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성녀 대 데레사
bundotour/ 2013. 10. 15.
▒ 성녀 대 데레사
♤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1515-1582)는 「맨발의 가르멜회」를 창설한 성녀로 ‘예수의 데레사’ 로 불려진다. 축일은 10월15일.
성녀 대 데레사는 1515년 3월 28일 신심이 두터운 귀족의 딸로 탄생했다. 그러나 12세 때 어머니를 여윈 데레사는, 성모상 앞에 꿇어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자기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돌봐주는 어머니도 없고, 많은 사람들의 나쁜 표양 때문에 세속적인 변화를 염려한 아버지는 그녀가 14세 때, 아우구스티노회 수녀원에 위탁하여 교육시켰다.
데레사는 차차 마음이 바로 잡혀가는 중에 병으로 집에 돌아와 요양하면서 성 예로니모가 성녀 바울라와 성녀 에우스토치움에게 보낸 서간을 읽고 마침내 수도자가 될 것을 결심, 19세 때 아빌라에 있는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 완덕의 길을 닦기 시작하였다.
성녀는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예수께서 매질을 당하시는 장면의 상본과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각성하였다. 성녀는 "그때까지 나의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 나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고 자서전에 적고 있다.
'자기 안의 예수의 생활', 이것이 바로 유명한 데레사의 신비 생활의 기본인 것이다. 성녀의 이런 생활은 바오로 사도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 20)라는 말씀과 상통하는 삶이었다. 대 데레사 성녀는 신비신학의 기초로서 신비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은 "하느님 없는 나는 무(無)요, 나에게 하느님은 전부"라는 사상이다.
영성적으로 점차 깊은 신비체험을 가지고 "영적 결혼"의 상태를 경험하였다. 이렇듯 데레사는 영혼을 신비계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가르멜회의 개혁에 착수하여 마침내 성공을 거두어 다른 수도회의 모범이 되었다.
성녀는 1536년 가르멜회에 입회하여 다음해 첫 서원을 했다. 1560년 데레사는 개혁 가르멜 창립을 결의하고 진행하여 1567년 8월 15일에 메디나 델 깜포에 개혁 수도원을 창립했다.
이 때 십자가의 성 요한과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고, 다음해인 1568년 11월 28일에는 십자가의 요한 수사에 의해 가르멜 남자수도원이 창립되었다. 성녀는 20년 동안 스페인 전역을 여행하며 17개의 남녀 수도원을 세웠다.
데레사 성녀는 개혁가와 조직가, 영성가로서 교회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1575년부터 가르멜회 수도원 안에서 개혁파와 보수파 간에 분쟁이 시작되어 온갖 박해가 발생, 강생 수녀원 55명의 수녀가 파문당하고 십자가의 요한 수사가 감금당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579년 드디어 개혁파가 보수파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얻었다. 1581년 개혁파와 보수파가 분리되었다.
대 데레사 성녀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기에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기를 원했다.
고통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주여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겠나이다.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나이다."고 하면서 극기 수덕의 길을 걷던 데레사 성녀는 1582년 10월 4일 저녁, 기쁨 중에 "주여 나는 성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거듭 말하면서 67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1617년 스페인 국회는 대 데레사 성녀를 스페인 주보로 선언하였으며, 사후 40년이 지난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1970년 9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살라망카 외곽의 '알바 데 또로메스' 수도원의 성녀 대 데레사 성당에는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성녀의 심장과 팔이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대 데레사 성녀는「자서전」,「하느님 사랑에 관한 명상」, 개혁 까르멜「창립사」,「영혼의 성」,「완덕의 길」,「영적 보고」,「하느님께 외침」,「수도원 시찰방법」등의 저서를 남겼다. ‘자서전’(천주 자비의 글)과 ‘영혼의 성’ 등 다수가 번역되어 성녀의 삶과 영성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