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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7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마태오 7,21-29
왜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마음이 평화로울까?
미국의 첫 번째 수도회 창설자요,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첫 번째로 시성이 된 분이 엘리자베스 앤 시튼입니다.
그녀는 19세에 부유한 사업가 윌리엄과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고 잘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와 병마의 어려움이 그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남편의 사업 파트너이자 친구인 필리치는 이탈리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이탈리아 좋은 날씨에서 병도 고칠 겸 사업의 도움도 받을 겸 이탈리아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병자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검역소에서 몇 달을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때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이때 느꼈던 평화를 남편이 검역소에서 나오자마자 죽었어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필리치의 집안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성모 마리아와 성체에 대한 열망이 깊어졌습니다.
그렇게 미국으로 돌아와서 개종에 대한 갈등에 시달렸습니다.
마음에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면 평화로울 것 같았지만, 그러면 독실한 성공회 집안인 가족들과는 멀어져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사회적, 재정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805년 3월 14일 가톨릭교회에 입교합니다.
개종 후 엘리자베스는 사회적 배척과 재정적 어려움을 포함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녀는 자녀를 부양해야 했고 자신의 신앙과 필요한 수입을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볼티모어의 존 캐롤 대주교를 비롯한 여러 영향력 있는 성직자들의 격려를 받아 그녀는 학교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예상하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평화로웠습니다.
마치 자기 행동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두 딸의 죽음과 지속적인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1809년에 미국 최초의 종교 단체인 성 요셉 사랑의 수녀회를 설립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시튼 수녀회로 교육사업을 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수천 명의 수녀들이
마더 시튼의 뜻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 가톨릭 교구 학교 시스템의 토대를 마련하고 여러 세대의 교육자와 수녀들에게
영감을 준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 9월 14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최초의 미국 원주민 성인으로 시성 되었습니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개인적인 비극에도 신앙에 관한 깊은 탐구가 어떻게 자신과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오랜 평화와 도움을 남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행동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집을 짓는데 하나는 반석 위에, 하나는 모래 위에 짓습니다.
집이 행동입니다.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 집은 뜻에 따라 좌지우지됩니다. 여기서 뜻은 두 종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뜻은 내가 스스로 창조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나의 창조자로 인정할 것인지 두 선택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행동의 의도가 나의 뜻인지, 내 창조자의 뜻인지에 따라 모래가 될 수도 있고 반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은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반석이 된 것입니다.
반석은 나의 죽음 뒤에도 지속되지만, 모래는 나의 죽음과 함께 끝납니다.
그런 행동은 아무것도 남길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뜻에 행동의 기초를 삼는다면 벌써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뜻에 기초한 행동은 내가 죽으면 끝장납니다.
그러나 더 오래가는 무엇의 뜻을 따른다면 나의 행동은 그 무언가가 지속되는 동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평화롭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의 박치기왕, 김일은 당시 먹고살기 힘들었던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자기 머리가 깨져 더는 박치기를 할 수 없을 때도 그는 국민을 위해 박치기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평화로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 어리석게도 그때 알았습니다.
‘온 국민이 내 박치기 한 방에 이렇게 통쾌함을 느끼는데 내가 감히 박치기를 멈출 수 있을까. 이 한 몸 아프다고, 조금 힘들다고 어찌 못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박치기로 인해 많은 이들이 웃고 기뻐하고 행복했었다면 나 역시도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김일의 처음 박치기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고 나중 박치기는 사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도와 뜻을 가지고 하느냐가 행위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 박치기가 국민의 뜻으로 이뤄진 다음에는 국민이 다 사라지기 전에는 그 의미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먼저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러다 부모의 뜻을 따라줍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 양심 시스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녀의 어리광과 마음은 부모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
그 행동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따름이 반석처럼 오래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 부모가 하느님이라면 당신을 위해 행한 뜻은 영원히 지속합니다.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물 한 잔 준 행위도 영원한 보상을 받는다는 말이 이 뜻입니다.
내가 하는 행동보다는 나는 나를 나 자신을 창조한 창조자로 여기는지, 아니면 나의 창조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가 나에게 바라는 뜻이 있을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 매일, 아니 매 순간 그분이 나에게 원하는 뜻을 찾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성경이 제일 좋겠지만, 아직은 『하.사.시.』를 매일 읽으며 그 뜻 안에 머물려고 합니다.
매일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청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면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내가 느끼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7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마태오 7,21-29
<말의 품격>
살아갈수록 점점 더 크게 느끼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말, 언어의 중요성입니다.
정말이지 말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유창하고 거침없는 말, 설득력있고 호소력 있는 말을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다른 무엇에 앞서 진실된 말, 진심이 담긴 말, 그래서 살아 숨쉬는 말, 말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선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말이 정말 중요한 것이, 말은 곧 한 인간 존재의 인격과 삶, 영혼과 정신을 외부로 드러내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말은 한 인간 존재 안에 거처하시는 주님 현존을 반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 생각없이 던진 말로 큰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수로 내뱉은 말로 인해 두고 두고 후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난 지방 선거 때만 해도 보십시오.
생각없이 ‘툭’ 하고 던진 말 한 마디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인생 한 방’이라고, 말 한 마디 실수한 탓에 어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쌓아온 자신의 정치 기반이 뿌리채 흔들렸습니다.
말을 시작하기에 앞서 언제나 진지하게 숙고해야겠습니다.
입에서 빠져나간 말은 이미 ‘엎지른 물’과 같습니다.
다시 주워 담을수가 없습니다.
입을 열기 전에 늘 고민해야겠습니다.
내가 하는 이 말로 인해 혹시 단 한 사람이라도 상처를 입는 것은 아닌지?
내가 하려는 이 말은 누군가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말인지?
주님께서 우리 인간 각자에게 베푸신 여러가지 은총의 선물 가운데, 말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큰 선물입니다.
잘 다스리고, 잘 사용해서 이웃들을 치유하고, 이웃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라고 부여하신 선물이 곧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엄청나게 쏱아낸 말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숙고 작업을 한번 해보면 좋겠습니다.
언행일치가 되고 있는 말입니까?
혹시라도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은 말은 아닙니까?
이웃의 입가에 미소를 돌게하는 희망의 언어입니까?
이웃을 영원한 생명으로 안내하는 구원의 도구입니까?
“사람은 홀로 떨어진 섬과 같은 존재다.
사람이라는 각기 다른 섬을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말이라는 교각(橋脚)이다.
말 덕분에 우리는 외롭지 않다...
수준이나 등급을 의미하는 한자 품(品)은 구조가 흥미롭다.
입 구(口)가 세 개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싸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
말은 마음을 담아낸다.
말은 마음의 주인이다.” (‘말의 품격’,이기주, 황소북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강론>
(2024. 6. 27. 목)(마태 7,21-29)
<신앙은 생활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1-27).”
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 또는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 즉 ‘삶으로’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신앙생활은 말로 하는 생활도 아니고, 생각만 하는 생활도 아니고, 온 삶으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신앙은 생활”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인간 구원’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희망하지도 않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사람은, 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지도 않고, 들어가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2) ‘사랑’을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들’을 실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1코린 13,2).
<사랑이 없으면 신앙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3) 그렇다면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라는 22절의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언을 한 것과 마귀를 쫓아낸 일과 많은 기적을 일으킨 일은 다 무엇인가?
우리는 주님께서 그 일들을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예언이니 ‘거짓 예언’입니다.
또 마귀를 쫓아낸 일과 많은 기적을 일으킨 일도,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이니, 그 일들은 모두 ‘속임수’, 즉 ‘가짜’입니다.
23절의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라는 말씀은, 그들이 행한 예언과 마귀를 쫓아낸 일과 기적을 일으킨 일이 모두 ‘불법’이라는 뜻인데, 그 일들은 ‘가짜’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거짓 예언과 거짓 기적을 행하면서 감히 ‘주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4) 뒤에 이어지는 24절-27절에서는 ‘실행’이 건물의 기초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표현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뿌리’ 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리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고,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건강하고 튼튼하게 뿌리를 내린 사람은 같은 사람입니다.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을 무너뜨리는 비, 강물, 바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말하는 ‘환난과 박해’입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과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사람은,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미련 없이 금방 신앙을 버립니다.
그러나 믿음과 삶이 하나인 사람, 즉 ‘신앙이 생활인 사람’은 환난이나 박해를 잘 참고 견디고, 결국 그것을 극복합니다.
여기서 각자 자기 자신이 자기 집을 짓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인생이라는 집은 주님이 아니라, 내가 짓고, 내가 삽니다.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것이지만, 그래도 내 인생은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살아 주시지 않고, 내가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