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대공수사권, 5일 뒤 경찰로 넘어가… 경찰 수사핵심인력, 국정원에 크게 못미쳐
간부 절반, 대공수사 경력 3년미만
국정원 파견직원도 5명 안팎 그쳐
국가정보원 청사 모습. 2023.11.1./뉴스1
국가정보원의 ‘대공 수사권’이 내년 1월 1일부터 경찰로 완전히 넘어간다. 기존 간첩 수사 과정에서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와 구속영장 신청이 가능했던 국정원은 이제 해외 정보망 등을 통해 수사 첩보를 입수한 뒤 이를 경찰에 전달하는 역할만 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내년부터 간첩 수사를 지휘할 본청·시도경찰청 소속 경찰 간부 84명 중 절반 이상(51%)은 안보 수사 경력이 3년 미만인 것으로 파악됐다. 또 대공 수사의 중심에 설 본청 경찰 인력(142명)은 현재 국정원 대공 수사 인력 규모에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안보수사국 내에 협의체를 두고 국정원 직원을 파견받아 노하우를 공유하고 적극 소통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내년 초 파견될 국정원 직원은 5명 안팎이 될 것으로 전해져 의미 있는 협업이 이뤄지겠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경찰은 본청 안보수사단과 시도청 소속 안보수사대를 합한 안보 수사 인력을 올해 724명에서 내년 1127명으로 403명(55.7%) 증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동아일보 취재에 따르면 순수 대공 수사 인력은 750여 명 규모로 꾸려질 전망이다. 특히 핵심 수사는 본청 안보수사단이 사실상 전담한다. 지금의 국정원과 같은 역할은 안보수사단 내 142명 규모의 인력이 맡는다는 것. 사정 당국 고위 관계자는 “지방청 소속 안보수사대는 (간첩 수사) 지원 등의 역할을 주로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신진우 기자, 고도예 기자
‘간첩’ 64%가 외국서 北접선… “경찰 전담땐 해외수사 공백 우려”
국정원 ‘대공수사권 이관’ 문제점은
간첩통신-암호해독에 노하우 필요… 경찰 내부 ‘대공 베테랑수사관’ 적어
경찰 “국정원 인프라 활용 등 협업”
일각 “휴민트 등 100% 공유 의문”
“접선 장소는 캄보디아 프놈펜.”
2018년 4월 5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 선상에 올랐던 ‘자주통일충북동지회’ 구성원 박모 씨가 북한 공작원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충북동지회의 또 다른 구성원인 윤모 씨를 프놈펜으로 보내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도록 하겠다는 것.
윤 씨는 정확히 3주 뒤 프놈펜 공항에 도착했다. 이후 프놈펜의 한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내 기념비로 향한 윤 씨는 한 남성을 발견했다. 그리고 공원을 산책하듯 한 바퀴 돌았다. 이어 인파로 북적이는 시장으로 이동했다. 몇 분 뒤 윤 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시장을 빠져나갔다. 공원에서 만난 남성도 함께였다. 행선지는 프놈펜의 한 호텔방. 윤 씨는 그곳에서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국내에서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국가정보원 수사팀은 ‘007 작전’을 방불케 한 윤 씨와 북한 공작원의 접선 장면을 사진은 물론 동영상으로도 촬영했다. 수년간 내사 후 충북동지회를 확인해 수사를 벌였고, 이후 윤 씨의 출국 계획을 파악한 직후 캄보디아 현지의 다른 국정원 요원 등에게 협조를 구하는 등 신속한 수사가 이뤄진 결과였다. 수사팀이 확보한 영상 자료는 충북동지회에 대한 강제수사를 시작하는 핵심 단서가 됐다.
● 北지령 10명 중 7명, 해외서 공작원 접선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내에서 활동하는 ‘고정 간첩’ 피고인들이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나 지령이나 공작금을 받는 경향은 최근 더욱 두드러지는 추세다. 최근 5년간 북한의 지령에 따라 활동하는 등 국보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최소 22명 중 14명(63.6%)은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을 접촉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아일보가 이 피고인들의 공소장과 1심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다.
전문가들은 “해외 접촉 사례가 늘면서 간첩 수사가 까다로워진 상황에서 내년 1월 1일부터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넘어가면서 해외 수사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정원법 개정안에 따르면 해외 정보 수집과 간첩 수사를 도맡던 국정원은 앞으로 ‘해외 정보 수집’만 할 수 있게 된다.
2006년 간첩 사건인 일심회 사건 등을 수사한 최기식 전 차장검사는 “일심회 사건 당시 국정원 수사팀이 주요 피의자에 대해 ‘중국 외곽 아지트에 교육을 받으러 간다’는 첩보를 확인했고, 중국에 파견된 요원들에게 협조를 요청해 접선 장면을 채증했다”며 “경찰과 국정원의 신속한 정보 공유가 간첩 검거의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국정원 전 수사 요원 A 씨는 “국정원이 북한 공작원과의 접선 장면을 확인해도 이 정보가 곧바로 100% 경찰에 공유되긴 어려울 것”이라며 “경찰이 국정원의 휴민트(인적 정보) 관련 보안을 얼마나 잘 유지해 줄지도 의문”이라고 했다.
경찰은 내년 본청에 신설할 안보수사단과 국정원 대공수사국 관계자들 간 업무협의체를 꾸려 국정원의 자문을 받는 안을 검토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국정원이 가진 기존 해외 인프라를 적극 활용하는 등 협업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안보수사단에 파견될 국정원 직원이 5명 안팎에 불과할 것으로 알려져 제대로 협업이 될지 의문이란 지적도 나온다. 경찰 관계자도 “국정원 파견 인력은 연락관 정도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 “간첩 수사 간부 절반 대공 수사 경력 3년 미만”
내사에만 수년이 소요되는 경우가 빈번한 간첩 수사를 내년부터 전담할 경찰 내부에 대공 수사 경험이 많은 베테랑 수사관이 적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내년에 전국 간첩 수사를 지휘할 본청·시도경찰청 소속 과장급 이상 간부 84명 중 절반 이상인 43명(51%)은 대공 수사 경력이 3년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력이 1년도 안 된 간부도 26명(31%)이었다.
신속함이 생명인 대북 지령문 암호 해독 등에서 생길 수사 공백 우려도 제기된다. 앞서 5월 국정원은 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직쟁의국장 석모 씨의 컴퓨터에서 ‘스테가노그라피’ 등으로 잠금 장치가 된 문서를 확보했다. 당시 국정원의 한 베테랑 수사관은 압수물인 파일에서 규칙이 보이지 않는 영문자를 확인했다. 이어 이 문자열을 한글 타자로 변환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란 패스워드를 발견해 암호 해독에 성공했다.
고도예 기자, 신진우 기자, 신규진 기자
美, 9·11후 DNI 만들어 정보-수사 협력 총괄
해외 정보기관들은 어떻게
美, 정보-수사 유기적 융합 강화추세
英, 정보 수집해 독립수사청에 이첩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이 내년 1월 1일부터 경찰로 이관되면 국정원은 미국 중앙정보국(CIA), 영국 비밀정보부(SIS·일명 MI6) 등처럼 해외 정보 수집만 주로 전담하되 수사권은 없는 정보기관이 된다. 다만 미국의 경우 국정원 역할도 하는 연방수사국(FBI) 등 정보기관이 수사권을 보유하는 등 정보와 수사의 유기적인 융합이 강화되는 추세다.
2018년 국회 정보위원회의 연구 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52개국의 정보기관이 수사권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외의 19개국은 단순 조사권만, 11개국은 조사권과 수사권 모두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개정 국정원법상 국정원은 내년부터 행정 행위인 조사권만 행사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정보 수집과 수사의 영역을 엄격히 구분했던 미국의 경우 1974년 CIA가 창설돼 해외 정보 수집을 맡고, 기존 FBI는 국내 정보 수집은 물론이고 방첩 수사까지 담당하는 체제가 구축됐다. 이후 2000년 9·11테러를 계기로 사전 징후를 공유·판단하는 과정에서 두 기관 간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에 미국은 국가정보국(DNI)을 창설해 정보기관들 간 정보 협력을 총괄하도록 했다. DNI는 CIA, FBI 등 미국 내 17개 정보기관을 지휘, 통솔하면서 취합한 정보를 매일 아침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FBI는 정보 업무와 수사 담당자 간 유기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국가안보청(NSB)을 설립했다. 대량살상무기, 테러, 정보 공작, 간첩 활동 등 4대 분야 정보활동 및 수사 역량 통합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였다. NSB는 청장 임명 시 DNI의 동의를 거치는 등 DNI의 지휘 감독을 받는다.
영국의 MI6는 해외 정보 수집 업무만 맡는다. 다른 정보기관인 보안정보부(SS·일명 MI5)는 국내 정보 수집과 국가 안보 범죄에 대한 조사권을 갖고 있다. 대테러나 방첩 관련 정보 수집, 조사 시 체포 등 강제 수사 권한이 없는 MI5는 조사 결과를 내무부 산하에 별도로 설립된 수사 조직인 국립범죄수사청(NCA)이나 경찰에 이첩하면 이들 기관이 수사하게 된다.
신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