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국적, 무혈연의 공간에서 사랑 찾기
열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이 작품집의 주인공들은 모두 도쿄에 거주하는 30대의 직장인들이다. 현대 도시문명의 요람 속에서 자본주의가 선사하는 물질의 세례에 이질감 없이 적응한 채 샐러리맨으로서의 공적 삶과 사랑에 굶주린 개체로서의 사적 삶을 동시에 밀고 나아간다. 어찌 보면 우리의 30대 보통 남녀의 삶의 조건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런 유사성만으로 우리가 이 소설을 비롯한 현대 일본소설에 국내 소설보다 더 호감을 갖거나 열광하는 현상이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나는 설명의 보충을 위해 현대 일본소설의 '무국적성'과 '무혈연성'을 꼽고자 한다. 우리가 즐겨 보는 일본 소설에는 간간히,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요리명, 서명 등 일본 문화의 소품을 제외하고는 일본인의 국민성, 역사,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내용이 거의 없다. 우리 소설에서의 분단, 80년대를 둘러싼 역사적 부채 의식에 필적할 만한 모티프를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우리 드라마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주제화되는 가족내의 갈등이나 윤리 문제도 돌출되지 않는다. 철저히 해부하고 숨겨진 음영을 가려보지 않는 한 현대 일본소설은 이처럼 무국적성과 무혈연성의 속성을 보인다.
위 두 가지 속성은 소설속 인물들을 자유롭게 한다. 진공 속의 자유, 공허한 자유, 무책임한 자유라는 비웃음을 받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들은 자유롭다. 단편 [두 사람의 이름]의 남녀 주인공들처럼 결혼도 안 하고 몇 년씩 자기 사유물에 각자의 이니셜을 적으면서 아슬아슬한 동거 생활을 하기도 하고, [스타팅 오버]의 마유미처럼 16살부터 30세까지 단 일주일도 안 쉬고 남자친구를 갈아대며 살기도 한다. 그래도 '여론의 심판'을 받을 염려가 없다. 가족들의 훈계를 듣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모든 기성의 집단적 구심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채 각자의 삶을 자기 의지대로 요리해 나가려는 듯하다. 물론 삶이란 언제나 다른 삶들과의 관계 속에서 전개되므로 굴절이 없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주체의 선택에서 "남의 눈치를 보는 일"은 없다. 그것만 해도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오히려 과도한 자유, 과도하게 자유로운 사랑이 부담이 되기까지 한다. 자유는 주체의 선택과 사랑의 의미 찾기를 더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시다 이라와 그의 인물들의 고민도 여기 있는 듯하다. [슬로우걸]의 바람둥이 남자 주인공은 너무나 순진한 장애 여자와 만남을 지속하기로 결단한다. 하룻밤 섹스로 끝내기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소중한 가치를 그 여자의 웃음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옛 남자친구]의 여주인공은 오래 전 헤어진 남자친구의 전화를 받고 다시 설레는 가슴을 느낀다. 고된 직장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자신을 받아줄 만한 사람이 그 남자친구밖에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1파운드의 슬픔]에서 1달에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하는 연인은 그 애달픈 하룻밤의 만남 끝에 헤어짐의 슬픔과 그 가치를 서로 확인한다. 이처럼 이시다 이라는 현대 일본, 그 극 자본주의의 현장에서 외견상 자유로워 보이는 남녀들의 힘든 사랑의 의미 찾기를 시도한다.
좋, 은, 소설을 쓴다, 이 작가는. 무국적성과 무혈연성의 진공,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애정의 양태를 그려 보임으로써 현대 일본의, 혹은 여기 한국의, 나아가 보편적 공간의 보편적 사랑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