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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반민특위계승국민위원회 원문보기 글쓴이: 반민특위계승
[11월의 독립운동가]
이석용[1877~1914]
훈격 : 건국훈장 독립장 / 서훈년도 : 1962
공적개요
ㅇ 기삼연의 호남창의진 종사로 활약하다 의병대장으로 추대
ㅇ 남원, 전주, 임실 등지에서 활약 중 체포되어 순국
11월의 독립운동가 이석용(李錫庸)선생
(1877. 11. 29 ~ 1914. 4. 28(음 4.4))
만번 죽어도 변치 않은 의병장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석용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전북 마이산에서 거의하여‘호남창의소’의병대장으로 추대되고, 남원, 전주, 임실 등지에서 활약 중 체포되어 사형순국하였다.
선생은 전북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어른들을 좇아 옛사람들이 충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들을 즐겨 들었던 선생은 1897년 8월, 10여 명의 동학과 함께 진안의 도동서려(桃洞書侶)로 이거하여 학문연마에 전심전력하였고, 이후 면암 최익현과 연재 송병선 선생에게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아 의병을 일으킬 이론적 근거를 정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의병봉기가 본격화되었다. 선생은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의병에 가담하고자 했으나 최익현 등 12의사의 체포로 의진이 해산되자 독자적으로 의진을 일으켜 설욕할 결심을 굳혔다. 1906년 가을, 선생은 고광수 등과 거의 방략을 협의하여 1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하였고, 마침내 1907년 음력 9월 12일 전북 마이산 자락 용암에서 고천제를 지낸 후 의진의 명칭을 ‘호남창의소’라 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어 진안읍을 공격, 헌병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파괴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기습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1907년 음력 11월 의병을 다시 규합하고 군자금을 확보한 선생은,‘의진약속’,‘의령10조’를 통해 전투력을 향상시키고 군율을 정비하여 군경과 시설물을 공격하고, 친일세력인 일진회와 자위단의 처단에 앞장섰으며 임실, 장수, 남원, 함양, 구례 등을 비롯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를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이끌었다.
1909년 일제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된 일제는 수시로 변장대 및 밀정을 투입하고 진압잔적을 전개하였다. 이에 선생은 1909년 음력 3월 훗날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하고 잠복하였다. 그 후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의령단(義靈壇)’을 설치하여 전사한 의병들을 추모하고 전의를 가다듬었으며 일본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12년 겨울에는 비밀결사인‘임자밀맹단(壬子密盟團)’을 조직하여 테라우치총독과 을사5적, 정미7적의 처단, 일본 도쿄와 오사카 등지의 방화 등을 계획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불행히도 1913년 음력 10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대한의 닭이나 개가 될지언정 원수 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며 당당히 재판에 임하였으며 1914년 4월 28일(음 4.4),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사형 순국하였다.
천고의 강상을 짊어짐은 중요하고 / 삼한의 해와 달은 밝게 비치는데 외로운 신하 만 번 죽어도 마음 변치 않으니 / 사람으로 머리 숙여 사는 것보다 훨씨 낫다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만 번 죽어도 변치 않은 의병장 이석용(李錫庸)
(1877.11.29~1914.4.3)
임금과 부모의 은혜와 의리 하늘과 같아
만 번 죽어도 그 공을 갚을 길 없네
태어나던 날 아침 장부의 뜻 저버려 부끄러워도
편안히 감옥 가운데 홀로 있다네. - 대구감옥에서 생일날 쓰다
1. 충의(忠義)를 중시한 선비
이석용(李錫庸)은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 본관은 전주였다. 그의 선조 가운데 이목(李穆, 1471-1498)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김굉필, 정여창 등과 동문수학하였으며,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현달했으나 연산군 당시 무오사화로 인해 김일손 등과 같이 화를 당했다. 이목은 절의가 투철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사상과 활동을 알려주는 [寒齋文集]이 전한다. 이목의 아들 세장(世璋, 1497-1562)은 중종반정 이후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 관찰사와 사헌부 지평 등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했는데도 청백리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이석용의 집안은 출사자(出仕者)를 거의 배출하지 못한 채 임실지역의 향반(鄕班) 신분을 근근이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부모 봉선(鳳善)과 조양임씨(兆陽林氏)는 한동안 자식이 없었다. 이에 봉선은 상서(尙書)를 애독하고 산천에 열심히 기도했는데, 어느 날 번개가 왼발을 때리는 태몽을 꾼 후 부인 임씨가 임신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석용은 1878년 음력 11월 29일 갑술일(甲戌日)에 태어났다. 태어난 날의 간지에 의해 그는 어려서 갑술이라 불렸고, 그후 손아래 누이 2명과 함께 3대 독자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어른들을 좇아 옛사람들이 충의(忠義)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들을 즐겨 들었다. 부친이 골패로 소일하던 어느 날 그가, '아버지가 잡기를 하면 자식은 어찌 하란 말입니까?'라고 말하자, 그날 이후로 그의 부친은 죽을 때까지 잡기를 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를 통해 그가 어릴 때부터 비범했을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언행을 보였다.
그는 8세에 비로소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한 번 읽으면 대부분 암송할 정도로 영특하였다. 그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열심히 공부하여 뛰어난 기량과 문장을 자랑하였다. 한편, 1894년 봄 고부(古阜)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 일대를 휩쓸었다. 김개남은 전라좌도의 중심지 남원을 점령한 다음 여세를 몰아 그의 향리인 임실의 삼봉 마을까지 쳐들어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민군을 두려워하여 피난했으나, 그는 이들의 활동에 대해, '소요를 일으킬 뿐 '동병(動兵)', 즉 군사 행동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평하였다. 그해 겨울 그는 부친의 지시로 겸재(謙齋) 김관술(金觀述)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였다. 바로 앞서 그는 스승인 김관술의 딸인 부녕김씨(扶寧金氏)와 혼인하였다.
이듬해인 1895년에는 더욱 어수선한 소용돌이의 정국이 전개되었다. 음력 8월에 명성황후시해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져서 일본이 삭발을 강요한다고 전해졌다. 이에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서 일본은 임진왜란이후 불공대천의 원수라고 비분강개하였다. 하지만 그의 스승인 겸재가 측은한 마음만으로는 군부의 위급함을 구할 수 없으므로 학문연마에 더욱 정진해야 한다는 말에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96년 음력 3월부터 그는 공산촌(公山村)에서 6-7명의 동학과 같이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다리의 털이 거의 빠져 버릴 정도였다. 당시 그의 성품은 악을 미워하고 조금이라도 의롭지 않은 사람은 즉시 배척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으면 그 또한 돌아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행 중에 단 한 차례도 음주가무를 하지 않았다. 그는 북쪽으로는 남한산성에 올라 삼학사(三學士)의 충렬(忠烈)을 추상(追想)하고, 남으로는 진주에 가서 삼장사(三壯士)의 장쾌한 사적에 조위를 표했다. 때로는 방황하고 오열하다가도 명현의 묘소나 충렬각을 만나면 비록 바쁠지라도 반드시 글을 지어 칭송했는데, 그러한 글들이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어 참고된다.
1897년 8월 그는 10여 명의 동학과 함께 진안의 도동서려(桃洞書侶)로 이거하여 학문연마에 전심전력하였다. 이후 그는 경향각지를 순회하며 고명한 학자들을 만나 학문과 시세를 논하였다. 예컨대, 입재 송근수, 연재 송병선, 간재 전우, 송사 기우만, 예산 정재규, 면우 곽종석, 면암 최익현 등을 만나 학문적 세계관과 구국의 방편을 논의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면암과 연재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01년 면암이 그에게 현재 가장 큰 의리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벽파개화(劈破開化)' 네 글자라고 답하였다. 또한 1902년 연재를 만났을 때 그는 창의(倡義)와 사상(私喪) 중에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의할 때 창의가 우선이라는 연재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겼다. 즉 그는 충효 중에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보다는 국가를 위한 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던 것이다. 이로써 그는 의병을 일으킬 이론적 근거를 정립한 것으로 짐작된다. 더욱이 연재는 그에게 정재(靜齋)라는 호를 지어줌으로써 그를 제자처럼 인식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높은 학문과 식견을 가진 거유들과의 담론을 통해 충의를 우선시하는 출처관(出處觀)과 시국관을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2. 마이산에 울려 퍼진 의병의 함성
기삼연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전라남도 후기의병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면 전라북도에서의 그러한 역할은 이석용이 담당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는 이토오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을 앞세워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전라도에서는 1906년 봄부터 의병봉기가 본격화되었는데,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의병이 대표적 사례였다. 당시 태인의병에 가담하려던 이석용은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태인의병이 약 열흘만에 해산하여 최익현과 임병찬을 비롯한 이른바 12의사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독자적으로 의진을 일으켜 설욕할 결심을 굳혔다.
그리하여 1906년 가을부터 1년 동안 그는 거사 준비에 동분서주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광수(高光秀), 이평해(李平海) 등과 수시로 상의하였다. 어느 정도 준비가 이루어지자, 1907년 8월 하순 그는 아버지께 하직인사를 올렸다. 부친은 그에게 "네가 본시 큰 뜻이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오늘 어찌 억지로 말리겠느냐. 마땅히 모든 것을 조심해서 조상에게 욕이 되지 않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의 문중 노인들은 3대 독자인 지중한 몸으로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라고 타일렀지만, 그는 자신의 우국충정을 막지 말라며 의병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자신의 거사로 가족들이 일본 군경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피해를 우려하여 여러 곳에 나누어 피신시키고, 가산을 정리해서 만일에 대비하였다.
그는 자신이 비록 한미한 선비이나 왜적을 물리치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오랑캐 놈들이 도성 안에 가득차 있어 임금과 신하는 처소를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렀사오며, 단군과 기자의 베푼 풍교는 요원해지고 요순의 도학은 땅에 떨어졌사오니 무릇 혈기있는 사람이면 어찌 누구인들 역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을 생각이 없겠습니까. 다만 대의를 만천하에 펴기 원이오며, 성공 여부는 예측할 바가 아닙니다. (중략) 부모님 슬하를 떠나게 되니 정경이 가련하지만 (중략) 두어 해를 지나지 않아 돌아와 뵙게 될 것인즉 어린 아이들이나 돌보아 주시고 행여 조석 간에 너무 기다리시어 화기(和氣)를 손상시키지 마십시오.([정재 이석용 창의일록], [독립운동사자료집] 2, 512쪽).
그는 왜적의 침탈을 막기 위해 의병에 나설 것임을 부모에 알리고서 죽음을 각오하고 의병의 길로 나선 것이다. 그는 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위국위민(爲國爲民)에 있음을 천명하였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임실군 상이암(上耳菴)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무기를 조달하는 한편, 사방에 격문을 전하여 의병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처음에는 주로 무기를 수습하여 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마침내 1907년 음력 9월 12일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석용은 의진의 명칭을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라 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마이산 용암(龍巖) 위에 단을 설치하여 거의를 알리는 제사를 주
관하며 격중가(激衆歌)를 지어 불렀다. 격중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가을바람 소슬하니
영웅이 때를 만남이라
장사가 없을 소냐
구름같이 모여든다.
어화 우리 장사들아
격중가를 불러 보세
한양성중 바라보니
원수놈이 왜놈이요
원수놈이 간신이라
삼천리 우리 강산
오백년 우리 종사 어찌할까
아마도 의병을 일으켜서
왜놈을 쫓아내고
간신을 타살하여
우리 임금 봉안하고
우리 백성 보전하여
삼각산이 숫돌 되고
한강수 띠 되도록
즐기고 놀아보세
우리 대한 만만세([大韓義將 湖南倡義錄] 권 3, [창의일기], 84쪽).
위에서 보이듯이 이 노래는 의병을 규합하고 격분시키기 위한 국한문 혼용체의 가사이다.
의병장에 추대된 그는 곧바로 의진의 부서를 정했는데, 이석용 의병부대의 초기 진용은 다음과 같다.
대장(大將) 이석용
기실(記室) 전해산 한사국, 선봉(先鋒) 박만화 송판구, 중군(中軍) 여주목 김운서, 후군(後軍) 임종문 김사범, 총지휘(總指揮) 곽자의 박갑쇠
이들은 대체로 임실을 비롯한 전라북도 동부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유생들이 지휘부를 형성하였으며, 병사층은 주로 농민들과 일부 천민들로 구성되었다. 이석용 의병부대는 창의동맹단(倡義同盟團)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석용은 스스로 호남창의소를 표방하였다. 이석용은 의진의 조직을 정비하면서 연락, 도로부장, 보급, 운량을 담당하는 직책을 두기도 했으며 유고시 교체하기도 하였다.
당시 마이산 용암에는 1천여 명이 운집했다고 하는데, 다음의 기록을 통해 그러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음 9월) 12일 경자. 군중을 수대로 거느리고 마이산 남쪽 기슭 용암 위에 올라 나무를 베어 단을 만들고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데, 질서가 정연하여 진용이 엄하고 씩씩했다. 사방에서 장정을 보내와 봉우리마다 파수를 보는데, 집결한 사람이 1천여 명이었다. 중군장 김운서(金雲瑞)가 총포를 수집해 왔으니 그 정의(情誼)가 감심(感心)할 만하다. 사람들 말이, '왜병이 종일 엿보기만 하고 감히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정재 이석용 창의일록],[독립운동사자료집] 2, 516쪽).
이들은 창의동맹단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주위 산봉우리마다 파수를 세우고 고천제(告天祭)를 지냈는데, 인근의 주민들과 장정 등 1천여 명이 집결하여 성세를 이루자 일본군조차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날 이석용은, '우리의 동맹 일체는 국가와 군부(君父)의 만세(萬歲)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이며, 충성은 공(公)이고 효도는 사(私)이니 만약 두 마음을 품으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 맹세하였다. 이로써 이석용이 이끄는 호남창의소(창의동맹단)가 정식으로 출범한 것이다.
3. 고난의 항일투쟁
이석용은 의병 조직을 결성한 지 하룻만인 음력 9월 13일 진안읍 공격에 나섰다. 당시의 상황은 아래의 인용문에 잘 나타나 있다.
진안읍을 도륙하기 위해 우화정(羽化亭)에 진을 치고 총을 우레와 같이 터뜨리니 왜적이 방금 밥을 먹다가 문득 놀라 몸을 피해 산으로 달아나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외치며 쫓아가서 격전을 벌여 굴구원차랑(堀口源次郞)이 총에 맞아 팔이 부러진 채 도망하였다. 이에 그들의 복장, 양총, 일본 옥편, 이등(伊藤)이 지급한 직첩, 돈, 지물(紙物) 등을 노획하였는데 거의 20여 짐이나 되었다. 무거워서 옮겨가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절반이나 불태웠다. 왜가 고을 원님을 쫓아낸 후 1년 동안 명령을 내린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가죽 끈이 수천 건이나 되었다. 나는 읍민들을 불러 앞에 세우고 말하기를, '원수들이 장차 이것으로 당신의 부모와 처자를 묶어 갈 것이다'하니, 군중들이 모두 놀라 다투어 불에 넣었다. 또 우편취급소를 부수고 통역의 집에 있는 일본 상품을 불사르고, 전선 100여 발을 절단하였다. 일진회을 불러 타일러 스스로 그 깃발을 없애게 하였다.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양민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털끝만한 물건도 침노치 못하게 했다. 그리고 격문을 만들어 사방에 전달하니 듣고서 감동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정재 이석용 창의일록], 516-517쪽).
다소 장황하지만 위의 글을 통해 이석용 의진의 활동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즉, 이들은 의진을 결성하자마자 진안읍을 공격하여 헌병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점령하여 파괴하였으며, 일본어 통역의 집에 있는 일본 상품을 불사르고 통신망을 사용할 수 없도록 전선을 끊었다. 아울러 일진회원 스스로 사무소의 깃발을 내리게 했으며, 군율을 엄히 하여 전혀 민폐를 끼치지 않아 주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석용 의진은 일본 군경과 그 시설물, 일본 상품, 친일세력을 공격대상으로 삼았으며 군기를 엄정히 하여 민폐근절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출진하여 진안읍 공격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자 이석용 의진의 명성이 전라북도 지방에 곧바로 퍼졌던 것 같다. 이들이 용담의 심원사(深源寺)를 거쳐 숭암사(崇巖寺)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인근에서 활동 중인 김동신(金東臣) 의병부대가 합진(合陣)을 요청해왔다. 이에 두 의진은 용담 대벌평(大筏坪)에서 만나 합진을 논의하였으나 의진의 군사 지휘권 문제로 갈등을 일으켰다. 이석용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유격전술로 대응하자고 주장한 반면, 김동신은 대규모의 의병부대로 운용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결국 합진 여부를 놓고 의견이 일치되지 않던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이석용 의진은 크게 패하였다. 당시 선봉장 박만화(朴萬華)가 전사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석용 자신도 겨우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결국 두 의진은 결별하게 되었으며, 이석용은 잔여 병력을 수습하며 함양과 운봉 인월 등 지리산 자락을 전전하였다. 당시 이석용 의진은 겨우 군사 20여 명과 총기 10여 정, 창 4자루가 전부였다. 그가 지리산으로 이진한 것은 창평에서 구례로 이동해온 고광순(高光洵) 의병부대와의 연합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고광순 의진은 이미 1907년 10월 연곡사에서 기습을 당해 고광순 이하 수십명이 전사했으며 나머지 의병들은 이리저리 떠돌고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들 두 의진이 연합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석용 의진은 좀처럼 초창기의 세를 회복하지 못한 채 지리산과 같은 깊은 산중의 사찰과 제각에서 주둔하였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장수는 수저없이 밥을 먹고 군사는 겹옷 아닌 홑옷을 입었네"라고 표현하였다.
이석용은 의병 모집과 무기를 수습하며 의진의 정비에 노력하던 중 용담 화암(華巖)에서 일본군의 공격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인근 마을에서 밀고하여 이들이 불의의 기습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중상을 입은 선봉장 안관서(安寬瑞)를 민가에 맡겨 치료를 부탁한 후 상황을 수습하려 했으나 흩어진 병사들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이석용은 의진을 일시 해산한 후 광주의 기우만(奇宇萬)과 태인의 임병찬(林炳瓚) 등을 만나 시국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907년 음력 11월 중순 그는 다시 의병을 규합하고 군자금을 확보하여 의진을 재정비하였다. 이후 그는 투쟁역량을 제고하기 위해 전투능력이 있는 의병의 모집과 무기의 구득 및 성능 향상에 노력하였다. 아마도 이무렵 이석용이 발표한 [의진약속(義陣約束)] 14개 조 가운데 2개 항이 무기의 성능 개선과 연관된 점만 보더라도 그가 전투력 향상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즉, 그는 궁장(弓匠), 공장(工匠), 총장(銃匠) 등 한 가지 기술이나 능력을 가진 자를 고루 선발하여 활용할 것과 우리의 무기는 낡고 위력이 약하니 왜인들의 무기를 빼앗거나 개량하여 사용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들은 성능을 향상시킨 화승총을 개발하였다. 즉, 1907년 음력 12월 하순 이들은 대장장이를 데리고 백련산에 들어가 대장간을 만들어 무기를 수리하고 포를 시험할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1908년 4월에는 해산군인 출신으로 선봉장으로 활약한 최덕일과 윤정오가 화승총을 관타식(管打式)으로 개조하여 성능을 향상시켰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석용은 의진의 정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의진약속]과 [의령10조(義令十條), 1908년 음력 정월 12일]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의진약속]에서는 일본세력 구축, 일본 상품 배격, 인물 본위 모병, 무기제조 기술자 영입, 푸른색 군복 착용, 간략한 군례(軍禮),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세력 처단, 엄격한 군율 적용, 민폐 근절 등을 내세웠다. [의령10조]에서는 근왕사(勤王事) 정명분(正名分) 안민심(安民心) 족군용(足軍用) 출기계(出器械) 정공상(定功賞) 등을 내걸었다. 특히, 그는 일본 군경을 죽이거나 체포한 의병에게는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강력한 의병부대를 만들기 위한 그의 의지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탄환과 화약, 군량 등을 조달하기 위해 부유한 집안의 형편에 따라 군자금을 할당하였다. 간혹 부서를 재편하기도 했는데, 중군장 김운서(金雲瑞)를 부장(副將), 윤명선(尹明善)을 중군장, 김성학(金成學)을 선봉장, 정성현(鄭成賢)을 우포장(右砲將)을 삼아 포군장(砲軍將)에 임명된 최덕일(崔德逸)을 보좌하게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석용은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재개하였다. 이들은 친일활동을 일삼는 일진회원을 처단했으며, 공전영수원 등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이나 세무서 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의병의 동향을 보고하는 자위단 활동을 금지시키고, 가짜 의병 및 탐학을 일삼는 관리 그리고 의병 배반자들도 징치의 대상으로 삼았다. 의병 활동에 필요한 군자금은 부호가의 자발적인 협조를 통해 해결하거나 일본 군경으로부터 빼앗은 노획품, 그리고 면장이나 공전영수원 등이 거두어들인 세금을 빼앗아 충당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납세거부투쟁을 병행하였다. 특히 이석용은 자신들을 후원한 내역을 기록한 [불망록(弗忘錄)]을 남기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 자료는 1908년 음력 9월부터 1913년 음력 7월까지 후원받은 내용인데, 후원자의 이름과 거주지, 금액, 물품 등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석용 의진의 의병투쟁은 1909년에 들면서 더욱 어려움에 처해졌다. 장기항전으로 인해 의병의 전력이 크게 약화된 데다 일제 군경의 탄압이 갈수록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귀순을 권유하며 회유하는 한편, 이들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토벌대를 집중적으로 편성하여 압박을 가했다. 심지어 일본 군경은 이석용의 누이를 불법으로 구금, 협박하며 이석용의 거처를 파악하려 하였다. 특히 14연대장 국지(菊池) 대좌는 그의 지기(志氣)와 글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시세를 들먹이며 귀순을 하면 후하게 대우할 것이라며 적극 회유하였다. 이석용은 수미일관 거의의 정당성을 천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즉, 그는 전국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과 통문을 비롯하여 일본 천황에서 일인 순사까지, 그리고 고종에게 보낸 상소문으로부터 일진회와 자위단과 같은 친일단체 등에 보낸 수많은 글을 지어 게시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를 통해 이석용의 사상과 활동, 나아가 당시 전라도 지역 의병항쟁의 동향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일제의 압박이 갈수록 커지자, 전라북도에서 활동하던 의병장들은 1908년 음력 12월 하순 순창의 모처에 모여 향후 대책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얼마 후인 1909년 음력 2월 하순에는 이석용, 신보현 등은 전라남도 장성의 백양사에서 다시 만나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합의한 것 같다. 그의 종사(從事)로 활동했던 전수용(全垂鏞)은 이미 1908년 봄에 광주로 내려가 조경환, 오성술 등과 거의하여 전남지역 의병항쟁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와 무관하게 일제는 수비대와 헌병대, 경찰뿐만 아니라 일진회와 자위단 등 친일단체까지 동원하여 이석용 등을 체포하기 위해 수시로 진압작전을 전개하거나, 변장대 및 밀정 등을 투입하여 그를 추적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이석용 의진은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으나 역부족이었다. 1909년 봄 이석용 의진의 상황은 아래와 같다.
대개 우리 의병들은 위에서 권장하는 상이 없고 밖으로는 조그만 지원도 전혀 없는데다 훈련과 병기가 불리하여 쇠약하기 그지없고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군사일 따름이다. 더욱이 혈전 3년간 적을 격파하여 천하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다. 어찌 장하지 아니한가. 그런데 호남의 모든 땅에 풍운이 크게 일어나 말발굽 소리와 전장터에 흘린 피가 넘쳐날 정도였다. 해와 달은 빛이 없고 귀신의 통곡소리에도 수심이 어렸다. 나부끼는 깃발은 갈가리 찢기고 보잘 것 없는 무기조차 부러져서 장사는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선생(이석용 필자주)은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고하고 신의 힘이 다했으니 다음에 재기하겠노라고 다짐하며 의병을 해산하고 산간에 숨었는데, 이때가 1909년 음력 3월이었다([행장], 앞의 책, 63쪽).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석용은 3년에 걸친 의병활동을 접고 후일을 기약하며 눈물을 머금고 의병을 해산한 후 자신도 잠복하였다. 그 때가 1909년 음력 3월이었다.
4. 불굴의 와신상담(臥薪嘗膽)과 순국
1910년 8월, 나라를 잃은 처지였지만 그는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그가 같은 해 음력 11월 전투중 사망한 의병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주거나 애도하는 글을 지어 추모하는 활동을 전개하며 결의를 다졌다. 그는 임실군 상동면 지의동(知義洞)과 동룡동(東龍洞)에 은밀히 의령단(義靈壇)을 설치하였다. 이곳은 임실 운현 전투가 벌어진 장소인데, 그곳에 전사하거나 피체되었다가 순국한 장졸의 신위를 모신 것이다. 이를 그는 제2錦山義師塚이라 불렀다. 의병장 전기홍을 비롯하여 최덕일 여운서 박만화 김사범, 의사(義士) 한사국 이광삼 허윤조 이문백 양경삼 오병선, 의졸(義卒) 윤정오 김여집 서성일 한득주 김치삼 정군삼 김춘화 박운서 최일권 성경삼 김경선 서상렬 박인완 박달천 양성숙 오원풍 정원국 신성운 김원일 김상칠 박창원 김경삼 김준완 김복남 김의삼 정복기, 의동(義童) 김동관 박철규 허천석 김학도 한북술 임종문 양인숙 서상기, 의승(義僧) 봉수 덕홍 계화 등 48인의 신위를 모시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영단이었다(굵은 글씨는 이른바 28의사).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새로운 각오로 반일투쟁의 전의를 다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가 의병 장졸들을 의장-의사-의졸-의동-의승 등 다섯가지로 구분했음이 이채롭다. 아마도 그는 신분과 의진상의 직책, 연령, 신분 등을 고려하여 그렇게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최덕일이 어떻게 순국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908년 음력 3월 포군장 최덕일은 임실 대운리(岱雲里) 운현(雲峴)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할복 자결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석용 의진은 16명이나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석용은 그의 죽음을 매우 안타까워하며 다음과 같이 애도하였다.
한번도 어려운데 두 번을 찌르다니
보배로운 핏자국 붉다 못해 파랗구려
그대의 대의는 천상의 저 별과 같이 드높으니
그대 이름 어찌 남녁 고을에만 가득하랴([崔先鋒德逸挽], [정재선생문집] 권 1, 8쪽).
이처럼 희생자는 장졸을 불문하고 잇달아 발생했으며, 이석용조차 여러 차례 사경을 넘나들었다. 그는 이미 의병을 해산했지만 1910년 말에 자신과 함께 활동하다가 전사한 의병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거나, 글을 지어 추모했던 것이다.
의령단 설치운동을 통해 점차 무력감에서 벗어난 그는 1911년 3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1912년 겨울 조국의 광복을 위한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의 항일지사들과 연계한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이른바 임자밀맹단(壬子密盟團)이 그것이다. 이 비밀결사는 구례의 정찬석을 비롯하여 하동, 곡성, 남원, 전주, 임실, 진안 등의 동지 약 2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밀맹단의 명단만 소개되어 있을 뿐이어서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아마도 이석용은 밀맹단을 중심으로 을사5적과 정미7적의 처단, 일본 도쿄와 오사카 등지의 방화 그리고 중국 망명을 추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군자금 후원을 약속했던 친구의 배반으로 그는 한인 순사에 의해 1913년 음력 10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상과 같이 이석용은 1906년 중반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의병이 해산한 후 직접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굳혔다. 그후 고광수 등과 만나 거의방략을 협의하며 1년 동안 치밀하게 거의준비를 하였다. 마침내 1907년 음력 9월 12일 전라북도 마이산 자락 용암에서 고천제를 지낸 후 의병장에 추대된 그는 진안읍 공격을 시작으로 의병활동을 본격화하였다. 이후 그는 임실-장수-남원-함양-구례 등을 비롯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를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석용은 일제의 구축과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목표로 일제 군경과 그 시설물을 공격하였으며 친일세력인 일진회와 자위단의 처단에도 앞장섰다. 이석용은 보다 효과적인 의병항쟁을 위해 전투능력을 지닌 의병 모집과 무기의 성능 향상 그리고 민폐근절에 심혈을 기울임으로써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일제는 그를 비롯한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는데, 특히 그를 귀순시키거나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될 정도였다. 일제의 다양한 압박이 워낙 심해지자, 1909년 음력 3월 그는 훗날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하고 잠복하였다. 그후 나라가 망하자 항일투쟁중 전사한 의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의령단 설치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는 은밀히 일본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912년 겨울에는 밀맹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으로 전환하여 테라우치총독과 매국노를 처단하고 중국 망명을 계획하다가 불행히도 1913년 음력 10월에 체포되었다. 요컨대, 이석용은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후기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며, 해산 이후에도 이석용은 국내에서 의령단을 설치하여 전사한 의병들을 애도하고, 비밀결사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으로의 전환에 기여하였다. 따라서 그는 전라북도를 대표한 한말의병장으로서 무려 7년 동안이나 의병전쟁과 독립운동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는 방화상해(放火傷害), 모살(謀殺), 강도급강도상인(强盜及强盜傷人)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미주에서 발간되는 [신한민보]에 재판과정이 상세하게 실려있다.
[의병장리석용공판 : 4천여 년 지켜오던 조국이 강적에게 합병 당함을 원통히 생각하여 한 번의 의기를 들고 전북, 경남 일대에 풍운을 일으키며 감사(敢死-필자주)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토멸하고 한국 강토를 회복하고자 하다가 불행히 작년 11월에 원수에게 사로잡힌 의병대장 이석용씨는 방금 나이 37세에 명성이 전국에 전파되으로 원수들은 이씨를 없애고자하여 살인, 강도범으로 몰아놓고 금년 2월 5일에 전주지청에서 소위 공판이라 하는 것을 시작하고 리씨에게 대하여 심문하였는데 (중략) 방청인은 각 신문기자와 통신원들이며 기타 여러 사람이 풍우를 무릅쓰고 당외당내에 다수가 둘러 구경하더라.
얼마 후에 옳은 일을 하고자 하던 일로 피고된 리석용씨는 옥졸의 보호로 출정하였는데 평복에 초혜를 신고 성긴 수염, 화평한 얼굴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서서히 걸어 들어오니 보기에 일개 조그마한 남자요 외모가 미약하야 성문에 듣던 말보다 웅장한 기상은 없으나 흔연히 웃는 얼굴로 의기 자득하여 최후 결심이 있는 듯 하더라. ([신한민보] 1914년 5월 14일자 현대문으로 고침).
다소 길지만 위의 인용문을 보면, 조희제의 [염재야록]에 한문으로 수록된 것보다 훨씬 현장감과 구체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언론사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석용의 재판에 관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매우 당당한 자세로 재판을 받았는데, 그에 대해 일본인 고등법원 판사는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대한의 지사로서 위로는 황실의 일을 애통하고, 광무 11년 정미 8월에 의병을 전라북도 임실군에서 일으켜 다음해 8월까지 전투에 종사하였으나 횡폭을 금하고 부호를 타일러서 추호도 범한 바가 없었으며, 무신년 9월 이후 기유년 3월에 이르러 진퇴할 길이 없어 부득이 무리를 해산하고 몸을 깊은 산중에 감추고 우연히 고향 땅으로 왔을 때에 체포된 몸이 되어 지금 살인 방화 강도죄의 악명이 씌어져서 극형에 처하게 된 것은 원통한 일다([이석용고등법원판결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933쪽).
위의 내용을 보면 일제의 고등법원 판사조차 그를 매우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이석용의 11가지 범죄사실이 적시되어 있는데, 일본 군경과 전투한 내용은 전혀 없이 친일파의 처단과 그 가옥의 방화, 군자금 모금 등이 집중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는, 일제가 그를 의병장이 아닌 파렴치한 잡범으로 호도한 저의가 반영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한편, 그는 지방법원 판결문에 직업이 한문교사로 적혀 있다. 아마도 그가 의병에 투신하기 전에 도동서려 등에서 학인들을 가르친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석용에 대한 재판은 1914년 2월 5일 시작하여 같은 달 7일 1심 사형선고가 있었다. 같은 해 음력 2월 그는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어 복심법원 재판을 받아 3월 6일 원심대로 기각되었으며, 서울의 고등법원 역시 4월 16일자로 상고를 기각하였다. 따라서 그의 재판에 관한 신문기사는 전주지청에서 열린 1심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는 크게 10가지 질문을 받았는데, 그 중에 중요한 답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4서3경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많이 읽었다는 것, 빈한한 선비이므로 재산이 없다는 것, 일본인을 배척하고 한국을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 호남창의대장으로서 약 300명을 지휘했다는 것, 의병활동에 대한 사실 여부, [창의록]과 [불망록] 저술의 목적 등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내정의(寺內正毅) 총독과 5역7적을 죽이지 못한 점과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를 불사르지 못한 점이 유감이라고 최후진술을 하였다. 재판장이 일본의 충실한 신민이 되겠냐고 질문하자, 그는"차라리 대한의 닭이나 개가 될지언정 너희 원수의 나라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고 당당히 답변하였다.
사형이 확정된 후 이석용은 15세의 아들과 최후 면회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아들 부부와 2명의 누이 앞으로 쓴 최후 유서를 아들에게 전달하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그는,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너무 슬퍼하지 말지어다. (중략) 밭을 가는 여가에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하여 가문의 명성을 이음이 너의 아비 소원"이라 하였다. 당시 그의 아들 원영은 14세에 남원 출신의 의병장 고광수(高光秀)의 딸과 혼인한 10대 소년이었다.
그런데 그가 [창의록]과 [불망록]을 남긴 이유로써 [창의록]은 자신의 충분(忠憤)을 담아 일본에 보내려는 것이었고, [불망록]은 거의이후 후원을 받은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훗날 보상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이러한 기록을 한국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아래 역사적 사료로 중요하게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는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르고 왜적을 멸하겠다고 맹세한 후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 1914년 4월 3일 그는 교수형으로 순국했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천고의 강상을 짊어짐은 중요하고
삼한의 해와 달은 밝게 비치는데
외로운 신하 만 번 죽어도 마음 변치 않으니
사람으로 머리 숙여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