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절 휴식일을 빌어 올해는 어떡하나 고향에 한번 다녀올려고 맘먹었습니다.
시큰둥 별로 관심이 없는 남편을 꼬셔 차몰고 동생이랑 함께 떠났어요.
29년만에 찾아보는 고향길이라 넘 가슴이 설레였습니다.한걸음에 달려가고픈 이내 마음을
알아주는듯 차는 고속도로에서 씽씽 잘도 달렸습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 꺾어들고보니...도로가 한심할 정도로 전에하고 조금도 변한것이 없었습니다.
올리막 내리막길에 울퉁불퉁한 크고작은 웅뎅이들로 차체가 심하게 들썽거렸습니다.30년전, 허술
한 버스의 뒤자석에 앉으면 차체가 웅뎅이를 만날때마다 올리 튀면서 천정에 머리를 탕탕 부딪치던
그때가 떠오르데요.길은 조금도 변화가 없구나....생각하면서 기듯이 조심조심 달렸습니다.
전에는 가는 길에 마을들이 꽤 있은걸로 기억이 되는데...지금은 거이 없데요.길옆에 세워진 도로표식
옆에는 찌글어진 초가집 몇채들로 구성된 작은 마을이 보였습니다.기억은 가물거리지만 표식하고 마
을에 비여있는 집이나 살고있는 집이나 아마 전에 우리가 있을때부터 살던 집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
다.좀씩 서글퍼지는 맘을 달래면서 한참을 더 달리니 앞이 훤하게 열리는 느낌이 들었구요.찬찬히 여겨
보니 대신저수지에 도착을 한것이였습니다.
79년도에 우리가 이곳을 떠나갈때 시공중이였는데 30년만에 이미 완공이 된 모습을 보게 되였네요.
감회가 깊었습니다.뚝에 대신저수지란 큰글자가 다 보이게 사진을 남기고 싶어서 이리저리 많이 걸
었지만 나무가 높은지 키가 작은지 찍고 보니 잘 안나왔네요.
가을을 맞은 저수지는 물이 많이 줄어있었고 저수지를 둘러싼 산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
있습니다.낚시하는 사람도 저수지를 관리하는 사람도 하여튼 사람이란 그림자도 안보이게 한적하여
조금은 쓸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그나저나 우리는 우리대로 저수지를 배경으로 기념으로 사진을 남
기고 가던 길을 재촉햇습니다.
대신저수지까지 오는 사람들이 많을걸로 생각이 되는데...딱 여기까지 흙길 그대로 유지를 하고 그담
은 콩크리트길..보이다싶이 3.8분계선처럼 계선이 딱 났습니다.흙길이 끝나는곳에 위험다리..저다리
를 지나서 우리들이 많이 다녔었는데 지금은 대충 이용은 하지만 빨란글로 <위험다리>로 인정이 되였
네요.세월이 오래동안 흘렀으니..그럴만도 한거겠죠..
높지는 않지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바위산~! 산골에 살면서 용정에 갈려면 20리길을 걸어서 대신-
이곳에 와야만 오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갈수있었습니다.그래서 추울때나 더울때나 늘 이 바위아래서
용정으로가는 버스를 기다리군 했었는데...바위는 여전한데 세월은 많이 흘렀네요..
그전에는 위험다리를 지나서 북으로 구불어드는 길이 있었습니다.이 표식에 씌여진 화전골로 드나
드는 길이였습니다.그전에는 여기에서 북을 향하여 들여다보면은 올망졸망 정다운 초가집들이며 굴
뚝으로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밥하는 연기며 다 보였습니다.지금은 그 길이 키높은 쑥밭이요,버드나무
숲이 되였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데요.밸처럼 구불구불한 흙길이 바위산굽을 에돌아 나있었는데 차
가 들어가기 대단히 불편하다는것이였습니다.힘들게 들어가보았대야 댓호의 인가가 그럭저럭 살고있
다는것이였습니다.내가 알사람도 나를 알사람도 없는 낯선 동네가 되였네요.참 마음이 아팠어요.
화전골로 향하는 길목에서 아픈맘 달래며 사진 한장을 남기고 그냥 돌아섰습니다.화전골에서 16년을
살았고 용신에서는 석달을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를 한건데..그래도 교통이 조금이 나마 편리한 용신
이야 낫겠지 생각하면서 차를 용신방향으로 돌리고 달리기 시작을 했어요,
용신까지는 길은 좋았고 길옆에는 농민들이 가을하여 쌓아놓은 벼단들도 보였습니다.아직까지 그래
도 이 고장에서 밭을 짓고 있는 이들이 있구나 생각하면서 무거워지는 맘을 조금씩 달래보았습니다.
멀리 바라보니 농사를 짓고 있는 마을은 전에 인상속에 남아있는 용천이란 마을 같았습니다.아직도
그 마을은 사람들이 꽤 살고 있는듯하였습니다.어릴때 <꽃파는 처녀>란 영화를 볼려고 몇십리밤길
을 걸어서 이 마을에 와서 구경하고 가던 기억이 생생한데....30년세월이 흘렸네요.
드디여 용신에 도착을 한겁니다.오긴했지만...대체 어디로 가야하는건지 막연한 걸음이였습니다.
친척도 친구도 아는 이가 없는 이고장에 내가 왜 왔는지...그냥 무작정 오고 싶은곳이였고 꼭 한번
은 와 보고 싶은 곳이였기에 찾았지만...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멀리 바라보이는 산위에는 렬사탑이 한눈에 안겨왔습니다.저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지만 동생이
그러데요.<언니,내가 제일 처음 넥타이를 맨곳이 바로 저 렬사탑아래요,그때 선생님들이 우릴 데리
고 저곳에 가서 입대의식을 했엇는데....><오~그랬구나!>멀리에서라도 사진 한장을 남기고 싶어서
그냥 샤타를 눌러밨습니다.굴뚝이랑 구분이 잘 안서지만...저나 동생은 분명히 알아봅니다.
우리들이 두번째로 찾은 곳은 당시에 중학교였습니다.무너진건 무너지고 새로 지은건 짓고 하여튼
어디가 어딘지 ...길가는 애기엄마하고 물어서 찾은 중학교자리입니다.당시에는 많은 학생들과 선생
님들로 흥성거리던 학교-이미 오래전에 빈집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겉은 멀쩡한 그대로인데 있
어야할 주인들은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유리창은 깨여진건지 뽑아간건지..하여튼 구멍 풍~
뚫린 문틀만 남아있는 상태로 우뚝 서있데요.애들이 웃음소리 넘치던 학교운동장에는 이름모를 잡초
들이 무성한 풀밭이 되여 교사를 가까이 하고 싶어도 들어갈수가 없는 상황이였습니다.몇년동안 이
렇게 비여있었을가???
그 때 우리들이 석달간 살았던 중학교교원주택이 지금도 이런 모습으로 남아있었다는것이 놀랍데요.
학교의 위치며 흐르는 개울물가에 위치한 이집...우리가 살던 집같았지만 단정할수가 없어서 옆에 사는
로인 두분하고 물어서야 당시 중학교교사들이 살던집이 맞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오래전에 주인을
잃고 무너지기 일보직전으로 겨우 지탱하면서 서있는 모습이지만 그래도 얼마나 정다운지..빈집이지만
한번 문열고 들여다보고 싶어서 시도를 해보았지만 서쪽은 양봉하는 사람들이 벌통을 늘여놓아서 들어
갈수가 없었구요 앞마당에는 개를 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되구..동쪽은 이렇게 울바자가 히뜩 넘어질라
고하는 상황이라 그냥 포기하고 겉모습만 기념으로 남겼어요.
이곳저곳 둘러바도 그전에 인상속에 남아있던 건물들은 모두 비여있는 상태이고 알고 있던 선생님들 몇
분 찾아뵐려고 물으니 모두 용정으로 이사를 가셨대네요.이렇게 모두가 고향을 등지고 떠나버리다보니
작지않던 공사마을이 이제는 자그마한 한개촌으로 겨우겨우 생계을 유지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고향
마을 전체가 이제 이삼년을 넘기지못하고 텅빈 산골로 되지 않을가하는 걱정과 함께 서글퍼지는 마음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놀랍게 발전하는 시대와 함께 날로 향상하는 인간의 수요...어쩔수없이 고향을 등져야하는 우리들,
몸은 멀리 떠났지만 우리들이 태줄이 묻힌 고향은 영원히 잊을수가 없네요.30년만에 찾아본 고향
서플픔이 많았지만 그래도 행복했습니다.단풍이 곱게 물든 고향의 산,맑디맑은 고향의 내물,정든 초가..
내가 살던 그때로 다시 돌아간 기분으로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는 순간순간들이
행복이였습니다.고향의 모습이 어떠하던 내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히 변함없을것입니다.
첫댓글 고향으로 가는 기분 감회가 새롭겠군요.즐거운 려행길이 되였으리라고 믿습니다
별로 멀지도 않은 고장인데..살다보니 이렇게 오래동안 그냥 소원으로만 간직하고 살아왔네요.이번에 소원은 풀었어요.머 어떻게 되였든...고향의 길에 발을 내리고 걸어보는 자체도 행복이데요...댓글 고맙습니다.
용신?? 혹시 투도가는 길에 있는 룡신을 말씀하시는건가요?
아뇨...용정시 용신향이였는데요..지금은 용정시백금향 용신촌으로 급이 하강되였데요,
고향은 영원한 내마음의 안식처요 잊지못하는 것이 고향입니다.강산이 3번 변할 세월속에서도 남아있는 고향산천 그래도 님의 발자취를 추억할수 있었네요 . 고향 한국도 많이 변하여 지금 고향가면 빈터만 남겨져 있고 옛모습은 없지요.잘보고 갑니다.영혼.
남기고 가신 흔적 늘 고맙습니다.존시간되세요.
꿈속에서도 가고싶어지는 고향,부푼마음으로 갓다가 서글픈 기분으로 돌아왓군요.저도 너무나 그리워 몇년전에 찾아가보앗더니 횡뎅그레하고 쓸쓸한 ,페허나 다름없는 마을로 마음만 아파나더군요 그러나 옛고향분들 시가지로 한국으로.... 나가서 다들 잘 살고잇을거라 생각하니 위로가 되엿구요.....
어쩔수없는 현실이잖아요.교통이 불편하고 애들 교육이 불편한건 뻔한일이니까 나가서 돈벌고 애들 교육하고 잘 살아야겠으니까 고향이 아까워도 울면서 떠나야하는 현실...
칠색무지개님은 국경절휴가에 고향으로 다녀오셧네요. 고향이 변한 모습을 많이 보았네요. 앞으로 고향이 더 멋지게 건설되겠지요.
제발 크다산 저수지만 덜렁 남아서 용신골을 지키는 신세는 되지 말았으면 하는것이 바램입니다.
칠색무지개님도 룡정태생이네요.어려서 자라던 고향은 어디에 가서도 잊어지지 않지요.올리신 글 잘보았어요.
네-용정태생입니다.남겨주신 고운 흔적 감사합니다.존 밤되세요.
고향으로 다녀온 기분 부럽기만하네요.저도 언제면 고향으로 갈수 있을런지...
시간 맞춰서 한번 다녀오세요.볼거리를 찾은것도 아니요,누가 기다리는것도 아니요 ,그냥 산과 물,바위산 풀내음....이모든것이 어머니의 체취인양 그렇게 맘에 와닿는것이 그냥 좋았습니다.
아무도 반겨주는이가 없어도 항상 마음속에는 그리운 고향....추억에 여행되였으리 생각합니다.
그래요,잊을수없는 추억의 여행이 될겁니다..댓글 감사합니다.
좋은추억으로 남을 걸음이 되였으리라고 믿습니다.
다녀가신 고운 흔적 고맙습니다, 내내 좋은 시간들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29념만에 고향 다녀온 감화가 깊겠습니다.덕분에 저도 고향의 모교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듣건데 내가 다니던 학교는 없어졌답니다.학생이 없어서... 참 아쉬운 일이지요...
지금 농촌마을에서 학교문 닫기지 않은곳 별로 없을걸로 기억이 됩니다.날따라 놀랍게 발전하는 시대의 수요와는 거리가 먼 농촌교육상황이 ...우리들의 부모님들 애들 손목잡고 도시로 하나둘 진출하다보면은 어쩔수없이 학교는 비게 된같데요.아쉬움이 많지만...
로신의 고향이 생각납니다.이름도 정다운 시골마을들이 하나 둘 사라져 마음이 아픕니다.고향마을이 사람들이 떠나가고 사라져가도 님의 마음에 영원한 추억으로 남아있길바라는 마음입니다. 정다운 마을이름들...용신,화전,작수툰.......지명에서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게 됩니다.
남겨주신 멋진 댓글 감사합니다.존시간되세요.
나의 고향생각도 나네요,, 중국가면 함 다녀와야겠습니다..
함 다녀와보세요.삼십년만에 다녀온 고향길..이제 또 30년동안 잊을수없는 추억으로 남을듯,....
고향마을에 다녀갓군요.고향마을이 황페해져서 마음이 많이 앞았겟네요.그래도 다행이도 옛집이 있었네요.그집터를 버리지 말고 기념으로 꼭 다시 세워요.별장처럼말입니다. 고향이 옛집을 소중이 남기세요.고향이 어떻게 됐던 즐거운 려행길 축하합니다.
시들어가는 고향모습에 맘 한구석이 알알해났지만 가을꽃님처럼 고향옛집터에 먼가 다시 세워볼려는 생각은 못하고 왔어요.어쨋든 남다른 가을꽃님의 생각~넘 좋은같네요..이제 앞으로 그런 생각과 그런 행동이 일직선에 놓일날 올건지 미결이지만 함 생각해는 볼거에요...고맙습니다.
고향에 가보니 어린시절 그모습대로인 쓰러져가는초가집모습 보구 가슴아팠으리라 생각됩니다.화룡농촌들에서는 새농촌건설로하여 거의다 멋진 벽돌집으로 바뀌엿던데......님의고향을 비롯한 연변의모든 농촌 마을들이 하루속히 새모습으로 바뀌여 고향찾아가는모든사람 맞아주길 충심으로 기원하면서....
그러게요.그러니까,조금도 변화없는 그전날의 모습에 더더욱 놀란거죠.내가 지금 사는 곳에서도 농촌건설에 대량의 투자를 하여 도로건설부터 낡은 초가집의 개선, 변소, 수도물...노인 독보조...하여튼 몰라보게 변하는 농촌마을의 정경들을 심심찮게 볼수있는데...내 고향은 정부에서부터 언젠가는 없어질거다~~는 식으로 먼발치에서 구경하는듯한 소외감이 들데요..먼가 있을거지만 내가 알길이 없고 그냥 서글픈맘은 어쩔수없었습니다.
고향모습을 잘 보고 내립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감사요, 머무시는 동안 내내 즐거운 시간되세요.
사진과 함께 고향길 함께 잘 가보았네요..농촌에 가보니 집주인들은 어데갔는지 없구 바자가 다 무너져 있데요...물만 아래로 흐르나봅니다.사람은 자꾸 좋은곳으로 이사만 가고..
그러게요.머 언제 나왔던...고향을 떠나버린 신세에 후에 떠나오는 사람들 이렇다저렇다 할것은 없지만..그전날에 오손도손 모여서 정답게 살던 그 옛모습들이 그리워졌습니다.
사진과 글 보면서 고향에 대한 추억에 잠겼다 갑니다.
남겨주신 고운 흔적~이 맘이 훈훈합니다.고맙습니다.
무지개님의 고향 다녀온 사진이 저에게도 잊을수 없는 추억을 주었습니다. 1985년도쯤 됐을겁니다. 용정시 어느 직업중학교에서 대신저수지에 놀려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학생들의 뻐스가 물에 빠져서 여러명의 학생들이 세상을 달리 하기 바로 1주일쯤 됩니다. 저도 대신에 놀려 갔었는데 지금보다는 훨씬많은 물이였습니다. 그곳에서 헤염쳐 갔다가 다시 돌아 왔었는데 지금은 그때그일들을 상상만해도 가슴이 벅찰뿐입니다
네~그랬군여...아마 그때는 대신저수지도 오가는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추게한 곳이였다고 생각을 해봅니다.지금은 오가는 이 아무도 없이 넘 한적한 곳이라는 느낌이데요.
늦게나마 추억의 고향행 사진과 글을 즐감했어요.
다녀가시고 댓글 남겨주심에 감사드립니다.좋은 시간되세요.
이 그림을 보니깐 나의 살던 고향 노래가 떠오르네요 동년의 추억속에 점겼다 감니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배경음악으로 넣음 좋을건데...그렇죠?
글과 사진을 접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추억의고향을 저도 잠간이나마 그려보기도 했어요.감사함을 리필로 남기면서 인사드림니다
짐승새끼는 시골로 보내고 사람자식은 서울로 보내라 했지 않습니까 하물며 강산에 세번이나 변했을건데 언제나 고향을 맘속에 두신 칠무님이 돋보이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