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은 일곱 지파의 땅 분배
수 18:1-10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
2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자가 아직도 일곱 지파라
3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4 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5 그들이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되 유다는 남쪽 자기 지역에 있고 요셉의 족속은 북쪽에 있는 그들의 지역에 있으니
6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이 곳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으리라
7 레위 사람은 너희 중에 분깃이 없나니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이 그들의 기업이 됨이며 갓과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저편 동쪽에서 이미 기업을 받았나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이니라 하더라
8 그 사람들이 일어나 떠나니 여호수아가 그 땅을 그리러 가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그 땅으로 두루 다니며 그것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여기 실로의 여호와 앞에서 너희를 위하여 제비를 뽑으리라 하니
9 그 사람들이 가서 그 땅으로 두루 다니며 성읍들을 따라서 일곱 부분으로 책에 그려서 실로 진영에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나아오니
10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하여 실로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고 그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분파대로 그 땅을 분배하였더라
수 18:1-10 / [나머지 땅을 나누다] 온 이스라엘 공동체 식구들은 실로에 모두 모여 만남의 장막을 쳤다. 실로는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온 뒤였기 때문에 그곳에 그 거룩한 장막을 칠 수 있었다. 2)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직도 자기 몫으로 부지하고 살아갈 땅을 분배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땅을 나눠 받지 못한 지파는 일곱 지파나 되었다. 3) 그래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입을 떼었다. `우리 조상들이 섬기고 받들어 모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우리들에게 땅을 주시지 않았더냐? 그런데도 어째서 아직까지 꾸무럭거리고 땅을 차지하지도 못하고 살아간단 말이냐?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지낼 작정이냐? 4) 각 지파에서 세 사람씩 뽑도록 하여라. 그들을 이곳 저곳으로 두루 보내어 그곳 땅의 형편이 어떤지 또 차지하고 살아가기에는 어떤지 그 사정을 자세히 알아보고 돌아오라고 일러주겠다. 5) 그런 다음에는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야 할 것이다. 유다는 지금처럼 계속해서 남쪽을 자기 땅으로 알고 살아라. 요셉 집안도 마찬가지로 지금처럼 계속해서 북쪽을 자기 땅으로 알고 살아라. 6) 그리고 그 나머지 땅을 일곱 부분으로 나눈 지적도를 그려라. 그렇게 분할하였으면 그 지적도를 내게 가져오너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고 계시는 바로 이 자리에서 내가 각각 너희들에게 어떤 지역이 차지하고 살아갈 몫으로 분배될지 제비를 뽑겠다. 7) 하지만 레위 지파 사람들은 너희들과 함께 땅을 나눠 받을 수 없다. 레위 사람들이 차지할 몫이란 다름 아니라 여호와를 모시고 섬기며 살아가는 일이다. 제사장 일을 하는 것만이 당연히 그들의 몫이다. 그리고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갓 지파 사람들과 르우벤 지파 사람들과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은 벌써 요단강 건너 동쪽에 그들의 몫을 분배받아서 살고 있다. 여호와의 종인 모세가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고 살라고 오래 전에 나눠 주신대로이다.' 8) 그래서 각 지파에서 뽑힌 사람들이 앞으로 차지하여 들어가 살 땅의 형편이 어떤지 지적도를 그려 오려고 떠날 때 여호수아가 또 한번 그들에게 당부하였다. `너희는 들어가 살 그 땅을 이곳 저곳 다니면서 두루 살펴보아라. 그러면서 몫 그 지세가 어떤지 잘 그려 오너라. 내가 이곳 실로에서 너희들이 어떤 지역을 차지하고 살아갈 수 있을지 제비를 뽑아 정해 주겠다. 여호와 앞에서 공정하게 제비를 뽑을 테니 아무 염려 말고 잘 다녀오도록 하여라.' 9) 각 지파에서 대표로 뽑힌 남자들이 길을 떠났다. 그들은 앞으로 살아갈 그 땅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각 지역이 어떻게 생겼는지, 또 그 밖에 여러 가지 사정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물론 각 지역에 퍼져 있는 각 성읍들의 형편을 여호수아가 지시한 대로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 잘 기록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지적도를 작성한 뒤에 실로의 진지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되돌아왔다. 10)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계시는 곳 실로에서 제비를 뽑았다. 제비에 뽑힌 대로 여호수아는 아직 땅을 몫으로 분배받지 못한 각 지파에게 한 몫씩 떼어 주었다.
일곱 지파가 아직도 분배된 땅을 갖지 않으려고 지체하고 있자 여호수아는 책망하는 모습으로 그들을 행동하게 합니다.
실로에 세운 회막(1-2) 여호수아의 진영이 길갈에서 실로로 옮겨진 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땅을 나태함과 게으른 모습으로 차지하지 않았던 일곱 지파가 있었습니다. 유다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에게 땅을 분배했던 여호수아는 전쟁 때문에 세우지 못했던 예배의 장소인 회막을 다시 세웁니다. 여호수아는 무엇이 우선인지 내면의 질서가 정렬되었던 지도자였습니다. 이처럼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 영적인 일인 것입니다. 또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빨리 해야 다음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로 가져오라(3-7) 여호수아는 땅을 차지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일곱 지파의 느긋함과 나태한 모습을 여호수아는 지적하고 책망합니다. 신앙생활과 영적 원리에 있어 경계해야할 일들 중 하나는 안주하고 안일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앞을 향해 전진하라고 합니다. 땅을 정복하고 차지하고 분배받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욱 작용되어야 할 자세와 태도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안일함에 빠지지 않도록 단호히 지적합니다. 그리고 각 지파당 세 사람을 뽑아 남은 땅의 지도를 그려 오도록 합니다. 따라서 선발된 사람들은 쉬지 않으시고 일하시는 주님의 모습처럼 사명과 푯대를 향해 부지런히 진군 하는 사명자의 바람직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땅을 얻고 차지하는 것입니다.
분파대로 분배된 땅(8-10) 하나님의 명령과 부르심에 순종한 선발된 사람들은 책임을 다하였습니다. 정복해야 할 낯선 땅을 다니며 그 지현을 그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매우 두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그려 온 지도로 남은 일곱 지파는 기업을 그 분파대로 분배하여 받습니다. 땅을 배정 받음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곱 지파에게 기업에 대한 그림을 그리도록 하신 것은 마음 속에 비전을 품게 하신 것입니다. 자신들이 거할 땅의 아름다움을 보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그 땅에서 살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꿈을 주십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마음에 그림을 그리며 살게 하십니다.
일본 제국대의 맥을 잇고 있는 현재의 국립 도쿄대는 일본에서 그야말로 대학 중의 대학입니다. 이 대학 정문에 들어서면 100년도 더 됐을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줄 서 있는, 그래서 저절로 전통과 역사의 힘이 느껴지는 길을 걷게 됩니다. 일본의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계절에 관계없이 단체로 견학 와서 걷는 길, 그리고 일본의 지도자를 꿈꾸는 젊은 대학생들이 매일 걷는 길입니다. 꿈을 잉태하라 그리하면 해산하리라. 어느 교수의 어록입니다.
< 설 교 >
얻은 사람, 얻을 사람
수 18:1-10
세상에는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이란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성공을 얻은 사람과 성공을 얻지 못한 사람, 돈을 벌어 재력을 얻은 사람과 돈을 벌지 못한 사람, 공부를 해서 많은 지식을 얻은 사람과 여러 사정으로 공부를 하지 못해 지식을 얻지 못한 사람 등 다양한 부분에서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이 존재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도 <얻은 사람들>과 <얻지 못한 사람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시작으로 여러 성읍들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이 완전히 정복되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땅을 분배해 줄 것을 명하셨습니다. 아직 정복되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었지만, 땅을 분배하라고 하신 이유는 여호수아가 늙었으므로 그가 살아 있을 때 땅 분배를 마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수아 13장 1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때 땅 분배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열 두 지파 중에서 르우벤 지파와 시므온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절반은 요단강 동쪽에서 이미 땅을 분배받은 후였으므로, 요단강 서쪽에서 땅을 얻어야 할 지파는 아홉 지파와 므낫세의 남은 절반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이 모두 정복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제비뽑기 방식으로 실제로 땅을 분배받은 지파는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그리고 므낫세의 남은 절반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아직 일곱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자가 아직도 일곱 지파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본문은 <이미 땅을 얻은 다섯 지파>와 <아직도 땅을 얻지 못한 일곱 지파>로 나뉜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리하여 <땅을 얻은 사람들>과 <땅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온갖 가슴 아픈 사연은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의 차이에서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얻은 사람들>은 그 얻은 것을 쳐다보는 기쁨에 도취되어 살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얻지 못한 사람들>은 그 좌절감이 보통이 아닙니다. 이들은 얻은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좌절합니다. 세상에는 얻고자 한 것을 얻지 못하여 슬퍼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얻으면 행복하고, 얻지 못하면 불행하다>는 단순 비교가 과연 옳은 것이겠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종종 한 지역 교회들의 연합 집회를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 곳에서 다양한 교회의 교인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규모가 있고 재력도 있어서 예배당도 짓고, 교육관도 짓습니다. 이 교회는 교회와 물질과 능력을 <얻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 교인들의 화젯거리는 건축 규모, 건축비, 건물 구조, 시설 등 입니다.
그런데 그런 대화를 듣고 있는 작은 교회 교인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합니다. 이 분들은 자신들의 교회는 <얻지 못한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소위 <얻은 교회> 교인들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른 교회 교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는 셈입니다. 더구나 만약 그런 이야기를 하는 마음 깊은 곳에 은근히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뜻이 숨어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교만으로 이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얻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세상에는 <얻었기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도 많습니다. 재물 때문에 삶의 질서가 무너진 사람들은 차라리 가난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권력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들은 차라리 평범한 소시민이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얻은 사람들은 행복하다>는 명제가 언제나 옳은 게 아닌 것처럼, <얻지 못한 사람은 무조건 불행하다>는 명제도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얻지 못했던 불행 때문에 더 깊은 영성과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정한 삶을 지켜간 이들이 많습니다.
1558년 1월 15일, 비쩍 마른데다 얼굴은 창백하고, 붉은 빛이 감도는 금발을 가진 스물다섯 살의 처녀가 웨스트민스터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든 영국인들은 그녀가 과연 유럽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영국을 건져낼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불안해했습니다. 이 처녀는 다름 아닌 엘리자베스였습니다.
그녀의 약점은 볼품없는 외모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 <앤 볼린>은 본래 시녀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헨리 8세>는 첫 부인인 <캐서린>에게서 <메리>를 낳은 후 이혼했고, 앤 볼린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태어날 때부터 시녀의 딸이라고 천대받았습니다. 그녀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겨우 네 살이 될 무렵 어머니 앤 볼린은 간통죄로 처형되었고, 그 때부터 엘리자베스는 사생아 취급을 받으며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뛰어난 외모도, 멋진 환경도 가지지 못한 불행한 처녀가 왕위계승자로 등장했을 때, 영국인들이 못미더워 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염려는 기우였습니다. 45년에 걸친 그녀의 치세가 끝났을 때, 영국은 유럽 최강의 나라로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될 초석이 탄탄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열세 살이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초상화를 이복 언니인 메리에게 보냈습니다. 초상화에 동봉된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창피하지만, 마음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창피하지 않습니다. 이 우아한 그림은 세월이 가면 색깔이 바래고 낡아지고 더러워지겠지만, 그 마음만큼은 아무리 빠른 세월이라 해도 따라잡을 수 없고, 아무리 빠른 발이라 해도 밟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불우한 환경에 놓여 있었고,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던 열세 살 소녀에 불과했지만, 좌절하기는커녕 <마음만은 따라잡을 수 없고, 밟을 수 없다>는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외모보다 마음, 환경보다 마음이 더 소중함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얻지는 못했지만, 마음을 어떻게 가지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역사에 길이 남는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비록 얻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가꿈으로써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앞에서 연합 집회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곳에는 아주 작은 교회 교인들 있습니다. 규모가 있는 교회 성도들이 예배당이나 교육관 짓는 일을 자랑하는 맛에 산다면, 예배당이나 교육관을 크게 지을 일이 없는 개척교회나 농촌교회 성도들은 무슨 기쁨으로 사는 것일까요? 그런 교회의 목사님들은 어려운 교회를 묵묵히 지켜가면서 받는 은혜와 잔잔한 보람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의 이야기에서 더 깊은 감동을 느꼈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도에 대해 더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에게 질문해 보았습니다. <나는 많이 얻은 목사인가? 아니면 얻은 게 없는 목사인가?> 그 대답은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저는 얻은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이 귀한 땅끝교회 교우님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가진 게 많습니다. 예배당과 교육관, 홀리조이센터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매주일 멀고 가까운 곳에서, 어린 아이로부터 어르신들까지 많은 교우님들이 오셔서 함께 예배합니다. 동료 목회자들 중에 저를 부러워하시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저는 많이 얻은 목사입니다.
<많이 얻은 목사>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제 마음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기쁨과 감사>였습니다. <기쁨과 감사>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뜻밖에 또 다른 하나의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위기의식>이었습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것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위기의식을 느끼는 첫째 이유는 얻었다는 자부심이 저를 교만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이미 얻었으므로 더 할 일이 없다는 허탈함에 빠질 위험성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를 <얻어 들이던 화려한 한 때의 과거>에 도취되어 살게 만듭니다. 이것은 우리 삶을 고착화시켜 죽은 인생이 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위기의식에서 벗어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본문에 나오는 <아직 땅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한 일>을 배우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는 땅을 얻지 못한 일곱 지파를 독려하여 얻지 못한 것을 탄식하지 말고, 지도를 그려오라고 말합니다. 3-4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아멘.
지도를 그려오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도를 놓고 땅을 분배하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6절을 보세요.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이 곳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으리라> 그러면 실제로 어떻게 되었을까요? 9-10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가서 그 땅으로 두루 다니며 성읍들을 따라서 일곱 부분으로 책에 그려서 실로 진영에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나아오니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하여 실로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고 그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분파대로 그 땅을 분배하였더라> 아멘.
땅을 얻지 못한 일곱 지파가 사람을 보내어 지도를 그려올 때, 땅을 이미 얻은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이미 얻은 그 땅을 바라보면서 흡족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 우리는 땅을 얻었으니, 정말 다행이야. 봐라. 저 땅들을......이 얼마나 좋은가?> 그들은 이미 얻은 것에 심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얻은 것에 취해서 사는 삶>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의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얻은 것들을 끌어안고 그것들을 얻던 때의 무용담이나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교만해질 뿐 아니라, 더 이상 새로운 일을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도를 그리러 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미래에 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지도를 그리고 있을 뿐이지만, 그들의 마음만은 그 땅을 실제로 정복하여 얻게 될 미래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얻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에 얻을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앞에서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에 대해 말씀드렸지요. 그 중에서 <얻지 못한 사람>이 <얻지 못한 사람>인 채로 남아 있으면 불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얻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얻을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불행하지 않습니다. 가슴이 뛰고, 흥분으로 가득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이미 얻었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더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얻지 못한 사람>으로 방치하면 안 됩니다. <얻을 사람>으로 변화시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을 <얻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얻을 사람>으로 만들어 끝까지 역동적 인생을 살아간 분의 예로 바울 사도를 들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14절에서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아멘.
이 말씀을 고백할 때 바울 사도는 감옥에 계셨습니다. 그는 이미 많은 곳에 복음을 전했고, 교회들을 세웠으며, 나이도 많았기에 이제 은퇴를 한다고 해도 그를 비방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얻은 사람>이 아니라, <얻고자 하는 사람, 얻을 사람>으로 살기를 갈망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끝까지 달려가고자 한 것이 바울의 모습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엘리자베스 1세 여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의 치세로 나라가 점차 부강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보석 반지마다 <셈페르 에어뎀, semper eadem>이라 새겨 넣었습니다. 그 뜻은 <항상 동일하게>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얻었든지, 얻지 못했든지 상관없이 늘 마음을 비우고 미래를 향해, 언제나 동일한 태도로 살길 원했습니다.
<얻은 것 때문에 교만하지 않고, 못 얻은 것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마음의 화폭에 미래를 위한 지도를 그리는 태도>는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저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지도를 그리는 태도로 살아가기로 다짐하였습니다. 앞으로 이미 얻은 것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제게 남은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실 가나안을 기대하는 흥분으로 살고 싶습니다. 과거로 열린 문은 닫고, 미래를 향해 문을 활짝 열고 싶습니다.
지도를 그리고, 그 지도를 펴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로, 의미 있게 살아가는 데 대한 기쁨으로, 온 몸의 신경이 살아 일어나 날마다 짜릿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이런 마음으로 지도를 그리는 것을 보시거든 <그 정도 얻었으면 되었지, 뭘 더 바래? 왜 그렇게 욕심이 많은가?>라고 비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가 자신의 삶에 진지한 데 대하여 경의를 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지도를 그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을 앞에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인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땅 끝에 이르는 세계 지도를 그리셨습니다. 그 세계 지도는 장차 복음으로 정복할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에 따라 거룩한 정복전쟁, 영적 전쟁이 지금도 수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도를 그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일곱 지파가 지도를 그리러 갈 수 있는 이유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도에 그린 땅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늙었고, 그는 머지않아 세상을 떠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셔서 땅을 주실 줄로 믿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지도를 그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가 지도를 그리기 원하십니다. <믿음으로 그리라. 내가 그 땅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멋진 지도를 그리시길 기원합니다.
<이룰 수 없는 꿈, The Impossible Dream>이란 노래를 아십니까?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 싸움, 이길 수 없어도 /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 길은, 험하고 험해도 //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 힘껏 팔을 뻗으리라 //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 내가 영광의 이 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 죽음이 나를 덮쳐 와도 평화롭게 되리 //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 가네 / 저 별을 향하여>
장엄하면서도 슬픈 노래입니다. 장엄한 이유는 불가능한 꿈을 향해 나아갈 각오를 담고 있기 때문이요, 슬픈 이유는 불가능한 꿈이기 때문에 몸이 찢기고 상할 수도 있다는 실패에 대한 예감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장엄해야 하지만, 슬퍼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얻은 사람이라 교만하지도 않고, 얻지 못한 사람이라 좌절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위하여 꿈을 꾸며 나아갈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곱 지파가 그려온 지도는 지도로 남지 않고, 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도에 그렸던 땅을 모두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지도를 그리려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산지를 향해 나아가길 원합니다.
축복의 그림을 그려라
수 18:1-10
A. 축복의 그림에 대해서
1. 축복의 그림, 지도 / 구체적인 꿈, 비전을 가져라
축복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축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 행복하기 원하는 사람은 행복의 그림을 그리고 성공하기 원하는 사람은 성공의 그림을 그리고 축복받기 원하는 사람은 축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s ; 1596~1650)는 “믿어라.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생각하고 그린대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트리분이라는 잡지에 페기 풀이라는 여성이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 직전에서 고침 받은 기적적인 사건을 간증으로 실었습니다. 이 여성은 암으로 병원에서도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다고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낙심하고 있는 이 여성에게 어떤 사람이 쟁반에 물을 떠와서 마시라고 주었습니다. 그래서 물을 마시려고 컵을 드니까 그 컵 밑에 ‘포기하지마세요’라는 글이 쓰여진 종이가 한 장 있었습니다. 그는 그 글을 보고, ‘그렇다. 내가 죽을 때 죽더라도 끝까지 암과 싸워 투쟁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창 밖을 보니 토끼 한 마리가 누군가 던져준 오렌지를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내 몸에 암 세포가 있는데 정상적인 세포, 백혈구가 암 세포를 갉아먹을 것을 믿습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암세포가 하나씩 없어지고 정상세포가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종일 기도하면서 그 모습을 마음에 그렸습니다. 점점 병이 호전되면서 암세포는 사라지고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암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고 절망하고 포기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잡지에 자신의 간증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무엇이든지 당신이 상상한대로 믿고 진심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라고 말했습니다.
건강문제, 가정문제, 사업문제나 인생에 닥친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십니다.
미국에서 ‘자기개발프로그램’으로 선풍적인 화제를 몰고 온 베리 파버(Barry J. Farber)가 쓴 신간서적 『지금 당장 시작하라』라는 성공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지침을 쓴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는 성공시나리오를 마음속에 그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승리하며 자신있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 마음속에 믿음을 가지고, 신념을 가지고 살고, 사업계획을 그리고, 또 그것을 생각하면서 이루어갑니다. 성공적으로 끝나는 장면을 항상 생각하십시오.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성공적으로 끝나는 장면을 항상 머릿속에 그려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그림을 그린다고 그대로 될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습니까? 오늘 본문말씀에도 똑같은 내용의 진리를 우리에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또 광야를 통해서 연단한 이스라엘 백성들, 이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전쟁에서 싸워 이겨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축복의 기업으로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지만, 그냥 얻은 것이 아니라 쳐들어가서, 싸워서, 정복해서,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에, 그 땅을 지파별로, 기업대로 분배하게 되었습니다. 열두 지파 중에 다섯 지파, 르우벤, 갓, 므낫세, 에브라임, 유다는 벌써 자기들이 원하는 땅을 다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일곱 지파, 베냐민, 시므온,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아셀, 단은 자신들의 땅을 차지할 생각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지체를 했습니다. 그들은 땅을 정하면 마무리 전쟁을 해야 하는데, ‘전쟁에 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해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가나안 족속들은 전쟁에 패했기 때문에 서로 힘을 합쳐 다시 한번 전쟁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 여호수아는 나머지 일곱 지파에게 빨리 땅을 차지하지 않으면 땅을 빼앗긴다고 책망을 하고 원하는 땅의 그림을 그려 가지고 오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그림을 가지고 기도하고 제비를 뽑아 분배해주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머뭇거리고 지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결정하고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축복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행복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성공에 대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을 가지고 ‘축복에 대한 그림을 그려라’라는 제목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너희는 그 기업에 상당하게 땅을 그려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책에 그리고 돌아오니 이스라엘 자손의 분파대로 땅을 분배하였더라’고 하셨습니다.
B. 축복의 그림을 그려라
1.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 지체함, 게으름, 머뭇거리고 주저함
/ 축복을 받으라, 진취적으로 나가서 취하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 회막을 세웠으니 …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수 18:1~3)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로라는 곳에 모여서 회막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우선시하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수 18:3)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힘을 합쳐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취하러 가야하는데 왜 머뭇거리고 주저하느냐는 것입니다.
다섯 지파는 이미 자신들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일곱 지파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용기가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과 의심에 사로잡혀 앞으로 전진하지 않았습니다. 기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땅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지체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용기를 잃었습니다. 맥이 빠졌습니다. 게으릅니다. 그리고 마음에 결단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성공하는 사람은 결단을 해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도 결단을 해야 합니다.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향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새벽기도를 하고, 금식기도를 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건축헌금을 드리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축복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까 말까 머뭇거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다닌 지 일년이 지나고, 삼년이 지나고, 오년이 지나고, 십년이 지나도 아직까지 축복받지 못하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소원성취를 하지 못했습니까? 이유는 지체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장 21절 말씀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이나 주저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둘 중에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를 보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지식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지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출 22:29), 축복받는 것(신 1:21),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갚는 것(신 23:21), 말씀을 듣고 지키고 순종하는 것(시 119:60), 주를 좇는 일(눅 9:61~62)을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겁이 많아서 주저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생각도 불가능, 보는 것도 불가능, 행동도 불가능, 그 사람의 결과는 결국 불가능입니다.
미국의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 1803~1882)은 “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정복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정복이 있습니다. 용기를 가진 사람, 담대함을 가진 사람만이 반드시 그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성공학 권위자인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 ; 1883~ 1970) 박사가 『적극적인 태도에 대한 성공』이라는 책에서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차이는 그들의 태도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매사에 적극적인 정신적 자세를 가졌지만, 실패한 사람은 모든 일에 다 소극적인 정신적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승리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간성에 달려있습니다.
성공과 승리와 영광은 용감하게 도전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대개 실패하는 사람들은 ‘나는 틀렸어’, ‘나는 못해, 되는 일이 없어’ 하며 너무 쉽게 포기하고 절망합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 결론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의 씨앗을 뿌리니 실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비록 그가 실패하였다 할지라도 다시 성공하기 위해서 도전을 합니다. 실패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서 더 크게 역사를 이루어 나갑니다. 도전해서 결국 마지막에 그 모든 운명을 뒤바꿔놓게 되는 것입니다.
경영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80:20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다 안다고 합니다. 어느 곳이든지 다 그 사회의 구조는 피라미드 형태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윗부분의 20%가 지도자입니다. 그 나머지 80%는 성공과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만주에서 똑같은 조건에서 100명의 가족을 이주시켜 땅을 똑같이 나누어 주고 분배를 했다고 합니다.
3년, 5년, 10년이 지났습니다. 100명의 가족 중에서 20%가 나머지 80%의 땅을 다 차지하고 그 나머지는 소작인이 되어있더라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땅을 계속해서 사들여 결국엔 80%도 다 차지했는데 게으르고 제대로 일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땅을 팔아서 소작인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 비전을 가진 사람, 열심히 일하는 사람, 창조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성공이 주어집니다.
오늘 참석한 여러분, 성공적인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간판사업을 시작한 원영한이라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딸과 세 식구가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서 간판사업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주인이 찾아와 가겟세를 두 배로 올려주던지 아니면 가게를 비워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데 이대로 살아서는 안되겠다.’ 하는 마음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수입이 적어도 반드시 십일조는 꼬박꼬박 드리고 ‘하나님, 나를 통해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왕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 가게가 아니라 땅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땅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1층은 가게, 2층은 살림집이 있는 건물도 짓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돈도 없고, 땅도 없고, 건물도 없는 사람이 믿음만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침 교회에서 성전 건축을 한다고 해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먼저 정성껏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매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가게에 자꾸만 손님이 늘어서 매상이 늘고 재물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땅도 사고, 건물도 짓고, 자신이 꿈을 가지고 계획한 대로 다 이루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하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큰 역사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그 믿음을 통해서 결과와 결실이 주어지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먼저 ‘하나님, 나에게도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너희는 그 기업에 상당하게 땅을 그려서 가져오라
- 축복의 그림을 그려라, 구체적인 꿈을 그려라
“너희는 매 지파에 삼 인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 기업에 상당하게 그려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 여호수아가 땅을 그리러 가는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그 땅으로 두루 다니며 그려가지고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여기 실로에서 여호와 앞에서 너희를 위하여 제비 뽑으리라”(수 18:4~8)
여러분, 그냥 막연하게 그림을 그리지 말고 가서 두루두루 다녀보고 나서 그림을 그리라는 것입니다. 확인을 하고, 조사도 하고 난 뒤에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땅을 사겠다는 사람이 가보지도 않고 땅을 사면 사기를 당합니다. 확인도 해보지 않고 알아보지도 않고 일을 했다가 나중에 사기 당하고 도난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가서 확인을 해보고 발로 밟아보고 그 다음에 정확하게 그림을 그려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여호수아가 그 각 지파 대표를 선정해서 실제로 다녀보고 자세히 둘러보고 조사하고 그 다음에 그림을 그리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기업에 상당한 대로, 원하는 대로, 형편에 맞는 대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림을 그리라고 구체적으로 명령을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기도할 때, 또 우리가 인생의 설계를 할 때, 막연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구체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계획을 세워서 하나님께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3장 17절 말씀에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목자와 조카 롯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그 후에 조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말씀입니다. 바라보고 밟고 다닌 그 곳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가서 그 땅을 밟아서 종과 횡으로 행하고 그것을 확인하고 체험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축복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또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상을 받을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응답 받을 것을 믿어야 합니다. 건강 주실 것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영광 받으실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존경받는 28대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 ; 1856~1924)은 “우리는 꿈에 의해 성장한다. 모든 위대한 사람은 꿈꾸는 자였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속에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꿈을 가지고 성공을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노력하지만 희망이 없는 사람은 노력하지 않습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겨우겨우 먹고 살아도 만족합니다. 거지가 왜 거지입니까? 꿈과 희망이 없기 때문에 거지입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맴돌다가 인생을 끝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우리의 목표와 삶의 꿈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면서 나갈 때에 그것이 결국 결실로,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그려지는 대로 성공을 생각하고 성공을 그리고 성공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은 성공합니다. 실패할 것을 생각하고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나는 이제 망했구나.’ 하고 실패를 생각하고 실패를 그리는 사람들은 그 실패가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교철이라는 성도의 남편이 갑자기 실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금요철야예배에 참석을 해서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그냥 막연히 기도하지 말고 서원기도하고 또 마음속에 결단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니까 그냥 막연히 기도하는 것이 미안한 것 같아서 그는 마음속에 결단을 내리고 은행에 가서 적금을 찾아서 하나님께 먼저 헌금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제 남편이 실직을 했습니다. 더 좋은 직장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하나님, 아파트를 분양하는데 그 아파트 분양에 당첨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 아파트 지도를 가지고 어디가 가장 좋은지 생각했습니다. 101동 10층에 있는 아파트가 남향으로 되어있어 제일 좋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지도를 달력에 붙이고 쳐다보면서 “주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고 새벽에도, 낮에도, 밤에도, 생각날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이 되기 전에 직장에서 실직한 남편이 먼저 직장보다 더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었고, 월급도 30% 더 많아지게 되었고 아파트도 자기가 기도한대로 101동 10층이 정확하게 당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를 했습니다.
그림을 그려서 간절히 집중적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막연하게 생각하고 희망만 갖지 마시고 그림을 그리고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본격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3. 책에 그리고 돌아오니 이스라엘 자손의 분파대로 땅을
분배하였더라 - 그림대로 기업을 받음, 꿈을 꾼대로
축복받음
“그 사람들이 가서 그 땅으로 두루 다니며 성읍들을 따라서 일곱 부분으로 책에 그리고 실로 진에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나아오니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하여 실로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고 그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분파대로 땅을 분배하였더라”(수 18:9~10)
일곱 지파 대표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땅을 두루 다니면서 확인하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땅의 산과 계곡과 길을 구체적으로 그려가지고 지도책을 만들어서 여호수아에게로 가지고 왔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제비뽑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그림을 그렸을지라도 그 그림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도록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곱 지파는 여호수아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그림을 그리지 않고, 가서 확인하라고 하면 확인하지 않습니다. 게으르고 낙심하고 의심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일곱 지파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말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명령에 순종해서 그 땅을 정탐하고 두루 다니면서 더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지도책을 만들어서 가져왔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해서 여호와 앞에서 제비뽑고 이스라엘 분파대로 땅을 분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나머지 전쟁들도 모두 이기게 하시고 일곱 지파도 좋은 땅을 차지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가나안 땅을 전부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공했습니다. 승리했습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한사람도 빠짐없이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16장 9절 말씀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농부가 씨를 뿌리고, 잘 개간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고 태양을 주시고 벌레가 없게 해주셔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역사하도록 끝까지 하나님 앞에 순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인물들, 신약에 나타난 인물들은 끝까지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고 은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나, 가정, 직장, 모든 시작과 끝까지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합니다.
카이저 철강 창업자 헨리 카이저(Henry John Kaiser ; 1882~1967)는 “나는 항상 최고가 되는 것을 꿈꾼다. 만약 성공할 거라고 꿈꾸지 않는다면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등하기를 꿈꾸고 노력하는 사람은 일등은 못해도 이등, 삼등은 합니다. 내가 잘될 것이라고 믿고 꿈꾸는 사람, 부자 될 것이라고 믿고 노력하는 사람은 부자 근처에는 갑니다. 건강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건강에 점점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최고가 되겠다. 최선을 다하겠다.’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네 할 일을 다하고 그 나머지는 하나님의 뜻에 맡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가 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악한 마귀가 공격하고 시험에 들게 하고 교만에 빠지게 하고 불신앙에 빠지게 합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 지도자 연구센터가 있습니다. 그 지도자 연구센터에서 미국의 최고 경영자들과 성공한 사람들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그 연구결과 세 가지 공통점이 나왔습니다. 첫 번째 조건은 그들에게 큰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냥 먹고 마시며 되는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큰 일을 하겠다는 큰 비전이 있는 사람이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끈기와 인내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포기해도 웬만해서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끈기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독실한 기독교 신자, 올바른 신앙과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끝까지 성공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이 시간 비전이 있고 인내가 있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 최고 경영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복 받는 사람이 되고 성공한 사람이 되고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신일덕 장로님(남, 63세)은 충북 제천 보양면 장평리에서 태어나 철도 공무원인 아버지 밑에서 평범하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농사꾼이 되기 위해서 제천농업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냇가에서 수영을 하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소나기를 피하려고 들어간 곳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교회 처마 밑에 들어갔다가 교회에서 들리는 찬송소리를 듣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들 10여명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뭔지 모르는 포근하고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 전도사님을 찾아가 “앞으로 교회를 나오고 싶습니다. 무언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시켜주십시오.” 하고 봉사를 자청했습니다. 그러자 전도사님이 새벽에 종을 칠 사람이 없다고 하셔서 그것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나와서 새벽기도 하기 전에 종을 쳤습니다. 종을 치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는 꿈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 때로는 손바닥에 피가 흘러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년 동안 종을 쳤습니다.
한 일년 쯤 되었을 때, 꿈에 흰 옷 입은 예수님이 나타나서 “너는 왜 새벽마다 종을 치느냐?” 하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잘 보이고 복을 받으려고 종을 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으냐?” 하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는 농사꾼이 되기 위해 농업고등학교까지 갔는데 엉뚱하게도 “하늘을 날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자기도 모르게 말한 것입니다.
농업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자신의 집에 하숙하고 있던 철도청 직원이 서울 집에 다녀오더니 대학 원서를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그 원서를 보니 국립항공학교 원서였습니다. 돈도 없고 집안이 어려워 학교를 갈 형편이 안 되었는데 항공학교 원서를 보니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면 등록금이 무료라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문득 예전에 꿈에서 자신이 하늘을 날고 싶다고 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시험을 쳤습니다. 그런데 국비장학생은 학생 총 20명 중에서 10명만 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사비생으로 합격했으면 등록금을 내야했으므로 포기했을 텐데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내가 일년 동안 교회에서 종을 쳤는데 설마 하나님께서 나를 섭섭하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기도했는데, 정말 국립항공학교에 국비장학생으로 들어가서 졸업하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무사고로 비행기를 조종하다 은퇴하고는 후진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새벽에 일년 동안 종을 쳤다가 항공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고 농사꾼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 40년 동안 하늘을 날고, 이제는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학교 선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공짜가 없습니다. 새벽에 종을 쳐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여러분, 무언가 하나님께 봉사해야 합니다. 충성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불타는 소원을 가지고 꿈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면 하나님께서 믿음대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C.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믿고, 축복의 그림을 그려서,
그림대로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음속에 축복의 그림을 그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부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돈도 많이 버시고, 자녀들도 모두 공부 잘해서 훌륭하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축복 받아서 전도도 많이 하고, 여러분 모두 복 받은 사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수아 없이는 가나안을 점령하지 않는 백성들
수 18: 1-10
◈ 시작기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시며 만물을 주관하시는 주님은 사랑하시고 관계하시고 기다리십니다. 만물 안에서 티끌처럼 허덕이면서도 성취와 결과에 매여 있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늘보다 높은 주님의 지혜처럼 주님을 찾고 구하고 기다리게 하옵소서. 묵상하며 주님을 바라는 영원의 시간을 아름답고 귀하게 여기며 주님께 나아가게 하옵소서. 해야 할 일들에 둘러싸여 해치우는 묵상이 아니라 주님을 알고 주안에 거하는 것이 존재의 첫 번째 이유가 되게 하옵소서. 주의 보혈로 저의 영혼을 정결하게 씻어 주시고 성령님 가난하고 목마른 심령으로 주님을 찾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주해: 성령님의 조명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기업으로 받은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는 또 다른 사명이 주어진다.
각 지파는 그들의 인구수대로 땅을 분배받았다. 유다지파는 가장 넓은 지역을 분배받았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즉 요셉지파도 넓은 땅을 분배받았으나 지파수에 비하면 땅이 적었다.
그래서 같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하는 여호수아에게 땅을 더 분배해 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큰 민족이 된 에브라임 지파에게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하였다.
요셉지파는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 않고 그 곳의 가나안 족속들은 철 병거가 있다고 불평하였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다시 한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고 하였다.
가나안 왕 33명을 죽이고 점령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으면 감사와 잔치 분위기일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1) 애굽의 노예와 광야에서 살때에 비하면 너무나 좋은 것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지파들은 감사함으로 받고 남아있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는 대신에 그저 넓은 땅을 받기를 원했고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는 피곤한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2)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거나, 점령을 했을지라도 그들을 종으로 삼아 편안한 삶을 선택했다.
2. 이스라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 회막을 세웠으며 가나안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다(1)
1) 오늘 본문은 이렇게 하나님이 하신 일과 실로에 회막을 세운 밝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2) 그러나 2절부터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7지파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3.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기업을 받는데 수동적인 7지파를 책망하며 적극적으로 기업을 분배받기 위하여서 그 땅을 두루다니며 일곱 부분으로 나누고 그 땅을 점령하러 가라고 책망한다.
수 18:3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수 18:4 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1) 여호수아는 7지파에게 첫 번째로 “하나님이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라”고 하며, 점령하러 가기 위해서 그 땅을 그들의 기업에 따라 지도를 그려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4. “가나안 땅이 정복되었다(1)”라는 말씀에 이어 곧바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지체하지 말라(3)”는 말씀이 나온다.
1) 하나님이 정복하여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가나안을 쫓아낼 때 하나님은 함께하시며 그들을 쫓아낸다.
3)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아직 죄의 세력이 활동하고 있다.
-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안에 거함으로 이 땅에서 누려야 한다.
5.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는 말씀 중간 중간에 레위 사람의 기업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화제물임을 밝히는 말씀이 나온다.
1) 레위 사람은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이 그들의 기업이 된다(7).”
2)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의 대표로 하나님을 섬기지만 동시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레위 지파처럼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임을 보여준다.
- 이스라엘이 받은 참된 기업은 눈에 보이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 레위 지파는 12지파에게 하나님이 기업임을 가르치며 기억나게 하는 사역을 감당한다.
6. 7지파의 사람들이 일어나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그 땅을 두루 다니며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실로 진영에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나아왔다.
1) 여호수아는 실로의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분파대로 그 땅을 분배하였다.
수 18:10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하여 실로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고 그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분파대로 그 땅을 분배하였더라
7. 여호수아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겠다고 하였고(6절)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다 그 땅을 분배하였다.
1) 함께 가나안 정복전쟁에 참여하여 요단 강을 마른땅으로 건너고 여리고 성을 함께 점령하고 아이성에서 함께 패배하고, 태양과 달이 멈추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함께 가나안을 점령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간격이 있다.
2) 여호수아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가나안을 점령하였다.
-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을 점령하라고, 개척하라고 말한다.
- 기업을 분배해 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분배하여 준다.
3) 누구보다 공로가 크고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지만 “자기 의”가 없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
8. 반면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을 점령하고도 각 지파들은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타협한다.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는 대신에 종으로 삼아 노역을 시켰다.
1) 7지파는 여호수아가 알아서 땅을 분배하고 차지하게 하겠지...하면서 마냥 기다렸다.
2) 각 지파별로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땅을 점령하기를 지체하였다.
3) 이는 여호수아가 없이는 말씀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영적 미성숙을 보여준다.
- 여호수아와 함께하면 가나안과 싸워 이기지만 여호수아 없이는 나가서 싸우려고 하지도 않고, 싸워 이기지도 못하거나, 싸워 이겨도 종으로 삼으면서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
4) 즉 여호수아의 지도력이 미치지 아니하면 변질되고 타협하여 가는 영적인 미성숙 상태에서 기업을 받는다. 그래서 여호수아때에 우상을 점점 섬기다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사사기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9. 교회가 함께 할 때, 목회자와 함께할 때, 예배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중요하다.
1) 그러나 셀만 모일 때, 각 성도가 따로 있을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점령하러 가는 믿음이 중요하다.
2)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겸손하여서 가르침을 받고 영적으로 더 자라가야 한다.
3) 영적 미성숙 상태에서 기업만 받아 챙기면 시간이 지나면서 사사기 시대로 들어가게 되며, 영적인 흑암을 다음세대에게 물려주게 된다.
◈ 나의 묵상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나안을 파죽지세로 점령하는 것을 보면서 이 세대는 준비되었다고 착각하였다. 그러나 정작 지파별로 가족별로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점령하는 영적 싸움을 싸우는데 무력하다. 힘이 없거나 힘이 있으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는 대신에 종으로 삼아 주인 노릇, 하나님 노릇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함으로 주 안에 거하는 여호수아 1장을 스킵하고 가나안 땅을 점령한 명성교회나 통합 교단이나 한국교회와 참 닮았다. 교인 수가 줄어 든다고 큰 일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큰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말씀에 순복하여 주안에 거하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거하지 못하면서 분배받은 기업...그 기업을 차지할 자격도 힘도 없다.
명성교회 세습을 허용한 통합 교단을 비판하기에 바쁜 나다. 그러나 내가 그 곳에 소속되었고 그 탐심에서 벗어난 자가 아닌 것이 더 마음 아픈 일이다. 남을 판단하기는 쉬운데 탐심과 타협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힘들어 한다. 주님의 십자가를 던져 버린 채, 목회를 하고 한국 교회를 하나님의 뜻대로 세워가겠다는 사사기 시대에 속하여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먼저이다. 나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서야 가나안 땅을 기업을 받는다 해도 헛되다.
하나님의 심판이 한국 교회에 임하고 있는데. 예레미야 때처럼 심판을 수용하는 대신에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돌보심만을 우기는 교회 지도자들 속에서, 나 또한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사망이 되었다.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이니 사망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헌신과 열심과 결과로 생명의 길을 걷는다는 착각 속에 있던 나를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요 긍휼이다. 한국 교회를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요 긍휼이다.
다만, 그 심판 속에서 긍휼의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처럼, 여호수아처럼 깨어 있기를 기도한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점령당하지 않고 어찌 가나안 땅을 점령하랴~ 그렇지만 힘으로 능으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좌절하고 낙심하고 한숨을 쉰다. 그래도 욥처럼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을 바란다. 휘장 사이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산 길은 생명의 길이지만 찾기 어려운 길이고 옆길로 자꾸만 빠지는 길이다. 그래도 오늘도 십자가로 나아가 휘장 사이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산 길로 간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옆길로 빠져 헤매일지라도 십자가를 통해 가는 아버지 집을 향한다.
이미 차지한 땅을 점령하지 못하는 지파들, 이미 열어놓으신 새로운 산길로 나아가지 못하며 누리지 못하는 우리들...하나님은 ‘어느때까지 지체하겠느냐’라고 하신다. 지체하지 않고 십자가로 나아간다. 여호수아 없이 어떻게 싸울지,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십자가로 향한다.
천로역정처럼 언제 아버지 집에 도착할지, 얼마나 해매다 도착할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세상 나라를 떠나 하나님의 나라를 멀리서 보고 걸어가는 크리스챤이 되고 싶다. 그리고 넘어지고 헤맬지라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나 하늘나라를 바라며 날마다 걸어가는 그 길을 간다. 예수님이 목자되시고 성령님이 인도하시니...나는 그 길을 모르지만 주님이 걷게 하시고 아버지 집에 도착하게 하실 것이다. 나는 한숨을 쉬며 걸어가는 이 길이지만 하늘 아버지는 오늘도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시고 품어주신다. 그리고 그런 하늘 아버지를 나는 용납한다. 내 안에 사랑과 겸손이 되시고 나의 생명되신 주님을 찬양한다.
◈ 묵상 기도
주님, 인간의 죄성이 왜 이렇게 깊은지요.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그 죄성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우리를 낮추셔도 낮아지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저 자신을 봅니다. 여호수아를 떠나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믿음이 없이 기업을 분배받습니다. 주님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그렇고 제가 그렇습니다. 주님, 치열한 삶,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땅임을 잊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이 좁은 길을 계속 걸어가게 하여 주십시오. 묵상이 외식과 합리화가 되지 않게 하시고 이 자체로 생명의 길을 걸어간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님이 날마다 말씀의 검으로 조명하여 주시고, 비참하게 되는 용기로 십자가와 심판대 앞에 서게 하시며 나를 용납하신 하나님을 용납하는 참된 용기와 겸손을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나안 족속들에게 다시 점령을 당해가는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무게중심 옮겨지다
수 18:1~7 / 옥성석 목사(충정교회)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이 곳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으리라(수 18:6)
제네시스 쿠페란 스포츠카가 있습니다. 2008년 10월 정통 스포츠카를 표방하며 처음 출시되자 첫 달에만 1000대가 팔렸었죠. 다음해에는 스포츠카의 판매량이라고는 믿기는 않는 7011대로 기염을 토했습니다. 하지만 쿠페의 황금기는 길지 않았습니다. 불과 2년 후인 2010년에 전년대비 무려 251%나 급감한 2789대로 추락하더니 다음해엔 1568대, 그 다음해엔 1262대로 하향곡선을 그리다 급기야는 한 해에 19대를 판매하는 실적에 이르게 됩니다.
한국호(號)는 어떠할까요? 산업화의 결실을 맛보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30여 년은 유사 이래 가장 잘 먹고 잘 산 민족사의 황금기였습니다. 한국의 지위는 어느 때보다 높았고 주변국들과의 관계 또한 대등했습니다. 중국·일본·러시아를 만만하게 본 적이 고구려 이후 1500년간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요?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요? 물론 격랑의 발원지는 중국입니다.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이 언급한 ‘중국 방안’(中國 方案·Chinese Solutions)은 국제사회에 새 질서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으며, AIIB와 일대일로(一帶一路)는 그 의지의 실천이었습니다.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바꾸려는 중국의 ‘현상 변경’ 전략은 필연적으로 한국을 미국의 품에서 떼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두 대국(大國)이 일으키는 격랑 속에서 한국은 샌드위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정녕 황금기는 저물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런 정황 가운데 2019년을 맞은 우리에게 오늘 본문이 시사하는 바는 대단히 큽니다. 길갈은 한때 정말 잘 나갔습니다. 모든 것의 중심지가 길갈이었기에, 길갈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첫째 달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 치매 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수 4:19~20)
길갈에는 기념비적인 건물들이 세워졌습니다. 최고의 건축물들이 우뚝 세워졌다는 뜻이죠.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수 5:10)
중요한 행사들과 최고의 잔치는 언제나 길갈이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수 14:6)
가나안땅 정복을 마친 백성들이 땅을 분배하는 민감하고 중요한 일을 길갈에서 했습니다. 이같이 당시 모든 것의 중심지는 길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막(법궤)은 어디에 세워졌을까요? 당연히 길갈이 아닐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수 18:1)
‘실로’라는 무척 생소한 지명이 등장합니다. 실로는 예루살렘 북방 30km, 그리심산과 에발이 있던 세겜으로부터 남방 19km 지점에 있었던 외진 곳입니다. 사람들이 뜸한 곳입니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곳도 아닙니다. 길갈과 비교할 때 실로는 그렇고 그런 장소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온 회중’이 회막을 세웠습니다. 의외의 사건입니다. 이는 길갈을 찾던 사람들이 이제 어디를 찾는다는 뜻인가요? 길갈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이제 어디를 중요하게 생각한단 뜻인가요? 실로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자주 언급되던 길갈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잊어진 지명이 되어 버립니다. 잠시 각광을 받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런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었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호 9:15)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암 4:4)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암 5:5)
길갈은 죄악의 온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길갈을 즐겨 찾던 백성들은 어떠했나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수 18:3)
그들은 사명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7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렘 7:12)
그들은 사명을 잊어버리고 지체할 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여지없이 법궤를 다시 다윗성, 곧 예루살렘으로 옮겨 버리십니다.(삼하 6:15~16) 그 이후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탄생하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무게중심은 안디옥으로, 다시 로마로, 저 유럽교회로, 미국교회로, 그리고 극동의 조그마한 나라 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100여 년 전, 이 조선 땅에 혜성같이 등장한 기독교는 참으로 신선하고 매력적이었습니다. 비록 숫자가 많지는 않았으나 민중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3·1운동의 주동자로 간주돼 일제검찰에 송치(피검)된 자들 중 기독교인은 51.2%를 차지했으며,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인이 16명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3·1운동의 핵심이었음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길선주, 주기철, 김병조, 양전배, 조만식, 백낙준, 박형룡, 한상동 등이 키를 잡은 ‘거룩한 무리’는 한결같이 세상을 향해 은혜의 충격파를 던졌습니다. 그 뒤를 이어받은 한경직, 김창인, 김준곤 등이 주역이었을 때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1200만 성도’ ‘민족복음화’란 당찬 외침에 당장이라도 이 한반도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며, 전 국민이 크리스천이 될 것 같은 자신감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30년, 오늘의 한국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요? 도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요?
서울에서 열렸던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 기념예배에 10만 여명이 운집했습니다. 진정 축제가 되어야 할 현장에서 단상에 선 한 설교자의 입에서는 온통 재를 뿌려버리는 듯한 메시지가 터져 나왔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교회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데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었느니라. 성경학자들은 사데교회가 한 때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중략)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눈에 비친 허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는 불행하게도 그 교회는 행위가 죽어 있었습니다. 행위에서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하략)”
그날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피를 토하듯이 눈물을 쏟으며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울부짖으며 설교를 끝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내다본 탄식이었을까요? 한국교회에 머물고 있던 무게중심,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을 내다보는 안타까움의 회개는 아니었을까요?
동일한 음성이 지금 실로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이 ‘지체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이어갑니다.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수 18:4)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이 곳 내게로 가져오라”(수 18:6)
여호수아가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다’입니다. 이 단어는 ‘카타브’로서, 다른 곳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원래 뜻은 ‘새기다’ ‘몸에 (문신을)새기다’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마음에 품고 간직하는 것, 꿈을 품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가 본문 18장에서는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되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하나, ‘그리다’보다 더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돌아오다’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붙잡고 최선을 다하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다시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 영적 무게중심이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저울을 들고 ‘메네 메네 데겔’하십니다.(단 5:27)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롬 13:11) 하나님은 사람,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사람과 교회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십니다.(마 3:9)
그 하나님이 ‘한 사람’과 ‘그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다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섭시다. 다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갑시다. 그래서 2019년이 다시금 초대교회의 영광, 아니 초대 한국교회의 영광을 회복하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멈추어 서있지 말라
여호수아 18:1~7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2005년 스탠포드대학 졸업식에서 연설하면서 “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끊임없이 갈망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젊은이들에게 도전을 주는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4강 신화를 이루었을 때, 히딩크(Guus Hiddink) 감독은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통해 그는 강한 투지와 열정을 드러내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요즘은 다른 어떤 시대보다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여유가 있다 보니 이전에 가졌던 헝그리(hungry) 정신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먹고살만해지니 사람들이 유약해졌습니다. 사람들은 편안한 것을 좋아합니다. 좋은 환경 속에 묻혀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서 열정으로 가득 찬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충대충 살아갑니다. 쉽게 살려 합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토록 동경하고 바라던 가나안 땅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꿈의 현장이었습니다. 바라고 바라던 가나안 땅에 진입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과정은 하나뿐입니다.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 취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들은 그 땅을 정복했습니다. 그 땅을 자기의 것으로 취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땅을 이미 정복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들에게 주어져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일곱 지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땅을 주셨으니,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갈 것 같은데, 말뚝이라도 박을 것 같은데, 그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가나안 땅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일을 끝내지 않고, 갑자기 주저앉아버렸습니다. 마라톤으로 설명하자면, 마지막까지 완주(完走)해야 하는데, 그들은 주저앉아버렸습니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남아있는데, 그들은 멈추어서버렸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라고 책망했습니다.
일곱 지파는 가나안 전쟁에서 매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왜 취하려고 하지 않고, 지체하고 있느냐고 책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왜 취하려고 하지 않고, 지체하고 있느냐, 왜 여기 머물러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여기에 주저앉아있느냐는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새로운 땅이 눈앞에 있는데, 머물러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여호수아는 책망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너무 쉽게 만족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광야를 벗어난 것만으로도 만족스럽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건조한 광야를 벗어난 것 것만으로도 참 좋습니다.
그들은 요단 강을 건넌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노예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그친다면 미완성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安住)하게 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유혹이 의외로 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 머물러있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자기 스스로 합리화하고, 자신을 설득합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괜찮아.’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적당한 선에 머물러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벗어난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예생활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각자 삶에서 안주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주위에서 아무리 도전해도 ‘나는 여기가 좋아. 이 정도면 괜찮잖아. 더 이상 뭐가 필요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계속 도약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머물러있습니다. 현실에 적응하려 합니다. 사람들은 먹고살기에 바쁘다 보니 ‘이 정도 신앙생활 하는 것도 괜찮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일 출석 잘하고, 그런대로 직분도 감당하고 있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어떤 위치에 도달한 것으로 만족하고 안주하려 합니다.
바울은 그의 신앙 여정 가운데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빌 3:12).
그는 머물러있지 않았습니다. 영적 도약을 위한 그의 목표는 결코 얄팍하지 않았습니다. 성숙을 위한 그의 목표는 굉장히 높았습니다. 그는 결코 쉽게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달렸습니다. 바울의 서신서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달리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며 적당하게 살려하는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적으로 부요한 세계를 향해 가지 않고, 적당한 선에 머물러 있으려 하는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마치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에 안주해버릴 때에 나타나는 증상이 무엇입니까? 영적 무감각입니다. 영적 기대감과 사모함이 없어져버립니다. 영적 일에 관심이 없어집니다. 영적 헝그리 정신이 사라져버립니다. 사모함, 갈급함, 기대감, 갈망이 없어집니다.
욕심이 없는 것은 좋지만, 의욕조차 없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과욕(過慾)은 금물(禁物)입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갈망은 있어야 합니다.
기회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쉽게 포기해버려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욕망은 갖지 않아야 하지만, 영적 축복에 대한 갈망이 없는 것은 문제입니다.
목표를 놓쳐버릴 때, 스스로 세운 기준에 만족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도피(逃避)입니다.
더 나아갈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 적당한 지점에서 만족해버립니다.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했습니다(마 17:4). 갈 길이 먼데, 여기가 좋다며 만족해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마 16:22). 베드로는 주님의 구속 사건을 가로막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 깊은 은혜의 세계가 있는데, 적당한 곳에 자리를 깔고 싶은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우선의 편안함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잠깐의 행복을 위해 영원한 즐거움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일곱 지파에 대한 여호수아의 처방은 무엇이었습니까? 각 지파마다 세 사람씩 뽑아 그들이 차지할 기업의 땅들을 돌아보고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남은 부분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서 지도를 그려오게 했습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은 그 땅에 가서 지도를 그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현장체험을 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지도가 필요해서 지도를 그려오라고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안일함에 빠져있는 그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함입니다. 현장체험을 통해, 무관심으로 일관되었던 그들의 마음에 열망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이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땅을 밟으며 이곳저곳으로 다니는 동안, 그들의 마음에 소원이 일어나기를 원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기업들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가를 그들로 하여금 보게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답답해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축복의 땅을 목전(目前)에 두고도 가만히 있는 모습 때문입니다. 그들이 눈앞에 있는 땅을 취해야 하는데, 그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 때문입니다.
왜 그들은 가만히 있었을까요? 그들은 본 것이 없었습니다. 본 것이 없으니까 그들 속에 아무 그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땅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습니다. 그 땅이 얼마나 크고 광대하고 풍성한가를 몰랐습니다.
본 것이 없으면, 무엇이 좋은 것인지 설명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눈앞에 있는 것만 보는 근시안(近視眼)이 됩니다.
현실에 만족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미래에 대한 그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눈앞에 주어진 것을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설명해도 이대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해결방법은 무엇일까요? 백 마디의 설명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직접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그림을 그려오게 한 것입니다. 그 땅의 지도를 그려오게 했습니다.
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본 것이 있으면, 쉽게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많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기 때문에 본 사람은 주저앉아있을 수 없습니다. 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왜 중요합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보아야 아는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보지 않고도 이미 본 것처럼 믿음을 갖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기대감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안(肉眼)으로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은 미리 보는 눈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리더(leader)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어야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 리더가 되면 안 됩니다.
왜 믿음의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합니까? 믿음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미리 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미리 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끌어가는 리더로 여호수아를 세우신 이유는 그는 이미 가나안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 중 한 사람으로 가나안에 갔을 때,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살피고 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이 무엇인지 샅샅이 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그 땅을 밟았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여러분이 본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림을 먼저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림을 이루어가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림이 정확하게 그려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냥 돌아보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려오게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대충 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대충 봐서는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구석구석 들여다보며, 꼼꼼하게 챙겨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얼마나 기름지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크고 놀라운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을 그려오라고 한 것은
첫째, 구체적인 비전이 생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보고 그림을 그리는 가운데, 비전이 생깁니다. 비전을 일으키는 데 보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비전이 생기지 않습니다.
보는 것이 비전이 됩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비전입니다. 믿음으로 보고 있다면, 그것이 비전이고, 그것이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보는 것이 없으면, 비전이 없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보는 것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우리의 믿음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봅니까?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게 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보는 것이 축복입니다. 보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보는 것은 자극을 일으킵니다. 보는 가운데 자극이 일어납니다. 자극이 일어나면 가만히 있을 수 없고,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흥분이 일어나고, 열정이 일어납니다.
비전은 열정을 일으킵니다. 비전은 우리로 하여금 쉽게 만족하지 않게 하고, 주저앉지 않게 하는 힘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비전은 위험을 선택하는 용기를 갖게 합니다.
OM국제선교회는 둘로스와 로고스라는 선교 선(船)을 움직이며, 세계 86개국에서 3천 6백 명의 사역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국제적인 선교단체입니다.
OM국제선교회의 설립자는 조지 버워(George Verwer)입니다. 조지 버워는 어렸을 때에 온 세상이 물로 덮여있다는 것을 알고, 바다를 왕래하며 선교하는 것에 대한 꿈을 키웠습니다. 조지 버워는 바다를 보며 요트 탈 것을 생각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데 바다를 이용하면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둘로스와 로고스 배를 통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OM국제선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바다를 보며 그 꿈을 가졌습니다. 그 꿈이 커지고, 비전이 이루어져서 마침내 세계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지도가 그려진 옷을 항상 입고 다닙니다. 그리고 그는 날마다 세계지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조지 버워는 커다란 지구본 풍선을 들고 설교합니다.
그는 세계지도를 보고, 바다를 보며 꿈을 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입니다. 바다를 통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꿈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꿈에 사로잡힌 한 사람에 의해 설립된 선교단체를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선교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의 자녀들이 여행도 많이 다니고, 선교지도 많이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름에 단기선교를 많이 갑니다만,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보는 것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것을 보는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합니다. 많은 것을 보는 기회를 많이 가지면,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여름에 단기선교에 많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나라든지 작정하시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먼저 목표를 정하시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목표를 정하시고 기도하며 도전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자꾸 보면, 우리 안에 그림이 생깁니다.
여호수아는 사람들에게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땅을 보고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 속에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얼마나 광대한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호주에 살 때, 아무리 달려도 한 주(州)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 주가 그렇게 큽니다. 끝도 없이 달렸습니다. 미국은 또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땅 가운데서 우리에게 여러 영역을 보게 하시면서 비전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갖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다양한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공간적 개념을 계속 넓히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높은 곳에 가보세요. 등산하다가 길을 잃으면, 아래에서 헤매다 보면, 점점 더 길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위로 올라가면, 길이 보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곳에 올라가 보세요. 그렇게 하면,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해야 하는 땅이 얼마나 넓은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비전이 우리 안에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끌고 갑니다. 내가 보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본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본 것을 내가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다르게 살아갑니까? 본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볼 것인가. 세상이 보여주는 것을 볼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도 세상의 문화를 가지고 우리에게 무엇인가 보여주려 합니다. 우리를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여셔서 장래의 기업의 풍성한 것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비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전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정복해야 할 땅이 아직 많은 것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여기에 앉아있지만,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눈을 여셔서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시고, 구체적으로 보게 하시고, 우리가 본 것을 비전으로 일으키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둘째, 사명을 확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땅을 다니며 이스라엘 민족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확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도만 그리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를 그리므로 그 땅에 대한 애착, 관심, 비전이 생기게 하고, 그 비전을 통해 우리를 사명으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복해야 할 영역이 있고, 버려진 땅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발견하게 하시고, 그것을 어떻게 가꾸고 세워야 할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도를 그려오게 한 것은 사명과 연관되어있습니다. 본 것이 비전입니다.
그런데 비전이 비전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비전은 사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비전을 구체적으로 성취해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땅을 계속 살펴보는 가운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점검하게 했습니다.
계속해서 바라보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게 하시는 것을 보면, 우리의 할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바라볼 때, 우리 안에 사명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다 보면, 우리 안에 사명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계속해서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꿈꾸게 하시는 것들 속에 우리를 향한 부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명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밥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현실에 안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도시와 나라에 대한 영적 도해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전을 일으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비전에 집중하며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바라볼 때에도 우리 안에 사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황폐한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셔서, 방황하고 상처 입은 영혼들, 깨어진 가정들, 고통하는 청소년들을 보게 하시면,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취하게 하시는 땅, 다가가게 하시는 사명의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업(遺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신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기업이 얼마나 풍성한지 모릅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엡 1:18~19).
바울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기 원했습니다. 그것을 알려면,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마음의 눈이 열릴 때,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들을 보게 됩니다.
은혜 중의 은혜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풍성하신 기업의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중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업들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역이 얼마나 풍성하고 많은가를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을 때, 바울은 이전에 붙들었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전에 붙들고 미련을 가졌던 것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새로운 세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신앙생활이 교회놀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먹고 놀고 어울려 다니는 친목모임과 비슷해질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축복을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약속하는 부요함과 복된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주저앉아있게 됩니다. 우리도 모르게 무관심이 찾아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무관심해지고 영적으로 나태해집니다.
왜 영적으로 나태해집니까? 영적으로 계속해서 상승해야 하는데,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깊고 풍성한 곳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것을 향해 나아가기를 주저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어서 만족합니다.
은혜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더 깊고 풍성한 세계로 나아가려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은혜 충만한 가운데 산다는 것, 영적으로 계속해서 도약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은혜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은혜 충만한 상태에 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기본 상태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서 은혜를 빼앗아가고, 기본적인 것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나태해지면, 본전도 찾지 못합니다. 기본적인 것도 잃어버립니다. 나중에는 기도도 하지 않게 됩니다. 성경이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립니다.
계속해서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본문에서 찾아야 하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본문에서 지금 이 시간 나에게 약속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약속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고, 약속이 성취되는 그 날까지 멈추지 않고 달음질쳐야 합니다.
영적으로 계속해서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내 삶 속에 이루어질 것을 믿고,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내 삶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합니다. 환경을 탓하지 마세요.
요즘 ‘트라우마(trauma)’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과거에 아픈 기억과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에 갇혀서 꼼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삶이 자신을 붙들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는 우리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과거의 삶이 어떠하든지,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든지, 과거에 좋지 않은 경험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지금 능력이 부족하다 해도 우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선택하면, 믿음으로 용기를 가지고 내디디면, 우리에게 능력이 부족하다 해도, 과거에 상처와 아픔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불안하여 갇혀있기만 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과거가 어떠하든지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면, 삶은 바뀔 수 있습니다.
이전의 좋지 않았던 환경이나 경험에 묶여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과거일 뿐입니다. 미래를 위해 도전하면, 과거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도전하세요. 용기를 가지세요. 제자리걸음하지 마세요. 현상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마세요.
결단하고 내디뎌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믿음으로 내디뎌야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야 합니다.
과거가 어떠하든 상관없습니다. 한 걸음 내딛는 것은 믿음의 행위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서부터 모든 역사(役事)가 시작됩니다. 과거에 문제가 있어도, 나를 붙잡는 요소가 수없이 많아도,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디디면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편이 되어주십니다. 거기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한 걸음 내딛는 믿음의 행위가 바로 용기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현실을 합리화하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무기로 삼는 삶은 믿음이 후퇴하는 삶입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한 발 내디뎌야 합니다. 선택해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한 걸음 내디뎌야 합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영적 세계에 대한 기대감이 있습니까? 영적 기업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허락하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믿으십니까?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림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보여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부요하신 아버지께서는 자녀가 그냥 살다가 죽도록 내버려두실 리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기업의 영광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 원하시는 영역이 있습니다. 무한한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도를 그리게 했습니다. 멈추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확인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도를 그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영역 속에 보여주실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속에 파묻혀 먹고사는 것으로 인해 발버둥 치다가 인생을 끝내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현실 가운데 주저앉아있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현실의 편안함에 젖어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과 축복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있는 곳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혹시 머물러있지는 않습니까? 작년, 재작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선을 그어놓고, 선 밖으로 벗어나지 않고 살지 않습니까? 과거의 승리에 젖어 멈추어 있지는 않습니까?
조금만 더 파고 들어가면, 어마어마한 광맥(鑛脈)이 있는데, 멈추어버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조금만 더 파고 들어가면, 어마어마한 광맥이 있습니다. 금광이 있습니다.
언제부터 멈추어있는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적당하게 만족하며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 깊은 은혜와 축복을 갈망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일평생 달려도 끝에 도달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약속은 광대(廣大)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실 일은 매우 광대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분도 예외가 없습니다. 나이와 조건은 상관없습니다. 지금까지 은혜를 많이 받고, 지금까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배고픈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산과 같아서 우리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대한 산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일평생 다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지점에 멈추어 서서 마치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다 경험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의 삶과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된 후의 삶이 크게 다를 바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풀려나 가나안에 들어가 사는 삶은 이전의 삶과 전혀 다릅니다. 확연히 구별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와 예수님을 믿는 지금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생각해보세요.
신자의 삶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삶과 차이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궁색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노예생활에서 겨우 벗어난 정도의 삶이 아니라,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는 새로운 삶이 열려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영적으로 적극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정복해가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누려야 할 영역들을 사탄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의 영토를 사탄에게 빼앗겨버립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땅을 적극적으로 취하지 않으면, 사탄이 그것을 빼앗아갑니다.
혹시 사탄에게 빼앗긴 것이 없습니까? 탈환(奪還)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탈환하셔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고,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머물러있지 말고 계속해서 도전해야 합니다. 계속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멋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에 대해 적극성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도 치고 나아가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다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영적으로 배고픈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풍성한 세계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적당한 수준에 머물러있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언제나 배고파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안전지대에 머물러있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위험한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곳이라면, 우리가 거침없이 나아가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한 걸음 내디디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우물쭈물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의 풍성함의 베일을 계속해서 벗겨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세계는 광대하고 놀라워서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베일을 벗기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그 베일을 벗기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그러나 베일을 벗겨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로 가서 취하기만 하면 되는데, 가서 취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여호수아는 가서 지도를 그려오게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한 것입니다. 자극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도전하게 했습니다. 사명을 확인하게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다시 세워가는 것을 다시 꿈꾸게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한계를 그어놓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으려고 머물러있고, 자신의 삶을 제한하고, 믿음과 반대되는 행위로 안주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한계선을 뛰어넘고,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내딛으시기 바랍니다.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머물러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만히 서있지 않고, 쟁취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꿈꾸시기 바랍니다. 그림을 그리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세계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저앉아서 맴돌고 있고, 제자리걸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와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궁색한 노예적 삶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의 풍성함을 누리며, 영적 세계에서도 더욱 깊이 더 풍성하게 다가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