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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02.12.20(금) 노무현 홈 회원게시판 글 NO: 331839
에 실린 글 입니다-
먼저 축하를 드립니다!
저는 목사로서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독학으로 공부하며 4전 5기 불굴의 정신으로 대선에
도전하신 대통령 당선자를 저는 늘 마음속에 생각했습니다.
실패를 겪은 저분이야말로 남의 아픔을 이해 할수 있겠구나!
저도 어렵게 공부하며 3번씩이나 대학에, 대학원에
떨어진 경험이 있기에 더욱 인간적인 정감이 느껴 집니다.
저는 3가지를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새벽예배때도 교인들에게 기도부탁한 내용입니다!
첫째, 겸손한 대통령이 되어 주십시요!
지금처럼 그렇게만 하시면 됩니다. 초심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섬겨 주십시요!
백성위에 군림하는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땅에 낮고
천한 마굿간에 태어나신 이유를 아십니까?
바로 겸손의 비하의 모습 그 자체 입니다. 교만한 왕 사울은
하나님이 버리셨습니다. 자기 혼자 영광을 다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백성들의 민심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정적을 제거할려고 했습니다(삼하19장1-7절).
그러나 성군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순리를 따랐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다윗에 대하여 말할때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삼하8장14절)
고 말씀하십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동시에
자연의 순리를 거스리지 않으며 겸손한 대통령이 되시면 어디를
가시든지 승리하리라 굳게 믿습니다.
승리에 도취되어 백성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그런 어리석은
대통령이 되지않을줄 믿습니다.
둘째, 동서화합을 꼭 이루어 주십시요!
제가 노후보를 지지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고향이 부산이시면서 지지는 호남에서 가장 최고로
지지를 받으셨습니다.
역대 대통령중에 이런 지지를 받은적이 없는 것으로 기억 됩니다.
물론 미국도 지역적인 지지성향이 분명하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나라나 어느 정도는 있을수 밖에 없다 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만큼은 이 일을 이루어 주실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야 말로 '지역감정 없는 대한민국'
'지역때문에 차별받지 않는 대한민국'으로 만들어 가실줄 믿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것을 해결해 달라고 1,188만표를
던진것임을 기억해 주십시요!
셋째, 통일을 꼭 이루어 내도록 해주십시요!
저는 '고모'라는 말을 한번도 들어보거나 불러보지
못한 실향민 입니다. 저의 '고모'가 북한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버님은 북한 '함경도'에서 출생 하시다가 6.25 전쟁때
'인천'으로 피난 나오셨습니다.
여러가지 사업도 하셨지만 많은 고생을 하시다가
결국은 '혈육'을 만나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제 피 속에도 실향민의 애끊는 절규가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님! 제 소원을 꼭 들어 주십시요!
실향민들의 아픔을 대변해 주십시요!
우리나라가 통일만 된다면 세계열강들 틈에서도 백의민족의
단합된 힘을 통해 세계4강을 이루어 낼것입니다.
마치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이루어 낸것처럼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내어 세계에 빛날 대한민국을 건설하게 해 주십시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위해 거름을 주고 물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열매로 우리 손에 쥐어질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님! 백두산에서 남과 북이 손에 손에 잡고
월드컵을 개최할수 있는 때가 속히 오기를 희구해 봅니다!
그리고 제가 'NO 무현' 대통령 이라 표현 한것은
1)교만하지 않는 대통령이 되어 주세요!
2)동서를 더 이상 분열시키지 않는 대통령이 되어 주세요!
3)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대통령이 되지 말아 주세요!
라는 뜻으로 쓴 것입니다.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
메리 성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님!
2002.12.20 거제도에서 한성호 목사 드림
추신:
다시한번 이번선거에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박수갈채를
보냅니다!(짝짝짝!)
그리고 대선을 못이루신 '이회창 후보'님 께도 심신한
위로한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그동안 수고 많이 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9장17절)
대한민국 화이팅!!!
호남 몰표 어떻게 볼 것인가?
화덕헌 기자 badak84@hanmail.net
나는 얼마 전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새내기 당원이다.(당연히 이 글은 개인 자격으로 쓰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선택했음을 먼저 밝힌다.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호남 몰표에 대해 말이 많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엽기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주변에 많은 것 같다. 특히 내 고향 대구와 내가 사는 부산에 있는 이회창 지지자들에게는 호남 몰표가 아주 혐오스런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민주노동당원 동지들도 호남에서의 심각한 부진을 충격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호남에서 단 1%의 지지도 얻지 못한 사실은 민주노동당 지지자들 입장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자괴감 드는 현실임에 틀림없다. 아울러 영남 출신을 제외한 타지역 유권자들의 호남 몰표에 대한 비난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찬찬히 호남 몰표의 배경을 뜯어보면 호남 유권자들을 도매금으로 묶어 욕할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호남 사람들이 이런 눈총을 감수하면서도 저런 투표성향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아주 사소한 이유라도 찾아보자. 우리가 정말 지역감정 없는 나라를 원한다면,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갈망한다면 바로 그 지점이 우리의 생각을 풀어갈 단초가 될 것이며,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각 정파가 향후 호남 표밭을 두고 씨뿌리기 전 밭을 가는 작업에 해당하는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먼저 이번에 노무현은 호남에서 총 365만여 표를 얻었고, 이회창은 영남에서 총 668만여 표를 얻었다는 통계와 이번 선거가 57만표 차이로 승부가 갈린 박빙의 승부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회창이 영남에서 받은 표가 노무현이 호남에서만 받은 표 보다 무려 300만표 이상 많다는 사실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그리고 영호남을 통틀어 이회창은 노무현을 70만 표 이상 이겼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선거에서 수 싸움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호남에게 불리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영/호남 대립에 근거한 호남 몰표는 전략적인 것이 아니고, 치밀한 정치공학적 계산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90%가 넘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 대한 호남의 지지율은 민주당에 대한 무작정 지지표도 있겠지만, 그 당 후보가 노무현이기 때문에 지지한 표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노무현은 민주당의 후보이다. 하지만 그가 부산 출신 정치인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호남 몰표 중에서 노무현이라서 지지하는 표를 걸러 낸다면, 영남의 70%와 별로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아니 산업이 발달하고 인구이동이 많은 영남의 70% 보다 오히려 건강하게 볼 수 있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나는 호남의 몰표의 첫 번째 이유를 나는 한나라당의 선거 전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호남 몰표를 통해 가장 큰 득을 보는 사람이 과연 누구이며, 가장 욕을 먹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호남 몰표를 호재로 삼아 두고두고 써먹을 세력이 어디인가? 바로 한나라당과 영남의 수구기득권세력이다.
한나라당은 호남에 결코 인재를 투입하지 않는다. 왜냐면 호남에서의 한나라당 득표는 지역주의의 붕괴 도미노를 가져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는 결코 지역주의의 붕괴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역 주민 입장에서 찍을래야 찍을 수가 없다. 우리가 호남을 비판할 때 이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호남의 표심은 영남 수구기득권 세력의 횡포에 의해 변형된 것 이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반면 그간 민주당은 영남에 상징적인 인물, 정치적으로 비중 있는 인물을 내세우며 영남 표밭을 가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 노무현, 김중권, 엄삼탁, 김정길 등을 앞세우며 어떻게 해서라도 지역주의를 한 번이라도 깨 볼려고 노력한 흔적이 있다. 그러나 그마저도 지역주의의 역풍을 맞아 도리어 영남 지역주의에 재료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한 번도 이들은 영남에서 선택받지 못했다. 만약 한나라당이 이 정도 정치적 비중을 호남에 투자했다면 호남에서 한나라당의 득표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결코 그런 짓을 안 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주 선거전략이 무엇이며 그들이 유세장에서 외쳤던 구호의 내용을 알면 호남인의 유전자를 탓하지는 못할 것이다.
노무현이 김대중의 앞잡이이며,
노무현의 고향은 전라도 강진이다.
노무현은 아버지가 전라도 사람이며,
노무현은 광주 노씨이므로 광주 사람이다. 등등등...
이런 흑색선전, 지역감정 조장이 정치적 선동술으로 먹혀드는 판국을 안다면 무작정 호남인을 정신병자 취급하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이런 정치판에서 어떻게 호남 사람들이 한나라당과 대립각을 세운 민주당을 안 찍을 수 있겠나?
95%를 지지해도 결코 이기지 못하는 줄 알면서, 후세인의 이라크 국민 같다는 모욕을 감수하면서, 어리석은 몰표 행각을 벌이는 이 호남 표심을 앉아서 편리하게 욕만 할 일이 아니다. 어느 정파든 그런 인식 수준을 가지고는 호남에서의 표심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매맞는 아이가 있다. 이런 아이는 성장하면서 주눅들거나, 성격이 난폭해진다. 이 아이에 대해 그가 가진 상처를 이해하면서 접근하지 않고, 난폭성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윽박질러서야 어떻게 교정이 되겠나? "폭력은 또다른 폭력을 부른다"는 식의 설교가 이 아이에게 먹히겠냔 말이다. 이 아이를 치유하려는 좋은 교사라면, 이 아이가 당한 폭력의 상처와 과거를 먼저 어루만져야 하는 것 아닌가?
아울러 지역 몰표의 기원이 박정희와 영남세력이라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물론 내 입장에서 볼 때 호남에서 권영길의 약세는 정말 분통 터지는 일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민주노동당은 또 한번 지역주의의 피해자가 되었다. 민주노동당 지지자와 당원으로서 우리는 이를 얼마든지 욕할 수 있다. 하지만 욕을 하더라도 한나라당의 악랄한 지역주의와 싸우기 위해 방어적으로 발생한 호남 표심을 영남의 그것과 싸잡아서 매도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의 서운함을 읍소하여서 그들이 깨닫고 좀 미안해하도록 해야지, 함께 욕을 하고 저주를 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이참에 민주당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정파는 아예 전라도에서 철수하고, 선거전략에서 전라도 유권자 수를 제외시켜야 하나? 아니다, 어차피 국민의 표를 먹고사는 게 정치이고, 정치세력의 본연이다. 적어도 민주노동당 만큼은 호남을 투자가능지역 아니 투자유망지역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실 돌아보면 한나라당은 언제나 영남에서 100% 였다. 지난 총선을 생각해 보라. 민주당에서 쟁쟁한 사람들이 영남에 많이 나왔다. 하지만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전원, 100% 당선되었다. 여기에는 노무현이나 김중권의 낙선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고문기술자, 공작정치가 정형근이 부산에서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후퇴이다. 아니 부산은 부분적인 역사적 암흑기를 맞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치 온 동네가 환한데 우리 집만 정전된 꼴이었다. 민주화를 위해 앞장선 우리의 형제 자매들, 선배들과 동료들을 고문하고, 모욕 주고, 때린 사람이 어떻게 국회의원이 된다 말인가? 지역주의 앞에서는 인권이고 나발이고 없다는 걸 보여준 뼈아픈 사건이었다. 이것보다 지역주의의 폐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지역주의 망령의 실체를 분명히 직시하면서 호남차별주의와 싸우는 것이 민주주의와 인권에도 큰 진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역구도가 깨지면 수혜자는 진보정당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역주의에 관해서는 어줍잖은 양비론은 금물이다. 엄정한 판관 노릇으로 도토리 키 재기를 실천할 때 분열주의자가 설 땅을 잃게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예정자님 당선 축하합니다.
저는 대학원 휴학하고 과천에서 직장다니고 있고 항상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곳 게시판에 회원가입도 안했다가 이 글을 꼭 쓰고 싶어서 방금에야 가입했습니다.
전에 한 번 쯤 노무현 후보에게 투표를 할까 생각해본 적도 있지만, 노무현 후보의 당선가능성과 관계없이 친구들과 얘기하면서 역시 그래도 민노당에게 투표하려고 했었지요.
어제밤에 정몽준이 어이없는 짓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노무현씨 당선되기
힘들겠구나 생각했었습니다. 이곳게시판을 봐도 그렇고 다른 게시판을 봐도 그렇고 너무도 실망하는 노무현 후보의 지지자들 글을 보고서 정말 가슴이 아프고 저도 의욕이 떠어졌습니다. 사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이건 노무현씨가 완전히 뒤통수 맞고 당한 것이라는 느낌이었지요. 너무도 드라마틱한 지지철회 선언이기에 제 짐작으로는 이것은 계획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노무현씨의 발언을 문제삼으며 책임을 노무현씨에게 넘기려는 제도언론의 속보 기사들을 보고서 너무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 사건을 생각하면서 우리나라 보수 특권층들이 국민들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는지 생각하고는 도저히 잠이 안왔습니다.
어제 새벽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에게 투표하려던 수많은 사람들은 노무현씨의 지지자들 못지 않게 괴롭고 고민스러운 밤을 보내야만 했을 겁니다. 상황은 너무도 뜻밖에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습니다.
오늘 노무현씨의 당선에는 몇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어제밤 10시 30분 직후의 상황만 놓고 본다면 오늘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렇지만, 기존의 노무현 지지자 여러분들이 끝까지 믿고 지지해주더군요. 그 다른 편에는 어제밤에 저와 같이 고민했던 사람들이 오늘 눈물을 흘리면서 노무현씨에게 정말 한표가 아까운 그런 표를 기호 4번이 아닌 2번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이 10%도 채 나오지 않은 지역이 있다는 것 아실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는지요. 권영길 후보의 예상 지지율이 약 6.0%정도 되었었는데, 오늘 실제 투표에서는 4%가 채 나오질 않았습니다.
우선 노무현 당선자께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정말 축하합니다. 그리고 제가 노무현 후보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도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후보가 한국의 노동자와 진보진영에 어떠한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사실 기대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도와줬으니까 어떻게 해달라하는 요구사항도 없지만, 그래도 노무현씨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께서는 단 6%만 나와도 행복했을 수많은 노동자들과 저와 같이 12월 19일 새벽을 고민으로 밤새운 사람들의 고사리손같은 표까지 받았다는 점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그건 노동자들을 위해서 민주노동당을 위해서 무엇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 세상을 어떻게 바꿔달라는 요구도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노무현당선자가 살아온 대로, 당신의 원칙과 소신대로만 대통령직을 수행해주었으면 하는 기대입니다. 우리같은 사람들은 노당선자께서 그것만 행해줘도 우리의 힘든 결정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뿌듯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다시한번 당선 축하드립니다.
어려운 싸움 헤쳐나간 노무현 당선자에게 진심어린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
오마이뉴스 덧글..
아빠의 호소 추천수 : 19
들불바람, 2002/12/19 오전 11:51:18
한밤중에 벌인 정몽준씨의 반란을 보며 한 아빠는 눈물이 났습니다.
전남 고흥에 사는 이 아빠는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두 딸이 생각났습니다.
두 딸은 부재자 신고도 않은 상태였고 투표장이 너무 먼 고흥이어서 기권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아빠는 밤 11시에 떨리는 손으로 두 딸에게 전화했습니다.
심야버스 타고 당장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잠자던 두 딸이 선거 때문이라는는 이유를 듣고 거부했습니다. 시험 때문에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아빠는 답답해서 소리쳤습니다.
너희 둘이 투표하지 않으면 역사가 후퇴한다고, 정몽준 같은 사람이 한국 정치판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을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이 순간 두 딸이 투표를 하지 않음으로써 역사에 죄를 짓고 싶지 않다고 아빠는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두 딸이 서울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바로 출발했습니다.
새벽 4시 10분, 광주에 도착한 두 딸을 아빠가 마중나갔습니다.
그리고 고흥까지 데려와 투표를 마쳤습니다.
지금 막 아빠는 시험 준비에 바쁜 두 딸을 여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태워 서울로 보냈습니다.
아빠는 이륙하는 비행기를 보며 자랑스런 딸, 자랑스런 아빠를 확인할 수 있었던 오늘을 영원히 기억하리라 다짐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고등학생이고, 또 유학생이라서,
노무현 님의 곧은 정신을 깨우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풋한 새내기입니다.
방학으로 인해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16대 대선에 관심을 가졌고,
구체적인 정책과 부드럽고 서민적인 인상을 가진 노당선자님에게 푹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10/20 개혁국민정당발기인 연설에서 문성근 님의 연설을 듣게 되었습니다.
20분 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연설이였다지만,
온몸이 찌릿찌릿하고 그의 열성이 모두에게 전해지는,
말 그래도 "감.동" 적인 연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생각해 왔습니다.
저런 사람, 즉, 누군가를 위해 쓰러지도록 헌신의 힘을 다해 지지를 호소할 사람을 가진 사람...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며, 또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하였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느꼈습니다.
문성근 씨 외에도 노무현 님을 눈물로 지지하는 분들은 대한민국에 넘쳐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건,
노무현 님께서 인생을 잘 살아오셨다는 증거라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국회에서의 멱살잡음, 다수당의 횡포, 정경유착, 부정부패..
이 모든 것들은 어린 저와 제 친구들에게
정치는 "그런 사람들" 만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 우리나라의 밝은 정치를 보았습니다, 아니 느꼈습니다.
낡은 정치는 우리 손으로 물리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고,
며칠 전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대한민국엔, 썩은 정치를 타파하기 위해 헌신을 다하는 깨끗한 정치인
노.무.현 님이 계시다는 것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 분을 위해,
비록 투표권이 없긴 하지만, 나름대로 부단한 노력을 했습니다.
제 주변 분들을 설득해 투표장으로 가시라고 전화도 많이 했습니다.
친구들에게 연락해, 부모님께선 투표 하셨느냐고 성화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이 작은 손으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분주한 곧은 사람들과 정신을 함께 했다는 것에, 저는 무한한 행복과 성취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노무현 당선자 님!
저는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의 미래에 "공부"로 보탬이 되고자 하오니,
부디 당선자 님 께선 정치의 선두주자가 되어주십시오.
제가 크면, 정치에 보다 깨끗하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지금의 기적처럼 말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지금의 모습 영원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저에게 "존경하는 정치인" 이 되어주심에,
말씀으로 못다할 감사함을 드립니다.
저는 경북이 고향이고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고 지금은 경북 구미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직생(직장인 자취생)입니다.
물론 12.19일 구미에서 대구로 같은 날 저녁 대구에서 구미를 오갔습니다.
표를 던지기 위함입니다.
몰표와 싸워야 하는 소시민의 자존심이 발동한 탓도 있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 5년 동안 신문을 읽지 않아야 한다는 식자유감의 사태를 방관하지 않으
려는 자구책이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날 저녁 대구에서 구미로 무궁화기차안에서 여기저기에 전화해서 개표결과
를 간접 생중계해주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3방송사가 18시 선거마감과 동시에
발표한 출구자조사 결과와는 다르게 이해창씨가 앞선다는 소리를 듣고서
객차사이에 찬바람을 맞으며 줄담배를 피웠습니다.
왜 이 나라의 대통령 선거결과에 내가 이토록 초조해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은 감성적 기대가 더 우선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 자취방은 주공아파트 월세방이였는데 최근 재개발이 확정되어 집주인이
방을 빼라는 위로다운(?) 협박을 해와서 최근 자취방을 옮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고생활용품점에서 4만원주고 사온 TV가 이사온 방에서는
잡음을 동반한 전기 고문만 할 뿐 통 화면이 조정되지 않아서 이사온 후로는
라디오에 의존하며 세상을 보고있는 터라 그날도 방에 도착하자마자
MBC대선방송에 귀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역전과 우세에서 확실과 확정으로 이어지는 순간 저는 이불을 덮어 쓰고
울었습니다. 당원들에게 '저는 그냥 악수 하고 싶습니다'로 소감을 말씀하시
는 순간에도 울었고, '기분좋습니다'말씀에도 울었습니다.
오래동안 간직해온 갈증나던 소망을 성취했다는 감격은 여러 밤을 놓고도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노사모 회원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민주당 당원도 아닙니다.
다만 내 유년의 시절에 사고의 깊이를 더했던 사람을 기억하고 그 분이
잘 되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적 사명으로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기대와 살아 숨 쉬는
것이 삶이 아님을 보여주신 분에 대한 작은 제 보답이자 부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게는 6년을 사귄 여자친구가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친구도 저와 같은
후보를 지지한다는 것에 감사했고, 경찰을 직업으로 사는 친한 형도 투표 후
전화 통화에 19일의 감격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두 명다 충청도 사람인데
이제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가 아닌 한국을 진지하게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제 나이도 이제 몇 일이 지나면 계란 한 판을 채웁니다.
결혼도 해야 하고 적금 넣어 작은 원룸 전세방도 마련해야 할 형편이지만
그래도 적어도 앞으로 5년은 한국을 사랑할 이유가 생겨서 부자가 된 듯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저도 5년 후 우연히 뵙게 된다면
진정 뵙게 된다면 '악수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눈물이 납니다.
대구에서 소시민
고인 물’ 공직사회 바람 불어 좋은 날?
노당선자 인사 정책에 ‘2030 공무원’ 기대 부풀어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해양수산부장관 시절, 다른 중앙 부처 과장과 사무관을 찾아가 업무 협조를 요청하고, 토론을 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국회의원도 장·차관을 상대하려고 하지 실무자를 만나지 않는다. 노당선자가 형식보다는 실질을 강조해 공직 사회의 비효율성을 줄일 것으로 보인다.” 경제 부처에서 근무하는 한 서기관의 말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들이 속속 발표되자 노무현 당선자의 개혁 행보에 공직 사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공직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젊은 서기관·사무관 급인 ‘2030 공직자’들은 새로운 조직 문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술렁거리고 있다.
20∼30대 공직자들이 보기에 노무현 당선자가 해양수산부장관 시절에 보여준 ‘수평적 리더십’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노당선자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8개월 동안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재임했다. 취임 후 노장관은 각 층을 돌며 국장실에서 업무 보고를 받았다. 장관이 출근할 때 수위장이 차 문을 열어주고 비서들이 현관에서 영접하는 관행도 없앴다.
해양수산부의 한 사무관에 따르면, 노당선자는 과장급 공무원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던 장관이다. 노장관은 의사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과장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장관과 친한 민원인이 청탁을 해도 담당 과장이 안된다고 하면 과장과 2시간 동안 토론했다. 이 사무관은 “자기 의견을 존중해 주는 장관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장관 시절을 보면, 노당선자는 권위적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공무원에게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직 사회를 뒤흔드는 무리수를 두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다”라고 말했다.
젊은 공직자들에게 인사 정책도 큰 관심 사항이다. 노당선자는 지난 12월26일 “인사나 이권 청탁을 하다 걸리면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라고 말했다. ‘패가망신’이라는 파격적 언사를 동원하면서까지 공정 인사를 강조했다. 노당선자의 인사 개혁 의지는 다면평가제에서도 엿볼 수 있다. 노당선자는 민주당 선대위원장과 각 본부장, 국·실·팀장과 팀원들을 대상으로 다면 평가를 실시해 인사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다면평가제는 해양수산부 시절 노장관이 직원들의 건의를 받아 도입한 인사 시스템이다. 노장관은 국장급 인사만 직접 챙기고, 그 이하 인사는 조직에 맡겼다. 다면평가제란 승진 심사를 할 때 상급자·동료·하급자를 무작위로 추출해 구성한 위원회가 후보자를 평가하고 순위를 정하는 방식으로, 사무관과 서기관 승진에 결정적 평가 요소로 자리잡았다. 해양수산부의 한 사무관은 “다면 평가를 바탕으로 한 승진 순위를 장관이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반영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원내 지지 기반 약해 용두사미 될 수도”
노무현 정부 출범을 앞두고 공직 사회에 핑크빛 기대감만 넘치는 것은 아니다. 일부 부처는 노당선자가 선거 때 내세운 공약에 맞추어 운영 계획을 세우느라 냉가슴을 앓고 있다. 경제 부처의 맏형 격인 재정경제부는 ‘7% 경제 성장, 일자리 2백50만개 창출’이라는 공약을 놓고 속병을 앓고 있다. 재경부의 한 관계자는 “7% 성장에 일자리 2백50만개를 창출하는 것은 당장은 어렵다. 어떻게 이를 달성할지 구체적 계획이 아직 안 나왔다. 물가 상승과 국제 수지 악화를 초래하지 않는 잠재성장률이 5∼5.5% 정도이다. 목표에 집착하지 말고 실현 가능성에 중심을 두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부작용이 생긴다”라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도 곤혹스러운 처지이다. 공정위는 노당선자가 재벌 출자총액한도 폐지를 유지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전반적으로 기능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중앙 부처이다. 그러나 노후보가 정책토론회에서 공정위가 고발해야만 형사 처벌이 가능한 전속고발권을 폐지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이 제도가 존속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공무원 ‘노동조합’을 인정하는 노당선자의 공약 때문에 행정자치부도 당혹해 하고 있다. 행정자치부는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공무원조합’ 안을 내놓은 상태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경제 부처의 한 서기관은 부처 상황뿐만 아니라 당선자의 원내 지지 기반이 약한 점이 개혁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는 “원내 안정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반쪽짜리 정부’에서는 공직 사회 개혁이 용두사미로 그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차형석 기자 papapipi@sisapress.com
[프레시안]
<데스크 칼럼> "변화를 바라는 국민"만이 盧의 우군
2003-01-15 오전 9:34:38
며칠 전에 한 모임에 참석했다. 김대중 정부의 지난 5년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 집권할 노무현 새 정부의 과제에 대한 좌담을 위한 전문가들의 예비 모임이었다. 이날 여러 얘기가 오갔고, 다음과 같은 DJ와 노 당선자의 집권초기 상황에 대한 비교분석이 참석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요지인즉 DJ의 집권당시에 비해 노 당선자는 최소한 세 가지 측면에서 크게 불리하다는 것이다.
첫번째는, "미국과의 관계"다.
두번째는, "재계와의 관계"다.
세번째는, "야당과의 관계"다.
첫번째, 미국과의 관계
하나씩 살펴보자.
첫번째 "미국과의 관계" 측면에서 비교해보면, DJ는 집권후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DJ집권 당시는 IMF사태가 터진 직후의 공황기였다. 따라서 DJ로서는 IMF의 경제신탁통치에 부응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IMF의 최대주주인 미국과의 충돌이란 생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미국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그후 DJ를 전폭지지했고, 지금도 "DJ노믹스"에 대한 미국의 호의적 평가는 변함없다.
반면에 노무현 당선자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대통령에 당선된 노 당선자 앞에 출현한 최대 난제는 북핵위기다. 미국은 현재까지 북핵위기와 관련, 일방주의 외교노선을 고집하고 있다. 미국의 극우세력은 "전쟁 불사론"까지 주장하고 있다. 노 당선자는 이에 대해 한반도 7천만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일방주의를 수용할 수 없다며,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반드시 한국의 사전동의아래 추진돼야 한다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DJ에게는 더없는 우군이었던 미국이 노 당선자에게는 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두번째, 재계와의 관계
두번째 "재계와의 관계"도 크게 다르다.
DJ는 집권후 "재벌개혁"을 거침없이 공언했다. "IMF사태의 주범중 하나가 재벌"이라는 당시의 광범위한 사회적 공감대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재벌은 힘없이 고개 숙였고, 그로부터 상당 기간동안 공개적 저항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반면에 노 당선자가 처한 상황은 다르다. 최근 전경련 김석중 상무의 "사회주의" 발언 파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재계는 자못 고개를 곧추세우고 냉랭한 시선으로 노 당선자 진영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재계의 이같은 자신감의 저변에는 적극적 시설투자 등 재계의 협조없이는 작금의 불황위기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있는 듯 싶다.
DJ에게는 고개 숙였던 재계가 노 당선자에게는 고개를 들고 있는 형국이다.
세번째, 야당과의 관계
세번째 "야당과의 관계"도 DJ 당시와 크게 다르다.
DJ집권직후 상당 기간 한나라당은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했다. 당시에도 한나라당은 JP총리 인준에 반대하는 등 안티를 걸기는 했다. 그러나 DJ가 추진한 대다수 정책에 대해선 큰 저항없이 없이 추인했다. "한나라당 역시 IMF사태의 주범"이라는 호된 비난 여론 때문이었다. 이같은 여야간 역학관계는 옷로비 사건을 계기로 여론이 DJ에게 등을 돌리기 전까지 계속됐다.
노 당선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두번의 잇따른 대선 패배로 이회창 후보가 정계은퇴하면서 아노미(무정부) 상태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한나라당은 거침없이 대여공세를 펴고 있다. 대여공세로 당내분란을 희석시키려는 전술적 측면도 존재하나, 내각제 개헌 등을 제기하는 한나라당 주류 일각에서는 심지어 "6개월후 정국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분위기는 간단치 않다. 노 당선자가 북핵위기를 제대로 풀지 못해 외교,경제,정치적 혼란을 맞을 경우 "대반전"의 계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상황판단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원칙이 흔들려선 안돼"
이처럼 노무현 당선자가 처한 상황은 DJ 집권초기와 비교하면 여러 모로 간단치 않다. 대통령직 인수위가 출범한 이래 지난 2주동안 여러 갈등상황이 야기된 데에서도 알 수 있듯,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다.
한 마디로 말해 노 당선자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는 세력들이 만만치 않게 많다는 얘기다.
과연 어떻게 이같은 첩첩난관을 돌파할 것인가.
이와 관련, 과거 한 정권의 집권초기에 청와대 재직경험이 있는 한 정계의 거물은 노 당선자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이럴 때일수록 노 당선자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특히 원칙이 흔들려선 안된다. 한번 원칙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제2, 제3의 공세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대단히 막강한 자리다. 비록 의회가 여소야대라 할지라도 대통령제하에서는 대통령이 절대적이다. 여소야대의 한계나 재계의 저항을 한순간에 무력화시킬 수도 있는 자리다. 눈앞의 저항에 흔들리지 말고 원칙을 관철하는 강력한 리더십을 보일 필요가 있다.
단하나, 북핵위기로 갈등을 보이고 있는 미국과의 관계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확실하게 풀 필요가 있다. 여기서 꼬이면 경제, 정치 등 나머지 모든 게 꼬일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관계만 잘 풀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려갈 것이다."
변화를 바라는 국민이라는 무서운 호랑이
그는 또 노 당선자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변화를 바라는 국민"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노 당선자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이들은 "변화를 바라는 국민"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 뭔가 바뀌지 않겠느냐"는 믿음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다. 이들의 믿음을 배신해선 안된다.
위정자들이 집권 초기에 흔히 하는 실수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고정표"로 홀대하고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진 이들을 겨냥한 정책을 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순서가 뒤바뀐 접근방식이다. 우선 자신을 지지한 이들의 믿음에 부응하는 정책을 펴면서, 반대쪽 지지자들을 끌어들이는 게 올바른 순서다.
이렇게 지지기반을 확고히 하면서 집권 6개월내에 헤게모니를 확고히 쥐겠다는 자세로 일을 추진해야 국민이 바라는 개혁을 할 수 있는 법이다."
한마디로, 변화를 갈망하는 국민이라는 "무서운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는 기호지세(騎虎之勢)의 긴장감을 잃지 않고 매진할 때에만 노 당선자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겹겹의 장애를 돌파할 수 있으리라는 지적이었다.
아무리 미국, 재계, 야당이 펴는 공세의 칼날이 시퍼렇다라도 "변화를 바라는 국민"을 믿고 그들의 명령에 따라 "개혁 대로행(大路行)"을 해나가야 한다는 조언을 노 당선자를 비롯한 새 정권 참가자들이 경청할 때가 아닌가 싶다.
박태견/기자
2002년 12월 19일 새벽이었습니다. 정몽준의 지지 철회가 있은 지, 정확히 세 시간 후였습니다. 다 이긴 선거가 다시 승부를 알 수 없는 원점으로 돌아갔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노무현 라디오를 듣고 있었지요. 노무현 라디오에는 마침 문성근씨 명계남씨가 나와 있었습니다. 문성근씨와 명계남씨는 울고 있었습니다. 서로 흐느끼면서 명계남씨가 문성근씨에게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성근아, 왜 오늘 따라 문익환 목사님이 보고 싶냐?"
아버지는 아들에게 꿈을 물려줬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묘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건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구나. 높은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실패한 이상주의자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의 못 다한 과제를 해결하려는 아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는 문성근씨와 문익환 목사님 뿐만 아니라, 노무현 당선자와 그의 아버지, 유시민 씨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김원웅 의원과 그의 아버지 사이에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번 대선은 아버지와 아들 세대간의 대결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세대가 함께 이룬 승리였던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오이디푸스 신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어머니를 가운데 두고 아들과 아버지의 투쟁을 다루는 신화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머니는 그들이 자라는 환경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상징적으로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어머니를 사이에 둔 아버지와 아들의 투쟁은 상징적으로는 세계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는 권력 투쟁일 수밖에 없습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와 이런 투쟁에서 패배하기 마련이고 언젠가 자신이 커서 또 다른 어머니 (결국 아내가 되겠지요)를 차지 할 수 있다는 희망 아래 아버지를 이상화하고 그를 동일시하게 됩니다. 결국 아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투쟁했던 바로 그 폭군을 닮아가게 됩니다.
사실 수많은 아들들은 이러한 패턴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회창 후보는 이러한 길을 따라갔던 사람입니다. 아래 글은 동아일보에 기고되었던 신용구씨의 칼럼 중 일부입니다.
"부모가 나들이할 때는 대개 한살이라도 더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게 상례인데 그(이회창)의 모친은 네 살배기인 그에게 혼자 집을 보게 하고 그보다 공부를 잘하는 형과 손위 누이를 데리고 친정에 다녀오곤 했다고 한다. 자신에 비해 형을 편애하는 듯한 어머니의 태도에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일곱 살 적에 군말 없이 어머니의 쌀 심부름을 하는 의젓한 행동은 어머니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한 형제간 경쟁심의 발로로 이해된다. 부친은 훨씬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이 후보의 부친은 엄했을 뿐 아니라 공직자의 청빈을 무섭게 강조한 사람이었다. 이 후보를 둘러싼 남자들은 막강한 경쟁력을 갖춘 강한 남자들로 그가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이 후보가 받았을 정신적 중압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부담스러운 경쟁적 관계가 빚는 갈등과 자신의 무력감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 후보는 완벽을 추구하는 강박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성장하게된 것 같다."
이회창 후보는 형제 중에서도 어머니의 관심을 받지 못한 아이였습니다. 솔직히 어머니의 총애를 받지 못했던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놓고 감히 아버지와 경쟁을 시도할 수 없었을 겁니다. 덕분에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상화와 동일시는 일찍부터 시작되었으며 남들보다 철저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는 경기 중학교 시절, 수학 시험성적이 나쁘게 나오자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가출을 시도합니다. 그가 부모의 관심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모가 원하는 성취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소년시절 이회창 후보는 부모가 원하는 성취를 이루지 못한다면 버려질 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결국 그는 유기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 되기 보다 아버지가 원하는 그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형제 중 유일하게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회창 후보는 아버지가 못 이룬 사회적 성공을 이룸으로써 아버지의 관심을 받으려고 했고 이홍규 옹은 그런 아들을 통해서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권력의 핵심에 다가서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이러한 밀착 관계는 이회창 후보가 40살이 넘어서도 아버지의 종아리를 맞았다는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40이 넘어 이제 아내와 아이들을 가진 아들을 독립된 존재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40이 넘은 아들을 여전히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줄 대리자로 보고 있었고 그 대리자가 자신의 뜻에 벗어나면 언제고 처벌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신화가 모든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신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처받은 아버지를 회복시키는 아들의 신화입니다. 성배의 기사 퍼시1벌은 여행중 한 성에 들어갑니다. 그 성에 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입은 어부왕이 살고 있습니다. 퍼시발은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는 기사도에 따라 어부왕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어부왕은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잃고 어부왕의 성은 허공 중으로 사라집니다. 퍼시발은 뒤늦게 후회를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후 그는 사라진 어부왕의 성을 찾아 긴 여행을 합니다. 결국 그는 그 성을 다시 찾고 다시 어부왕 앞에 섭니다. 그리고 어부왕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묻습니다. 퍼시발은 질문은 어부왕을 치료합니다. 그리고 그는 어부왕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됩니다.
알 수 없는 병으로 고통 받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상처의 원인을 묻고 그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찾아내는 아들의 신화는 노무현 당선자, 김원웅 의원, 문성근씨, 유시민씨에게서 되풀이 됩니다. 그들 모두는 상처받은 아버지의 아들이었고 그들의 인생은 아버지의 상처를 치유하는 긴 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인용은 '희망 혹은 상식'에서 유시민씨가 노무현 당선자를 인터뷰한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유시민 : 부모님한테서 받은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노무현 : 받은 것이 있지요. 타협을 하지 않는 성격은 아버지한테 받았습니다.
유시민 : 그렇게 배웠다는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났다는 말씀인가요?
노무현 :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버지가 타협을 잘 못하셨어요. 별로 큰일은 없었지만 타협을 잘 안하셨어요.
유시민 : 어른 시절에 선친께서 타협하지 않은 모습을 보신 걸 기억하십니까?
노무현 : 그렇지만 이러면 자꾸 우리 어머니가 나쁜 사람이 되는 데(웃음)... 어느 가정이나 다 그렇잖아요?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구박을 참 많이 받았어요. 이유는 소위 일상 생활에서 권모술수를 쓸 줄 모른다는 것이죠. 우리 어머니는 '너무 용맹이 없다', 이렇게 표현하셨는 데, 이를테면 손해보는 거래 같은 걸 자주 하셨던가 봅니다. 아버지가 남 소송하는 데 증인을 서러 많이 다니셨어요. 소송의 당사자는 이해 당사자지만 증인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협박과 회유를 무릎 쓰고 온 마을에서 다 아는 일인데도 아무도 증언을 안 하는 일을 유독 아버지 혼자만 증언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모난 사람인지(웃음). 증언을 해서 아버지가 증언을 해준 쪽이 이겼어요. 말하자면 소송에서 약자가 이긴 거죠. 마름 출신의 지주와 소작인이 토지 분배를 놓고 분쟁을 했는데 결국은 소작인 쪽이 이겼죠. 그런데 다 끝난 뒤에 마을의 몇 가지를 정리하면서 우리 아버지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화해를 하였어요. 원수는 아버지만 남았죠. 그 일로 우리 어머니가 항상 아버지를 비난했어요.
유시민 : 어머니께서 동네에서 생활하시기가 불편하셨다는 점도 있었겠네요.
노무현 : 그렇지요. 그런 일로 해서 어머니가 가장 억울해하는 것은 봐라 그 사람들은 배신했지 않냐, 결국. 그러니 양심껏 살아서는 안된다고 자주 저를 교육했죠. 득 되지 않는 일에 나서지 말라는 거죠. 아버지가 그런 일에 나섰다고 해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실제로 그일 때문에 지주 아들들한테 아버지가 몰매를 맞아서 두루마기에 피가 벌겋게 묻어서 집으로 들어오시고 했던 것을 제가 봤어요.
유시민 : 노고문께서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선친께서 잘못된 일을 하셨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노무현 : 말은 못했지만 어머니를 원망스럽게 생각했죠. 어머니하고 다툴만한 나이는 안됐고 하지만 아버지는 충분히 이해했죠.
어린 노무현의 눈에는 옳은 일은 한 아버지가 왜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어머니의 비난을 받으며 지주의 아들들의 몰매를 맞았는지 이상했을 겁니다. 훗날 변호사가 되어 부림 사건을 맡았을 때, 그는 금서를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만신창이로 맞고 공포에 질려있는 대학생들의 모습 속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을 겁니다. 왜 옳은 일을 한 이들이 구속되며 감금되며 고문당해야 하는가? 그는 학생들의 처참한 모습을 통해, 핍박 받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 옛날 옳은 일을 하고도 고통 받았던 아버지의 상처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는 아버지를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듯이, 사회적 약자들을 모른 척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인권 변호사로서 또는 정치가로서의 그의 경력은 그렇게 해서 시작됩니다.
대선 막바지, 철새들이 몰려오는 한나라 당을 떠나 과감하게 개혁당으로 간 김원웅 의원도 노무현 당선자와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래 이야기는 그가 TV 찬조 연설에 나와 한 이야기입니다.
"제 집안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제 선친은 광복군 간부였던 김근수 지사이고, 제 모친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으신 전월선 지사입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집은 아버지의 독립군 동지들이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하루는 아버지의 독립군 동지들이 선배독립군이 돌아가셔서 상가에 들렀다가 우리집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친구들이 밤새도록 통음을 하며 엉엉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돌아가신 선배 광복군께서 임종시 가족들을 모아놓고 이런 유언을 했답니다. 앞으로 우리 가문은 절대 독립운동을 하지 말아라. 일본놈이 밀고 들어오면 친일파가 되고, 미국이나 중국이 쳐들어오면 그 앞잡이가 되라. 그래야 자손들이 번창한다고요. 어깨 너머로 이 말을 들은 소년 김원웅은 우리 현실에 얼마나 분개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독립군이었던 아버지를 울린 그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 반공만 외치면서 애국자로 둔갑했고, 이승만 독재에 빌붙고, 군사독재에 빌붙고, 지역주의에 빌붙어 지금까지도 기득권을 지키고 있다고. 그래서 그는 한나라당에 머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제 눈에도 한나라당에 머물러 있으면 힘도 생기고, 돈도 생기고 양지를 걸어갈 수 있을 거라는 게 보였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자민련에서, 민주당에서 철새정치인이란 오명을 뒤집어 쓰고도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저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나라당은 제가 머물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떠나야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원웅 의원은 그것이 아무리 보장된 길이라도 친일파의 후예인 한나라당과 함께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두 번 울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바르고 원칙대로 살았기 때문에 고통 당했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또 다른 아들이 있습니다. 아래 인용은 유시민 씨가 쓴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유시민)는 아버지의 월급이 얼마인지를 고3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알았다. 그전에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부터 교직에 몸담았던 아버지는 이미 30년 가까이 교편생활을 한 노교사였다. 그런데 당시 아버지가 경주에 있는 미션 계통의 사립고등학교에서 받은 봉급은 대학을 갓 졸업한 교사의 초임과 같았다. 이것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누이들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썩어빠진 교육계의 풍토 때문이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 소작농이나 다름없는 빈궁한 어린 시절. 소학교 졸업 후 농사일에 매인 가운데 검정고시로 중학교 졸업 자격 획득. 영양실조로 인한 한쪽 눈의 실명. 일본으로 건너가 병원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면서 전문학교 수료. 해방. 태평양전쟁 당시의 식량부족 속에서 얻은 만성적인 위장병. 맨손의 귀국. 그리고 역사교사로 교직생활 시작.
나의 아버지는 이토록 험한 인생역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보기 힘든 이상주의자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접에서 쉴새없이 독서하며 무언가 쓰는 것에 이외에는 다른 취미가 없었다. 소심한 성품이라 친구도 별로 없었다. 자식들을 아들 딸 구별 않고 키웠고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이런 성품 때문에 당신은 소위'운동'이란 것을, 말하자면 인사 청탁 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교감 승진 자격을 얻고도 무려 10년째 되던 해에야 겨우 승진 발령을 받았는데, 그것도 경북 청송 골짜기의 교사 3명뿐인 분교장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교직을 떠나라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20리길을 걸어야 하는 벽지 근무를 감당하기에는 건강이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늘어난 빚의 무게 때문에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리기 까지 하였다.
아버지는 사표를 내고 퇴직으로 빚을 갚았지만 이젠 직장을 잃어버린 셈이다. 웬만한 교장선생과 맞먹는 높은 호봉의 노교사를 받아들일 만큼 어리숙한 사립학교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경주시에 있는 모 고등학교에서 교사 초임만 받는 조건으로 다시 교편을 잡았다. 어머니가 장사일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도, 아버지가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객지에서 손수 밥을 지어야 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고3이 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도 아버지를 무척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한글을 깨우쳐주고 손수 구구단을 가르쳐준 아버지, 여섯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받아 읽은 그 수많은 책들, 늘 독서하는 모습, 나는 아버지를 존경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그때까지 가르침을 받은 어느 역사선생님보다 아버지는 역사에 대해 훨씬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었다. 제자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 잘못 가르친 때문이라고 스스로 자기의 종아리를 때리는 선생님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훌륭한 선생님이자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러한 분이 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고 권모술수를 모른다는 이유로 냉대 받고 소외당한다는 것이 내 가슴속에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단지 봉급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25년여 교직생활에서 쌓은 아버지의 연륜과 풍모가 가차없이 짓밟히고 있다는 데서 나는 내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과 똑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후 나의 의식 한귀퉁이에서 정신적 반란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그후 유시민씨는 출세가 보장되어 있지만 독재자에 편에는 서는 삶과 고통스럽지만 약한 자의 편에 선 삶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숙비 아끼기 위해) 밥을 손수 짓는 늙은 아버지, 편찮은 몸을 이끌고 시장을 다니는 어머니. 내가 으레껏 법대에 진학하여 사법고시를 보리라고 기대하는 일가친척들. 매일 열 시간 이상 일하고서 2만 5천 원의 월급을 받아쥐는 야학의 어린 여성 노동자들. 유신 독재의 횡포에 비분강개했던 그 수많은 불면의 밤들. 법복을 입은 중년의 나. 붉은 오랏줄에 묶여 법정에 선 나의 모습. 감옥의 높은 담장. 내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열려 있었다. 타협과 투쟁, 출세의 탄탄대로와 투옥의 가시밭길, 평화롭고 안일한 미래와 쫓기고 고난받는 미래, 이 두 갈래길 앞에서 나는 번민했다."
그리고 그는 고난받은 미래를 선택합니다. 이상주의자였던 아버지, 술수를 몰라 언제나 피해를 보지만 그래도 소신을 지킨 아버지 반대편에 서서 사리사욕을 채우고 자신의 영달만을 꿈꿀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이 글 처음에 등장했던 문성근씨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왜 그가 노무현을 지지했는지, 그에게 이번 대선이 어떤 의미였는지, 투표일 새벽에 흘린 그의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래의 인용은 그가 쓴 "인간 김대중, 문익환 그리고 노무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송구스럽고 또 주저되지만 얘기를 문익환 목사에서 시작하는 것을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솔직히 저는 제 아버지 문익환 목사를 잘 모릅니다. 저는 그분 살아 생전에, 그리고 돌아가신 후에도 그분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감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 부족한 머리와 좁은 가슴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차원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문목사의 삶 중에서도 제가 특히 감당이 안 되었던 부분은 이것입니다. 문목사는 1976년 59세에 처음 구속된 이래 94년 77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생애 마지막 17년 중에서 11년 반을 교도소에서! 살았다는 겁니다. 5년 반을 밖에 있었고 11년 반을 교도소 안에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정치범에게는 난방을 해주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물이 10cm, 15cm씩 얼어 있습니다. 그런 방에 70살 넘은 노인네가 담요 몇 장만 가지고, 맨몸으로 버티는 겁니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또 들어가지",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또 들어가지" 이런 걸 뻔히 알면서 도대체가 6번씩이나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걸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최근, 『문익환평전』을 쓰고 있는 김형수 시인을 만났더니 눈이 번쩍 뜨이는, 정말 귀가 번쩍 뜨이는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김형수씨가 저한테도 뭘 물어보겠다고 왔길래 대뜸 "나 문목이 누군지 모르겠어" 그랬더니 이렇게 설명을 해주더군요.
문익환 집안은 1905년도에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해 갈 때 만주로 건너갑니다. 윤동주 시인 집안, 김약연 집안 해서 5가문이 만주로 넘어갑니다. 이 집안들이 모두 한 식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일본놈 첩자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연히 해방구가 되었지요. 안중근 의사가 저희 집에 묵으시며 뒷동산에서 총연습을 하셨다니까요. 문 목사는 여기서 몸으로 민족주의를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해방 후에 남북한 정권이 만들어지는 걸 보니까, 이것은 완전히 민족주의의 패배입니다.
그래서 문 목사는 당분간 접어두고 공부만 합니다. 그러면서 1968년부터 처음 잡혀가던 1976년까지 8년 동안 구약성경 번역을 합니다. 구약학자로서, 또 종교인으로서 문 목사에게는 영광이었죠. 그리고 필생의 사업이었습니다. "이거 마치면 죽어도 좋다"고 할만큼. 그리고 번역이 정리되어 가던 1976년부터 사회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구약성경이 무엇입니까? 그 안엔 수많은 선지자의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1976년도에 나올 때 문익환은 성경에 나와 있는 선지자들의 삶을 수없이 "따라 살겠다"고 연습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이 선지자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까?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면서 "자, 가자!" 이렇게 외치고 곧바로 위정자들에게 잡혀 죽는 게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 선지자들의 삶을 따라 살겠다는데 그에게 공권력이 눈앞에 보였겠습니까?
"자, 우리 민족의 갈 길이 무엇이냐? 그 길을! 향해서 가자!" 그대로 전진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공권력이 잡아들이면 구속되는 거구, 풀어 주면 나왔다? 다시 "자! 죽으러 가자!" 외치면 또 들어가고....그래서 6번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구속되었던 것이 아니냐. 이게 그의 삶이었다….
이런 설명을 듣는 순간, 이해가 되었습니다. 인간 문익환에게는 감옥을 넘어 죽음을 넘어 바라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민족의 비전이고 '희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꿈을 이룬 아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문성근씨는 40이 훨씬 넘어 자신의 아버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염원을 이해하게 됩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비록 자신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중년이 되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아들은 아버지를 결코 실패한 이상주의자, 세상을 잘못 만난 선지자로 만들 순 없었을 겁니다. 그는 결국 아버지가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순탄했던 방송일을 접고 정치판으로
http://gall.dcinside.com/list.php?id=news&no=656267&page=1
첫댓글 노무현은 전남 강진이 본적인데 무슨 부산
그렇게 시험공부하는 딸들을 비행기타고 오게해서 투표하게 만든 님들 반성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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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근 아버지 문익환 목사에 대해서라면 저 윗글에 있는 것보다는 상세하게 제가 알고 있습니마다는 운동권이 민중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문익환 목사에 대해 알고 계신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바람이하는말님 직접 만나면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정치 카페말고 다른 모임에서는 정치 얘기하지 않습니다.
바람이하는말/ 시사토론에는 정치 시사가 포함됩니다.