쪽에 통곡의 벽이라며 70명 위안부 할머니들의 곤혹스러운 표정의 흑백 사진으로 벽을 만들어 놓았다. 벽 아래 작은 흙 마당은 할머니들의 눈물로 마르지 않는 땅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맞은편 위안소 건물의 노란색 벽체에 南京利濟巷慰安所舊址陳列館 이라는 큰 현판이 세로로 길게 걸렸다. 앞마당엔 임신한 모습의 박영심 할머니를 크게 돋보이게 만든 셋 위안부의 동상이 고통스러운 형상으로 햇살을 받아내고 있었다.
2호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17세에 붙들려 온 박영심 할머니가 3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던 방도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작은 방에 놓인 다다미 한 장이 지옥 같았으리라. 진열관 내부에는 위안부와 관련된 온갖 증거품들이 놓여있었다. 특히 '突撃前へ(돌격 앞으로)'라는 문구가 새겨진 콘돔 앞에 망연해졌다.
진열관 끝자락에서 만난 '끝없이 흐르는 눈물'이라는 이름을 붙인 한 할머니 조각상 앞에 섰다. 앞으로 고개 내민 얼굴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달라"는 문구와 함께 마른 수건이 놓여있다. 어둑한 실내를 돌며 함께 관람하던 일행의 몇 여성이 수건을 쥐고 얼굴을 닦아주며 눈시울을 훔친다. 아무리 닦아도 할머니의 눈물은 멈추지 못하는 눈물이었다.
모처럼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로 저녁밥을 먹었다. 한국인 입에 맞춘 한정식 ‘무궁화’ 식당이다. 조금 전 돌아다녔던, 공자의 사당이 있는 난징의 중심 관광지 푸쯔먀오夫子庙 옛 거리의 풍광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사람 사는 일이 어디나 같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여기 사람들에겐 서울의 명동이나 인사동과 같은 의미를 가진 거리였다. 무협 영화에 등장하던 전통 목조 기와집이 길 양안을 메우고 있었다. 건물 난간에서 저쪽 난간으로 휙휙 날아다니는 사람을 떠올리며 시조를 쓰는 대학 친구인 일행과 한참이나 배회했다. 오랜만에 만난 지라 여정 중에 한방을 쓰면서 옛정을 이었다. 메케한 향료 냄새가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중국의 냄새였고 질서였다.
감시당하듯 들어왔던 호텔, 新城商務酒店에서 마지막 밤을 뒤척인다. 도시의 가로를 온통 덮은 검푸른 고목의 플라타너스가 인상적이었다. 모두 밑동의 사람 키 높이에서 세 개의 큰 가지로 뻗어난 수형이 궁금해 물었더니 쑨원孫文이 중화민국 건국이념으로 제창한 삼민주의(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상징한다고 했다.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혁명이념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는 그 생각들이 나무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였다. 이념을 먹고 자란 나무였다. 1928년 이곳 난징南京에 수도를 정했던 장제스蔣介石 국민정부의 총통부 청사 앞 가로수는 더 우람한 세 개의 가지를 뻗어 올려 나다니는 이곳 인민들의 머리를 덮고 있었다. 내세운 이념의 푯대로 줄을 세우는 장구한 역사의 통치술 아니던가. 창밖으로 희붐한 건물들이 괴물처럼 붉은빛을 밤하늘에 흘리고 있다.
난징 공항으로 가기 전 들린 靈谷寺다. 끝 일정이다. 이곳에서 산을 처음 만났다. 남경시의 동쪽 鐘山의 명승지구라고 했다. 강남 4대 명산의 하나로 자색 구름이 맴돈다 하여 紫金山이라고 한다. 당나라 태종 때의 유명한 고승인 현장법사玄裝法師를 기리는 현장원과 사리를 모신 사당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원래의 사찰 자리에는 항일운동을 한 ‘국민혁명열사 공동묘지’가 조성되었고, 옆으로 이전한 자리가 지금의 사찰이다.
산사 초입, 붉은 숲이 내려앉은 작은 호수가 걸음을 붙든다. 휘날리는 가랑잎들이 호수 위에 날리고 냉한 바람이 산 쪽으로 치오르며 분다. 현장법사의 사리를 참배하고 현장원의 돌계단에 섰다. 처마를 휘돌며 산바람이 스친다. 천축국天竺國으로 불경을 찾아 떠났던, 삼장법사三藏法師로 불렸던 고승 현장법사의 고행의 의미를 짚어본다. 인간의 삶의 길은 대체 무엇인가. 손오공을 거느렸다던 그의 불력으로 보듬으려 했던 세상은 무엇이었던가. 일본군과 맞섰던 이 국민혁명열사의 혼을, 이 땅에까지 흘러와 나라를 찾겠다며 용을 쓰다 사라지며 납작 돌 묘비 하나로 남겨진 우리 선각들의 혼을, 집단 살육을 당한 난징의 사람들, 위안부로 잡혀 와 한 많은 생을 산 여인들을 받아 안을 수 있는 것인가.
아무래도 이 넓은 대륙의 얼굴은 대답 못 할 것 같다. 황푸강黃浦江 가에서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용의 집, 그 속내를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그럼에도 이 큰 땅엔 정치적 논리의 환대가 도처에 굼틀댔다. 그건 한때의 바람 같은 거다. 훨씬 많았던 중국 여자를 두고 조선의 여인을 대표 위안부로 동상을 크게 만들어 세우는 얄궂은 심사 그런 거다. 중국 편이냐, 미국 편이냐의 선택의 갈림길에 힘겹게 걸려 있는 게 오늘 아닌가.
내 작은 땅이 자꾸 억울하다. 또 다시 강대한 나라의 틈새에서 힘겨워하는 우리 얼굴이 여기서 새삼 난감해진다. 남정네는 나라를 떠나 용을 쓰다 쓰러져 묻히고, 앳된 여인네가 다시 타국의 남자 앞에서 치를 떨어야 하는, 조각상의 눈물을 닦으며 후세대 여인이 흐느끼는 그런 날을 다시는 만들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선생의 가슴 에이는 읊조림이 이국의 땅에서 내게 방망이질을 한다. 눈을 뜨라 한다.
※ 중국 인명, 지명은 중국어 간자체(한글의 신명조 간자체)로 적고, 중국어 발음을 한글로 적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우리말 발음 표기가 의미가 없고 되레 어색한 곳은 중국어로만 표기했습니다. 일부 우리말처럼 굳어진 것은 한국식 표현을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