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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반민특위계승국민위원회 원문보기 글쓴이: 반민특위계승
[10월의 독립운동가]
이희승[1897.4.28~1989.11.27]
훈격 : 건국훈장 독립장 / 서훈년도 : 1962
공적개요
ㅇ 조선어사전편찬회 조직, 조선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
ㅇ 진단학회 창립, 국학운동에 진력하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
10월의 독립운동가 이희승(李熙昇)선생
(1897. 4. 28 ~ 1989. 11. 27)
한글 말살정책에 저항한 우리말 지킴이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조선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진단학회를 창립하여 국학운동에 진력하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희승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97년 경기도 시흥군에서 태어났다. 1910년 관립 한성 외국어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학교를 중퇴하였다. 이 시기 선생은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과 국문법을 학습하고 독립사상을 정립하였으며 일생동안 우리말을 연구하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은 결과 1918년 스물두살에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경성방직회사에서 일하며 학비를 마련한 후 1925년 서른 살에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여 언어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이듬해 8월‘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일본어 교과서를 사용하고 평상시에도 일본어의 사용을 강제하는 등 이른바‘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해나갔다. 대학 졸업 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조선어와 조선문학을 강의하던 선생은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1933년까지‘한글맞춤법통일안’을 이루어냈으며,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일제의‘민족말살정책’에 적극적으로 항거해 나갔다.
선생은 1934년 5월 우리의 역사,언어,문학을 연구하고자 이윤재, 손진태 선생 등과 함께 학술단체 진단학회를 결성하고, 1938년 조선어학회에서 간행한 잡지《한글》에 2년 동안‘한글맞춤법통일안 강의’를 연재하는 등 한글 맞춤법을 연구하고 일반 대중들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또한 [박꽃] 등 시집을 발표하고, [역대조선문학정화]를 펴내는 등 우리말과 문학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갔다.
1942년 10월, 선생은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와 한글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지인 이윤재, 한징은 옥중 순국하였으며, 선생은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선생은 출옥하자 곧바로 상경하여 다시 교직과 학구생활을 계속하였고, 1946년부터는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어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선생은 우리의 민족 문화와 정신이 짓밟히던 암울한 시대에 끊임없이 우리말을 연구하였고, 해방 후 그러한 각고의 결실로 [국어대사전](민중서관, 1961)을 편찬하였다. 선생의 이러한 노력으로 우리는 일제 35년의 지배를 받고도 우리의 언어를 지켜 낼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하였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고 연구한 일석 이희승(李熙昇) 선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강신항
1. 국어,국문 정리운동과 맞춤법(正書法) 확립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세계의 문물제도와 접촉이 잦아지자, 우리 겨레의 언어생활에도 큰 변화가 생기었다. 즉 당시까지 중국의 영향 아래 한문과 한자 중심이었던 언어생활에서 벗어나 우리말과 우리글을 애용하자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우리 자신의 언어인 국어를 어떻게 하면 합리적으로 표기하느냐 하는 면으로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1443년 우리 고유문자인 훈민정음(한글)이 창제되었을 때에는 우리글을 한동안 어느 정도 규칙적으로 표기했었으나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일정한 규칙 없이 표기되어 왔었다.
그래서 조선어와 조선문학을 애용하자는 민족적인 열기가 뜨거워지자 선각자들은 국어 정서법(正書法)의 확립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국가(대한제국)에서도 1907년(광무 11) 7월 8일에 학부(學部, 오늘날의 교육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고 14명의 위원을 임명하여 1909년(융희 3) 12월 27일까지 약 3년 동안에 걸쳐서 통일성 있는 국어의 정서법 마련을 위하여 여러 가지 의제를 놓고 토론하였다.
이 국문연구소의 최종안 보고서는 1910년 8월 29일에 나라가 망하여 국가적으로 채택되지 못하였으나 이 연구소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한 주시경(周時經 한힌샘, 1876~1914)의 학설과 주장은 제자들에게 계승되었다.
1921년 12월 3일에 한힌샘 선생의 영향을 여러 면으로 받은 10여명의 학자가 모여서 조선어연구회(1931년 1월 31일 조선어학회로 개명)을 조직하였다. 이 학회는 1930년 12월 3일에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을 결의하고 3년 동안 125회의 회의를 열어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마련하고 '훈민정음 반포' 487회 기념일인 1933년 10월 29일을 기하여 제정안을 발표하였다. 이 안은 한힌샘이 주장하여 '국문연구소' 안으로 종합되었던 이론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었으며, 또 최현배의 '조선어의 품사분류'(1930)등 당시까지의 국어 문법 연구의 결과가 반영된 것이었다.
한힌샘이 주장한 정서법은, 훈민정음 창제 무렵의 음소적 정서법(phonemic orthography)이 아니라, 형태음소적 정서법(morphophonemic orthography)이었으며 이 안이 통일안 정서법의 기초가 되었다.
일석 선생은 1930년 12월 13일 통일안 제정을 조선어연구회에서 결의할 때 권덕규, 김윤경, 이병기, 이윤재, 장지영, 정인섭, 최현배, 정열모, 이극로 위원과 함께 12인 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1932년 12월까지에 걸쳐서 '통일안' 원안 작성에 참여하였다. 이 원안은 다시 6인의 위원이 증원되어, 18인의 위원이 제1독회를 마치고 다시 권덕규, 김선기, 김윤경, 이윤재, 장지영, 최현배 위원과 일석 선생 등 10인 위원이 제2독회를 마치었으며 끝으로 권덕규, 김윤경, 김선기, 이윤재, 최현배, 정인섭, 신명균, 이극로와 일석 선생 등 9인 위원이 정리하였다.
이 '통일안'은 다음과 같은 3대 원칙 아래 제정된 것이었다.
1. 한글맞춤법은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으로서 원칙을 삼는다.
2.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
3.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쓰되, 토는 그 윗말에 붙여 쓴다.
이 3대 원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법에 맞도록 함으로서'였으나 이 안은 어원표시, 즉 원사(原辭, 語根, 語辭)를 표시한다는 뜻이며, 형태음소론적인 표기 원칙을 정한 것이다. 즉 어형을 고정시켜 문법체계에 부합시키고, 표음문자인 한글이 갖는 결함을 보충하여 독서의 시각적 효과를 거둘 수 있게 한 것이었다.
1933년에 정서법인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깊이 관여하였던 일석 선생은 조선어학회에서 간행한 '한글'(53호-76호)지에 '한글맞춤법통일안 강의'를 연재하고 새 맞춤법의 원리를 해설하여 일반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이 강의는 그 뒤 몇 차례 단행본으로 나왔다.)
2. 국어, 국문의 수호와 수난
-조선어학회 사건-
1443년에 우리의 고유문자인 훈민정음(한글)이 창제된 이후, 역대 우리나라 학자들의 크나큰 관심사는 주로 음운과 문자(글자) 또는 어휘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 일본이나 서양 문물과 접촉하면서 국어의 구조를 밝히는 문법 연구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법 연구는 국어정서법(한글 맞춤법) 확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또한 표준어 정리도 시급한 일이었다. 국어정서법을 제정한 조선어학회는 1936년 1월부터 1937년 8월까지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회'를 두고 6,231개의 표준어를 사정하여 1937년 10월 28일에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라는 이름으로 공표하였다. 이 외에도 조선어학회에서는 1940년 6월 25일에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과 '조선어음 로마자 표기법'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활동 이외에도 조선어학회에서는 개화기부터 전개된 국어통일운동과 더불어 절실하게 느껴왔던 '조선말 큰 사전'의 편찬에 힘을 기울이었다. 조선어학회는 1929년 10월 31일에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여 1940년에는 출판 단계에 이르렀었다. (이 사업은 1942년 10월 10일에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대부분 일제에게 피검되어 1957년 10월 9일에야 164,125 어휘가 수록된 6권짜리 사전으로 출간되었다.)
한편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은 더욱더 가혹해졌다. 1938년부터는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금지시키고, 1940년에는 소위 '창씨개명'이라고 하여 전통적인 우리나라 이름 대신에 일본인과 똑같은 이름으로 바꾸도록 강요하였다. 또한 공공기관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각급 학교 교육이나 심지어 일상생활의 언어에서까지 '국어(일본어)상용'이라는 표어를 크게 내세워 일본어만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당시의 정세가 이와 같이 조선어와 조선문학 사용을 억압하고 말살 정책이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던 시기에, 조선어학회 중심으로 조선어 정서법을 제정하고, 조선말 표준어를 사정하며, '조선말 큰 사전'까지 편찬하고 있었으니 통치자인 일제 당국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태였었다. 그래서 어떤 꼬투리를 잡으려고 노리고 있던 참에 함경남도 홍원읍(洪原邑) 소재 영생(永生)고등여학교 재학생의 일기 가운데 반일적(反日的)인 불순한 내용이 있다고 하여 일을 크게 벌인 것이었다.
애당초에는 학생들에게 이러한 반일 사상을 주입한 교사로 정태진(丁泰鎭), 김학준(金學俊) 선생이 주목을 받아 붙들리고, 이어서 정태진 선생이 1940년에 조선어학회에서 '조선어사전' 편찬에 종사한 일이 있었던 것을 빌미로 하여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조선 민족주의자의 단체라고 지목을 하여 조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2년 10월 1일에 제1차로 다음 11명의 회원들이 서울에서 체포되어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나이 차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이중화(李重華) 장지영(張志暎) 한징(韓澄) 이윤재(李允宰) 김윤경(金允經) 최현배(崔鉉培) 이극로(李克魯) 이희승(李熙昇) 정인승(鄭寅承) 권승욱(權承昱) 이석린(李錫麟)
1942년 10월 21일부터는 다음과 같은 인사들이 서울 또는 지방에서 검거되어 홍원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병기(李秉岐) 이만규(李萬珪) 이강래(李康來) 김선기(金善琪) 정열모(鄭烈模) 김법린(金法麟) 이우식(李祐植) 서승효(徐承孝) 안재홍(安在鴻) 이인(李仁) 김양수(金良洙) 장현식(張鉉植) 정인섭(鄭寅燮) 윤병호(尹炳浩) 김도연(金度演) 서민호(徐珉濠) 신윤국(申允局) 김종철(金種哲) 권덕규(權悳奎) 안호상(安浩相)
이와 같이 조선어학회 사건에 직접 관련된 사람이 모두 33명이었으며 이 중에서 구속되어서 경찰서 유치장의 감방에 갇힌 사람이 29명이었고 이 밖에 약 50명의 증인이 역시 비슷한 고초를 받았다.
이분들은 홍원 경찰서에서 온갖 고문으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최종적으로 16명이 기소되어 1943년 9월 12일에야 함흥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 사이에 이윤재 선생(1943년 12월 8일 옥사)과 한징 선생(1944년 2월 22일 옥사)이 옥에서 돌아가셨고, 나머지 열두 분이 정식 재판으로 회부되었다. 이 때(1944년 9월 30일) 예심 판사가 재판에 회부할 때 작성한 예심 종결 결정문에는 일제가 본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반일 독립운동의 성격이 뚜렷하게 밝혀져 있다.(원문은 일본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일석 선생께서 우리말로 옮겼다. -한국어문교육연구회 간행 어문연구 7~11집, 1975.5-76.4 게재)
[ 피고인들을 함흥지방법원의 공판에 붙인 이유 ]
민족 운동의 한 가지 형태로서의 소위 어문운동(語文運動)은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 통일, 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민족 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를 포함한 민족 독립 운동의 점진형태(漸進形態)다.
생각건대 언어는 사람의 지적 정신적인 것의 원천일 뿐 아니라, 사람의 의사 감정을 표현하는 외에, 그 특성도 표현하는 것이므로 민족 고유의 언어는 민족 안에 있어서 의사의 소통(疏通)은 물론, 민족 감정 및 민족의식을 빚어내어, 이에 굳건한 민족의 결합(結合)을 성취시키며, 그것을 기록하는 민족 고유의 글자가 있어서, 이에 민족 문화를 성립시키는 것이니, 민족적 특질은 그 어문을 통하여 나아가서는 민족 문화의 특수성을 파생(派生)시키고 향상 발전시키며, 고유문화에 대한 과시(誇示)와 애착(愛着)은 민족적 우월감을 생기게 하고, 그 단결을 일층 공고하게 하여, 그 민족은 활발히 발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민족 고유의 어문의 소장(消長)은 그것이 곧 민족 자체의 소장에 관한 것이 되므로, 약소민족(弱小民族)은 필사의 노력으로서 그것을 유지 보전하기에 힘쓰며, 아울러 그 발전을 꾀하여 방언(方言)의 표준어화, 문자의 통일과 보급을 희구하여 마지않는다.
그리하여, 어문운동은 민족 고유문화의 쇠퇴(衰頹)를 방지할 뿐 아니라, 그 향상 발전을 가져오게 하고, 문화의 향상은 민족 자체에 대하여 일층 굳센 반성적 의식을 불러일으키고, 강렬한 민족의식을 배양하여, 약소민족에게 독립의 의욕을 용솟음치게 하며, 정치적 독립 달성의 실력을 양성시키는 일이 되나니, 이러한 운동은 18세기 중엽 이래 구라파 약소민족들이 반복하여 채용하여 온 그 성과(成果)에 비추어 볼 때에, 세계 민족운동사상(民族運動史上)에 가장 유력하고 또 효과적인 운동이라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본건 [조선어학회]는 1919년(대정 8) 만세소요사건(萬歲騷擾事件)의 실패에 비추어, 조선의 독립을 장래에 기약하는 데는, 문화운동에 의하여 민족정신의 환기(喚起)와 실력 양성을 급무(急務)로 삼아서 대두(擡頭)된 소위 실력 양성 운동이 그 출발의 꽃봉오리였음에 불구하고 드디어 용두사미(龍頭蛇尾)에 마쳐서, 그 본령(本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더니, 그 뒤를 받들어 1931년(소화 6) 이래로 피고인 이극로(李克魯)를 중심으로 하여, 문화운동 중 그 기초적 운동이 되는, 위에서 말한바 어문운동 방법을 위하여, 그 이념으로서 지도 이념을 삼아 가지고, 겉으로 문화운동의 가면을 쓰고, 조선 독립을 목적한 실력 양성 단체로서 본건(本件)이 검거(檢擧)되기까지 10여년이나 오랜 동안, 조선 민족에 대하여 조선의 어문운동을 전개하여 온 것이니, 종시일관(終始一貫) 진지하고 변치 않는 그 활동은 조선 어문에 쏠리는 조선 민심의 기미(機微)에 부딪쳐서, 깊이 그 마음속에 파고들어, 조선 어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일으키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내려오며, 편협한 민족 감정을 북돋아서 민족 문화의 향상, 민족의식의 앙양 등, 그 기도하는 바 조선 독립을 위한 실력 신장(伸長)의 수단을 다하지 아니 한 바가 없다.
[조선어학회]는 이와 같이 하여, 민족주의 진영에 단연 불발(不拔)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어, 저 조선 사상계를 풍미하는 공산주의 운동 앞에 떨면서, 하등(何等)하는 바가 없이 혹은 자연 소멸하여 버리고, 혹은 사교단체(社交團體)로 타락하여, 근근이 그 쇠잔한 명맥을 이어오던 민족주의 단체 중에서 홀로 민족주의의 아성(牙城)을 사수(死守)하는 것이라고 중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뒤에 기록하는 그 사업과 같은 것은 어느 것이나 모두 언문신문(諺文新聞)들의 열의(熱意) 넘치는 지지 밑에서, 조선인 사회에 비상한 반향을 환기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과 같은 것은 광고(曠古)의 민족적 대사업으로 촉망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이 조선어학회를 독립 단체로 규정하는 주되는 이유요, 따라서 그 회원들과 관계자들을 독립 운동자로 보아서 처벌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인식하였고 회원들을 독립운동자로 인정하여 1944년 9월 30일에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리하여 1945년 1월 16일에 판결을 받은 12분의 형량은 다음과 같다.
이극로 징역 6년 (구류 통산 600일)
최현배 징역 4년 (구류 통산 750일)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구류 통산 750일)
정인승 징역 2년 (구류 통산 440일)
정태진 징역 2년 (구류 통산 570일)
김법린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이중화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이우식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김양수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김도연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이 인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장현식 무죄
이 분들은 일제가 1945년 8월 15일에 패망하자 1945년 8월 17일에 함흥에서 출옥하였다.
3. 평생을 국어 연구와 사전 편찬에 전념
① [국어학 개설]과 [국어대사전]
일석 선생은 조선어학회에서의 활동 이외에도 국어 연구에 전념하였다. 애당초 18세 때에 국어 연구를 결심하고 초지일관 그대로 실천에 옮기었다.
선생께서는 1897년 4월 28일(실제 생년월일은 1896. 6. 9)일에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儀旺面, 옛 儀谷面, 현 의왕시) 포일리에서 태어나신 뒤, 집안이 넉넉지 못하기도 하였거니와 나라가 망해가던 20세기 초에 시작한 공부가 순탄치 못하였다. 열세 살 때 관립 한성외국어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0년 8월 29일에 나라가 망하여 경성고보(京城高普, 경기고의 전신)에 편입되었다가 중퇴하고 취직, 부업 등 여러 고단한 삶을 겪으면서 다시 양정, 중동, 중앙 등 여러 학교를 전전해야만 했다. 22세 되던 해인 1918년 3월에야 겨우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다음 곧바로 진학하지 않고 경성방직회사 서기로 취직하였다. 이것이 18세 때부터 주시경 선생의 저술을 읽고 일생 동안 연구하려고 마음먹었던 언어학 공부를 수행하기 위한 첫 수단이었다.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어 언어학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미리 1923년 10월에 '전문학교 입학 자격시험'을 치른 것을 바탕으로 해서 1925년에 30세가 되어서야 경성제국대학 제2회생이 되었다. 학비는 그동안 꼼꼼히 모았던 돈으로 내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조선어와 조선문학을 강의하였다.
일석 선생은 1945년 8월 17일 함흥형무소에서 출옥하자 곧바로 상경하여 다시 교직과 학구생활을 계속하였다. 1946년부터는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어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949년 무렵 대학 강의는 대개 두 시간 연속(120분) 단위였다. 세 시간 연속(180분) 강의도 있었다. 이런 강의를 선생께서는 중간에 쉬지도 않고 꼬박 120분을 채웠다. 때로는 120분을 채우고도 모자라, '벌써 시간이 다 되었나?' 하고 묻는 일이 많았다. 이 강의 노트는 1955년에 민중서관에서 [국어학개설]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으며, 그 뒤 몇 십년 동안 국어학 전공자들에게는 가장 권위 있는 입문서가 되었다. 선생께서는 '국어학개설' 이외에도 '국어문법론'과 '훈민정음연구' 등 여러 과목을 휴강 한 번 한 일이 없이 꾸준히 강의를 계속하여 광복 후 왕성하게 일어난 국어학 연구의 기반을 잡아주었다. 특히 '국어문법론' 강의의 이론 체계는 외솔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의 이론과 함께 우리나라 문법학계에서 커다란 두 줄기 주류를 이루었다.
선생은 일찍이 1934년 5월에 우리의 역사 언어 문학을 연구하고자 이윤재, 손진태 선생들이 결성한 학술단체 진단학회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선생의 학문적인 업적 가운데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0여 년의 각고 끝에 1961년 12월 28일에 민중서관에서 펴낸 [국어대사전]이다. 선생은 국어학자이면서도 8.15 광복 이전에 [박꽃] 등 시집도 발표하고 [역대조선문학정화]를 펴낼 정도로 우리말 어휘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사전편찬 때에도 수록되는 단어마다 섬세하게 검토하였다. 그래서 이 사전은 출간된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가장 믿을 수 있는 사전이라고 여러 사람들이 애용하고 있다.
② 언제나 꿋꿋하셨던 일석 선생
선생은 대학 졸업 후 교편생활과 연구생활을 계속하였으나 1960년 4월 25일에는 계엄령 아래에서 '학생의 피(4.19)에 보답하자'고 교수들의 데모에 앞장을 섰고, 1961년 9월 30일에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임한 뒤, 1963년 8월 1일부터 2년 동안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일이 있었다. 이 시기는 1961년 5월 16일에 실권을 장악한 군부세력의 감시가 철저한 때였으므로, 이러한 위험한 환경 아래에서 반(反)집권세력 논조가 가장 격렬했던 언론기관의 책임자 노릇을 한다는 것은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관계기관의 탄압을 언제나 앞장서서 막았고, 지조를 굽히지 않은 채 2년 동안의 임기를 무사히 마치었다.
선생은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한 뒤에는 1965년 9월 1일에 대구대학 대학원장과 1966년 9월 1일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낸 다음 1971년 1월 1일부터 1981년까지 10년 동안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소장직을 맡아 국학 및 동양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밖에도 국어학회 명예회장, 고문(1966~1989), 단군 현양 단체인 현정회(顯正會) 이사장을 맡았고 정부의 '한글전용정책'에 맞서서 '한자 교육을 통한 국어 교육의 정상화'를 목표로 한 '한국어문교육연구회'를 설립하여 회장(1969~1988, 1988년 3월~1989년 11월 명예회장)을 지냈다.
이와 같이 90세 때까지도 학술활동을 계속한 것은 섭생(攝生)에 주의하면서 꾸준히 건강관리를 잘한 덕분이었다.
사람은 한 평생을 살다 간 뒤 지조, 청렴도, 학문, 언행 등 여러 면으로 평가를 받는다. 선생은 언제 뵈어도 노기등등(怒氣騰騰)한 모습을 보인 일이 없고, 늘 온화하였다.
더군다나 94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지조를 굽힌 일이 없었고, 어려운 가정살림 속에서도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근검절약하면서 언제나 꿋꿋하게 살았으며, 18세 때 마음먹은 대로 일생 동안 국어학 연구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선생의 나라사랑, 민족사랑 그리고 우리말과 글 사랑의 정신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③ 근검절약과 자립정신이 몸에 배셨던 일석 선생의 학술재단설립
어떤 모임이 있을 때, 제자들은 선생을 모셔오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선생께서는 언제나 버스를 고집하여 댁의 집 밖에서 택시기사와 함께 기다리던 제자들이 몹시 애탔었다. 이래서 꼼짝달싹 못하는 만원버스에 매달려가다시피 하던 선생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던 광경이었다. 이와 같이 근검절약은 선생의 생활신조였다.
세뱃돈이 적어도 만 원으로 보편화되었던 시절에도 선생께서는 연말에 은행에서 백 원짜리를 준비해 놓고 세배 온 자손들에게는 백 원씩 주셨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면서도 선생 댁 경조사에서는 돈을 받는 일이 없었다.
'나는 아무리 적은 액수라고 하더라도, 남의 물품을 바라고 살아오지를 안했네.'
이것은 선생께서 평생 실천해 온 생활신조의 하나였다.
'분에 넘치는 생활은 안한다.' '절대로 공짜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간다.'
이와 같이 평생을 근검절약으로 살아온 일석 선생께서는 1989년 6월 8일 94회 생신날을 하루 앞두고 제자 몇 사람과 아드님을 댁으로 불러, 돌아가신 뒤 시행할 '학술상' 기금을 비롯하여 여러 학회에도 희사할 상당한 액수의 연구 장려금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였다. 평생 동안 택시도 타지 않고 아끼고 아낀 정재(淨財)를 자손에게 남기지 않고 학계의 발전을 위하여 거금을 희사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선생께서 뜻하신 대로 '재단법인 일석학술재단'이 설립되어 우수한 업적을 남긴 국어학자들에게 2003년부터 선생의 생신날인 6월 9일에 '일석국어학상'을 수여하고 있다.
다음은 1989년 11월 27일에 영면하신 뒤 1992년 6월 9일에 세워진 추모비의 내용이다.
[ 일석 선생 추모 비문 ]
여기 겨레의 스승이요 지사(志士)이신 한 어른께서 고이 누워 계시다. 경술국치 이래 세상이 여러 번 바뀌었으나 선생은 그 꼿꼿한 지조(志操)로 백년을 하루와 같이 겨레의 사표(師表)이셨다. 세상에 스승이 많으나 선생처럼 고결(高潔)한 스승이 몇 분이나 되며, 불의부정(不義不正)과는 타협하지 않고 대쪽같이 곧은 기개로 한 평생(平生)을 지내는 동안 만인(萬人)의 숭앙(崇仰)을 받았던 어른은 또 몇 분이 되리요. 선생은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京畿道 廣州郡 儀谷面 浦一里)에서 태어나 18세 때부터 국어연구에 뜻을 두어 조선어학회에서 1933년에는 회원들과 민족의 숙원(宿願)이었던 한글맞춤법을 완성하였고 42년에는 민족혼(民族魂)을 일깨우고 독립을 주모(主謀)한 한 분으로 3년여의 혹독한 옥고를 치르시었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어 국어학 연구의 길에 선도자로서 등불을 비추셨으니, 특히 그 문법론은 사학(斯學)의 우뚝한 한 봉우리였고 남의 추종을 불허하는 국어대사전을 엮어 펴내는 한편 시작(詩作)과 수필로 뛰어난 문재(文才)를 드러내기도 하셨다. 한때 동아일보사장과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회장을 맡아 언론창달과 어문교육 시정에 공헌하셨고, 현정회 이사장으로서 국조(國祖)이신 단군의 존숭사업(尊崇事業)에도 앞장서셨다. 선생은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한 정재(淨財)로 장학사업과 학회육성에 크게 이바지하셨고,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워 따르는 제자가 줄을 이었다. 구순(九旬)에도 오히려 낭낭하시던 그 음성이 아직도 들려오는 듯한데, 80년을 해로하시던 사모님과 함께 계시니 높은 풍교(風敎)가 겨레로 더불어 길이 빛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