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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읍
우리 고장의 지명은 고타야, 고창(古昌), 창녕(昌寧), 일계(一界), 지평(地平), 화산(花山), 고령(古寧), 고장(古藏), 석릉(石陵), 능라(陵羅), 안동(安東), 영가(永嘉), 길주(吉州), 복주(福州)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현재의 지명인 안동을 처음 쓰게된 것은 930년이다. 이 무렵은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시기이다. 공산전투를 시작으로 한 경상도 지역에서 견훤에게 연전연패하던 왕건은 우리 지역 병산에서 최후의 배수진을 치고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된다. 이 전투(古昌戰鬪, 929∼930)에서 고창성주(城主)인 김선평(金宣平)과 권행(權幸), 장길(張吉) 등의 도움을 받은 왕건이 승리함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고창전투에서 승리한 태조는 성주와 지역민들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고창군(古昌郡)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으며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세 명의 호족들에게 안동이란 본관을 하사하게 된다. 안동이란 의미는 편안할 안(安) 자에 동녘 동(東) 자를 써서 우리 나라(大東)의 안전을 도모한 고을이란 뜻이 담긴‘安於大東’에서 취한 이름이다.
그후 안동부가 영가(永嘉)로 바뀌게 되는데 그 시기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는 않으나 고려 경종 6년(980)에 상주관할의 부를 군으로 바꾸면서 영가군으로 개칭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영가'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때 편찬된 우리 고장의 지방지를『영가지(永嘉誌)』로 이름지을 만큼 우리고장의 지세(地勢)를 잘 나타낸 지명이다. 영가지의 서문에 따르면 지지(地誌)의 명칭으로 처음에는 화산지(花山誌)와 영가지(永嘉誌)라는 두 가지 명칭이 제시되어 논의가 활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논의에서 화산(花山)은 안동의 중심에서 많이 떨어진 곳에 있어 대표성이 적어서 불합리하고 영가는 글자의 풀이가 안동의 지세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매호(梅湖) 권행가(權行可) 공의 의견을 받아 들여 지지(地誌)의 명칭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권행가는 영가가 안동의 옛 이름이라는 연유 외에도 '영(永)' 자는 이수(二水)의 합자(合字)이며 '가(嘉)'는 아름답다는 뜻으로 '永嘉'는 낙동강 본류(浦項, 개목)와 반변천(瓦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잡은 안동의 지세를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적절한 이름이라 주장하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고려 성종 14년(995) 영가에서 길주로 바뀌었다가 현종 21년(1030) 다시 안동부가 되고 신종 7년(1204)에는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충렬왕 34년(1308)에 복주목으로 다시 개칭되었다가 공민왕 10년(1361) 안동대도호부로 다시 바뀐 이후 지금까지 안동이란 지명으로 남아 있다. 풍산읍은 신라시대에는 하지현(下枝縣)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풍산현(豊山縣)이라 하였다가 1914년 부군면(府郡面) 통폐합에 따라 풍산현의 내면(內面) 4개 동과 서선면(西先面) 7개 동을 병합하여 11개 동(막곡, 계평, 수곡, 회곡, 수, 노, 단호, 상리, 하리, 안교, 마애)을 관할하는 풍산면으로 바뀌었다. 그 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북면과 풍서면의 소산리를 편입하였으며 1973년 7월 1일 풍산읍으로 승격되어 현재 19개의 법정리를 두고 있다.
영가지 권1 강역(彊域)의 기록에 의하면‘풍산현(豊山縣)은 부(府)의 서쪽 35리에 있다. 현의 규모는 동·서가 30리이며 남·북은 45리이다. 동쪽으로는 본부(本府)의 경계인 권산정(權山亭)과는 5리 떨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일직현(一直縣)의 경계인 어가말(於加末)과 30리 떨어져 있다. 서남쪽으로는 비안(比安), 의성 등 현의 경계인 백동(栢洞)과 40리 떨어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용궁현 경계인 구담과 25리 떨어져 있다. 서북쪽으로는 예천군의 경계인 백야현(白也峴)과 15리 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예천군의 경계인 오적(五赤)과 15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명은 풍성할 풍(豊)자에 뫼 산(山)자를 쓴 것으로 이 지역을 에워싸고 있는 산 모양이 굽을 곡(曲)자와 콩 두(豆)자를 합친 것과 같이 생겨 이 두 글자를 합하여 풍(豊)자가 되고 뫼 산 자를 붙여 풍산이라 이름지었다.
풍산읍의 지형적인 특성은 북쪽의 경우에는 소백산맥의 지맥인 학가산과 보문산이 둘러쳐져 산촌을 형성하고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낮은 구릉지로 형성되었고 남쪽은 평탄한 평야지로 풍산들을 형성하고 있다. 보문산에서 발원하는 매곡천이 읍의 서쪽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불노봉에서 발원하는 상리천은 읍의 동쪽을 북에서 남으로 흘러 낙동강과 합류한다. 교통은 중앙고속도로의 서안동인터체인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국도 34호선이 관통하고 있어 외부와 안동을 연결하는 관문역할을 한다. 이 지역은 중앙고속도로의 건설로 인하여 수 백 년간 지켜오던 삶의 보금자리였던 자연마을들이 도로용지에 편입됨으로 해서 자연마을의 붕괴를 초래하였고, 거주지 이전에 따른 새로운 정착과정과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 뚫려있는 도로망은 주민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농산물도매시장과 유통센터의 건립은 안동지역뿐만 아니라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물류와 유통의 중심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낙동강을 따라서 마을이 형성된 계평리는 안동군 서선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와평리, 상계곡리, 회곡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계곡리의 계(桂) 자와 와평리의 평(平) 자를 취하여 계평이라 하였다. 자연마을의 현황은 욋들, 살머리, 웃절, 엄실 마을 등 4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96가구에 285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욋들 : 한자 표기로는 와평(瓦平)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사람이 마을을 개척한 후 가마를 만들어 기와를 굽던 곳이란 데서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에 와서는 욋들로 부른다. 회곡리의 아랫절과 경계를 이룬 곳으로 마을의 북서쪽에 계평못이 있어 계평들의 수원이 되고 있다.
◇ 계평들:욋들 마을 앞에 형성된 들이다. 낙동강의 흐름에 의해 형성된 퇴적지이다. 들판 위로 중앙 고속도로의 풍산대교가 지나며 강 건너 낙암정(洛巖亭)과 상락대의 절경이 또렷이 보인 다.
◇ 독지골:욋들 북쪽 골짜기이다. 외따로 떨어진 마을이라고 하여 독지골이라 부르며 옛날에 도둑이 출몰하기도 하여 도둑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욋들 북쪽 골짜기가 있는 마을로서, 이 마 을 북쪽에는 만석곡(萬石谷)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만석꾼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독지골 못이 있다.
▶ 엄실(奄實)·엄곡(奄谷)
욋들 남동쪽에 형성된 마을로 지세는 둔덕이 지고 엄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어떤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고 나서 엄나무가 많다고 해서 엄곡이라 하다가 엄실로 불리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부친의 시묘(侍墓)살이를 3년간 했다하여 빈소골이라고도 한다.
◇ 절 골:엄실 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절이 있었다고 절골이다.
◇ 중 골:절골 옆 골짜기로 스님들이 살았다고 중골이라 한다.
◇ 큰엄실골:엄나무가 있다고 붙인 이름이다.
◇ 바람테재:엄골 동쪽에 있는 고개이다. 계평리에서 막곡리로 연결되는데 바람이 항상 세게 불어 서 바람테재라 부른다.
▶ 살머리
계평리를 감싸안은 산줄기가 낙동강으로 그 맥을 뻗어 엄실 동쪽 산머리를 이루었다. 이 산머리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산머리, 살머리라 한다.
▶ 웃절·상계곡(上桂谷)
살머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편에 상계사(上桂寺)라는 작은 절이 있어서 상계곡 또는 웃절이라 이름지었다. 막곡리와 경계되는 지점에 대덕사(大德寺)가 있다.
◇ 불당골:불당과 샘이 솟아올라 지은 이름이다.
괴정리는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북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발산동, 수박동, 신사동, 매곡동, 오미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괴정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산면에 편입되고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되어 행정구역이 안동시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은 마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고 해서 붙였다. 자연마을은 갓뒤, 뒷절, 수박골, 까칠개, 개상골, 바래미, 절뒤, 솥절, 영뱅이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168가구에 457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 갓디·갓뒤·지북(枝北)
괴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34번 국도를 이용하여 예천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풍산농공단지 조금 못 미쳐 풍산읍 오미리와 연결되는 지방도로 접어들면 만나는 마을이다. 숲의 뒤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라고 하여 갓디라 한다. 여러 성씨(姓氏)가 모여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이 마을에는 매년 정월 보름에 동제사를 올리는 동수나무와 마을 뒤 산비탈에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느티나무가 있다. 이 느티나무로 인하여 괴정리라 부르게 되었다.
▶ 개상골·채상곡(採相谷)·개쌍곡(介雙谷)
갓 뒤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채상(개상:시루에 콩을 넣어 콩나물을 기를 때 시루 위에 걸치는 'V'자형의 나뭇가지)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까칠개·작평(鵲坪)
지금부터 400여 년 전인 1600년경에 안동 권씨들이 들어와 터잡은 곳으로 마을 앞에 있는 넓은 들판은 매곡천과 괴정천이 합수되는 지점이라 비만 오면 물에 잠겨 듬벙('웅덩이'의 사투리)이 되었다. 바로 이 들 옆에 있는 야산(野山)에는 늘 까치떼가 모여들어서 까칠개라 하였다.
▶ 바래미·발산(鉢山)
갓뒤마을의 앞쪽 지대가 조금 낮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인 1600년경에 사람들이 들어와 마을을 이룰 때에 집을 짓고 보니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바래미라고 불렀다. 또는 풍북교회가 자리잡은 마을 뒷산 모양이 바릿대(鉢) 같다고 해서 바래미라 했다.
▶ 뒷절·사후(寺後)
갓뒤 마을과 인접해 있다. 1500년경에 이곳에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나 절 뒤에 있던 마을은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어서 절뒤에 있던 마을이라고 해서 뒷절 또는 사후라고 한다.
▶ 솟절·솥절
갓뒤 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조그마한 절이 있었다하여 솟절이라고 하며, 1500년경에 한 선비가 상주(尙州)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면서 정사동(鼎寺洞)이라고도 했다고 전한다.
◇ 소사(小寺):작은 절이 있었다고 소사라 하기도 했다.
◇ 정사동(鼎寺洞):솥처럼 생긴 작은 절이 있다고 해서 정사동이라 한다.
▶ 영뱅이
갓 뒤 마을 남쪽 오미들 건너편에는 오래 전부터 주검을 모신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 공동묘지가 두 갈래로 나뉘어 산 능선에 자리하고 그 사이로 난 골짜기를 영(靈)을 모신 곳이라 해서 영뱅이골이라고 불렀다. 이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마을을 영뱅이라 했다.
▶ 수박골
풍산읍 괴정리와 예천군 호명면 직산 1리 재궁마와 고개를 사이에 두고 경계하고 있는 마을이다. 예부터 이 고개는 번개탄을 만드는 숯 공장이 있어서 항상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꿀뚝고개라 불렀으며 마을 이름은 수박을 많이 재배한다고 붙였다.
노리는 안동군 서선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상동, 중동, 하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노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산면에 편입되고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되어 행정구역이 안동시 풍산읍 노리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은 모운사라 부르는 절이 있어서 모노골, 모놋골 또는 노곡이라 부르다가 노리로 정착되었다. 자연마을은 안마(모노골), 막가무, 납들고개, 거릿마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108가구에 331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 모노골·모놋골
노리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옛날 이 마을 뒷산에 모운사(暮雲寺)란 절이 있어 모운곡(暮雲谷)이라 부르다가 뒷날 모녹(暮鷺)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을 왔을 때 이곳을 지나는데 날이 저물자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데리고 하룻밤 머물렀다가 갔다하여 모녹(暮鷺)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배나무골:큰 배나무가 있다고 붙인 이름이다.
◇ 성 난 골:배나무골과 마주보고 있는 골짜기이다.
◇ 제 비 골:지형이 제비 형상을 하고 있다고 붙인 이름이다.
◇ 작은제비골:제비골 아래 위치한 작은 골이다.
◇ 정 골:그릇을 파는 상점이 있어 붙인 이름이다.
◇ 모 노 골:노리의 가장 큰 마을인 안마가 위치한 골짜기이다.
▶ 거릿마
모노골에서 서후면 명리로 이어지는 길섶에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거릿마라 이름하였다.
◇ 뱀 골:지형이 습하여 뱀이 많다고 붙인 이름이다.
◇ 수노골:거릿마 옆에 있는 골짜기로 작은 못이 있다.
◇ 마당바위골:뱀골 입구에 있는 큰 바위가 마당같이 넓적하게 생겨서 붙인 이름이다.
◇ 저승골:뱀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막가무·석교(石橋)
막가무와 웃막감우로 나눈다. 옛날 마을 앞에 돌다리가 있어 석교(石橋)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그 후 마감(磨鑑)이라고 부르다가 마까무골로 변하여 지금 막가무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웃막감우골:막가무에서 700m 정도 북쪽에 있다.
▶ 납돌고개·신석(申石)
서안동인터체인지가 자리잡은 지역이다. 옛날 이 고개마루에 원숭이모양을 한 돌이 있다고 해서 납돌이라 불렀으며 한자표기로 신석(申石)이라 썼다.
마애리는 마애 본동과 시우실 2개의 자연마을에 93가구 257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낙동강이 마을을 굽이돌고 아름다운 절벽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하는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풍산읍에서 하리와 마애리로 연결되는 도로가 최근에 포장되고 낙동강을 건너 남후면 단호리로 연결되는 다리(단호교)가 세워졌다. 이 다리가 세워지기 전에는 풍산에서 안동시의 강남 지역인 남후면으로 갈려면 안동시내를 거쳐서 가야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이제는 곧바로 닿을 수 있다. 원래는 중국에 있는 망천(輞川)과 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지녀 망천이라 불렀으나 낙동강 가에 바위를 쪼아 만든 부처가 있어서 마애로 바꾸어 불렀다.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에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산내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리 일부를 병합하여 마애리라 하여 풍산읍에 편입하였다. 마을을 감싸 도는 낙동강과 망천절벽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망천절벽은 풍산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영호루로부터 냇물의 남쪽에 적벽(赤壁), 삼봉(三峰)이 있는데 동쪽 것은 준엄(峻嚴)·단정하고 서쪽 봉은 구불구불 고절(高截)하며 중간의 한 봉은 작으나 기전(氣全)하여 초립경직하여 옥동봉(玉童峯)이라 이름했다. 봉의 서쪽에 간곡(澗谷)이 있고 골짜기 가운데 정사 수칸이 있는데 곧 박사 이돈(李燉)이 구축하였다. 삼봉의 아래에 깊은 못이 있고 백사(白沙)를 금대(襟帶)같이 두르고 경연(瓊然)히 장림(長林)이 둘렸으며, 그 경치가 기절(奇絶)하다. 융경(隆慶) 무진(戊辰)에 진사 이숙인(李淑仁), 생원 권경전, 교수 이령 등이 배를 타고 적벽의 아래에서 유람하는데 송암 권호문이 이를 바라보고 시를 지었다. 이 시의 내용이 망천절벽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추풍(秋風)에 술 싣고 취하고 또 취해, 구로(鷗鷺)를 찾아서 청담(淸談)을 즐기네.
서리맞은 단풍이 비단보다 붉은데, 우후(雨後)의 한파(寒波)가 쪽과 같이 푸르다.
두로(杜老)의 곡강(曲江)이 응당 멀지 않고, 소선(蘇仙)의 적벽(赤壁)에 부끄럽지 않네.
고가(孤歌) 한 가락에 노화(蘆花)가 저물고, 고개 돌려 정행(停行)하니 흥치 감당 못하네.
망천절벽과 낙동강이 빚어내는 고결함과 청아함은 오늘날까지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마애는 진성이씨 안동입향시조인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脩)가 처음 기지를 잡은 곳이다. 본래 진보의 현리를 지내다가 사마시에 합격한 시조 이석(李碩)이 진보에서 영양의 청기현에 옮겨 살았으며 그의 아들 자수가 안동의 마라촌으로 이거하였다. 마을 경로당 앞에 세워진 송안군 유허비문은 다음과 같다.
"府之西數里 許에 洛東江이 굽이쳐 흐르는 산 곱고 물 맑은 麻厓村은 고려 송안군이 계셨던 유허이다. 松安君 公의 휘 자수이니 진성이씨 시조인 贈 奉翊大夫密直司 휘 석(碩)의 長子로서 文武兼全하시어 고려 忠穆王祖에 급제,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신 공으로 安社功臣 號와 함께 封君의 광영을 얻게 되었다. 일찍 진보 이촌(李村)으로부터 마애촌에 이거하신 후 600여 성상이 흐르는 동안 유적이 점차 宋化 되었으나 산수가 佳麗하여 輞川이라고 명명하신 후 낙동강의 방파제로 쌓으셨던 맞무덤과 공이 직접 기거하셨다는 안터내기 등은 오늘에 와서도 옛날을 돌아보게 한다. 안터에 직접 심으신 뽕나무 한 주가 400여 년 동안이나 움이 트고 싹이 돋다가 수령이 다하여 원뿌리는 朽滅되고 후려 묻은 곁가지가 남아 있으므로 先父老들이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우려다 未遑하시었다."
▶ 마애(麻厓)
기암절벽과 낙동강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와 같은 절경을 자랑하는 마애는 마을의 생김새가 영락없는 중국의 망천을 빼어 닮았다고 해서 망천이라 불렀다. 그후 바위를 쪼아 만든 부처가 있어 이를 상징하는 마애로 바뀌었다.
◇ 깻골(桂谷):마을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깻골못이라 부르는 작은 못이 있다.
◇ 마 애 들:마을 앞에 있는 들을 가리킨다.
◇ 망천사지:마을의 동편 낙동강 옆에 있는 절터이다. 주변에 깨어진 기와편과 석조비로사나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석조비로사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이 불상은 팔각연화대좌에 결까부좌한 비로자나상으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얼굴부분의 마멸이 심하다.
▶ 시우실(時雨)
안동권씨와 안동김씨가 모여 사는 이 마을은 농토가 대부분 고지에 있고 하천을 끼고 있지 못하여 가뭄이 드는 해에는 곡물을 수확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따라서 비가 때맞추어 와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하여 마을 이름을 때 시(時) 비 우(雨) 자를 써서 시우실이라 한다.
◇ 당너머:마을 앞 들 가운데 동수나무가 서 있다. 이 당나무를 경계로하여 고개 밖과 안으로 구분한다.
◇ 웃 골:마을 위에 있는 골짜기을 웃골이라 한다.
◇ 딱지골:골짜기에 닥나무가 많아서 딱지골이라 한다.
◇ 앞구렁:동수나무가 서 있는 구릉을 마을 앞에 있다고 해서 앞구렁이라 한다.
◇ 봉운재:마을 뒷산에 옛날 봉수대가 있고 그곳으로 오르는 길목에 재가 있어 그 재를 봉운재라 한다.
막곡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원래 서선면에 속하였다. 청성산이 남쪽을 가로막아 막실, 막곡, 두곡, 두곡촌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탄곡리와 서후면의 교동 일부를 병합하여 막곡이라 하고 풍산읍에 편입되었다. 청성산(靑城山)은 성산(星山), 청산(靑山), 성산(城山)이라고도 한다. 영가지에 따르면 "용산(龍山:서후면 교리 뒷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은 청(靑)과 성(城) 두 자를 합하여 청성산이라 이름하였다. 김학봉(金鶴峯)의 석문정사(石門精舍)와 권송암(權松巖)의 연어헌(鳶魚軒)이 있다. 송암기(松巖記)에 말하기를, '영가는 고칭 산수향(山水鄕)으로 낙동강을 따라서 그것을 논한다면 청량산과 여산과 이 청성산을 병칭하고 나머지는 들은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청량산은 다만 가파르고, 여산은 한갓 아득할 뿐이나 청성산은 이 두 산의 기상을 겸하고 또 멀리 확 트인 경치와 같음이 있겠는가?... 산에는 적송봉(赤松峯), 대학봉(對鶴峯), 상진암(上眞巖), 적홍암(赤虹巖), 목단암(牧丹巖), 계수대(桂樹臺), 취소대(吹簫臺), 구하대(鷗下臺), 세이천(洗耳泉), 한송단(寒松壇)이 있다."고 적고 있다. 막곡 1리는 웃막실과 아랫막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막곡 2리는 미름미, 방갓골, 청석골, 주상골 등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막곡(幕谷)
막곡, 두곡(杜谷), 두곡촌이라고도 한다. 후삼국시대에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이 안동의 합전교(안동시 송현동) 부근에 진을 치고 전투를 할 때에 이 지역의 호족들이 의병을 일으켜 이 마을에서 진을 쳤는데 이때에 커다란 막을 쳐서 주둔하였다고 한다. 막을 친 골짜기가 장관이었는데 이 때부터 막곡이라 불렀다.
◇ 웃막실:마을을 위, 아래로 나누었을 때 위에 있다고 해서 웃막실 또는 윗막실이라고도 한다.
송암선생을 모시고 있는 청성서원이 이 마을에 있다.
◇ 닥박골: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가 많아서 닥박골이라 한다.
◇ 괴실, 괴동:마을 앞에 큰 느티나무가 있어서 괴실이라 한다.
◇ 아랫막실:마을의 아래쪽에 있어서 아랫막실로 부른다.
◇ 불당골:아랫막실의 서쪽 청성산 기슭에 있다. 예전에 절(성산사)이 있어서 불당골이라 이름했다.
◇ 석문(石門):청성산에 있는 큰 바위문이다. 위에 석문정이 있는데 이 정자로 나아가려면 석문을 거쳐야 한다.
◇ 쉰골(오십곡):아랫막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풋굿재:아랫막실의 서쪽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기암절벽 위에 있는 고개이다. 막실에서 회곡 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7월 백중 이곳에서 주로 풋굿을 한다고 해서 풋굿재라 한다.
▶ 청성서원(靑城書院)
조선 중기의 학자 송암 권호문(權好文,1532∼1587) 선생을 추모하는 서원으로 건립되어 매년 춘추향사를 지내고 있다. 서원내에는 강당과 동·서재, 정도문(正道門), 청풍사(淸風祠), 전사청, 신문(神門) 등 7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선조 41년(1608) 사림의 발의로 연어헌지에 창건하여 광해군 4년(1612)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다가 영조 43년(1767)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09년 복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서원은 안동사 편찬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장소로 용만(龍巒) 권기(權紀,1545∼1624) 선생이 편찬한 영가지 한 본을 당초 청성서원에 갈무리 하였다. 1791년 귀와(龜窩) 김굉(1739∼1816)이 서원의 원장이 되어 향중의 여러 선비를 초청하여 영가지를 교정하고 한 부를 정서하여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목판본이 간행될 수 있도록 한 결정적인 모임을 가진 장소이기도 하다.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 석문정사(石門精舍)
학봉 김성일 선생의 정자로 선조 20년(1587)에 건립하였다. 학봉은 청성산 중턱에 이 정자를 짓고 칠백리 낙동강 맑은 물과 자연의 경관을 벗하며 성리학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력하였고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 성리학의 연원을 계승하였다. 석문이란 정사 서쪽에 큰 바위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데 골짜기가 휑하니 비어 마치 문과 같다고 해서 석문이라 이름지었다. 경상북도문화재 자료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 졸루정(拙陋亭)
영가지를 편찬한 용만 권기의 정자이다. 용만이 지은 졸루정기문에 의하면 "처음에 아들인 괄(适)이 나무 기둥 넷을 꽂아서 한 칸 집을 지었다. 그 가운데 벽을 쌓아 북쪽에는 방을 내고 남쪽에는 마루를 내었으니 작으나마 제도는 갖춘 셈이다. 그러나 방의 길이는 4척에 지나지 않고 넓이는 2척에 지나지 못하며 그 높이는 겨우 5척이어서 서려고 하면 머리가 부딪치고 앉으려 하면 무릎이 닿으니 비록 따스하게 거처하고 싶더라도 그럴 수 없었다. 마루의 높이와 비좁음과 길고 짧음도 방과 같아서 겨우 두 사람이 앉을 수 있으나 무릎의 절반은 허공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만약 엉덩이가 크거나 무릎이 긴 사람이 먼저 자리를 차지할양이면 나가 앉고 싶더라도 그럴 수 있겠는가. 이것이 졸루라고 이름지은 까닭이다."
▶ 연어헌(鳶魚軒)
송암 권호문이 자연과 벗하며 거처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이 건물은 청성산 아래 낙동강을 굽어보고 있다. 연어헌 위에는 청성산 중턱에 학봉의 석문정이 있다. 두 분은 청성산을 나누어 가지며 평생을 자연과 벗삼으며 학문에 전념할 것을 기약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현판은 신재 주세붕의 글씨라고 전한다. 송암은 30세 되던 명종 16년(1561)에 사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여러 번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권유받았지만 끝내 사양하고 청성산 기슭에 이 건물을 짓고 유연자적 하였다. 스승 퇴계가 이곳을 찾아 처사적인 삶을 살아가는 송암에게 내려준 시와 산옹이라 자호한 송암 자신의 시판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송암은 퇴계의 처사적인 삶을 가장 잘 실천한 제자 중에 한 사람이다. 퇴계의 문하에서 과거 시험장에 나아가기만 했어도 단번에 급제할 분이 세 사람이 있는데 그 세 사람은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매암 이숙량, 송암 권호문이다고 할만큼 선생의 학문은 뛰어났다.
▶ 미름미(眉陰谷)
송야천을 따라 막곡 1리와 수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200m 정도 나아가면 길가에 미름미라 적은 푯돌을 만난다. 이 푯돌에서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만나는 마을이 미름미인데 미르미, 미산이라고도 한다. 마을은 미르미골을 따라 형성되었으며 좌향은 동향이다. 마을 앞에 송야천을 따라 농토가 펼쳐져 있다. 막곡 1리와 2리의 경계가 되는 마을 남쪽 산등성이에 동에서 서로 뻗어있는 고분군을 찾아 볼 수 있다. 미름미라는 지명은 이 마을 뒤 산정 음지진 곳에 조선 영조 때 출생하여 안동 좌수별감을 지낸 광산(光山) 김광제(金光濟)·미산옹(眉山翁)의 묘가 있어서 미음곡 또는 미산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또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주위에 뽕나무 숲이 아름다워 미르미라 하였다고도 한다.
◇ 미르미골:마을 뒤편에 있는 골짜기이다.
◇ 나징거들:마을 앞에 있는 들이다.
▶ 율리(栗里)
송야교(솔밤다리)를 건너 왼편에 있는 마을이다. 의성김씨 도암(陶庵) 김후(金煦)공이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은둔하였다. 도암 선생은 효우(孝友)로 이름이 높았다. 선생은 시문이 간고(簡古)하여 사우(士友)들로부터 추증을 받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춘추(春秋) 의리가 없어졌으니 다시 세상에 나가 무엇하리오’하고 안동부 서쪽 청성산 아래 낙동강변에 터를 잡고 은둔하였다고 하니 그곳이 바로 이 율리이다. 의성김씨율리종택이 이 마을에 있다.
◇ 율리:밤골이라고도 한다. 마을에 밤나무가 많아서 이름지어졌으나 지금은 밤나무가 많지 않다. 도암 선생이 도연명의 고사에서 인용하여 마을 이름을 율리라 지었다고도 한다.
◇ 방갓골:마을 뒷산에 북쪽으로 갈라진 바위가 있는데 생긴 모양이 디딜방아의 살개와 같이 생겼다 고 해서 방갓골이라 한다.
▶ 의성김씨율리종택(義城金氏栗里宗宅)
이 집은 선조 8년(1630)에 세워진 것으로 운천(雲川) 김용(金涌, 1557∼1620)의 손자인 도암 김후 공의 종택이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5칸이며 口자형의 평면을 갖추었다. 선생의 장인인 광풍당(光風堂) 권제가(權際可) 공이 사위에게 분재한 집이다.
▶ 주상골(周上谷)
송야교(솔밤다리)에서 류병원으로 가는 길을 이용한다. 류병원을 지나 왼편으로 난 소로를 따라 들어가면 광풍정(光風亭) 정자가 있는 마을이 주상골이다. 마을 뒷편 산정에 막곡리고분군이 능선을 따라 펼쳐져 있다. 주상골은 마을 앞으로 안동에서 풍산으로 향하는 34번 국도가 생기기 이전에는 더없이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이었을 것이다.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주변의 산들이 높지 않은 규모지만 어느 한 방향이라도 터진 곳이 없어서 아늑함을 가져다준다. 마을의 좌향은 서북향이다. 마을 이름은 이와 같은 지형적 요인에 의하여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두루 주(周) 자에 위 상(上) 자를 합성한 것으로 마을이 두루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골이 깊고 높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상골(地上谷)이라고도 한다.
▶ 광풍정(光風亭)
이 정자는 조선 중기의 인물인 광풍당(光風堂) 권제가(權際可) 공의 정자로 선생께서 조용히 독서와 사색을 즐기던 장소이다. 선생의 8세손 필린(必麟), 필헌(必憲) 등이 중창하였으며 1922년, 1989년에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자에는 '광풍정', '광풍당', '광풍정중수기' 현판이 게첨되어 있으며 당호는 선생의 호에서 땄다. 광풍정의 배치는 일반적인 정자의 입지조건을 갖추지는 못한 듯하다. 건물의 좌향이 서북향이고 뒤에는 산이 막혀있어서 하루동안 햇빛을 맞을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짧다. 따라서 이러한 지형적인 조건을 잘 고려하여 건축을 함으로써 부족함을 메우고 있다. 먼저 정자가 앉을 야트막한 북사면의 구릉에 산석(山石)을 가져다가 경계를 구분하기 위하여 2층의 기단을 만들었다. 그 위에 자연석으로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건물 바닥이 땅바닥에 거의 맞닿을 듯 바짝 붙어있다. 그러다 보니 정자에서 보는 시야가 막혀있어 답답하다 건너 운곡(雲谷)의 일부만 보이고 사면이 꽉 막혀있다. 은둔생활을 하며 글 읽고 사색하기에는 더없이 좋다. 그러나 건물이 북향하고 있어 추위를 막아야 했기에 누각형으로 짓지 않은 것 같다. 공간구성에 있어서도 주위 여건이 잘 고려되었다. 정면 3칸인 정자는 어칸에 마루를 내고 좌·우 협칸에 구들 놓은 방을 꾸몄다. 왼편 방은 1.5칸의 통으로 널찍하게 꾸미고 오른편 방은 1칸 크기로 잡아 좌·우측 방의 크기가 다르다. 그러나 마루와 접하는 벽면에는 3분합문을 달아 필요시에는 개방할 수 있도록 고려하였다.
▶ 천석골·청석골(靑石谷)
수곡리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마을 앞에 청석이 있어서 청석골이라 한다. 또 옛날 이 곳에 천석군이 살았다고 해서 천석골이라고도 한다.
영가지에 의하면‘만운촌은 일명 두답(斗畓)이라고도 한다. 풍산현의 북쪽 5리에 위치하며 선비 송여원(宋汝源)이 마을의 이름을 만오(晩悟)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마을의 생긴 모습이 말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말논, 마논, 또는 두답이라 이름지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 마을은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천옥(天獄)과 같아 사람살기에는 적당하지 않으나 송여원이 천옥을 닮은 지세를 피하고 사람이 모여 살기 위해서는 거침없이 떠다니는 구름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늦을 만(晩) 구름 운(雲)자를 써서 만운으로 개명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풍산현에 속하였으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 때에 안동군 풍산면에 편입되고 다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우안동 일부를 병합하여 만운동이라 하였다. 그 후 1934년 행정구역변경에 의해 풍산면에 속했다가 현재 풍산읍에 예속되어 있다. 전체 가구수는 94가구에 233명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 만운리를 찾아가는 길은 풍산읍 안교리에 있는 선돌을 기점으로 하여 매곡천을 건너면 신양리와 서미리로 가는 지방도로이고 이곳에서 매곡천을 건너지 않고 하천을 따라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만운저수지를 휘감아 돌면 만날 수 있다. 만운리는 만운저수지를 가운데 두고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1리는 만운저수지 앞쪽을 중심으로 방담, 지담, 평지 3개의 자연마을에 43가구 104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운 2리는 호암, 조파, 추월 등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51가구에 129명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 만운 1리 평지마을에서 약 2km 정도 북쪽에 위치한다. 평지에서 만운 2리로 가는 길은 죽전리로 연결되며 현재 포장을 위하여 도로를 부분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만운저수지를 굽이돌아 좁은 비포장 길을 따라 오르면 길 양편에 커다란 바위가 놓여져 있고 그 사이로 열린 좁은 길이 만운 2리로 연결된다. 왼편 바위에는 선성이씨묘하동천(宣城李氏墓下洞天)이라 쓴 각자를 볼 수 있고 오른편에는 모암(帽巖), 사모암(四慕巖), 호암(虎巖), 도소호계맹락용산(陶笑虎溪孟落龍山)이라 적은 바위를 만난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400m 정도 나아가면 모선루(慕先樓)가 있다. 여러 개의 바위 글씨와 모선루가 있는 이곳이 호암마을이다. 모선루를 지나 현공산 남록에 위치한 마을이 추월이며 조파는 호암마을에서 서북쪽 산간에 위치하고 있다. 자연마을의 성씨 분포를 살펴보면 방담은 안동권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지담은 경주이씨가 중심이 되고 평지는 각성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방담(方潭)
방담은 방담산을 배산(背山)으로 매곡천을 임수(臨水)로 한 아늑한 골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어귀에 네모진 못이 있었으나 갑술년 대홍수에 매몰되어 현재는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가구수는 6가구로 안동권씨가 4호, 경주이씨와 동래정씨가 각 1호로 아주 단출한 마을이다. 예전에는 권강(權 )을 배향한 운계이사(雲溪里社)가 있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효자인 방담(方潭) 권강(權 )이 살았다고 해서 마을의 이름도 방담이라 했다. 또 옛날 마을 앞에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네모난 못이 있었다고 하여 방대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에는 권강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각과 비각 뒤편에 있는 바위에 이열암(怡悅 )이라 새긴 각자(刻字)를 볼 수 있다.
▶ 권강효자비각
방담 권강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각이다. 선생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부모의 병환을 보살피기 위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부모상을 당하자 여막을 얽어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효자비의 전면에는 "孝子贈持平行洗馬權 之閭"라 적고 있다. 비각의 형태는 단칸 맞배지붕이며 비각의 뒤편에 바위에 새긴 암각서가 있다.
▶ 이열암
효자비각의 뒤편에 있는 암각서이다. 화강암으로 된 바위면을 가로 54cm, 세로 18cm 크기로 다듬은 다음 가로 세로 17cm 크기의 글씨를 음각했다. 글은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린다는 의미의 "怡悅 "이라 새겼다.
▶ 지담(池潭)
지담은 방담에서 500m 정도 북쪽으로 올라간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만운저수지의 물막이 제방 바로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다. 매곡천을 사이에 두고 그리 넓지 않은 농경지가 마을의 앞골과 뒷골에 펼쳐져 있다. 이 마을은 경주이씨 문정파의 500년 세거지로 고려말기의 명신 문정공제정이선생(文靖公霽亭李先生)의 유지가 깃 든 곳으로 선생의 신도비와 종회가 자리잡고 있다.
◇ 지담:평지못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예전에 못(沼)이 있었다고 하여 지담 또는 못대미라 불렀다.
◇ 못대미:마을 앞에 있었던 작은 연못이 모가 나서 못대미라 하였다.
◇ 삼백산:못대미 동쪽에 있는 산이다. 삼백사(三百寺)가 있었다고 전하나 현전하지 않는다. 영가지 의 기록에 의하면 삼백사는 풍산현의 북쪽 10리 떨어진 창풍천(昌豊川) 서쪽에 있다. 불가에서 전 하기를 신라가 쇠퇴할 무렵에 임금이 불교를 좋아하여 풍산현에는 절이 300개나 되었는데 고려가 삼한을 통일하여 다 없애고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사찰들을 이 사찰에 통합한 후 이름을 삼백사 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다시 고쳐지어 선비들의 책 읽는 곳이 되었는데 이름을 학록(學麓)이라 한다.
◇ 앞골:마을 앞에 펼쳐져 있다고 해서 앞골이라 한다. 앞골에서 매곡천 건너편에 제정이선생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 뒷골:앞골은 마을에서 바라다 보이나 뒷골은 보이지 않는다. 방담 마을과 산을 사이에 두고 경계 를 이루고 있으며 앞골의 뒤쪽에 있다고 하여 뒷골이라 부른다.
▶ 문정공제정이선생신도비(文靖公霽亭李先生神道碑)
고려말기의 명신 제정 이선생의 신도비이다. 신도비의 기록에 의하면 선생의 초명(初名)은 달중(達中)이며 후에 달충(達衷)으로 개명했다. 자는 중권(仲權)이고 호는 제정이다. 선계(先系)는 신라 아찬(阿餐) 휘(諱) 알평(謁平)의 후손으로 본관을 경주로 삼았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한림(翰林) 정언(正言)을 거쳐 여러 번 옮겨 성균관제주가 되었다. 선생은 문학이 우수하고 도량이 원대하였으며 의리를 살핌에 정밀하였다. 그의 학문은 문채가 밝고 빛났으며 도(道)로써 임금을 섬겼다. 시호는 배움에는 근(勤)하고 고종명(考終命)하였으니 일러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 제정(霽亭)
제정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지은 정자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의 형태를 취했다. 평면의 구성은 전면 반 칸은 누마루를 설치하고 어칸에는 마루를 깔고 좌·우 협칸에는 방을 배치하였다.
▶ 평지(平村)
만운저수지의 위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각성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농사는 대부분 논농사와 고추를 재배한다.
◇ 평지:마을에 평지못이 있어서 평지라고 불렀다. 1956년 풍산수리조합에서 저수지를 만들 때에 마을 전체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자못이라 하였다.
◇ 정자못:마을에 있는 정자 앞에 못이 있어서 정자못이라 하였다.
◇ 여막들:마을 서쪽에 있는 들이다. 송(宋) 효자가 여막을 짓고 삼년동안 시묘(侍墓)를 살았다고 하여 여막들이라 한다.
▶ 망서정(望西亭)
이 건물은 연안송씨들의 정자이다. 특이하게도 건물의 좌향을 서향으로 잡았는데 이는 후손들이 입향조인 송수은(宋水隱)의 묘소를 바라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이다. 지붕은 홑처마를 한 팔작지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평면 구성은 전면에 반 칸의 누마루를 설치하고 어칸에는 마루를 깔고 좌·우 협칸에 방을 부설하여 사계절을 지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 호암(虎巖)
만운 1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각성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농사는 대부분 논농사와 고추를 재배한다.
◇ 호암(범바우):마논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마치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이라 부른다. 바위 면에 도소호계 맹락용산(陶笑虎溪 孟落龍山)이란 8자가 새겨져 있다.
▶ 사모암(四慕巖) 각자(刻字)
모선루 조금 못 미쳐서 오른편에 있는 바위 면에 새긴 암각서이다. 사모암은 세로로 쓰고 가로 글씨로 만촌(晩村)이라 새겼다. 같은 바위의 반대편에 모암(帽巖)이라 새긴 각자가 있다. 모암이라 새긴 것은 바위의 생김새가 사모와 닮아서 붙인 것이다.
▶ 도소호계(陶笑虎溪) 맹락용산(孟落龍山) 각자(刻字)
사모암에서 동쪽으로 5m 떨어진 바위 면에 새긴 글씨이다. 신축(辛丑) 중추(仲秋) 만촌이라 새긴 것으로 보아 사모암과 동일인이 쓴 것으로 보인다. 도소호계란 진나라 혜원법사(惠遠法師)가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 머무르며 한 번도 호계를 건넌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도연명과 육수정(陸修靜) 두 사람을 전송하여 저도 모르게 호계를 건너 범이 우는 소리를 듣고 안거금족(安居禁足)의 맹세를 깨뜨린 것을 깨닫고 세 사람이 서로 돌아보며 크게 웃었다는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맹락용산은 진나라 맹가(孟嘉)가 항온(桓溫)이 손성(孫盛)으로 하여금 그를 놀리는 시를 짓게 하였는데 그 시에 화답한 시가 매우 아름다웠다는 맹가락모(孟嘉落帽)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호암(虎巖) 각자(刻字)
모선루 조금 못미쳐서 오른편에 있다. 바위의 생김새가 호랑이를 빼어 닮아서 호암이라 부른다. 이 바위로 인하여 호암 또는 범바우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바위 면에 가로 글씨로 호암이라 새겼다.
▶ 선성이씨묘하동천(宣城李氏墓下洞天) 각자(刻字)
호암과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만운 1리에서 2리로 연결되는 이 길은 거대한 두 바위 사이로 뚫려있어서 마치 동굴로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선성이씨묘라 함은 근재(近齋) 이전(李 , 1486∼1529)의 묘소가 바로 모선루의 뒷산에 있어서 이렇게 붙인듯하다. 근재공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어진 선비들이 누명을 쓰고 화를 당하자 안동 풍산으로 낙향하였다.
▶ 조파(助坡)
매봉산 북서쪽에 있는 산간마을로 각성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농사는 대부분 담배와 고추를 재배한다.
◇ 조파:마논 서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호암과 대추월에서 조파로 갈려면 험한 산길을 굽이 돌아야 된다. 산이 험하여 고개마루에서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아 여러 명이 모여서 서로 의지 하여 고개를 오른다고 하여 도울 조 고개 파 자를 붙여 조파라 했다.
◇ 큰골:조파 뒷 골짜기가 깊어서 큰골이라 한다.
◇ 복숭아골:복숭아나무가 있어서 복숭아골이라 한다.
◇ 참나무골:참나무 숲이 우거져서 부른다.
◇ 참나무골못:참나무골에 있는 작은 연못이다.
◇ 새골:계단식 논을 새로 만들어 새골이라 한다.
▶ 추월·대추월(秋月·大秋月)
현공산 기슭에 자리잡은 마을로 안동권씨와 충주석씨가 모여 산다. 안동권씨는 복야파의 후손들로 이 곳에서 14대째 이어온다. 예전에는 대추나무가 많았으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만운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현재는 폐교가 되었다. 학교 정문에 조그만 빗돌을 세워 이곳이 만운초등학교였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빗돌의 내용은 1949년 11월 30일 개교하여 1993년 3월 1일 폐교되었으며 졸업생 1,627명을 배출하였다고 적고 있다. 현재는 안동불교대학 수련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 추월(秋月):지금부터 400여 년 전에 권추월(權秋月)이 살았다고 해서 추월이라 하며 또는 이 마을에 대추나무가 많아서 대추월이라고도 한다.
◇ 거절골(巨寺谷)·거지골:추월 뒷편에 있는 골짜기이다. 예전에 큰 절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 절에 거처하는 스님들이 많아서 쌀 씻은 물이 만운못까지 뿌옇게 흘렀다고 한다. 작은 못이 있는데 거지골못이라 부른다.
▶ 권극상재각(權克常齋閣)
만운보건진료소 옆에 위치한 정려각으로 훈련원첨정에 증직된 충신 권극상의 정려각이다. 맞배지붕을 얹은 비각이 세워져 있다. 비각 내부에는“忠臣贈宣略將軍訓練院僉正權克常之閭”라 적은 편액이 게첨되어 있다.
매곡리는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북면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매남리, 우안동, 번곡을 병합하여 매남리의 매 자와 번곡의 곡 자를 따서 매곡이라 하였다. 그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산면에 편입되고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되어 행정구역이 안동시 풍산읍 매곡리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은 매곡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자연마을은 1리에 새터, 어란, 밤실, 나바우 등 4개이고 2리에 번걸, 매날, 미질, 새절골, 막골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231가구에 600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 새터·신기(新基)
매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조선 효종(孝宗) 때 남씨(南氏)들이 살면서 신안동(新安東)이라 하였다. 마을 앞에는 봉황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산에 응고개가 있었으나 홍수(洪水) 때 유실되어 도로가 되었다.
◇ 응고개:새터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를 응고개라 하는데 원님 행차가 드나들었다 하여 원고개라고 도 한다. 고개 안쪽이 늪지대였는데 폭우가 쏟아지자 지곡댁(枝谷宅)이 자기 밭으로 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응고개를 호미로 팠더니 차차 파여서 고개가 없어지고 평평한 도로가 되었다고 한다.
◇ 강변:매곡천변에 자리하였다고 강변마라 하였다.
◇ 강당들:새터 앞에 있는 들로써 봉암서원이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 밤실·율리(栗里)
새터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며 아랫밤실과 윗밤실로 나뉜다. 밤나무가 많아서 밤실로 불리었다고 전한다.
◇ 밤실골:밤나무가 많다고 밤실골이라 붙였다.
◇ 밤실앞들:밤실 마을 앞에 있는 들이다.
◇ 양대밭골:새터에서 아랫밤실로 가는 길목이 되는 골짜기이다. 양대를 많이 심는다고 붙인 이름이다.
▶ 매날·매산(梅山)
새터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매곡(梅谷)에 속했다 하며, 벼 농사(農事)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 금동들:강당과 매날 사이에 있는 들이다.
▶ 미곡(美谷)·미질
막곡(幕谷)·막골 서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1733년경에 형성되었다. 좁은 농토에서 벼농사와 밭농사로 생활하고 있다.
▶ 번곡·번거곡촌(蕃居谷村)
매날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벼 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마을에 명천(明泉)이란 샘이 있는데 숫비척 깊이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 새절골·신사곡(新寺谷)·신사동(新寺洞)
밤실 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1683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옛날 이 마을의 북서쪽 산밑에 조그마한 절이 있어서 이 골짜기 일대를 새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진성(眞城) 이씨(李氏) 집단 부락이다
풍산읍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웃마 또는 상리라고 부른다. 원래 이 지역은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산내면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안부리의 일부와 서선면의 하리, 서후면의 대두서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리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행정구역이 안동시 풍산읍에 상리리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은 상리 1리와 2리, 3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자연마을은 1리에 우렁골, 신구실, 새못골 등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고 2리도 장터, 시묘골, 삼강당 등 3개이며 3리는 권산정, 회촌의 2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전체 266가구에 747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 우렁골·우동(芋洞)
우렁골은 전의 이씨와 예안 이씨 450년 세거지이다. 학가산에서 떨어진 한 갈래 지맥이 30리를 남으로 뻗어 내려 풍산읍의 동쪽을 에워 두른 하지산(下枝山)과 와우산(臥牛山)을 배산으로 하고 굽이쳐 흐르는 곡강을 임수로 한 아름다운 지형에 자리잡았다. 지명은 고려 때 우농사(芋農寺)란 큰 절이 있어서 우렁골이라 불렀다. 현재는 폐사되어 전하지 않으므로 사찰의 규모와 창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 새못골
와우산 남록에 자리잡은 마을로 우렁골에서 뒷산을 넘어 닿는다. 천수답에 물을 대기 위하여 새롭게 조성한 못이 있어 새못골이라 하였다. 그렇지만 홍수에 못이 유실되어 모습을 볼 수 없다.
▶ 신구실·종송(宗松)
우렁골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잘 가꾸어 종송이라 하였다. 풍산읍에서 상리천을 건너 수리로 연결되는 지방도로 초입에 형성된 마을이다.
▶ 시묘골·시묘곡(侍墓谷)
조선 명종 때 선비 김시좌(金時佐)가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다 돌아가시자 묘막(墓幕)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 권산지·권산정(權山亭)
안동 권씨 오동정(梧桐亭) 휘(諱) 안세(安世)의 증손 교수(敎授) 휘 구(耉), 훈도(訓導) 휘 기(耆), 교수 휘 질 3형제가 각각 나무 한 그루씩을 심고 정자를 지어 그 정자 이름을 삼수정(三樹亭)이라 하였다. 삼형제는 부모의 거상(居喪)에 여막을 지어 시묘하며 지극히 애통해 하였으므로 원근(遠近)에서 칭효(稱孝)의 소문이 자자하였다. 때마침 나라에서 큰 행차가 이 마을 앞을 지나는데 삼형제가 정성을 다해 시묘하는 모습을 보고 상제(喪制)의 효심에 감동하여 여막에 권상정(權喪亭)이라는 3자의 현판을 크게 써서 붙여놓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은 그 자리에 정자를 지어 그 때의 일을 기리기 위하여 권산정이라 당호하였다. 이때부터 마을 이름을 정자의 당호에서 이름 붙여 권산정이라 불렀다. 지금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재로 소실되고 마을 이름만 권산정 또는 음이 변하여 권산징으로 부르고 있다.
▶ 도린마·회촌(回村)·고산(孤山)
마을 앞을 흐르는 상리천(上里川)이 이곳에서 돌아간다고 하여 도린마라 하였다.
◇ 고 산:상리천이 마을을 돌아 흐르며 생긴 동그란 산이 외롭게 있다고 고산이라 하였다.
◇ 앙겟골:예안 이씨(李氏)의 재실(齋室)이 있는데 묘(墓)지기의 아내가 시루떡을 하다가 떡이 설었 다는 꾸중을 듣고 자결한 후부터 제사에 시루떡을 쓰지 않고 절편을 쓰게 되었다고 전한 다. 도린마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동짝마·동촌(東村)
도린마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짝마라 한다.
▶ 장터·장기리(場基里)
지금부터 80여 년 전인 1920년대에 이 마을에 5일장이 섰다고 붙인 이름이다. 그후 1980년부터 풍산시장이 확장됨에 따라 그 기능이 축소되고 말았지만 상리리에서 가장 큰 동리다.
서미리를 찾아가는 길은 풍산읍사무소와 풍산농업협동조합 사이로 뚫려있는 지방도를 따라 방향을 잡는다. 이 길을 따라 700m 정도 가면 커다란 동수나무 아래에 있는 안교리 선돌을 만나고 이 곳에서 매곡천을 앞에 두고 갈라지는데 오른편 길은 만운리로 향하고 왼편 길은 신양리, 현애리, 서미리로 연결된다. 신양리는 1·2·3리로 나누어지는데 주막거리에서 현애리로 가는 지방도와 또다시 갈라진다. 이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곧장 나아가면 풍산초등학교 안양분교를 지나 창말에 닿는다. 창말을 지나면 최근에 축조한 저수지를 끼고 언덕을 오르면 저수지를 굽어볼 수 있는 위치에 우뚝 선 비석을 만난다. 영의정문충공서애류선생농환재유적비(領議政文忠公西厓柳先生弄丸齋遺蹟碑)라 전면(前面)에 적은 이 비석은 서애선생이 만년을 서미리에 초가삼칸(弄丸齋)을 짓고 사시다가 돌아가신 유서 깊은 곳으로 농환재는 없어져 그 위치조차 찾을 길 없지만 후손들이 선생을 존모(尊慕)하는 마음을 담아 서미리 입구에 지난 2000년에 비석을 세웠다. 유적비를 지나면 또다시 갈림길을 만나는데 왼편으로 나아가면 신양 3리이고 서미리는 오른편 길로 접근한다. 매곡천을 건너 신양리를 거쳐 서미리까지는 약 8km정도이다. 서미리는 소백산맥의 지맥인 보문산(普門山)과 오적산(五赤山)을 배산으로 현공산(懸空山)을 안산으로 삼아 남향한 터에 자리잡고 있다. 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서미동촌(西美洞村)은 현공(懸空) 오적(五赤) 두 산 사이에 있다. 서애 류선생이 만력(萬曆) 을사년(1605)에 우거하면서 이화동(梨花洞)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적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서미 1리와 2리로 구분된다. 마을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개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서애선생이 이 곳에 우거하면서 이화동으로 개명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그 이전에 벌써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을이 번성하였을 때에는 100호에 가까운 가구가 모여 살았지만 현재는 30호로 줄었다. 성씨 분포를 살펴보면 예천임씨가 가장 많은 20호이며 진주강씨 5호, 단양우씨 4호, 청주한씨 1호로 구성되어 있다. 농사는 쌀농사와 밭농사를 주로 하며 콩과 고추를 경작한다.
▶ 서미골(西薇谷)
서미골은 원래 한자로 서미(西美)라 적었는데 서애 선생이 이곳으로 들어와 이화동(梨花洞)으로 고쳤다. 서애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하회의 옥연정사에 머물면서 임진왜란의 모든 기록을 정리한 징비록(懲毖錄)을 완성한 후 고향을 떠나 서미로 이우(移寓) 하였다. 이때는 선생의 나이 64세인 선조 38년(1605) 9월이다. 이듬해 3월 선생은 이 마을에 3칸 초옥(弄丸齋)을 완성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거처하는데 이때 마을의 이름을 서미에서 이화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바꾼 연유는 기록이 없어서 알지 못하지만 관직에서 물러나 처사적 삶으로 돌아 온 선비가 만년을 지내는 곳의 지명에 아름다울 미(美)자를 쓰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며 자신의 처지를 낮추어 생각하고 늙음의 은유적 표현인 이화(梨花)로 개명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 후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굴욕을 분개하며 고향 소산으로 물러나 청원루에 은거하다가 이 곳 서미로 거처를 옮겨 두어 칸 초가를 짓고‘목석거만석산방(木石居萬石山房)’이라 이름지어 소요하며 울분을 달래기도 하였던 곳이다. 이때 선생은 금산촌(金山村)이라 부르던 고향을 너무 화려한 이름이라 하여 소산(素山)으로 고쳐 불렀으며, 이곳 또한 옛날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치려는 것을 말려도 듣지 않자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았는 것과 자신의 처지가 같다고 하여 다시 고사리 미(薇)자로 바꾸어 서미(西薇)라 이름하였다.
◇ 서원골:서미는 청음 김상헌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서간사(西磵祠)가 있어서 송골, 서원 촌 등으로도 불렸다. 서간사는 목석거 유허비 아래에 있었으나 지금은 강당만 남아 옛 모습을 전하고 있다.
◇ 음달들:서미 마을 앞에 있는 들이다. 현공산과 오적산으로 인해 빛이 잘 들지 않아 음달들로 부른다.
◇ 갈메재, 초마골:서미에서 예천군 산성면으로 넘어가는 험한 고개를 갈메재(葛馬嶺)라 하고 그 아래에 있는 깊은 골짜기를 초마골이라 부른다.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유허비(遺墟碑)
청음 선생의 7대 손인 김학순(金學淳)이 순조 30년(1830)에 세운 비석과 비각이다. 이 비는 거대한 둥근 바위(빗집바우) 위에 세워져 있는데 바위 정면에‘목석거(木石居)’라는 암각서가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71cm, 너비 72cm, 두께 21cm이다. 김학순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영남어사와 안동부사, 관찰사, 도승지, 공조판서 등 40여 년 관직에 몸담았다.
▶ 서간사(西磵祠)
청음 김상헌을 기리기 위하여 현종 10년(1669)에 서간정사를 지어 선생을 배향하였다. 그후 정조 10년(1786년)에 서간사로 사액되었다. 현재는 강당만 남아 있다.
▶ 중대사(中臺寺)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중대바위 아래에 있었던 제법 규모를 갖춘 절이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폐사되고 1958년에 풍산읍 안교 2리 산 13번지에 새롭게 창건하였다.
▶ 중대바위, 중대바우, 탕관바우
서미의 뒷산 중턱에 탕건과 같이 생긴 커다란 바위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중대사가 있었다고 하여 중대바우라 부르고, 생긴 모양이 탕관과 같이 생겨 탕관바우라고도 불린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신성스럽게 받들어지는 골매기와 같은 신성물이다. 실제 이 바위로 인하여 마을에 재앙이 없고 평안하다고 믿고 있다.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높은 관직에 진출한 사람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판사, 군수까지 나왔고 전쟁에 나간 동리 사람들이 전사자 한 명 없었다는 것은 중대바위의 영험 때문이라 믿고 있다.
▶ 인절바우(隱者巖)
서미리로 들어가는 길가 오른편에 있는 바위이다. 안동부사로 부임한 김학순이 7대조인 청음 선생이 나라 잃은 울분을 달래기 위해 머물렀던 유지를 찾고 선생의 강직한 인품과 충성스런 기품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을 찾고 바위에 새긴 글이다. 또한 같은 바위에‘海東首陽 山南栗里’라 쓴 각자를 볼 수 있다. 수양산은 백이숙제가 절의를 지키며 은거하다 굶어 죽은 산을 이름이고, 율리는 중국 심양( 陽) 자상현(紫桑縣)에 있는 지명으로 한 때에 도연명이 은거해 살던 곳이다. 즉 이곳 서미리는 중국의 백이숙제와 도연명과 같이 도의와 절의를 지킨 충신들이 은거한 수양과 율리와 같은 곳이란 뜻을 담고 있다.
▶ 아들바우(祈子石)
인절바우에서 500m 정도 마을쪽으로 올라간 길섶에 있었던 바위이다. 형태는 2층으로 아래에 커다란 바위가 놓이고 그 위에 또 다른 바위가 얹혀져서 입을 벌리고 있는 것과 같이 생겼다. 이 바위를 지나는 사람들이 뒤로 돌아서서 바위를 향하여 작은 돌을 던져 입안으로 들어가면 아들을 낳고 그렇지 않으면 딸을 낳는다고 했다. 지금은 도로를 넓히는 과정에 없어지고 말았다.
▶ 대목재(木峴)
대목재는 행정구역으로는 서미 2리에 속한다. 서미 2리는 서미골 마을 앞 현공산의 북록에 위치한 마을이다. 찾아가는 길은 서미에서 가는 길은 험하여 잘 이용하지 않고 신양리를 지나 만운저수지를 끼고 돌아 가파른 골짜기로 오르면 다다른다. 이 마을에서 산등성을 타고 갈마재를 넘으면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로 이어진다. 현공산을 넘으면 만운리의 대추월이다. 이 마을은 현재 30여 호의 가구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며 가옥의 구조가 산간지역에 자리잡은 지형적인 특성이 잘 반영된 까치구멍집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평해 황씨 동성마을이다. 지금부터 약 350여 년 전에 평해 황씨 황흥세(黃興世)의 부인 삼척 김씨가 풍천면 인금리 다래에 살다가 남편을 잃은 후 살 곳을 찾아 이 골짜기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이 골짜기에는 높은 산이 앞을 막고 이 산을 넘는 고갯길이 험난하여 어린 자식들을 대리고 재를 넘지 못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고개 마루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어 큰 나무가 있는 재란 의미를 지닌 대목재, 목현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 취적헌(取適軒)
이 건물은 황병규가 1895년에 지은 것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구성은 좌우협칸에 1칸 크기의 방을 두고 어칸에는 1칸의 마루를 부설했다. 건물의 전면 반 칸은 퇴를 내어 누마루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원래 소산리는 금산촌이라 했다. 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금산촌은 현의 서편 5리에 위치한다. 앞에 큰 들을 놓고 땅이 기름져 온갖 곡식이 잘 된다.(金山村 在縣西五里許 南臨大野 土地沃饒 百穀皆宜)”고 적고 있다. 금산촌은 소가 누운 형국이라 하여 쇠미 또는 금산이라 불렀다. 금산촌은 풍산현에 속했다가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서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지동, 선동, 가곡리와 풍북면의 괴정동, 발산동, 신촌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소산동이라 하였으며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풍산면, 풍산읍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에는 소산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다. 소산 1리는 본동, 역골, 나바우 등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마을은 학가산의 지맥이 남으로 뻗어내려 일으킨 정산(井山)의 동쪽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앞으로는 기름진 풍산들과 굽이치는 낙동강의 물줄기를 내려다보는 양명하고 시원스런 풍광을 자랑한다. 금산촌을 소산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데에는 병자호란 때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이 낙향하여 은거할 때에 김씨가 모여 사는 마을 이름을 금산촌이라 하는 것은 화려한 이름이어서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소요산(素耀山)의 이름을 따서 소산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곧 깨끗하고 희며 빛나는 산에 둘러싸인 마을이란 뜻을 지녔으며 이는 곧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갈망한 선생의 소박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소산마을에는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김씨 문중이 400여 년을 세거해 오는 동성마을이다. 안동 김씨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김태사(金太師) 선평(宣平)공을 시조로 하는 후안동김씨(後安東金氏 ; 新安東金氏)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은열(銀說)공을 시조로 하는 선안동김씨(先安東金氏 ; 上洛金氏)로 구분한다. 소산 2리는 풍산읍 소산 1리와 풍천면 가곡리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916번 지방도가 마을 앞을 통과하고 길 건너 풍산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소요산 기슭에 자리 잡은 소산 2리는 회당마, 설못, 웃마 등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소산(本洞)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이 낙향하여 은거할 때에 김씨가 모여 사는 마을 이름을 금산촌이라 하는 것은 화려한 이름이어서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소요산(素耀山)의 흰 소(素) 자와 뫼 산(山) 자를 합쳐서 소산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곧 깨끗하고 희며 빛나는 산에 둘러싸인 마을이란 뜻을 지녔다. 이 마을에는 오랜 역사에 걸맞은 다양한 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다. 청원루(淸遠樓,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0호), 삼구정(三龜亭,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3호), 안동김씨종택(安東金氏宗宅, 養素堂,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5호), 선안동김씨종택(先安東金氏宗宅, 三素齋,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6호), 묵재고택(默齋古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5호), 동야고택(東 古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3호), 비안공구택(比安公舊宅, 敦素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11호) 등 7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박물관 학술총서로 발간된 안동의 명현당호 1권과 2권에 수록되지 않은 청원루와 삼구정을 소개한다.
▶ 청원루(淸遠樓)
당초 이 건물은 1520년 평양서윤을 지낸 김반(1497∼1544) 선생이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지은 집이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난 인조 23년(1645)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선생이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풀려 나온 뒤에 이를 누각식으로 중건하면서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이름하였다. 청음 선생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 임금이 굴욕적으로 강화하는 것을 극력 반대한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의 거두이다. 건물의 규모는 2채로 되어 전체칸수가 41칸이었으나 1934년 대홍수에 허물어져 한 채만 남아 있다.
▶ 삼구정(三龜亭)
이 정자는 안동김씨 입향조인 전농정 비안현감을 지낸 득우(得雨) 공의 현손인 사헌부 장령 김영수(金永銖, 1446∼1502) 공이 88세인 어머니 예천 권씨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연산군 2년(1496)에 지은 정자이다. 삼구정이란 이름은 십장생 중의 하나인 거북과 같이 생긴 세 개의 바위가 정자 마당에 있어서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붙인 것이다. 건축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마루는 우물마루로 깔고 4면을 개방함으로써 앞으로는 탁 트인 풍산들과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고 뒤로는 소요산 자락에 그림 같이 앉은 동네를 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 역골(驛谷)·역동(驛洞)
소산 본동의 마을회관과 청원루를 지나면 마을 동편에 목이 긴 질그릇 병(陶甁)과 같이 생긴 동오봉(東吳峯)을 만난다. 이 봉우리를 사이에 두고 본동과 역동은 구분되어 있다. 동오봉은 탁 트인 풍산들을 향하여 예쁘게 엎드려 있듯이 다소곳하고 그 끝자락에 삼구정을 올려놓아 안동김씨 오백년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역동은 동오봉의 동북편 자락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입구에 창평반월연화부수지(蒼坪半月蓮化浮水池)가 있다.
◇ 역 골:본동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역이 있어서 역골이라 부른다. 이 역은 후에 안교리 새역마로 옮기고 역이 있던 자리에 재사( 洞齋)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대뫼등:마을 뒷산에 선조를 모신 성역, 또는 큰 묘가 있다고 해서 대뫼등이라 부른다.
▶ 창평반월연화부수지(蒼坪半月蓮化浮水池)
이 하늘 아래 어디엔가 등불을 밝히는 明堂이 있으니 바로 素耀山 뒷자락의 揭燈穴이다. 이 터는 안동김씨의 성역으로서 大位 諱 係權을 비롯한 여러 선조를 모신 영산이다. 예로부터 선영의 발치에 연못을 이룩하는 것은 복을 머물게 하고 학문과 덕행을 쌓게 하는 슬기의 원천이라는 풍수학설에서 연유하였다. 연대를 알길 없는 옛적부터 있어 온 이 蒼坪半月蓮化浮水池는 후손들의 不敏한 탓으로 수백 여 성상 긴 세월 속에 몹시 황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채 후손 누구나 조상을 뵈옵기 悚懼스런 마음으로 누대를 살아오던 중에 지난 1992년 會奠때 참배 온 후손들이 이 성지를 개수하자는 데 의견을 모으게 되었다. 그리하여 洞所管理運營委員會가 중심이 되어 경향 각지의 僉宗께 이 취지를 알리고 성금을 거출하여 1993년 구월에 이르러 공사를 완료하였다. 이제 명실공히 명당으로서 면모를 갖춤에 따라 조상에게 고유하여 속죄하였고 앞으로 조상 받드는 마음을 다시 이룩한 崇祖事業에 기꺼이 동참하신 僉宗 여러분의 지극한 효심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로써 앞날에는 이 揭燈穴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더욱 밝아지매 자손마다 큰 기운을 얻데 되어 소망하는 대업을 모두 이룩하리라. 서기 1994년 10월
▶ 나바우
풍산읍에서 하회마을로 들어가는 지방도로는 매곡천을 옆에 끼고 풍산들을 가로지른다. 국도와 지방도의 분기점인 이곳은 매곡천을 사이에 두고 동편에는 안교리의 새역마가 자리잡았고 매곡천 건너 서편에 소산리의 나바우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현재 풍산한지 공장과 전시관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곳을 찾는다. 매곡천과 괴정천이 합수하는 지역에 늪이 형성되었고 그 주위에 바위가 도열한 듯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고 전한다. 바위가 나열해 있는 듯한 모양을 따서 마을 이름을 나바우라 했다. 현재 늪과 바위 모두 매몰되어 찾을 길이 없다.
▶ 회당마(會堂)
설못 남쪽에 916번 지방도와 연접해 있는 마을로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소산교회가 마을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앞에 넓은 들이 있어서 벼농사를 주로 한다. 당마 또는 신촌(新村)이라고도 부른다.
▶ 설못
상자 사, 못 지(池) 자를 써서 한자 표기로 사지촌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마을이 형성될 당시 상자만 한 크기의 네모난 작은 못이 있어서 사지동이라 불렀다. 이 못을 1938년에 확장하여 설못이라 불렀는데 마을 앞에 있는 풍산들에 물을 대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웃마
설못 위에 있다고 해서 윗마, 웃마 등으로 불린다.
◇ 골 마:설못 북쪽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다.
◇ 덕 암 골:골마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 뒷 방 들:설못 남쪽에 있는 들을 일컫는다.
◇ 마리끝들:설못 남서쪽에 있는 들로 마을 끝에 있다는 의미이다.
◇ 연 등 골:설못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음 마:햇빛이 들지 않아 음지마, 음마라 한다.
수리는 안동군 서선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상동, 중동, 하동과 풍현내면의 마애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수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안동시 풍산읍에 수리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은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이 동쪽에서 흘러오므로 수동촌이라 불렀다. 현재 행정구역은 수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자연마을은 1리에 하동, 진곡 마을로 구성되어 있고, 2리는 중동 마을 1개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는 전체 157가구에 459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 중동(中洞)·수동(水洞)·수동촌(水東村)
옛 행정 구역상 이 마을이 중앙에 위치한다 하여 중동이라 하였고, 상동(上洞)·중동(中洞)·하동(下洞)이 있었는데 현재 상동은 없고 수동촌이라 하였다. 수동은 수동촌에서 비롯되며, 수동 별신굿과 국신당(國神堂)에 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을 오는데 쫓기는 형편이라 자기를 추종하는 부하가 한 두 사람씩 줄게 되었으며 풍산에 도착했을 때는 5, 6명에 지나지 않았다. 다급한 공민왕은 풍산 동쪽 상리동 산 정상에 허수아비 병정을 곳곳에 세우고 남으로 피신을 하였다. 마침 때가 가을철 아침이라 안개가 자욱했는데 왕을 쫓던 군사가 산 위를 보니 잡아 삼킬 기세를 한 많은 군사가 활을 쏘는 형용을 하고 내려다보고 있어 겁에 질려 후퇴하였다. 공민왕은 무성한 대나무 숲으로 피신하여 무사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국신당을 세워 공민왕의 영정을 모시게 되었고, 해마다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냈다. 별신굿은 조선 중엽 이 마을에 권사도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말 잘 타고 활 잘 쏘아 그 무술이 천하 일품이었다. 어느 날 이 수동 마을에 어디선가 종일 하늘을 울리는 용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불안과 공포에 떨며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때 권사도 청년이 용마를 달래 보겠다고 나섰다. 권사도는 말을 타고 마을을 달려나가 낙동강 어귀에 있는 깊은 웅덩이 옆 큰 바위에서 울고 있는 용마에게 다가갔다. 신통하게 용마는 사도가 가까이 오자 울음을 그쳤다. 사도는 그 용마를 타고 마을로 돌아와 온갖 정성을 다하여 무술을 닦았다. 몇 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 용마를 타고 출전하는 권사도가 국신당 앞을 지나는데 말의 발이 떨어지지 않는 이변이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뜻밖의 변고에 술렁거렸다. 그러자 권사도는 말에서 내려 이는 국신당을 돌보지 않아 신주가 노하신 것이라 하며 그 안으로 들어가 빌었더니 말의 발이 떨어져 전장으로 나가게 되었고 후일 큰 전공을 세워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에 마을에서는 국신당을 재건하여 정월 대보름에는 수동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인근 5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사당 앞에서 굿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 굿을 수동 별신굿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400여 년 계속되었다 한다. 옛날에는 마을 복판에 왕골 논이 있어 용봉(龍鳳) 문체의 돗자리를 짜서 나라에 헌납하기도 했다.
▶ 하동
수동 마을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다고 하여 하동이라 하였다. 이말기·이말계:하동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처음이 마을에 이씨(李氏)가 살았으므로 이씨 마을이라 하다가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시내 계(溪) 자를 써서 이말계로 불리기도 하고 이말기라고도 한다.
◇ 골 안:하동 마을의 안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구 루 미:하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고 구루미골이라 한다.
◇ 수 동 개:수동 앞에 있는 들이다.
◇ 승당골고개:승당이 있었다고 전하며 하동에서 노리를 잇는 고개이다.
▶ 진곡(眞谷)
하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로 참꽃(진달래)이 많이 피는 마을이라 하여 진곡이라 불렀다. 또는 구름이 쉬어 가는 곳이라 하여 구루미라고도 불렀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李如松)이 산혈(山穴)을 끊어서 고갯길이 났다고 한다.
수곡리는 안동군 서선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증수동, 탄곡리, 상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증수의 수 자와 탄곡의 곡 자를 따서 수곡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안동시 풍산읍 수리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은 수곡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자연마을은 1리에 산음, 토일, 두실원 등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고, 2리는 증수, 매일 2개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는 전체 130가구에 359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 증수(增壽)
마을 사람들이 장수(長壽)한다고 하여 더할 증 목숨 수 자를 써서 증수(增壽)라고 불렀으며 1280년 경 안동 권씨가 개척하여 약 300년 살았다고 전한다. 그후 풍산(豊山) 김씨(金氏)가 살다가 모두 떠나고, 해주(海州) 오씨(吳氏) 송암공(松菴公)이 병자호란 때 이 곳으로 낙향하여 터 잡음으로 해서 그 후손들이 동성마을을 이루고 있다.
▶ 산음(山陰)·사느미
마을 주위에 산이 많아 저녁때가 되면 산(山) 그늘이 일찍 온다고 하여 산음이라 한다.
▶ 토일(吐日)·퇴귀(退歸)
처음 마을이 형성될 때에는 독가촌으로 적막하게 살았으나 점차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인구가 불어남에 다라 날이 새는 것 같다하여 토일(吐日)이라 불렀다 하며 일설에 의하면 퇴계(退溪)가 지리(地理)를 밟아 이 곳을 왔다가 돌아 갔다하여 퇴귀(退歸)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다.
▶ 매일골·매일(每日)·매곡동(梅谷洞)
이곳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어 매곡이라 불렀다. 이 마을은 지금부터 200여 년 전인 1800년경에 경주(慶州) 김씨(金氏)가 농막(農幕)을 따라 이곳으로 이주하였으며 이 농막이 차차 커져서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 무정골:매일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신양리는 영가지에 의하면 '만운(晩雲) 서쪽 5리에 있으며 풍산현에서는 10리 떨어져 있다. 옛날에는 부곡(部曲)이 되었다가 지금은 촌리(村里)로 되고 본 현에 예속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후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북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성촌, 창촌, 단곡, 오치, 현애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신양동이라 하였다.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산면에 편입되었다가 현재에는 풍산읍에 속하고 신양 1리·2리·3리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져 있다. 신양리를 찾아가는 길은 안교리 선돌에서 매곡천을 건너서 뻗은 지방도를 따라간다. 이 길은 신양리와 서미리, 현애리로 통한다. 신양 1리는 원들, 잿마, 새납골, 주막거리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72가구에 19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신양 2리는 창마, 당골, 안신양, 선바위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48가구에 134명의 주민이 모여 산다. 성씨의 분포는 각성으로 구성되어 특출한 세력을 지닌 성씨는 없다. 신양 2리는 창마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는 당골마을이 자리잡고 있고 서쪽에 안신양과 선바위 마을이 위치한다. 생업은 논농사와 밭농사가 반반 정도이며 재배하는 작물은 벼와 고추가 대부분이다. 신양 3리는 안마을과 거랫마을, 오티(烏峠)로 나누어지며 각성으로 된 35가구에 95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씨의 분포는 각성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으나 그 중에서도 경주최씨 화수공파가 예안의 싸리골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함으로써 가장 많은 분포를 점유하고 있다. 이 마을은 최근 중앙고속도로가 마을을 관통하면서 자연마을의 환경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변화로는 거랫마을의 해체를 들 수 있다. 거랫마을은 안마을과 거랑을 사이에 두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고속도로가 이 마을을 관통하는 관계로 주민들이 이주함으로써 마을의 해체를 불러왔다. 거랫마을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집들이 다른 곳으로 생활기반을 옮긴 것이 아니라 안마을로 이주하게 되었다.
▶ 원들(院坪)
신양 1리의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로 각성들이 모여서 마을을 형성했다.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감료원(甘了院)이 있어서 상당한 규모를 갖추었으리라 짐작된다. 감료원이 있었다고 해서 원들, 원뜰, 원평이란 이름이 붙었다.
▶ 잿마
원들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각성들이 모여서 마을을 형성했다. 신양안식일교회와 풍산초등학교 안양분교가 있다. 마을 뒤로 작은 고갯마루가 있다.
◇ 잿 마:작은고갯마루가 있다고 해서 잿마, 잿말이라 한다.
◇ 장성배기:잿마 서쪽에 있는 들이다. 옛날 장승이 세워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안 흥:잿마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 영우골:안흥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새납골(鳥納谷)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각기 다른 성씨들이 모여 산다. 신양리와 현애리로 갈라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위에 논·밭이 둘러 쌓여 있다. 들이 넓게 자리잡고 있어서 새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새납골이라 하였다. 조그만 개울을 사이에 두고 안팎으로 갈라져 있다.
▶ 주막거리
신양리와 현애리로 갈라지는 갈림길에 위치한 마을이다. 감료원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곳이어서 주막이 있었다. 주막이 있었다고 해서 주막거리라 하였다.
▶ 창마, 창촌(倉村)
길안면 천지리의 창마와 같이 마을에 큰 창고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창고가 있었던 자리를 창터라 부른다. 이 마을에는 우장군과 말무덤에 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조선 인조 임금 때에 우홍구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청빈을 생활의 신조로 삼는 가난한 선비라 마을 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생활해 오던 중 나이 50에 셋째 아들 영진을 분만하였다. 영진은 태어나자마자 걸어 다녔다고 하며 기골이 장대하고 영리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신동으로 4살 때 벌써 큰 아이 들이 책 읽는 것을 옆에서 듣고 그대로 따라 외웠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일은 7살 때 벌써 동리 씨름판에서 당할 사람이 없었으니 날 때부터 장사의 기골을 타고났던 모양이다. 때는 연산군의 폭정, 인조반정, 병자호란 등으로 나라가 매우 어지러울 때라 영진은 장차 훌륭한 장사로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남모르게 무술을 수련하였다. 한편 영진의 부모인 우홍구 내외는 아들의 비범한 재간을 보고 장차 커서 나라를 어지럽게 하여 집안에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늘 무술 수업을 중지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영진은 아침에 일어나면 마을에서 8km나 되는 학가산을 단숨에 뛰어갔다 와서 아침을 먹었으며 밤이면 마을 앞 느티나무를 몇 번씩 뛰어 넘고 냇가에 가서 그 건너편으로 돌 던지기 연습을 하였다. 지금 영진이 태어난 마을 앞 냇가에 약 200m 거리를 두고 수레바퀴 만한 바위 2개가 있으니 이 바위는 우 장군이 돌던지기 연습을 하던 바위라 전해지며 이 바위를 우 장군이 공깃돌과 같이 가지고 놀았다하여 우 장군의 공깃돌이라고도 부른다. 영진은 나이 19세 되던 해 힘이나 무술의 재간이 비범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때마침 나라는 인조 임금이 청나라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영진은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없음과 부모의 자기에 대한 장래의 두려움을 보다 못해 나라 망함을 탄식한 나머지 원대한 포부를 이루지 못한 채 19세 의 꽃다운 나이로 자결하고 말았다. 그런데 천리인지 조화인지 예천군 보문면 작곡동 속칭 읍실소에서 젊은 장수 우 영진을 태우고 천하를 호령하는 용마가 솟아나 우영진이 거주하는 창마을을 향해 오던 중 지금 예천군 보문면 속칭 오치마을 앞에 와서 자기 주인인 영진의 자결 비보를 듣고 용마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세 번을 울부짖다 그 자리에서 숨졌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우장군과 용마는 하늘이 내리신 것인데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이 용마의 시체를 오치 마을 뒷산에 장사 지내니 지금도 이 무덤터를 말무덤이라 부르고 있다.”
▶ 당골(塘谷)
가뭄이 심한 마을이기에 비를 기원하는 뜻에서 못 당(塘)자를 써서 당곡이라 했다.
▶ 안신양(內新陽)
신양리의 중심마을인 창마의 안쪽에 있다고 해서 안신양이라 한다.
▶ 선바우, 선바위(立巖)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선바위가 있는데서 마을 이름을 선바우라 했다. 현애리의 선바우골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나누어져 있다.
▶ 안마을
서미리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신양 3리 중에서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안마라 부른다.
▶ 거랫마을
안마와 거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고 해서 건너편 마을이란 의미로 거랫마라 한다.
▶ 오티(烏峙)
마을 형국이 마치 까마귀가 먹이를 쪼아먹는 형국을 닮았다고 해서 까마귀 오(烏) 언덕 치(峙)자를 써서 오치라 한다. 오티는 오치에서 음이 변한 것으로 이 오티고개의 동쪽은 안동땅이고 서쪽은 예천 오티이다. 고개마루에 서낭당이 있어 당고개라고도 한다.
▶ 당고개(堂峴)
신양리에서 예천군 오암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이다. 서낭당이 있어서 당고개라 부른다.
◇ 도롱골:당고개로 연결되는 골짜기이다.
◇ 오랑바우:오티 북동쪽 산에 있는 커다란 바위로 서미리 주민들과 함께 신앙의 대상이 되는 바위 이다.
◇ 웃골(上谷):오티에서 오랑바위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로 위에 있다는 뜻에서 웃골이라 한다.
◇ 점골(店谷):오티의 남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예전에 사기점이 있어서 점골로 부른다
원래 이 지역은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현내면에 편입되고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상리, 하리의 일부와 풍북면의 우안동 일부와 풍서면의 소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안교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행정구역이 안동시 풍산읍에 속하였다. 현재 행정구역은 안교 1리와 2리, 3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자연마을은 1리에 역마, 우안, 역전 등 3개이고, 2리에 역마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는 전체 672가구에 1,968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는 풍산읍의 중심지이다.
▶ 역마·역촌(驛村)
1530년 경 홍씨(洪氏)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1800년 경 소산동(素山洞)에 있던 역을 이곳으로 옮겨와 역마라 부르게 되었다.
▶ 어란(漁卵)·우안(愚安)
마을 앞에 갈대로 우거진 늪이 있어서 고기가 모여들고 알을 낳고 부화하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새역마·신역(新驛)
1800년 후반에 역마에 있던 역이 옮겨와서 생긴 마을이다. 역마에 이어 생긴 마을로 풍산들의 북서쪽 운보둑 아래 길게 펼쳐 있으며 주로 풍산 평야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 삼거리:안동·풍천·예천의 세 방면으로 갈라지는 길이 있어 삼거리라 하였다.
▶ 역전(驛前)
1930년대 경북선(慶北線) 풍산역(豊山驛)이 생긴 후 형성된 마을이다. 외지에서 이사온 여러 성씨(姓氏)가 살고 있으며 큰 창고와 도정공장이 있다.
오미리는 원래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북면에 편입되고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괴정리의 일부와 예천군 위라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오미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행정구역이 안동시 풍산읍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행정구역은 오미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자연마을은 1리에 동촌, 미남, 방계미, 서촌 등 4개이고, 2리에 새날, 개거리, 수룡골, 산골, 송지 등 5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는 전체 171가구에 388명의 주민이 생활하는 풍산 김씨의 동성마을이다.
▶ 오릉(五陵)·오미(五美)
오미리의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풍산 김씨 죽암회에서 지난 1994년에 세운 표지석을 만날 수 있는데 상단에는 오미 1리 오미동을 알리는 글씨가 적혀있고 하단에는 마을의 내력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간략하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오미동은 뒤로는 학가산의 한 갈래인 죽자봉을 배산으로 하고 동(東)으로는 아미산을 좌청룡으로 삼고 서(西)로는 도인산을 우백호로 삼은 명당터에 자리잡은 풍산김씨 500년 세거지이다. 풍산 김씨가 이곳에 정착하기는 조선 초기 시조 문적(文迪)공의 8세손 자순(子純)공 때부터이다. 이때에는 마을 이름을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 있다고 해서 오릉동(五陵洞)이라 불렀다. 그 후 의정(義貞) 공이 을사사화 후에 낙향하여 오무동(五畝洞)으로 고쳤는데 능이란 글자가 언덕을 뜻하지만 임금의 무덤을 뜻하기도 해서 이랑 무(畝) 자를 넣어 오무(五畝)로 고쳤다. 그후 의정공의 손자인 유연당(悠然堂) 대현(大賢)공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5형제는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 임금이 팔연오계(八蓮五桂)라 하여 오미동이라는 지명을 하사하게 되자 오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 보푸래미·보림(甫林)
오미리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마을로 아랫보푸래미(下甫林)와 웃보푸래미(上甫林)로 나뉜다. 웃보푸래미는 풍산 김씨의 세덕사(世德祠)가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도림추원사(道林追遠祠)와 도양강당(道楊講堂)은 조선시대 중기의 건물로 유명하다.
▶ 미내미·미남(美南)
오미리의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미남이라 하였다.
▶ 방계미·방감(方鑑)
옛날에는 백양(白楊)으로 불렀다고 하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방감(方鑑)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안동 권씨들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각성(各姓)들이 살고 있다.
▶ 솔가실·솔갖·송지(松枝)
오미골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많은 데서 유래되었으며, 고령(高靈) 박씨(朴氏)의 집성촌이다.
▶ 개거리·개곡(開谷)·용흥(龍興)
용이 올라갔다는 데서 유래하여 용흥(龍興)이라 했다고 전한다. 솔갖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 산골(山谷)
개거리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산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산곡이라 불렀다. 천수답이던 농토가 수리 시설로 인하여 전천후 혹토로 변한 마을이다.
▶ 수룡골·수용리(水龍里)
마을 앞의 들 이름이 수용(水蓉)들인 데서 연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한말까지는 60여 가구의 대부락이 형성되었으나 현재는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수리 시설로 주변 농토가 옥토로 되었다.
▶ 새날·사라(仕羅)·위라
개거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도랑의 중앙을 중심으로 해서 예천군 호명면 본동과 접경이 되며 호명면 구 소재지가 이 곳에 있었다.
죽전리는 원래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북면에 편입되고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관음동, 악대, 악심리, 탑골을 병합하여 죽전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안동시 풍산읍에 속하였다. 지명은 대밭이 있어서 대밭, 대밭골, 죽전이라 하였으며 자연마을은 학대, 악심, 관음절, 대밭골 등 4개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는 전체 120가구에 297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 악심이·화심이·악심(岳心)
옛날에 악심사(岳心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악심(岳心)이라고 하며, 지금은 고추와 담배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 악대·학대(鶴大)
학가산(鶴駕山) 아래 제일 큰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며 고추와 담배를 많이 재배한다.
▶ 관음절·가늠절·관음사(觀音寺)
옛날 관음사(觀音寺)란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며 지금은 고추와 담배를 많이 재배하는 마을이다.
▶ 대밭골·대밭·죽전(竹田)
마을 위에 자생하는 대나무 밭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관음절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리리는 원래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안동군 풍현내면에 편입되고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상리, 마애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하리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안동시 풍산읍에 속하였다. 지명은 풍산읍 소재지의 아래쪽에 있다고 하리라 하였다. 현재 행정구역은 하리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자연마을은 1리에 고창, 중마 등 2개이고, 2리에 시장, 새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는 전체 328가구에 1,021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 고창(高倉·庫倉·高唱)
옛적에 고창정(高倉亭)이란 누대(樓臺)가 있어 고창이라 부르고 있다. 또는 낙동강이 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어 강(江)을 오르내리는 배들의 화물(貨物)을 보관하기 위해 마을 언덕에 창고를 지었다 하여 고창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또 고창(高唱)이란 사람이 살면서 도둑을 잡아 나라를 도왔다 하여 고창이라 하기도 한다.
◇ 한절골·대사동(大寺洞):고려시대에 큰 절이 있어 한절이라 불렀다.
◇ 탑골·탑동(塔洞):한절골과 작은 구릉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어느 시대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석탑(石塔)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10여 가구가 농사를 짓고 있다.
◇ 철뚝밖:경북선(慶北線) 철로가 놓이고 나서 둑 바깥쪽에 생긴 마을이며 풍산 들판에 띄엄띄엄 살던 주민이 갑술년(甲戌年) 수해 때 가옥이 침수되자 높은 곳을 찾아서 집을 지어 생긴 마을이다.
▶ 중마·중말
상리와 하리의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며, 골마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 골마·곡촌(谷村):상리(上里)와 하리(下里) 중간에 있으며 중 마을 남동쪽 작은 골짜기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 배미골·남산(南山):마을 뒤에 있는 산을 남산(南山)이라고 하며, 남산 끝머리라고 하여 "배미끝"이라고 하며 약 300여 년 전에 부락이 생겼다고 한다.
▶ 장터·시장마·시장(市場)
조선시대에는 상리천(上里川)의 하천 바닥에서 장이 서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서 장이 섰다고 한다. 5일 장으로 3일과 8일에 장이 선다.
▶ 새마·새말
갑술년(甲戌年,1934) 대수해에 상리천이 범람하여 많은 가옥이 유실되었으며 이 홍수에 들판이 모래밭으로 되었는데 그 위에 점차 집을 지어 형성된 마을이다.
예천군의 호명면과 보문면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현애리는 대봉산(大鳳山)을 배산(背山)으로 하여 안동김씨가 약 400여 년을 이어온 동성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풍산현에 속하였으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 때에 안동군 풍북면에 편입되고 다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신양동과 신촌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현애리로 거듭났다. 현애리는 풍산읍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30리 정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감애, 뱁재, 장여골, 선바우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가구수는 71개이며 인구는 184명이다.
▶ 감애(甘厓), 현애(玄厓)
현애리에서 가장 큰 자연마을로 본동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배산인 대봉산이 높고 골이 깊어 비옥한 토질을 갖추었다고 해서 달 감(甘) 언덕 애(厓)자를 써서 감애 또는 현애라 했다.
◇ 절 골:감애 북쪽에 있는 산골짜기로 예전에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 뒷 골:감애의 뒤쪽인 절골의 북쪽에 있다고 뒷골이라 부른다.
◇ 길똥재:뒷골 북쪽에 있는 고개로 현애리에서 예천군 보문면 조암리로 넘어가는 재를 일컫는다.
길이 험하여 우마의 똥이 길에 널려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먹뱅이:절골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 원앞들:마을 앞에 있는 들이다.
▶ 안동김씨북예공종택(安東金氏北厓公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7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이 건물은 안동김씨 북애 김후(金 )공의 종택이다. 건립연대는 미상이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처음에는 노씨(盧氏)문중의 종택이었으나 자손이 없어 대가 끊기게 되자 그 집안의 외손인 황씨 집안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황씨 집안도 자식이 없어 대를 잊지 못하자 또 다시 외손인 아주(鵝洲) 신씨(申氏)에게로 인계되고 이들 또한 손이 없자 그의 외손인 북애공이 약 370년전에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장여골(長餘谷)
본동인 감애의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대봉산 자락에 긴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어서 장여골이라 한다.
▶ 뱁재·백아현(百我峴)
현애리에서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백골로 연결되는 길목에 있는 재를 일컫는다. 재가 험하고 깊어서 도적이 자주 출몰하기에 백 명이 모여야만 재를 넘기 위해 길을 재촉한다고 하여 백아현이라 한다. 예전에는 예천장에 가서 소를 팔고 여러 사람들이 모이지 않고는 이 재를 넘어 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 선바우(立岩)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서 있어서 선바우라 한다. 지금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위에 벼락이 떨어져서 부서지고 땅속으로 일부가 매몰되어 옛날보다 작은 규모로 세워져 있다.
회곡리는 안동군 서선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청사동, 상계곡동, 증수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회곡리라 하였다. 그후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안동시 풍산읍에 속하였다. 지명은 회나무가 있다고 해서 회곡리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본마, 아랫절, 갈매절, 딱지골 등 4개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는 전체 94가구에 251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 회곡(檜谷)
옛날부터 제일이라 불려오다가 조선시대 때 동구 밖 거리에 큰 회나무가 있다고 회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아랫절
옛날 마을 뒷골에 만석(萬石)을 하는 부자가 살았는데, 작은 절을 아랫편에 세웠기에 아랫절이라 하였다고 하며 회곡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 갈매절·갈매사(葛梅寺)
딱지골 북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날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인근 마을 중에 지세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 딱지골
회곡 북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딱나무가 우거진 골이 있었기에 마을 이름을 딱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뱃가·낙연(洛淵)
회곡 아래에 있는 마을로 앞에 낙동강(洛東江) 물이 흐르고 낙연이라는 깊은 소(沼)가 있는데 옛날에는 돛단배가 오르내렸으며 닻을 내려 머무르고 곡식과 소금 등 여러 가지 상거래가 이루어지던 곳으로 지금까지 뱃가로 부르며 단호동으로 건너가는 나룻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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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좋은 자료 유익했습니다.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